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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유방(劉邦)의 약법삼장(約法三章)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의 부하였던 조무상은 '이럴 바에야 항우에게 항복해서 녹봉이나 받자.' 는 생각으로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있습니다." 라고 모함을 했고, 범증(范增) 역시 지금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자 항우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다음 날 아침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을 하였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은 유방은 10만명의 군사를 20만명이라고 부풀린 형국이었고, 항우는 40만명의 병사를 100만명이라고 부풀리는 상황이었다. 전력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항백(項伯)은 친분이 있던 장량을 살리고 싶어 몰래 진영을 빠져나와 장량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열이 뻗친 장량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함곡관을 막은 겁니까?"고 화를 내자 유방은 민망해서 "내가 간신배한테 속았소."라고 변명했지만 장량은 "그럼 공께서 항우를 이길 것 같았단 말입니까?"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 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근 것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유방은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영성 조씨 황족을 포함해 대학살을 단행하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천하의 지배자가 된 서초패왕 항우는 각지의 제후왕을 분봉했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유방은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관중은 6국을 제외하고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으므로, 파촉의 왕이 되는 것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라는 선언을 지키는 선에 들어가기는 했다.
파촉지역은 절벽수준의 높은 산맥으로 가로막혀서 잔도가 없으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감옥같은 지형인 데다 당시에는 아예 개발도 안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사는 마을도 통행할 길도 없는 그야말로 야만의 오지로 당시에는 정치범들을 유배보내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이건 그냥 갇혀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한반도로 치면 배도 없이 연평도나 백령도에 비할 곳을 던져주고 서울을 나와바리로 접수하면 서울과 경기도 지부장 자리를 준다는 약속은 지켰다는 식의 태도는 당연히 돌아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더 열받는 사실은 함양에서 바로 촉으로 들어가게 되어 고향 땅은커녕 가족 얼굴조차 못보고 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유방 뿐만이 아니라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 부하장수에 병사들도 대부분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려야 했으니 크게 분노했다. 유방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항우랑 싸워볼까?” 라는 생각까지 품었고 분노한 장수들도 동의했지만, 소하는 “이렇게 되긴 했어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설득했다. 네가 먼저 죽어볼 테냐고 소하에게 화를 내던 유방이었지만, 소하가 “ 지금 감정에 휩쓸려 항우와 싸운다면 개죽음이나 다름 없지만 뒷날을 기약하며 인내한다면 분명 기회가 올 것입니다.”라고 달래자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하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유방 입장에서 더 열받는 일은, 본래 유방의 군단은 10만명에 육박했는데 항우는 그중 30,000명만 유방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 이래서 차라리 한 판 뜰까 했던 것. 그 정도로 항우는 아직 유방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량은 잔도(棧道)를 불태우라고 충고해서 항우의 의심을 덜게 하였다.
그러나 유방을 따라 한중 지역으로 들어가는 대다수의 병사와 장수들은 중국 동쪽 패현 출신으로서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데다 이런 밀림 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두려워하며 그 길이 너무나도 험하여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러재꼈다. 유방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 날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어이쿠, 이제 난 망했구나!” 했지만 소하는 달아난 게 아니었다. 유방은 돌아온 소하를 보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도망갔던 것인가?”
소하가 답했다. “신은 감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자를 쫓았을 뿐입니다.”
유방이 물었다. “그대가 뒤쫓아 갔던 사람이 누구인가?”
다시 소하가 답했다. “치속 도위 한신을 뒤쫓았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관중에서 남정으로 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장졸들이 도망쳤는데 여지껏 한 명도 뒤쫓지 않다가 어찌하여 한신만을 뒤쫓아 갔다는 말인가?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이로다.”
