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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에서 귀환한 자손의 계보 1
느 7:8-38
8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9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10 아라 자손이 육백오십이 명이요
11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팔 명이요
12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13 삿두 자손이 팔백사십오 명이요
14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5 빈누이 자손이 육백사십팔 명이요
16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팔 명이요
17 아스갓 자손이 이천삼백이십이 명이요
18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칠 명이요
19 비그왜 자손이 이천육십칠 명이요
20 아딘 자손이 육백오십오 명이요
21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22 하숨 자손이 삼백이십팔 명이요
23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사 명이요
24 하립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25 기브온 사람이 구십오 명이요
26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백팔십팔 명이요
27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8 벧아스마웻 사람이 사십이 명이요
29 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30 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31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32 벧엘과 아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33 기타 느보 사람이 오십이 명이요
34 기타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5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6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7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일 명이요
38 스나아 자손이 삼천구백삼십 명이었느니라
느 7:8-38 / 바로스의 자손들 2172명, 9) 스바댜의 자손들 372명, 10) 아라의 자손들 652명,
느 11) 바핫모압의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의 자손들 2818명, 11) 16느 7:12 엘람의 자손들 1254명, 13) 삿두의 자손들 845명, 14) 삭개의 자손들 760명, 15) 빈누이의 자손들 648명, 16) 브배의 자손들 628명, 17) 아스갓의 자손들 2322명, 18)아도니감의 자손들 667명, 19) 비그왜의 자손들 2067명, 20) 아딘의 자손들 655명, 21) 아델의 자손들 곧 히스기야의 자손들 98명, 22) 하숨의 자손들 328명, 23) 베새의 자손들 324명, 24) 하립의 자손들 112명, 25) 기브온 사람들 95명, 26) 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들 188명, 27) 아나돗 사람들 128명, 28) 벧아스마웻 사람들 42명, 29) 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들 743명, 30) 라마와 게바 사람들 621명, 31) 믹마스 사람들 122명, 33) 벧엘과 아이 사람들 123명, 33) 다른 느보 사람들 52명, 34) 다른 엘람의 자손들 1254명, 35) 하림의 자손들 320명, 36) 여라고 사람들 345명, 37) 로드와 하딧과 오노 사람들 721명, 38) 스나아의 자손들 3930명.
성벽이 완공되면서 예루살렘 성읍은 드디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귀환자들의 명단이 소개되는데 계보가 있는 가문과 성읍별로 기록하였습니다.
계보가 있는 자들(8-24)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달고 난 뒤 느헤미야의 관심사는 예루살렘의 인구 감소로 인해 발생하게 될 안전문제였습니다. 도시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인구 증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중에 일부를 그곳으로 이주시켜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구 조사는 먼저 가족의 계보에 대한 입증이 가능한 자들의 명단으로 모두 누구누구의 자손으로 소개됩니다. 바로스 자손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립 자손으로 끝나는 명단은 모두 합하여 16,722명입니다. 바로스가 먼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잘 알려진 가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읍에 따라 분류된 자들(25-38) 본 단락에 기록된 사람들은 계보에 대한 입증이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성읍을 알 수 있기에 이스라엘 자손으로 확인된 자들입니다. 기브온 사람을 시작으로 스나아 자손까지 모두 합하면 8,684명입니다. 이들을 지명에 따라 기록한 이유는 그들의 가계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거나 족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이름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의 이름을 나란히 소개하는 것은 성전 재건과 공동체 형성에 있어서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성경이 허구가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고 그 안에 개입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삶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느헤미야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인구 조사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조물로서 인정하는 한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창조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은 인간을 구속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종으로 삼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며, 우상에 매여 사는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설 교 >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 - 1
느 7:5-38 / 산호석
돌아온 자들
6절 :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옴
7절 :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아사랴, 라아먀, 나하마니, 모르드개, 빌산, 미스베렛, 비그왜, 느훔,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자들
* 도움말
1. 계보(5절) : 혈연, 사제 관계 및 종교 전통 등의 계통을 밝혀 적는 것으로 ‘등록부’를 말한다.
2. 처음으로 돌아온 자(5절) : 첫 번째 돌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B.C.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고국에 돌아온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을 가리킨다. 2, 3차 귀환자들은 최근에 도착하였기에 인구 파악이 쉬웠지만, 1차 귀환자들은 거의 1세기가 지났기에 인구 파악이 어려웠을 것이다.
3. 사로잡혀 갔던 자들(6절)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주도 하에 이뤄진 예루살렘 침공으로 인해 유다 백성은 3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었다. 즉 1차로 B.C. 605년(여호야김 3년)에, 2차로 B.C. 597년(여호야긴 1년)에, 3차로 B.C. 586년(시드기야 11년)에 각각 포로가 되었다.
