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잠언 21,1-6.10-13; 루카 8,19-21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2026.9.22.
오늘은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박해시대의 교우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우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분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직후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박해령에 의해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상황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고향을 떠나 아무도 살지 않는 산간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우촌은 전국 각지에 형성되었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에는 공소로 발전하는 교우촌도 생겨났습니다. 1850년 당시 전국에는 189개소 이상의 공소가 존재하였습니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어 담배, 조, 대마, 채소 등을 재배하거나, 옹기와 숯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생활은 대체로 가난했는데, 박해의 조짐이 보이기만 하면 그동안 일군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마을의 지도자 혹은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했고, 교우촌 간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가까운 교우촌 사이의 교류도 있었지만, 함께 입교한 친척들 간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교우촌이 형성되기까지 전교는 주로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가친척이 함께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만나 서로 흩어지면 다시 안부를 묻기 위해 찾는 일이 필요했고, 찾게 되면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도 교류는 필요했던 겁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에는. 옹기나 숯을 판매하는 상인으로 행세하는 것이 매우 편리한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신자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다 상업에 종사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작용했는데, 그것은 박해시대 당시 천주교 신자는 대역죄인이었기 때문에 백정만도 못한 취급을 당해 관리, 양반, 포졸, 불량배, 일반 백성까지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기 위해 교우촌을 습격하는 일이 잦았던 사정도 작용했습니다.
여러 가족이 모인 교우촌에서 양반과 상민, 천민이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 교우라고 부르면서 한 가족처럼 지내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서로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교우촌을 조정과 유림에서는 상당히 의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범죄 집단이나 반란 집단이 아니고서는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천주교가 조선의 고유 풍속과 예절을 해친다는 이유도 박해를 가한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교우촌에 온 신자들은 서로에게 부모, 형제, 자매가 되어 주었기에, 박해가 닥쳐도 교우촌에서 하늘 나라의 삶을 지상에서 살았던 그 체험 덕분에 차마 배교할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우촌 신자들의 삶에서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다고 고백했으며, 이 신앙의 매력에 반하여 교우들과 함께 고생하고. 박해가 닥치면 함께 치명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에게 천국의 체험을 준 것은 우선 공동으로 기도하는 생활조건이었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교리를 서로 가르쳐 주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주일이면 기도문을 외고, 공소회장의 복음 해설을 들으며 하느님 말씀을 배웠습니다. 글을 아는 이들은 이웃들에게 기도문을 알려주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본분으로 알았습니다. 이들은 밤낮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천주교를 알렸습니다. 교우촌이 발각되고 신자들이 줄줄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이들은 감옥 안에서 함께 모여 기도를 바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새 신자 가족이 교우촌에 오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과부와 고아도 교우촌에서는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애덕을 실천하며 쌀 한 줌, 물 한 모금이라도 나누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집을 공소로 쓰도록 내놓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나눔의 실천이 기도에 이은 두 번째 천국의 체험이 되어 주었습니다.
박해시대에 교우촌의 경제사정이 매우 궁핍했고 국법을 어겨 천주교에 입교하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으며, 성당도 물론 없고 신부도 귀해서 드러내 놓고 전교를 할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요원의 불길처럼 신앙이 번져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 왕조 시대 오백 년 동안 신분사회에서 대대로 억눌리고 수탈을 당해 온 상민들과 천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사정도 크게 작용했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며 귀한 존재라는 천주교 교리는 그 자체로 복음이 아닐 수 없었던 데다가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내세관은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배가시켰습니다.
신유박해 이후 자발적으로 전국 심산유곡에 퍼져 자리잡기 시작한 교우촌은 백 년이나 지속된 모진 박해를 견딜 수 있게 한 요람이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운 일도 세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기적적인 일이었지만, 지배층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다른 가치관을 지닌 피지배층이 순전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백 년이나 저항한 일도 한민족 반만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백 년을 앞서서 교우촌 신자들이 이룩한 정신 문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핵심적인 포인트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만민 평등과 남녀 동등의 가치관이었습니다. 더 있습니다. 반만년 전에 시작되어 2천 년 가까이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문명을 이룩했던 고조선이 보여준 천손의식을 되살려낸 역사 현상이 또한 교우촌이었습니다. 교우촌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아침저녁으로 가족이 모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는데, 이것이 천손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하늘과의 소통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했던 정신 전통이었고, 불교와 유학 같은 외래 종교와 사조가 들어온 이래로 2천 년 가까이 잃어버렸던 터에 회복한 역사적 보화였지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라는 비난을 듣던 교우촌의 신자들이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께 바쳤을 기도가 오늘 독서인 잠언의 말씀입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1-3) 그리고 나라를 향해 대든 적도 없었고 이웃에게 패악질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말다툼조차 없이 그저 평화롭게 하느님을 믿고자 하던 착한 백성들에게 이들의 그 알량한 재산을 빼앗고 모진 고문을 가하던 형리들과 관헌들에 대해서는 이런 잠언이 기도 내용이지 않았을까요?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의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와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잠언 21,4. 6. 10-11)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친형제들이 아니라 친척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대가족 제도의 관습에 따라서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예수님마저 출가하여 홀몸이 된 마리아를 집안 어른으로 모시고 있었을 뿐, 예수님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예수님께는 더 가까운 가족이었습니다.
이 박해시대 교우촌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맥이요 이 순교자 성월에 기억해야 할 역사적 유산입니다. 그때는 물론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도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가 지상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