그러자 소하는 자신이 한신을 뒤쫓은 이유를 유방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른 장수들이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한신과 같은 인물은 걸출해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께서 만약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바 없거니와,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 말고는 그 일을 상의할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왕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소하의 설명 중 ‘至如信者 國士無雙’로부터 나온 말이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즉, 한신이 없으면 우린 여기 박혀서 아무것도 못함.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 유방은 한신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었고, 몇 달 동안 세력을 정비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전 206년 8월 파촉에 들어간 지 겨우 4개월 만에 한왕 유방과 한나라 군대가 관중의 삼진 가운데 장한의 옹나라를 공격한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고 때문에 항우와 삼진의 왕들은 유방이 다시 공격하는데 적어도 몇년의 시간은 벌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수창정후 조연이 제보한 우회로를 통해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이때 초한지의 표현이나 파촉이라는 위치 때문에 마치 유방이 삼국 시대의 유비처럼 파촉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최소 1년 이상 물자와 병력을 모으며 장기적으로 초한 전쟁을 준비했다고 여길 수 있는데, 실제로는 아니다. 물론 이후 초한전쟁 때 파촉 지역이 구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과 함께 유방의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삼진 평정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유방은 유비처럼 파촉 중심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고, 한중의 남정에서만 머물렀다. 나라 이름도 한(漢)이고, 수도도 한중군 남정현인 등 어디까지나 중심 거점은 한중이었지 파촉이 아니었다. 머물렀던 기간도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다. 항우가 유방을 비롯해 제후들을 분봉해서 유방이 파촉으로 떠난 게 기원전 206년 2월 무렵이고 이후 유방이 장한을 비롯한 삼진을 공격한 것이 같은 해 8월. 유방이 관중에서 남정까지 이동한 시간 등을 제외하면 유방이 전쟁을 준비한 시간은 길어야 4~5개월 남짓이고 여기에 한신이 대장군이 된게 유방이 남정에 도착한 뒤 시간이 지나서라는 걸 감안하면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반대로 말하자면 한신은 유방 세력에 들어온 지 한 달 남짓 만에 대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한신이 얼마나 파격인사인지 알 수 있다. 즉 유방은 남정에 도착하자마자 깃발만 꽂고 한신이 대장군이 되자마자 몇 달 준비하고 바로 삼진을 공격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짧은 준비 기간은 사실 삼진왕 쪽에 더 악조건이었다. 그나마 30,000명이나마 받고 가는 유방과는 달리, 삼진은 항우의 신안대학살로 인해 휘하 병력 0명에서부터 새로 시작한 처지였다. 게다가 이미 관중 평정 당시 항우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행적으로 인해 관중과 파촉의 민심을 확보한 유방과는 달리 이들은 관중의 민심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항우에 의해 초토화된 관중에서 당장 어떤 생산력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 기원전 206년 그해의 관중에는 대기근이 돌아서 오히려 파촉 땅이 관중을 먹여살릴 지경이었고, 징병할 장정도 모자라서 청소년과 노인들까지 병사로 만들어야 했다. 관중이 생산력을 회복해서 유방에게 제 기능을 해준 것은 유방이 삼진을 점령해서 파촉과 연계를 이룬 뒤의 일이었다.
장한은 여러 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겨우 4개월 만에 군대를 복구할 수는 없었다. 유방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으며,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에게 항복을 받아내, 곧 관중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제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장량은 '유방은 관중 땅만 가지고 싶을 뿐'이라는 거짓말로 항우를 속였고, 이에 속은 항우는 제나라를 먼저 처리하고자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관중 주변의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한 후 봄이 되자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가로막는 항타와 용저 등을 간단하게 물리치고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진여의 기습으로 떠도는 신세가 된 조왕 장이가 유방의 세를 보고 몸을 의탁했고, 또한 사마앙이 유방에게 항복한 일로 인해 도망쳐온 진평(陳平)을 위무지의 천거로 수하로 삼았다. 주발과 관영 등은 들리는 풍문이 좋지 않은 데다 항우를 섬기다가 온 인물이 총애를 받고 자신을 감독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유방은 오히려 진평을 더욱 아꼈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른 후 완전히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인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장을 치른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0,000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밟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겪었지만, 한 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 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때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태운 후에야 다시 달렸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 짓을 세 번 반복하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유방은 열 번이나 하후영을 찔러서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하후영도 기어이 화가 치밀었는지, 참다 못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하찮은 짐승도 제 새끼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폐하께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후영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유방은 아이들을 던지려 드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두 아이들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그 후 유방은 고마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준다.