* 말씀묵상
1. 명단의 의미
성경에 인물이나 숫자가 계속해서 나열되면 우리는 금세 식상함과 지루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리고 본문의 중요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명단과 숫자는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열되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가 이방 땅에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고 이제 하나님 회복의 때에 다시 돌아오게 된 감격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은 한 영혼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은 매우 소중하고 기쁨을 주는 의미였습니다.
2. 돌아온 자들의 수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했을 때 그들은 살 집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을 따라 계수되었고, 그때 돌아온 친척들과 가족을 만나면서 기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인의 시간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회복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와 언약 백성으로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는 기쁨과 그 속에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가를 발견해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축복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회복의 때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과는 함께 그 기쁨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나의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도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돌아온 자들에 대해 살펴보십시오(6-7절).
2. 본문에 나열된 사람들의 수와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 깊은 묵상
1. 범죄로 인한 주의 진노에서 회복된 경험이 있습니까?
2.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다
느 7:1-38 / by Mr.Dreami
성벽이 재건되고 문짝도 다 달았다.
그야말로 재건 공사가 끝난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성벽에 문지기를 세웠다.
노래하는 자와 레위인들을 세웠다.
믿을만한 자를 관리로 지정하였다.
하나니,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유다에서 가장 뛰어난 자였다.
관리로서 능력이 좋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볼 때 가장 필요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언제 신앙적으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전히 적들은 호시탐탐 성벽와 유다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신실한 신앙이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신앙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그럴 때 가까이 두어야 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이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
하나님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교회다.
둘째, 위험 요소를 배제하였다.
예루살렘 성문은 낮에만 열어 두었다.
밤이 되면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파수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어둠이 내려 앉으면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어둠의 시간은 언제라도 찾아온다.
삶 속에서, 신앙적으로 어려움의 시간은 늘 존재한다.
어둠의 시간에 대비하고,
아예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이 약해질 때는 더욱 그러하다.
셋째, 함께 한 자들을 계수하였다.
포로 귀환자들을 계수하였다.
어느 집안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하였다.
그들이 어떤 일을 맡아서 할 수 있는지 분명히 하였다.
전쟁을 치르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길로 가야 하며,
그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을 짜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에서도 전략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계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길에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힘 주시고, 인도하시고, 앞서 행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 앞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적의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메우며,
주어진 일들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다.
느헤미야 7장 1-73절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작성 : 정한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문짝을 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아름답게 건축하고서, 거기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흉가가 될 것입니다. 집을 잘 짓는 것만큼이나 지어진 집에 들어가 그 집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성벽을 완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성벽이 완공되고 난 후에, 느헤미야는 그 성벽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부류는 모두 레위 지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벽을 공사를 방해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5번이나 보내어서 오노 평지에 있는 한 마을에서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5번째 사람을 보낼 때에는 봉하지 않을 편지를 보냄으로 모욕을 주고, 모함을 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마야마저도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성전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벽을 완공했다면, 느헤미야는 응당 최정예 무사들이나 유다 사람들 가운데 기골장대한 사람들을 뽑아서 성벽을 지키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물리적인 힘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벽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에스라서에서 살폈던 성전재건과 지금 느헤미야서에서 살피는 성벽재건은 단지 건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다시는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일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레위 지파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그 성벽 안에 70여 년 전에 세워진 성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예루살렘 성벽 관리 책임자로 레위 지파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니와 하나냐가 선임되었습니다. 하나냐가 선정된 이유가 그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충성스럽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나다’, ‘바른 길, 정도를 걷다’, ‘공평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겨 그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도 동일했습니다.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다 백성들이 기근과 납세와 고리이자로 먹고 살 것이 없고, 전답을 잡혀 세금을 내고,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할 때에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의 봉급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냐는 충성스러움을 통해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바로 하나냐와 같이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를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합니다.
