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여성시대 빙애
William A. Dickson
윌리엄 A. 딕슨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한국전쟁 참전
[한국으로 떠나는 날, 레이, 윌리엄 그리고 디]
1952년 01월 23일 ~ 1952년 02월 26일
1952년 2월 27일 전 까지 이 부분에다가 모든 일기를 적어내릴 것이다.
또, 내가 정찰기 비행사 중 한 명으로 하늘을 나는 동안 최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적을 것이다.
52년 1월 23일, 첫 정찰을 수행했다.
태커레이 대령이 내가 왜 이 일에 자원했는지 매번 설명해야만 했다.
자원한 이유는 간단하다, 가산이 무려 4점이나 추가된다!
허나, 태커레이 대령은 내가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참나!
롱가네커 대령은 "저 하늘 위에서 총 맞고 쳐박을 걸 알면서도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건가?" 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이미 저 하늘 위에서 수십 번은 사격당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찰스 R. 롱가네커 대령]
롱가네커 대령은 곧 대답했다.
"그래, 자네가 그렇다면야, 승낙하도록 하겠네, 제군"
나는 첫 비행을 키예스 중위와 함께 했다.
매우 신 세대적이면서도 좋은 사람인데, 자기 비행 실력을 너무 뽐내려고 한다.
비행 내내 대공포에 맞을 것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우리 둘은 세 번 째 비행 까지 별 탈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그 이후로,나는 글라스톤버리 출신의 알 르마이어 대위와 비행했다.
창동리 남쪽 부근에서 예광탄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그건 20mm 탄환이었지 싶다.
[윌리엄의 36번 째 생일, 오른 쪽 부터, 윌리엄 , 척 스완슨, 버드 불링, 잭 버틀러]
그 날엔 딱히 겁 먹지는 않았지만, 몇일 후, 내 생일날에 평양으로부터 7마일 북쪽에 있는 핑거 호로 출격했는데, 정말 무서워 죽을 뻔 했다.
분명 오후 네 시 즈음 이었을 것이다.
두 정의 대공포였던 것 같은데, 우리를 따라다니며 미친듯이 쏴재꼈다.
[알 르마이어 대위]
르마이어 대위가 훈련 받은 대로 잘 대처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른 곳에 자리 잡은 다음 대공포를 찾아내려 했지만, 운이 없었다.
르마이어는 세 번 이상 선회하기는 무리라고 했지만, 나는 여섯 번 정도의 선회를 부탁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월터스 대령과 함께 평강의 대공지역 위를 지나 비행했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제발 뭔 짓을 하고있든 제 정신만 찾게 해달라며 미친듯이 기도했다.
6,300 피트의 고도에서 비행했는데, 너무 낮은 고도였다.
대공포의 위치를 겨우 겨우 확인했다.
짐작컨데, 훈련은 흔들리는 비행기에서도 정신을 붙잡고, 안경을 똑바로 착용하고, 지도를 식별하고, 지형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위치를 선정하고, 또 기도하는 것 그 모두를 동시에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1952년 02월 27일
오늘은 비행 임무가 없다, 좋았어!
불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낮잠을 좀 잤다.
또 새로운 비행 일지도 만들었다.
[윌리엄이 주로 탑승한 L-19, 오른쪽에 이렇게 적혀있다.
COST OF AIRCRAFT $13000 OPERATION $15.00 PER HR
(이 비행기 값은 13000 달러 입니다. 한 시간에 15 달러나 써요.)]
1952년 02월 28일
오늘은 단 한 번의 비행 뿐이었다.
두 번째 임무를 받았는데, 견인포의 표적 확인을 위한 출격이었다.
핑거 호에서 움직임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저번 날 그 대공포인 것 같다.
참호가 보이는 교차로 위를 지나가자 마자 사격이 날라왔다.
오후에 해머 플라이츠가 추락했다.
독감에 걸려도 출격하던 녀석이었다.
CT-7073 지역에서 격추당했다.