참고로 이때 구해진 유영과 어머니 여후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하여,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혜제로 집권했을 때에도 하후영을 태복으로 삼았으며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는 특혜를 주면서 하후영에게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하여 여후가 죽을 때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여후가 죽은 이후에는 주발, 진평등과 함께 여씨 일당을 제거하는 데 일조하고 효문황제까지 섬겼으니 이 일은 하후영 자신에게 있어선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유방과 두 자식과는 달리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아내 여치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가 이들을 호위하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서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팽성 대전의 패배 이후 주여후 여택의 군사와 합류하고 하읍에 도착한 유방은 난리판 와중에 무사히 도망친 장량과 재회하자 말에 기댄 채로 물었다.
"내가 함곡관 동쪽의 땅을 떼어서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오. 누가 능히 나와 함께 통일천하를 건립하여 대공을 세울 수 있겠소?"
자식까지 던지던 양반이,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고작 며칠 사이에 태연하게 항우를 이길 생각을 내비친 것. 이에 장량은 '한신, 팽월, 경포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부하인 수하(隨何)를 통해서 영포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영포가 다음 달인 5월에 반기를 들어 반년가량 구강 땅에서 초나라 군대를 붙들고 있는 사이 경색 전투에서 관영의 활약으로 초나라 추격대를 쫒아내고 후방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간 유방은 사방으로 군사력을 투사하며 조참과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근흡, 번쾌로 하여금 왕무와 정처, 장한을 제거하여 배신자 중 상당수를 분쇄했다. 이후 한신에게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한 뒤 자신은 형양에서 항우를 상대했다. 팽성 대전 당시의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반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기원전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한편, 위에서 등용되었던 진평은 다시 한나라 쪽에 합류했지만 여전히 불만을 품은 여러 장수들이 진평이 형수와 간통을 한 색마이며, 뇌물만 받아먹는 데다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붓자 유방 또한 찜찜해졌는지 위무지와 진평을 불러 뇌물 수수 혐의와 간통 의혹을 지적하고, '네가 벌써 주인을 몇번이나 갈아치웠는데, 너한테 충성심이란 게 있긴 하냐?'라고 질책하자 둘은 헛된 명예를 쫓으려거든 행실을 따져서 진평을 쫓아내고, 천하를 얻으려거든 그 능력을 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유방은 즉시 진평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호군 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유방의 신뢰를 되찾은 이 위기 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휘하 제장들과의 사이를 악화시켜 서로 죽이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우선 유방이 준 돈을 닥치는 대로 쏟아부어 '범증, 계포, 종리말, 용저는 항우를 죽 따라다니면서 세운 공이 한둘이 아닌데도 포상은 인색하니 항우에게 불만이 아주 많아서 유방과 붙어먹고 왕이 되려고 한다더라'라는 유언비어를 좍 뿌렸고, 항우는 이 네 사람이 정말 그럴까 하고 불안해하며 은근히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진평은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상을 차려놨다가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당장 성을 에워싼 포위망이 어디로 사라질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유방에게 속았다는 분노로 공격이 더 거세어지고, 식량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군이었던 기신(紀信)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계책을 내놓았는데 유방과 닮은 자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하여 거짓으로 항복한 후 초의 군사들이 몰려 포위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반대편 성문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진평이 2천여명의 여자들을 무장시켜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는 계책을 냈다. 그리하여 밤중에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한 채 2천여 명의 무장한 여자들과 함께 형양성의 동문으로 나가 초군에게 항복했다. 초군은 진짜 유방이 항복한 줄 알고 기뻐하며 방심한 사이 진짜 유방은 수십 기와 함께 서문으로 탈출하였고 속임수에 당한 것을 깨달은 항우는 분노하며 기신에게 유방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지만 기신은 항우에게 "우리 대왕은 진작에 달아나셨다. 이 멍청아!" 라고 답했고 대노한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원래 욕을 잘하고 말이 거칠었던 기신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항우를 향해 욕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유방은 탈출하여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 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의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성고를 방어하는 척 하면서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빠져나와 한신의 군단으로 향했다.