만약 사람들과의 관계는 바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데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의 일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겨울 궁전인 수산 궁에 있을 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환난과 고통을 겪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벽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산궁까지는 약 1,600km 정도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에 꼬박 4개월이 걸렸습니다. 현대인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_Saint-Jean-Pied-de-Port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_Santiago de Compostela까지인데 약 800km이고 40일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가는 길에 잠잘 수 있는 호텔이 있고, 음식점이 있고, 쉼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짐은 다 실어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니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수산궁으로 갔던 사람들은 호텔, 음식점, 쉼터는 전무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이 들고 가야 했습니다. 거리도 산티아고 순례기의 2배나 됩니다. 그 먼 길을 가서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니도 하나냐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 성벽은 완성이 되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반대자들은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해가 떠서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해가 지기 전에 문을 닫고 잠그고, 반드시 경비하는 사람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완성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완성된 성벽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당을 예쁘게 짓는 것보다, 그 안에 있는 교회인 사람들의 믿음이 아름답고 신실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 100주년기념교회가 홍보관을 아름답게 꾸미고, 양화진선교사묘원을 잘 가꾸는 것보다도 우리 교회 구성원들이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5-73절까지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7절에는 인솔자 1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38절은 가족별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9-45절에는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5-60절에는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1-65절에는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6-73절에는 돌아온 사람들의 총 숫자와 예물의 숫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계보는 에스라 2장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옵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한 권, ‘에스라-느헤미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권의 책에 이렇게 긴 족보를 2번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갔던 사람들이 전부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를 비교하면 페르시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국입니다. 그곳에서 수 십 년을 살게 되니 그곳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없는 땅, 척박한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돌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셔서 성경에 2번씩이나 새겨주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종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은 돌아왔고, 성벽을 재건하는데 온갖 방해가 있었을지라도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기에 그 이름을 지금까지 남겨 주셨습니다.
혹시 유다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의 예루살렘처럼 우리의 삶이 황량하게 보이고, 척박하게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도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고 믿으며 섬기십시다. 하나니와 하나냐처럼 사람들 앞에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십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심어주신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들이 영글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오늘도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다시 기록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겨운 명단일 수 있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조국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보겠노라고 결단을 하며 돌아왔을 것입니다. 혹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내 소유 때문에, 내 지위 때문에, 내 세속적인 꿈 때문에, 혹 깨어진 관계 때문에, 건강 때문에 하나님과 멀리 떨어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시고, 우리 삶의 성경에 우리 이름을 크게 쓰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니와 하나냐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실하고 정도를 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뛰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삶의 자리가 척박하게 보일지라도 그곳에서 사람을 섬김과 하나님을 섬김의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음을 잊지 않아,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일터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라 2장에 나오는 명단과 거의 동일합니다. 같은 명단을 반복해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보시고, 당신은 어떤 영적인 명단에 당신에 이름을 새기고 싶습니까?
3. 하나니와 하나냐가 충성스러웠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들보다 뛰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4. 당신의 성품이나 자질 가운데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
느7:5-38 / 박은성목사
내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임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내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감동”의 뜻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나에게 임했다는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인격이 내 인격을 덮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내 인격을 덮어야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가능합니다. 느헤미야가 1차 포로귀환자들의 믿음을 알아본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납할 때 감동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함께 갈 사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1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열두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갈지를 결정할 때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이 열두 지도자는 세상 지위를 초개처럼 여기고 백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육적인 출신과 배경이 아니라 믿음의 배경을 보고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 공동체의 지도자를 뽑을 때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지를 분별하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누구와 함께 갈지를 결정할 때 육신의 가문보다 믿음의 계보를 지킨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는 무명의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이 내 믿음을 기억하셔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인생이야 말로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감동된 인생이 될 때 내 삶의 현장이 찬란한 믿음의 장소로 변합니다. 7장 8절부터 24절까지는 사람에 따라서 기록하고, 25절부터 38절까지는 어디 사람이라고 지역으로 분류해서 기록합니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디에서 사는가도 중요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미약한 지파입니다. 우리 집안에 간음과 살인의 역사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조상 탓, 부모 탓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바울의 집안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느 곳이 믿음의 장소라서 거기에 살아야 되는 게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사는 곳이 믿음의 성읍이 되기를 기도하고, 내가 찾아가는 곳마다 믿음의 장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적용질문
하나님의 감동으로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사람을 채울 지혜가 생겼습니까? 내가 기억해야 할 믿음의 조상, 믿음의 선배는 누구인가요? 알코올중독과 폭력과 무능력으로 힘들게 한 부모라도 그 부모님이 있어 내가 태어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의 부모님이야말로 무조건 인정해야 할 믿음의 조상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강대국 바사 왕보다 예수님의 조상이 될 스룹바벨을 분별하고 딸는 믿음이 있습니까? 유명하지 않은 살마이라도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간증을 들으며 그들을 높이고 인정합니까?
베냐민 지파처럼 간음과 살인의 사연을 가진 가정입니까? 여리고처럼 폐허가 되고 가난에 찌든 가정입니까? 내 수치와 아픔의 장소도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실 때 믿음의 장소가 될 것을 믿습니까? 내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가 믿음의 성읍이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섬김과 인내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