함께 한 조종사가 땅 위에 널부러진 낙하산만 보았다고 했다.
그저 해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랄 뿐이었다.
이 고지들은 밤만 되면 엄청 추워진다.
얼어붙은 귓볼이 풀리기 시작하면 엄청나게도 고통스럽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록!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처럼 코를 움켜잡고 세게 풀었다.
1952년 02월 29일
오늘은 단 한 번의 비행 뿐이었다.
유버트 중위과 함께 비행했다.
전선을 넘어가는 중령의 첫 비행이었다.
근데 문제는, 중위가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나는 정찰 목표까지 지시했고, 여태 발견된 대공포 진지들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조금 겁먹은 듯 했지만 지형에 대해 경청할 때의 모습을 보니 중위은 생각보다 훌륭한 조종사인 것 같다.
최대한 끝까지 가본다음 돌아왔다.
나는 오후에 "여명 전의 결심"이란 영화를 보았다.
딱히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송금할 100달러의 군표를 신청했다.
[윌리엄의 아내, 레를린과 애완견 레시아]
1952년 03월 01일
또 새로운 달의 시작이다.
레를린과 집으로부터 떨어진 지 벌써 아홉 달이 지났다.
마지막 까지 남지 않을거야, 하며 계속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다.
오늘은 단 한 번의 비행 뿐이었다.
오늘은 토디 중위와 함께 비행했다- 토디는 좋은 사람이다.
금성 강 분기점을 지나 대공포 진지가 두껍게 구축된 동쪽 지역을 지나왔다.
사격은 없었지만 두 쌍의 대공포가 새로이 배치된 것을 발견했다.
착륙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측풍이 너무나도 강했다.
1952년 03월 02일
안 좋은 소식이다.
0630시에 공습 경보가 울렸다.
제 40 사단에 6대의 적기가 출몰했다.
한 명의 조종사가 전사했다.
해머 베이커 1호는 0815시에 격추당했다.
내가 무전기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구조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
해머 베이커의 L-19는 적기가 사격한 총탄에 다섯 번이나 피격당했다.
로치 대위가 전하길, 제 2 사단의 L-19도 부숴졌다고 한다.
오늘은 0945시에 출격해서 1030시에 복귀했다.
폭격 예정지에 접근했다.
하늘은 거칠었고 불안정 했다.
멀미에 걸릴 뻔 했다.
오후에는 비행 일정이 없었기에 영상물을 보러 가기로 했다.
제인 와이먼이 출연한 "푸른 베일"을 보러갔다.
주인공이 어떻게 경연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어이가 없다.
물론 몇 년간 본 영화들 중 단연 최고였다.
아무래도 영화에 아이들이 출연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제기랄, 아이들이 너무 그리워.
아이들을 단 한 번 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안 돼, 그랬다간 더 그리워질지 몰라.
[미 육군 광역 정찰대 사령부 G-2]
1952년 03월 03일
날씨가 엉망진창이다.
바람이 너무 강해 비행기 두 기가 서로 충돌하기 까지 했다.
결국 모든 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G-2 부대의 비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만세!
1952년 03월 04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는데, 모두 턴센드랑 함께 했다.
그 작자랑 비행하는게 얼마나 싫은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한 두가지 무서운 것이 아니었지만, 적응하기로 했다.
확실한 것은, 턴센드랑 함께 20~30마일을 비행하는 동안 단 한번의 사격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임무 중 하나는 촬영 임무였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저공비행을 해야만 했다.
오후에는 점심으로 먹었던 한국 쌀이랑 고추때문에 속쓰려 죽을 뻔 했다.
레를린은 내가 완전 군장을 한 채로 꿈 속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편지에 썼다.
정말 레를린은 어뚱한 여자라니까.
1952년 03월 05일
오늘은 포치맨과 함께 첫 비행을 시작했다.
포치맨은 훌륭한 조종사 중 한명이다.
식은땀은 커녕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창동리의 서쪽에서 대공포대를 발견했다.
85미리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여태 내가 관측한 대공포 중 가장 거대한 크기가 아닌가.
