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다!"
미국 소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집회가 사그라들던 2008년 7월 8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탈리아 로마의 피아자 노바나 광장에서는 베를루스코니 행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집회에서는 베를루스코니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로마 시민들과 예술가, 가수, 배우, 정치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는데, EU의회 의원이기도 했던 이탈리아 정치가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지금 정부가 아닌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 '정치적 강탈'이란 범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베를루스코니의 첫 조치는 모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정치적 절차마저 말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자, 슬슬 베를루스코니란 사람이 궁금해지지 않는가? 아마 글을 다 읽고나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성공한 기업가에서 정치가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1936년생, 기업가, AC밀란 구단주, 현 이탈리아 총리.
90년대 정치에 입문한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총리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베를루스코니는 이미 성공한 기업가란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에 건축업에 뛰어들면서 기업가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말부터는 방송사를 사들이기 시작하며 일약 미디어 재벌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성공적인 기업가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기업가로도 성공을 거둔 만큼 총리로서의 자격도 충분하다고 유권자를 설득하여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2008년 3선에 성공할 때에도 경제재건을 내세운 공약으로 유권자의 호응을 얻어 기존 집권당을 압도적인 표차로 제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국가지도자, 그리고 언론재벌
그는 자기 스스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재판을 받은 자"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많은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는 인물이다. 92-93년 경 그의 회사가 파산 위기에 있었고, 사기죄, 뇌물 공여 및 수수, TV전파 남용 등의 혐의로 로마, 밀라노, 토리노의 검찰로부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총리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게다가 베를루스코니와 마피아 사이에 검은 커넥션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정원사에 의해 폭로되는 등, 도덕성이란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이탈리아 언론에 대한 그의 막강한 영향력이다. 그의 '언론제국'인 'Mediaset'은 이탈리아 10대 기업 가운데 하나로, 3개 전국 TV 채널을 소유하고 있으며, 여기에 이탈리아 최대 광고회사인 'Pubitalia', 최대 출판사인 'Arnoldo Mondadori Editore', 최대 판매부수를 보여주는 신문 'Panorama', 영화 배급사인 'Medusa', 'Penta', 은행인 'Medialanum'역시 그의 소유이다.
언론 위에 군림하는 자
베를루스코니는 단순히 성공한 기업가나 정치가를 넘어서, 이탈리아 언론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선 총 시청률이 40%를 넘는 본인 소유의 3개 TV 채널, 그리고 본인과 가족의 신문사가 친베를루스코니적인 내용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는데다, 이탈리아 공영방송인 RAI의 이사회 구성에도 개입하면서 RAI의 편집권까지 위협하고 있다.
또한 총리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언론에 간섭하였는데, 베를루스코니가 Enzo Biagi, Michele Santoro, Daniele Luttazzi 등의 언론인들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여 이들이 실직하게 만든 사례, 여배우 Sabina Guzzanti가 베를루스코니의 언론제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어 TV쇼를 아예 없애버리도록 한 사례 등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언론에 대한 심각한 영향력 때문에 2004년 '세계 언론자유 보고서'에서는 이탈리아의 언론의 자유 등급을 '자유'에서 '부분적 자유'로 강등하기도 하였다.
눈, 귀 틀어막기
이 글의 직접적인 동기는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방송법 때문이었다. 대기업 및 신문사가 방송사를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법안을 골자로 하는 방송법에 따르면,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문화방송은 민영방송으로 분류가 되어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조선, 중앙, 동아 등 메이저 언론사와 주요 재벌들의 표적이 되고, 방송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다는 '공영방송법'에 의해 공영방송으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예산과 인사에서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송국의 자유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이 상황을 보면 PD수첩으로 홍역을 치른 집권정당의 문화방송 때리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를 두고 정부에서는 '새로운 방송시장 개척을 통한 고용창출'이라는 이유를 대며 추진하고자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재벌 언론사들이 과연 엄청난 초기투자를 필요로 하는 방송사 설립을 시도하겠는가, 아니면 기존 방송사를 인수하겠는가.
게다가 기존 메이저 신문사 가운데 중앙일보가 방송법 개정안 직권상정을 거부한 김형오 국회의장을 사설로 맹공하는 등 지상파 진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어 더 불안하기도 하다. 편파방송을 일삼는다며 문화방송과 파업을 연일 비판하고 있지만, 과연 스스로는 얼마나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전 정권이 미국소고기 수입을 허용하려 하자 광우병의 위험을 제기하며 불같은 비난을 퍼부었던 전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성 순환출자 문제나 태안반도 원유유출 사태 등에 대해서는 입을 걸어잠그던 그 행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세계적인 미디어그룹 출현이 대세라는 이유를 들며 연일 메이저 언론사들이 방송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지만, 루퍼스 머독을 비롯한 세계 주요 미디어그룹들의 언론독점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보는 TV를 통해서는 좀 더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 정권이 최고라는 나팔수는 KBS 하나로 족하다, 그것도 채널이 2개라서 좀 짜증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