정형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뒤 왠지 찜찜한 행보를 보이던 한신은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일부러 잠시 눈을 붙여 새벽에 한신의 군영으로 찾아가서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한신의 침소로 침입해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놓으며 한신의 주변을 조참, 관영, 주설, 부관 등 자신의 최측근으로 갈아치웠다. 이때 한신은, 잠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 회수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식은 죽 먹듯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이후 유방은 장이에게 조나라에서 병사를 모아 한신의 군사를 보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동시에 한신과 찢어놓고 한신을 한의 좌승상에서 조나라의 상국으로 강등시켜버린 뒤 조참, 부관, 주설, 관영 등을 북쪽 방면으로 이동시켜 각각 군사를 맡으며 한신에게 '협조'하여 제나라를 평정하게 했고, 본인은 새롭게 충원한 군단을 거느리고 항우와 교전하기 위해 나섰다.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항우와 싸워봐야 이길 수가 없으니,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자." 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그 대신 노관과 유가(劉賈)에게 기병 500, 보병 2만을 주어 백마진을 통한 우회기동으로 초나라 후방으로 침투시켜 그곳에 있는 팽월과 합류하게 했다. 원군까지 받자 기세등등해진 팽월은 작정하고 초나라 수비군에 싸움을 걸며 무려 성 17개를 함락시켜버린다. 한번 항우가 회군했을 때의 상황이 더 심하게 반복된 것.
항우의 가장 큰 문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방과 결전을 벌이고 싶어도 팽월 때문에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방과 팽월은 기각지세를 이루어 협공을 취했는데, 항우는 팽월을 막기 위해서 군사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유방이 기존 대전략대로 방어선을 재구축하려고 할 때 역이기는 하늘(백성)위의 하늘(곡식)을 손에 넣어야만 왕업을 이룰 수 있다. 이 틈에 성고와 형양을 수복하고 오창의 곡창지대를 다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유방은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려고 간 틈을 타 성고에 주둔중이던 대사마 조구를 죽여버리고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곧 형양으로 돌진해 동문으로 도망친 종리말을 포위했다가 항우가 돌아오자 광무(廣武)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한신의 군단이 제나라로 진입하기 이전, 역이기는 자신이 나서면 싸움 한번 없이 제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로 보냈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 내어 제나라를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함으로서, 역이기는 삶겨서 죽게 되었고, 한나라는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던 제나라에 항우가 죽은 후로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신은 항우가 파견한 용저의 구원군을 격파하긴 했으나 제나라의 혼란을 구실로 "나를 가왕으로 삼아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라는 말만을 전했고, 유방은 분통이 터졌지만 장량과 진평의 만류로 한신을 아예 제왕으로 임명했다. 다만 역시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팽월을 쫓아낸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산 위에 틀어박힌 유방을 어쩌기엔 초군이 이미 심각하게 피폐해진데다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대단히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 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분을 네가 삶아죽이겠다고? 정 그렇다면 니가 네 애비를 삶은 국물 한 사발만 마셔보자꾸나!" 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 고 제안을 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서 싸우려고 한다" 고 거절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며 도발하도록 시켰는데 이러는 게 세 번이 넘어가자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서 다짜고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 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난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 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 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서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 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 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아홉, 의로서 우리 모두가 초 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모두 틀린 게 아니었으니 항우는 본전도 못 찾고 악명만 잔뜩 높이는 꼴이 되었지만, 유방은 이걸로도 속이 덜 풀렸는지 여기서 또 추가타를 날린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과 함께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뿐이니, 너같은 작자는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죄를 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 보내도 충분하다!”