마치 독일의 88mm가 깔려있는 지크프리트 전선 처럼!
[금성 강]
1952년 03월 06일
0910시에 출격했지만 엔진 문제로 귀환했다.
8,000피트 위에서 엔진 시동이 꺼져버렸다.
300피트까지 고도를 낮춘 후 착륙하고 나서 다른 비행기를 타고 0950시에 이륙했다.
금성 강에서 엄청난 움직임을 발견했다.
400명 즈음의 인파였다.
진로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통신기지도 발견했는데, 금성 동쪽의 사주 위에 있는 것을 포착했다.
오후에는 비행 일정이 없었기에 두 시간 동안 불어를 공부했다.
1952년 03월 07일
오늘은 임무가 없었다.
1952년 03월 08일
오늘 아침에 한 번의 비행이 있었다.
대공포에 많이 피격당했다.
세상에, 점점 피격 당하는 수가 늘어가고 있다.
만약 가산점 4 점을 얻지 못하면 최대한 빨리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
1952년 03월 09일
오늘은 단 두번의 비행이 있었다.
오늘 아침 출격은 꽤 고요했다.
이제 곧 오후에 또 비행 일정이 잡혀있다.
비야 내려라, 내려!
제발, 부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끔 이 전쟁에 자원한 내가 멍청하게 느껴진다.
내가 격추당해 맥없이 전사한데도, 레를린이 이 일기를 통해 내가 왜 이 곳에 자원했는지 그 연유라도 알게되길 희망한다.
난 레를린을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윌리엄의 숙소]
1952년 03월 10일
오늘은 두 번의 비행 일정이 잡혀있다.
평강을 넘어 핑거 호 주변에서 두 시간 동안 비행했다.
평소랑 달라진 점은 보기 힘들었다.
밖에 바람이 세차다.
비행이 취소될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1952년 03월 11일
꽤 괜찮은 비행이었다.
1030시 부터 1205시 까지 비행했다.
금성 위를 지나갈 때 사격을 당했는데, 그 움직임이 내가 전날 보고했던 그 대공포와 같았다.
아직도 대공포가 진을 치고있는 금성이 싫다.
그런데 높으신 몇몇 개만도 못한 좆만이 분들이 내가 그 좆같은 교구에 대해 사진을 찍어오길 바란다.
별 수 있나, 까라는 대로 깠다.
정오에 퍼트랑 같이 비행했다.
평소 예정보다 늦게 복귀했는데, 본부에 복귀하자 마자 나를 보고선 안도하는 사령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사령관이 소리쳤다.
"어딜 싸돌아 다니나? 식사 시간에 늦어도 한참을 늦지 않았나!"
행동거지가 조금 허둥지둥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날 걱정한 모양인 것 같았다.
아마 오늘 아침에 전사한 해군 조종사를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 해군 조종사는 바다에 충돌하자마자 곧바로 가라앉았다.
낙하산은 해수면에 닿기도 전에 불타 사라지고, 바닷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조종사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전사 처리되었다.
[춘천에서의 윌리엄]
1952년 03월 12일
오늘 또 다시 평강을 향해 비행했다.
두 정의 40mm 포대가 제 2 사단의 정찰기를 향해 불을 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 2 사단의 정찰기 조종사가 개방 통신으로 외쳤다.
"사요나라다 머저리 새끼들아!"
오늘 임무는 새로운 정보가 흘러넘칠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
기지로 귀환하는 도중 20mm의 사격을 받았다.
오후에는 철도 수송 장교인 짐 커레이란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춘천으로 향했다.
커레이는 오늘 여기에서 밤을 지낸다고 했다.
1952년 03월 13일
날씨가 좋지 않아 전선을 넘어가는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구름 바로 아래 고도인 2,000피트 선에서 비행했다.
G-2 부대에 짐이 새로운 조종사로 차출되었다.
짐은 첫 비행을 L-19 정찰기와 함께 할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길.
