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安堅, ?~?)은 조선 초기의 화가로 호는 현동자(玄洞子)
서산시 출생으로 본관은 순흥 안씨 ,생몰연도는 미상이며
세종대왕 때 도화서 정4품 호군을 지낸 것으로 보아 세종 때부터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 각종 그림에 능했지만
안견이 가장 뛰어났던 분야는 산수화였다.
1447년 안견은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광경을 산수화로 그렸는데 몽유도원도이다.
작품에서 안견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 현실 세계와 무릉도원으로 나뉜 독창적인 화폭 구성을 보여주어
양팽손, 신사임당, 슈우분[1] 등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안평대군은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그림에 손수 시를 지었다.
이외에도 안견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여럿 있지만
현재 안견이 그린 것으로 확실시되는 작품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안견의 화풍은 지금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전칭 작품(傳稱作品)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면 안견이 북송(北宋) 때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상의 특색을 비롯하여
확대 지향적인 공간 개념과 변화가 큰 필법 등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짙게 띠고 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점은 비단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있는 화기(畵記)나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다.
하지만 그밖에도 초상(肖像) · 화훼(花卉) · 매죽(梅竹) · 노안(蘆雁) · 누각(樓閣) · 말〔馬〕의장도(儀仗圖)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안견이 남긴 작품은 기록들에 상당수가 보인다. 그 중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42년에 제작된 「비해당 25세진」, 1443년의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1445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한재집』에 기록되어 있는 「팔경도(八景圖)」 등 30점이 있다.
1446년과 1447년에 제작된 「팔준도(八駿圖)」, 1447년 이전에 그려진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
1447년에 제작된 「몽유도원도」, 1448년에 그려진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杖圖)」
그리고 1464년에 중국 사신을 위하여 그린 「묵죽도(墨竹圖)」 등도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모두 없어져서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견파라고 지칭한다.
이들의 영향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