결국 항우는 격분하여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쏘아 유방을 맞혀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히네!” 라고 하며 달아났다. 물론 정통으로 가슴에 화살, 그것도 쇠뇌를 맞은 유방은 상태가 몹시 위중했으나 한군의 사기를 걱정해서 멀쩡한 척을 한 것이다. 장량은 유방을 억지로 일으켜서 군사들을 돌보게 했고, 덕분에 사기가 떨어져서 함락당하는 상황은 피했지만 상처가 더 도진 유방은 몰래 성고로 실려간 다음 다시 관중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황은 이제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었다.
한신은 북방의 패자가 되었고, 팽월은 징그러울 정도로 초나라의 후방을 만지작만지작 후벼파며 보급을 말아먹고 있는 상황. 앞에는 유방이 있고 경포마저도 유방의 편이 되었기에, 항우는 싸움 한번 져본 적도 없으면서 패전 직전에 놓이는 괴이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보급 때문에 항우는 전진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수도 없었다. 항우가 주력을 이끌고 팽월을 물리치러 갈 때마다 유방이 초나라 군을 박살내고 기껏 빼앗은 성을 탈환하기 일쑤였기에 자리를 비우기도 곤란했지만, 그렇다고 팽월을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항우로서는 승리는 고사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협상을 해서 홍구(鴻溝)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자는 협약을 맺었다. 항우는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한나라에 보내주었다. 한나라 진영의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항우의 군사들은 초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과 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 데 이른다. 그런데 함께 항우를 치기로 한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약속한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항우가 자기들끼리만 멀뚱하니 있는(...) 한군을 공격하여 고릉(固陵)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허겁지겁 돌아가서 다시 참호를 파고 버티기에 들어간 유방은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넓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팽성을 함락시킨뒤 곧바로 유방 쪽으로 내달려서 진성을 친 관영과의 합공으로 항우가 물러나자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기원전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최후의 해하전투에서 유방은 승리했고, 항우는 몰락하여 오강에서 자결했다. 초나라군은 10만의 군대 중 8만 명이 목 없는 귀신이 되었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현(魯縣) 지방도 항우의 목을 보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아직 항우가 세운 열여덟 제후 중 유일하게 한에 투항하지 않은 2대 임강왕(臨江王) 공환(共驩)이 있었지만, 사실상 전쟁은 종결되었고, 천하의 주인은 이제 유방이 되었다.
혹여 이 시점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다른 적절한 후보가 있다면 그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후 서쪽으로 가던 유방이 정도(定陶) 부근에 이를 무렵,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진영으로 달려가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신은 놀랐는지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고스란히 병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방은 한신을 제나라에서 초나라 왕으로 옮기고, 도읍을 하비(下郫)에 정하게 하였다. 실제로 이 때문에 한신이 군대는 잘 다루지만 머리는 나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이후 여후의 손에 처형당하는 것도 그렇고, 용병술에 비하면 처세술은 거의 0점에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꼭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괴철과 무섭이 한신을 설득할 때에도 한신이 은원을 내세우고 군신간의 의리를 드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 특히 은혜를 베푼 윗사람의 앞에서는 순종적이고 약한 것 같다. 여후에 의해 죽을 때에도 결국 자신을 천거했던 소하가 불러들였다. 다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또 다르다. 예를 들면 제나라 왕 시절. 그리고 한신이 원래 군대를 얻은 기반이 한고조 덕분인데, 한신의 군대가 정말 한신만의 군대라고 볼 수 있었을까? 사실 한신은 제왕과 같은 기질로 사람의 마음을 잘 얻었다고는 보기는 힘든 유형의 인물이며 그의 군대가 한고조가 한신을 사로잡는 강수를 두었어도 그게 통했고 딱히 반발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정말 반역을 했다가는 오히려 한고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에게 머리가 잘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명백한 한고조의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요청을 구경이나 하거나 조건을 터무니없이 건 것일 수도 있다.