오늘 두 명의 P-51 신참 조종사들이 배속되었다.
상당히 훌륭해 보이는 놈들이었다.
가산점 없이 출격해야 한다며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우리같은 조종사들은 전선을 넘어가는 것은 물론, 변변찮은 무장조차 없이 비행하느라 위험부담이 커서 가산점을 받는 것이라고 신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사격훈련]
1952년 03월 14일
사격 훈련을 진행했다.
별 탈 없었다.
45 권총으로 사격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명중했다.
100 야드 거리의 유리병을 향해 격발했다.
다른 사람들은 권총으로 맥주병을 맞추기는 무리라며 투덜댔다.
롱가네커 대령이 나한테 감명 받은 듯 싶다.
오늘 오후에는 강 변두리에서 50구경으로 적을 경계하는 임무가 있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다리 너머로 다섯 개 정도 되는 북한군 분대를 포착했다.
새로운 조종사로서 푸즈너 대위가 도착했다.
사격 당할 때 엄청 흥분했었다.
나도 그렇게 흥분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1952년 03월 15일
레이의 생일이다.
벌써 여덟 살이라니.
몇 일의 휴가를 받아내는 것 조차 불가능한 것 처럼 보인다.
아, 제발, 난 가족들과 함께 있고싶은데.
요즘 레이가 투병 생활을 하는 빈도가 늘어났다고 편지를 보냈다.
직접 레이를 보살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생일은 챙겨주어야 하는데.
제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오늘은 왠지 비행 임무가 꺼려진다.
오늘은 거친 비행이 될 거라고 한다.
근데 막상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우리 부대의 견인포가 파괴된 것 말고는 딱히 꼬인 일도 없다.
1952년 03월 16일
낙하산 점검을 맡겼는데, 어째 돌려받지를 못했다
그 덕에 아침 비행은 하나도 없었다.
오후에 조지 콜레트와 함께 하는 임무가 있다.
전선을 처음 넘어가는 비행이라나.
롱가네커 대령은 나에게 낙하산 없이 비행해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해왔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신참이랑 비행하는데 그런 제안은 무리수다.
낙하산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꼭 필수품이니까!
1952년 03월 17일
성 패트릭 기념일이 돌아왔다.
시간 참 빨리 가는구만.
오전에 포치맨과의 비행 일정이 잡혀있다.
포치맨과 함께하면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망 켕기는 것 한가지를 꼽으라면, 포치맨은 사실 어디로 비행하는지 그 스스로도 모르고 다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도를 읽을 줄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본부에 방문해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적들에 대해 보고했다.
몇 분 만에 상황 설명을 끝마치고 문을 박찼다.
마치 영화같았다.
정비병들은 군장과 낙하산을 입혀주고, 점검해주는 것은 물론 새로운 지도를 쥐어주고 비행기 문 까지 열어주더니 헤드폰도 씌워주었다.
그리고 바다와도 같은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쳤다.
9,000 피트.
이 고도에 온 건 또 처음이다.
지도를 펼쳤다.
새로운 진지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장군은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말을 전했다.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휴식을 즐기는 밥 맥니콜스, 잭 버틀러, 조지 예거]
1952년 03월 18일
비행장에서 허가를 받고, 곧 이륙했으나 날씨 상태가 영 안되고 구름 높이도 낮아서 그냥 귀환했다.
돌아오고 나니 밥 맥니콜스의 청동성장 수여식에 참관했다.
훈장 수여 리본을 다는 것도 보았다.
아니 왜 이 사람한테 훈장을?
1952년 03월 19일
비바람이 너무 강했던 탓에 천막을 날려먹었다.
신이시여 제발 날씨좀 도와주세요.
오늘은 어떠한 이륙도 불가능 할 것 같다.
구름 고도가 400 피트 밖에 되지 않는다.
부상당한 다리가 너무 아프다.
1952년 03월 20일
어제보단 나아진 것 같다.
다시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오늘은 첫 비행은 신참 조종수와 함께 한다.
