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 박영수 리사장 탐방
중국 서부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시에 한국인으로 2004년도에 첫발을 들여놓고 하이테크기업을 창설하여 간난신고 끝에 성공을 맞아온 기업인이 있으니 다름아닌 녕하한통지능시스템유한회사의 박영수 리사장(44세)이다.
투자사절단 접대하며 한족친구를 사귀다
1965년도 한국 충청남도 태안 태생인 박영수씨의 중국 진출은 한국에 일보러 왔던 중국 친구들을 사귀면서 시작된다.
1994년 녕하회족자치구 투자사절단이 서울에 투자유치를 왔는데 그때 한 중형 회사에서 근무하던 박영수씨는 그들 일행 15명을 접대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어 자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그는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들 중의 몇 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사절단이 귀국한 후,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높다란 언어장벽이 가로 놓여 있는 상황에서 그들간의 련계는 박영수씨의 열정으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박영수씨는 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7년부터 (주)트래픽 아이티에스(ITS-Intelligent Transpotation System) 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의 현대화 교통시스템의 보급작업은 마침 이 해부터 시작되여 그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안겨준다. 사업에서 남다른 추진력과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99년 마침내 현대화 교통시스템 도입을 시도하고있는 중국에 파견되여와 회사의 해외투자기업인 성도트래픽유한회사 리사장에 부임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나라 전역에 도입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는데, 박영수씨는 성도에서 3년간 사업하는 기간 사업 특성상의 우세를 빌어 중국의 각급 정부와 관련 회사를 접촉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혈혈단신 녕하 찾아 《한통회사》를 창설하다
패기 있게 업무를 펼치던 중 2003년 사스의 발생과 함께 귀국했다가 1년 후 줄곧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친구들이 있는 녕하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와 녕하한통(翰通)지능시스템유한회사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상해, 북경 등 다국적 기업이 치열한 경쟁을 벌리는 곳에는 자신이 없었던 그는 자기만의 독자적 능력발휘가 가능한 지역으로 중국 서부의 녕하를 선택한 것이다. 교통시스템이 없는 빈 구석인 이곳에서 일을 벌리면 주변 관계를 활용해서 길을 틔울 수 있고 일단 길만 뚫어놓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가 몇이 있다지만 필경은 생소한 곳이라 처음부터 인맥관계 구축에 숱한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술초대는 다반사고 정부와 기업소의 관련자를 한국에 청해다 구경도 시키고 했다. 그의 한족 친구들에게는 공무원 친구가 많았다. 일단 술초대를 하면 관련자뿐 아니라 무관련자들까지 부르니 환장할 노릇이였다. 상무국 국장 부르는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육국 국장은 왜 부른단 말인가? 저녁 한끼를 대접하는데 만원 이상 때려넣어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계산 없이 친구를 불러들이는 친구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아무런 소용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친구한테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도움을 받았을 때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중국의 생리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최초에 고달팠던 일은 직원관리였다. 한국에서 직원들은 하나를 시키면 두개 세개를 하려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하나는 고사하고 70%나 80% 정도밖에 못하니 속이 타서 재가 될 일이였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장 시키는 대로 하는 한국의 직원들과는 아주 딴판으로 이곳 사람들은 사장이 시키는데 따르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딨어》하면서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 주장을 펴러 드는 통에 결국 큰 피해를 보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면서 사장이 시킨 일이 원래 옳았는데 집행이 안돼서 결국 회사에 불이익이 조성됐다는 것이 증명되자 차츰 직원들이 사장의 지시에 따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였다. 물론 프로젝트 수행과정에 시행착오도 많이 빚었다.
《우회전술》구사하여 첫 오다를 수주받다
중국 실정에 역행하기보다는 실정을 알고 순리로 일을 진척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박영수씨는 말한다.
북경출장시 숙소에서도 컴퓨터를 리용해 데이터파일 처리에 드바쁘다.
2005년은 중국에서 중량별 화물차 료금징수 시스템을 산동성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에 정식 도입하기 시작한 첫해였다. 이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문가수준인 박영수는 처음에 당지 한족 친구들의 도움은 받되 오다는 자신이 직접 따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현실로 보아 한국인의 직접적인 오다수주가 불가능함을 재빨리 낌새채고 우회전술을 폈다. 한족 친구들에게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친구들이 방도를 대주니 그대로 했다. 한국식대로라면 전혀 상상이 안되는 이런 일도 여러 모로 분석판단한 끝에 대담히 친구들이 대주는 방도에 따랐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런 믿음은 또한 현실에 립각한 정확한 판단에 토대한 것이였다.
그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친구들을 내세워 입찰을 한 그는 개찰 전에 벌써 《이 프로는 인젠 내꺼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결국 그해 말께 그는 1500만원짜리 첫 오다를 따는데 성공했다.
하나 수주를 받았다 해서 일을 곧바로 진행시켜 일거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프로젝트는 수주받았는데 갖고온 돈 200만원이 몽땅 거덜이 났다. 중대 프로젝트를 수주받았으니 한국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필시 도와올게 아니냐고 할 이들이 있을테지만 그런게 아니였다.
친구들 도움으로 막혔던 숨통을 틔우다
중국 진출 2년 사이, 가족과 주변 친구들이 다 그를 《미친 놈》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친척들에게 부탁해서 돈을 대주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절대 돈을 대줘선 안된다고 그루를 박았다. 이렇게 돈줄기를 차단하면 배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것이였다.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친척, 친구, 아무튼 주변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철저한 합동작전을 폈다. 이렇게 하기를 만 2년이였다.
그런데 지금 굵직한 프로젝트를 이미 땄으니 돈만 대면 성공이라고 이실직고하는데도 모두들 한결같이 믿지를 않고 《이놈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또 〈사기술〉을 쓰는게다. 이제 돈줄기를 딱 끊으면 돌아온다》고들 하니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각삼추로 피말리는 고초를 겪고있을 때 그를 도와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족 친구들이였다. 친구들끼리 련통해서 200만원을 만들어 뀌어주었다. 친구의 귀중함을 통감하게 하는 대목, 꽉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순간이였다. 결국은 밥먹을 돈마저 떨어져 더 버티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들어섰을 때에 와서야 줄곧 목표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비로소 결과가 나서 드디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길이 트이자 일마다 순풍에 돛단배였다. 그 이듬해인 2006년 두 번째로 1200만원짜리 고속도로 《원카드시스템》 프로젝트를 따냈다. 2007년에는 2000만원 짜리를, 올해는 3000만원짜리를 수주 받아 수행했다.
2007년부터 자금이 돌기 시작, 《인제 자리를 잡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에 와서야 박영수는 가정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중국 내수시장 뚫어 제2차 도약을 준비하다
4년간의 실천을 거쳐 그는 자기의 최초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였다. 그가 뚫은 것은 중국의 내수시장이였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의 내수시장을 뚫었기에 장래의 발전에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는 지어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자기에게 찾아온 두번째 호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 시장에 4만 억(한화 8000조원)을 풀어 내수 확대를 하는 시점에서 이 호기를 잡아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제2차 도약기를 예상하고 있는 그다. 2009년 그는 녕하에서 수주액 1억을 올릴 목표를 이미 세워놓고있다. 사천대학교 기술연구소와 자매관계를 맺고 한국기술을 중국화하는 자기의 시스템개발작업을 연구소에 의뢰하기도 했다. 남들은 중국 전역을 상대로 시장공략을 꿈꾸지만 그는 녕하 시장을 전면적으로 집중공략할 전략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해왔던 교통시스템을 위주로 전력시스템과 오수처리장 등 환경관련 프로젝트에까지 진출을 준비 중이다.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