당시 한왕이었던 유방은 이후 범수(氾水) 북안에서 형식적인 겸양을 표시한 뒤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군국제(郡國制)의 방식으로서 이성왕(異姓王)들을 배치한 유방은 낙양(洛陽)에 수도를 정했으며 적절하게 부역을 면제하고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승리자가 되어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남궁(南宮)에서 여러 군신들과 주연을 베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방은 "내가 어떻게 항우를 이긴 것 같나? 계급장 떼고 편하게 이야기해 봐."라고 권했고, 이에 고기(高起)와 왕릉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시나 항우는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폐하께서는 휘하의 장수를 부리시어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점령한 다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봉함으로써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이익을 같이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경들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도다!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보다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호걸 중의 호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세 사람을 능히 부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范曾)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방은 여생을 각지의 반란 평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임강왕 공환을 노관과 유가, 또 별도로 근흡을 시켜 토벌케 하고,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격파하고 노관을 새로운 연나라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이기(利幾)의 반란도 직접 격파하였다.
유방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예법이라는 게 일반 가정에서 행하는 거리낌이 없는 태도와 똑같았다. 이를 본 태공의 집사장이 충고 해주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없으며, 땅위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황제께서는 비록 태공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임금이십니다. 또한 태공께서는 비록 황제 폐하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한 그 신하도 됩니다. 어찌 그 임금되는 사람이 그 신하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행한다면 황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유방이 태공을 다시 만나게 되자, 태공은 빗자루를 부여잡고 대문 앞에 나와 뒷걸음치며 유방을 맞이했다. 유방은 깜짝 놀라서 어가에서 내려 태공을 부축했는데, 태공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천하 만백성의 임금되시는 분이라! 내가 어찌 천하의 법을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이에 유방은 “그럼 그 황제보다 높으면 되겠군.” 이라는 의도로 “아비와 자식은 서로 공을 함께하는 법. 내가 오늘날 천하를 평정한 것은 모두 태공의 뛰어난 가르침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태공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려 버렸다. 다만, 태공에게 충고를 한 집사장에 대해서도 황금 500냥을 상으로 내렸다.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본래 개백정이나 도적 출신이 대부분이던 공신들은 규율이나 예절 같은 것이 전혀 없던 판국이었고 웬만한 공신들은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다!"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판국이었다.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최고의 대우를 하여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난리는 멈추지 않아 유방은 난감해했는데, 이 때 유학자였던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간언을 올렸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데려온 유생들이 있습니다.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본래 유학자들을 보면 관을 벗겨 오줌을 눌 정도로 오만불손하고 유학자를 싫어하던 유방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솔깃했다. 다만 유방의 걱정은 이게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는 점이었다. 이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황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도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자 유방은 “한번 해보시오, 대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만들어야 하오.”라 말했다. 이 부분을 보고 천하를 통일한 사람도 어려운 예법은 싫어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유방은 시험삼아 한번 숙손통이 만든 의례를 보고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며 다행스러워 했다.
이렇게 만든 예법이 시행되어 그 동안 난리를 치던 공신들이 얌전해지자, 유방은 그때서야 “아, 이제야 황제가 귀한 줄 알겠다!”며 좋아했다. 황제나 신하들이나 예법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었으니 벌어진 촌극이다.
이후 유방은 여전히 영향이 강한 한신을 견제하고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초나라 왕으로 있던 한신이 모반을 하려고 한다는 고발을 듣고, 진평의 계책을 이용해서 한신을 사로잡은 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한신도 같이 풀어주면서, 그를 회음후로 낮추어 버렸다. 그 후 전긍(田肯)이라는 인물의 충고를 들은 유방은 유가(劉賈)를 형왕(荊王)에 봉하여 회수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에 봉하고 회수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아들 유비를 제나라 왕으로 삼아 70여 성을 다스리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씨 성을 가진 인물들을 왕으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방은 형인 유중(劉仲)을 대나라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