하루가 멀다 할 정도로 조종수들이 매번 바뀌고 있다.
이륙 후에 새로운 지시를 받아 평강으로 비행했는데- 8,200 피트 상공에서 40mm 포격을 받았다.
검은색 포연이 얼마나 징그럽게 생겼는지!
한 발 딱 들이 맞으면 바로 지옥 급행이다!
그 후에는 20mm와 50구경의 사격을 받았다.
총알이 사방팔방으로 빗발쳤다.
나는 조종수에게 돌아가자고 했으나 아무래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그는 내가 사격 당하고 있어도 침착하는 모습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젠장할, 나 엄청 무서웠었는데.
1952년 03월 21일 - 22일
호우 때문에 비행 일정이 하나도 없었다.
1952년 03월 23일 - 24일
활주로에 세워놓은 비행기가 단 한 대도 없을 정도로 바람이 매우 강했다.
이렇게 상황이 나빠질 줄이야, 그저 기다릴 뿐이다.
[윌리엄의 상관, 윌리어드 W. 와이먼 장군]
1952년 03월 25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평강 상공에서 20분 전도 선회했다.
꽤 오랬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요격기도 없는 것을 보니 짱깨자식들은 공항을 제 역할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장군이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나는 그저 직접 착륙하지 않는 이상은 확인 할 방법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종수는 "그런데 윌리엄이 진짜로 그 짓을 저한테 시키려고 했다니까요" 하며 농담을 던졌다.
장군이 배꼽 빠지게 웃어대질 않던가.
오늘 오후, 창동리에서 빨랫줄 같이 긴 행군을 발견했다.
정말 악마 그 자체나 다름없다.
또 다시 대공 사격을 받았다.
[안개가 자주 껴서 위험한 부산(父山)]
1952년 03월 26일
오전에 비행이 있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안개가 많이 꼈다.
근데 높으신 분들은 날씨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정찰 임무를 어서 완수하길 바란다.
드웨이 장군과 대령이 산책하고 있을 때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안개가 정말 두꺼웠다.
우선 까래서 이륙하긴 했지만, 5,300 피트 부터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종수에게 기지로 돌아가자고 했다.
난 하루라도 빨리 이 의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절대로 장군의 전략적 판단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포의 사정거리 안으로만 비행하면 되는데 굳이 사정거리를 넘어 15마일을 비행할 이유는 없는 것은 물론 비행기에 발을 올린 이상 비행은 내가 직접 지휘하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1952년 03월 28일
오후에 한 번의 비행이 있었다.
핑거 호로 갔는데, 평강으로 가는 도중 빌어먹을 40mm 네 정이 불을 뿜었다.
사격을 멈출 때 까지 다른 길로 가자고 조종수에게 말했다.
기지로 귀환할 때면 왠지 자신감이 흘러 넘친다.
유버트 중위는 대공 사격을 받았을 때 대처 방법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킨다.
유버트는 조금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1952년 03월 29일
오늘자 비행은 없었다.
[공군 수훈장을 수여하는 윌리엄]
1952년 03월 30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오전 비행 후에, 롱가네커 대령이 나에게 공군 수훈장을 수여 해주었다.
나는 카터에게 수여할 때 컬러 사진으로 촬영을 부탁했다.
오후 비행 중에 매우 중요한 표적을 발견했으며, 창동리 위에서 목표 제거를 위한 전투기를 호출했다.
1952년 04월 02일
사흘 만의 첫 비행이다.
400여명에 달하는 적 행군에 대해 보고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열 명 즈음을 더 발견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오늘 비행은 정말 끔찍했다.
심지어 그 조종수조차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내 어떻게 버텨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버텨냈다.
1952년 04월 03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딱히 특별한 점은 없었다.
견인포랑 유도포탄 때문에 목표에 접근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난 곡사포 포격 지역 유도 임무가 가장 싫다.
곡사포의 탄두가 어디에 쏟아질지 모르지 않던가.
심지어 탄도 관측은 우리 몫이다.
