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0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충청도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은 아산
유궁포(由宮浦)의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안성천 하구에 있는 지금의 아산호, 즉 소사하와 합쳐지며 두 가닥의 물이 만나는 그 사이가 아산이다. 칠장산에서 비롯한 산줄기가 안성 서운산을 지나 성거산에 와서 다시 한 줄기를 들 가운데에 뻗어 내렸는데, 이 산줄기가 천안시 성환읍을 지나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영인산에서 그친다. 이 산이 곧 아산의 진산이다. 아산에는 광덕산, 망경산, 배방산, 영인산 등이 솟아 있고, 삽교천으로 무한천과 곡교천이 흐르면서 당정평야를 이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이 합쳐져 아산군이 되었다가 시로 바뀐 아산군의 백제 때 이름은 아술현(牙述縣)이었다. 신라 때는 음봉(陰峯)이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이 군의 형세를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이오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차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른다”라고 하였다. 이승소는 자신의 시에서 “아산은 역시 예부터 이름 있는 지역으로,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많아 한쪽 지방에서 으뜸갔던 곳, 풍속의 후박을 어찌 깊이 걱정하며, 시읍(市邑)의 흥폐를 다시 누구를 원망하랴” 하고 읊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차다”라고 기록된 아산의 당시 호수는 482호이고, 인구는 1,822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17명, 진군이 55명, 선군이 250명이었다.
아산에 편입된 온양은 온천으로 이름이 높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온양온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세조 10년) 3월 초하루에 온양군의 온탕에 거가(車駕)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가 눈과 같고, 그 맑기는 거울 같았으며, 맛은 달고도 짜릿하였고, 성질이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라고 하며 팔도에서 표문을 올려 하례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駐畢) 신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임원준의 시에 “밭보리 푸르고 푸르러 생의에 차 있는데, 평지와 산간에 부지런히 지은 것을 농부들은 함께 기뻐한다. 무성한 이삭들 한 대에 두 이삭씩 달렸으니, 높고 낮은 푸른 물결이 몇 겹이나 되던가. 일진(一陣) 화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만경(萬頃)의 누른 구름이 가을을 재촉한다. 우리에게 풍년 줌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니, 횃 무리만으로 어찌 노대(魯臺)를 점치랴” 하였던 온양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온천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으니 세월이 지나도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다름이 없는지도 모른다.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에는 신정비라는 조선시대의 석비가 있다. 세조가 1468년에 충청도를 살피고 속리산 복천사를 거쳐 환도하다가 온양에 머무를 때, 온천 옆의 냉천을 발견하고 이를 신정(神井)이라 칭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성종 7년(1476)에 건립됐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비문의 대부분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온양온천에는 국왕의 행차가 자주 있어서 그 때문에 온궁이 건립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