그 작고 귀여운 탄두 하나가 비행기에 처박는 순간, 재앙 그 자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탄두랑 부딪힐 뻔한 적이 한 두번도 아니고.
1952년 04월 04일
참으로 훌륭한 비행이었다!
값진 목표를 발견하고, F-51 전투기들을 호출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짱깨자식들이 포구를 열고 대공포화를 쏟아내는데도 우리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쓰라리다.
결국 백 여명 정도의 적이 살아남았다.
솔직히 우리 정찰기에도 최소한 두 정의 50구경은 달아야 하지 않을까?
1952년 04월 05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대공 사격은 없었다.
1952년 04월 07일
부대 이동일이다.
1952년 04월 08일
새로운 지역을 정찰하는 임무를 받았다.
길잡이가 되어주는 지형물이 많아, 찾아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1952년 04월 09일
다시 새로운 지역을 비행했는데, 세상에!
저번 비행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화끈했다.
적의 122mm 대공포가 우리를 격추시킬 뻔 했다!
검은 연기가 내 눈을 가리고 지도를 검은 잿덩이로 만들어버렸다.
비행기 한 발자국 밖은 혼돈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20mm 탄도 날라다녔다.
나는 겁에 질려 두 손 두 발 모두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 대공포좌를 찾기 위해서는 선회를 몇 번 더 돌아야만 했다.
1952년 04월 16일
6일 만의 첫 비행인데 아무 것도 관측되지 않았다.
Yak-9 두 기를 발견 및 보고하였으며, 바로 남하하여 귀환했다.
1952년 04월 18일
오늘 마지막 비행은 금화를 지나 창동리 까지 갔었는데, 하필이면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곳 까지 비행해버렸다.
거의 서 너 시간 동안 길을 찾느라 고생했다.
1952년 04월 20일
122mm 포를 관측하기 위해 다시 이륙했다.
122mm 포 진지를 관측하지 못했지만, 경 대공포 진지를 관측했다.
분명 20mm 일 것이다.
쬐그매서 찾아내기 한 번 참 힘들다.
1952년 04월 22일
장군의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최전방으로 이휵했다.
두 시간 내내 적 출몰지역에서 선회했다.
창동리의 남 쪽에서 50 구경의 사격을 받았다.
그리 큰 위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얕볼만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항공모함에 착륙했다!
아마추어에게 그리 좋은 시도는 아니었겠지만, 나쁜 시도도 아니었다.
오늘로써 나는 총 60 회의 비행을 달성했고, 또 공군 수훈장을 수여받았다.
1952년 04월 23일
정말 어떻게 이런 하루가 벌어질 수 있는건가!
오늘 아침, 평강 상공을 비행하는데, 사방에서 네 정의 20mm 대공포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중국인들이 나를 향해 포를 쏴갈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막 총을 난사하는데 막상 반격할 무기 조차 없는 상황이 닥치면, 어이가 털린다.
그냥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서 맞는 수 밖에 없다.
155mm 야포의 위치를 확인 후 공습을 요청했으며, 공습을 지켜보았다.
창동리 동쪽으로 이독했을 때는 세 대의 전차를 발견했다.
JS-53, 51 톤 짜리 중전차였다!
바로 화력지원협조본부에 연락한 후 항공지원이 도달할 때 까지 선회했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했다.
37mm 대공포가 우리 비행기를 쫓아 사격했고, 우리는 바로 선회 아래로 하강해서 후퇴한 후 다시 돌아왔다.
지원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37mm 대공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주어야만 했다.
저 녀석들을 그냥 보내줘야 한다니, 속이 영 불편하다.
내일 다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팟 대위가 오늘 대공포에 당했다- 꼬리 날개가 작살이 났다고 한다.
대위는 너덜너덜해져 절반 밖에 남지 않은 꼬리날개로 착륙을 시도했는데, 바퀴가 땅에 닿자 마자 꼬리날개가 부서졌다고 한다.
러키 독!
1952년 04월 24일
오늘 비행은 너무 좋았다.
핑거 호와 창동리를 오갔다.
대공포 사격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1952년 04월 25일
오늘은 단 한 번의 비행 뿐이었다.
하필이면 적 때문에 격추당할 뻔 했다.
대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 쪽으로 돌아 부대로 방향을 틀었다.
조종사는 등에 부상을 입었다.
평강을 넘어 비행했다.
우려했던 만큼 심각한 부상은 아닌 것 같다.
1952년 04월 27일
지난 이틀 동안 자꾸 좋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모두 평강 주변에서 벌어졌다.
여덟 대의 전차를 처리하러 출격한 해병대의 커세어 2개 편대가 한 대도 남김없이 격추당했다.
적들이 우리한테도 76mm를 사격했고, 조종수가 부상당했다.
곧 탈출했고, 다행히도 큰 부상은 아니었다.
어느 한 F-80 조종사는 운이 영 좋지 않았다.
피격 당하고 비상 탈출을 실행할 때, 아무래도 올바른 자세는 안중에도 없었나보다.
곧 좌석이 불꽃을 내뿜으며 발사되었는데, 다리를 하필이면 제 자리에 두지 않았다.
무릎은 잘려나가고 발톱은 단 한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세 시간 동안 자리를 절단하고 나서야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오늘은 평강 서쪽에서 F-51 한 기를 잃었다.
이 더럽게 쪼그만 L-19 타고 평강에 갈 때면,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만 같다!
1952년 04월 30일
평강을 넘어 창동리까지 비행했다.
대공 사격은 없었다.
1952년 05월(MAY) 01일(DAY)
부대원 모두가 피격 당할까 몸서리를 치고있다.
왜냐하면 오늘은 '메이데이' 이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들은 이른 아침부터 날 위험한 지역으로 정찰을 보냈다.
오후에는 와이먼 장군과 함께 면담을 가졌다.
장군은 내 성과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두 시간 동안 더 비행했다.
1952년 05월0 4일
핑거 호 위에서 또 다시 20mm의 사격을 받았다.
우리는 재빨리 빠져나왔다.
1952년 05월 05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별 탈 없었다.
1952년 05월 07일
오늘은 단 한 번의 비행밖에 없었는데, 하필 야간 비행이었다.
5,000 피트 상공에서 비행했다.
골짜기들 사이로 낀 안개가 선명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너무 기분이 좋아 껑충껑충 뛰어나디고 싶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었다.
아마 격추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일들이 두려웠던 것이었겠지.
1952년 05월 08일
오늘은 한 번 뿐이었다.
매우 잠잠했다.
1952년 05월 10일
늦게 비행 임무가 하달되었으나, 정찰 임무는 아니었다.
구름이 많았고, 고도는 5,500 피트였다.
이런 날씨에는 구름 위를 뚫고 올라가 수 키로미터나 되는 흰색 바다를 보아야 제맛이다.
1952년 05월 11일
오늘은 어머이날이다.
돈 쓰기 얼마나 좋은 날인가!
내가 군표와 함께 부친 편지를 레를린이 잘 받았기를.
레를린은 내가 한국에 와 있는 것을 이해 해주었다.
분명 집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무진장 기다리고 있겠지.
매일 나에게 편지를 써주는데, 나에게는 편지 한 장 한 장이 폐허속 보석과 같다!
어쩔 때는 한 뭉치나 되는 편지를 받기도 한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말해줄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아무래도 일기를 통해서 적어내리는 것이 최선인 듯 싶다.
오늘 비행은 새로 배속된 설리번과 함께했다.
설리번은 비행기를 엉뚱한 곳으로 몰고갔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2년 05월 12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나 대신 사진을 촬영하고 싶다고 찡찡대는 친구랑 함께했다.
근데 막상 일 때문에 부르면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루 종-일- 빈둥대며너 가산점을 얻으려고 하다니.
얼마나 많은 아군 조종사들이 적의 대공 사격에 죽어나갔는지 생각해보면, 소름이 확 끼친다.
내가 격추시킨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한 L-19 한 기가 제트기랑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제 25 사단의 그 L-19 조종사는 오늘 처녀비행이었다고 한다.
두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내가 곧 한 명을 더 출산할 예정이었다!
1952년 05월 13일
한 번의 비행이 있었다.
운이 없었다.
동쪽에서 네 기의 비행기를 잃었다.
살아남은 비행기는 한 기 뿐이었다.
네 기 모두 대공포화에 격추당했다.
1952년 05월 14일
오늘은 한 번의 비행이 있었다.
오늘은 두 기의 비행기를 잃었다,
한 기에 대해선 내가 직접 무전기로 그 소식을 들었다.
함께한 조종사가 상황을 보고했다.
대공포에 직격하자마자 비행기는 폭발했고, 낙하산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종사가 낙하산 없이 추락했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 다른 한 기는 황해에서 추락했다.
편대장의 유도를 받아 땟목을 타고 귀환했다.
1952년 05월 15일
제 13 사단의 조종사가 무전을 쳐왔는데, 대공포가 우리를 뒤따라 오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무전을 수신하자 마자 열 발이 넘는 대공포탄이 오른 쪽으로 빗나갔다!
두 번의 비행이 더 있었고, 사격은 없었다
1952년 05월 16일
오늘 아침 동쪽에서 피격당했다.
연락장교 브루드레트 소령이 저번 주에 잃은 비행기의 합이 저번 달 보다 많았다고 말해주었다.
1952년 05월 17일
두 번의 비행이 있었다.
비행기가 엄청나게 요동쳤지만 대공사격은 없었다.
1952년 05월 18일
두 번의 편안한 비행이 있었다.
아직도 병종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참들은 가산점을 얻길 바라지만, 막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꼴에 사내자식들이 이런 것도 안하나.
생각해보니, 이런, 나도 신참들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정찰 임무가 이런 것이라고 오래 전에 깨달았으면 똑같이 기피했을 것이 뻔해.
1952년 05월 20일
오직 한 번의 비행 뿐이었는데, 엔진이 두 번이나 고장났다.
전쟁터에서 찬양 받지 못하는 영웅들
육군 정찰대
군대의 눈이 되어주는 자들
이란 책에서는 G-2 정찰기 승무원들이 보내지는 곳 중 가장 위험한 곳은 야포 사격을 관측하는 장소라고 한다.
또 이렇게 적혀있다.
"그들은 화려한 곳에서 지내고(*Live),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전진하며(*Walk), 용기와 함께 비행한다"
이게 뭔 개소리야.
뭔 쓰레기같은 말들만 적어놨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고(*Live), 저 높은 하늘 위가 아닌 땅에서만 걸을 수 있으며(*Walk), 일반 사람들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두려움을 지닌 채 비행한다.
좆같군.
이 책을 쓴 새끼는 분명 내 평생 만나보게 될 사람 중 가장 아둔하고 병신같은 작자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빈둥대기를 좋아하는 다른 병사들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저 하늘 위에서는(*Up There) 세상 제일의 겁쟁이가 되고, 마지막 비행을 끝내고 올 때면 이 세상 제일의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나는 전선 아래에서의 비행을 선호한다.
하지만 전선 위는(*Up There) 절대로 아니다
1952년 05월 20일을 마지막으로 그는 일기 작성을 그만두었다.
그는 다음 날 대공포에 격추당했고, 홀로 살아남아 귀환했다.
8월 즈음에 기적적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 레를린과 자녀인 레이, 디와 재회했다.
하지만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으며, 49 세의 나이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결국 그는 G-2 육군 광역 정찰대의 몇 안되는 생존자로서 2001년에 생을 마감했다.
첫댓글 진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전쟁터였네...홀로 살아 돌아갈때 기분이 어땠을까..ㅠㅠㅠ전쟁은 진짜 안나야해..
읽는 내내 혹시나 전사했다는 글이 있을까봐 조마조마했다..
나도ㅠㅠ너무 무서웠을거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