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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에서 귀환한 자손의 계보 2
느 7:39-60
39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40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41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42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느니라
43 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4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사십팔 명이요
45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팔 명이었느니라
46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7 게로스 자손과 시아 자손과 바돈 자손과
48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살매 자손과
49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50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51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52 베새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비스심 자손과
53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4 바슬릿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5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6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느니라
57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소베렛 자손과 브리다 자손과
58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9 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몬 자손이니
60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느니라
느 7:39-60 / 제사장 가문들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집안들이 귀환하였다. 예수아 집안의 여다야 자손들 973명, 임멜의 자손들 1052명, 바스훌의 자손들 1247명, 하림의 자손들 1017명. 40-42) (39절과 같음) 43-46) 레위 사람들 중에서는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 74명이 돌아왔다. 44) 성전의 성가대원들 중에서는 아삽의 자손들 148명만이 돌아왔다. 45) 성전 문지기들 중에서는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 138명이 돌아왔다. 46) 성전의 막일꾼들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장들이 온 가족을 거느리고 귀환하였다. 시하, 하수바, 답바옷, 게로스, 시아, 바돈, 르바나, 하가바, 살매, 하난, 깃델, 가할, 르아야, 르신, 느고다, 갓삼, 웃사, 바세아, 베새, 므우님 자손들, 느비스심 자손들, 박북, 하그바, 할훌, 바슬릿, 므히다, 하르사, 바르고스, 시스라, 데마, 느시야, 하디바. 47-57) 솔로몬의 노예들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장들이 자손들을 거느리고 귀환하였다. 소대, 소베렛, 브리다, 야알라, 다르곤, 깃델, 스바댜, 핫딜, 보게렛하스바임, 아몬. 58-59) 60) 성전 막일꾼들과 솔로몬의 노예들 중에서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모두 392명이었다.
귀환한 사람들의 계보 중에는 느디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유다 족속이 아닙니다. 그런데 포로 귀환 후 이들은 제사장 가문, 레위인 가문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39-45) 본문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목록에 이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목록이 제시됩니다. 제사장 중에는 가장 먼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의 숫자가 소개됩니다. 예수아의 집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여다야 자손은 대제사장 예수아가 속했던 가문으로 보입니다. 제사장들의 목록은 다윗 시대 24개의 가문과 달리 네 가문만 언급되는데, 아마도 제사장들 중 일부만 귀환길에 올랐으며, 다른 제사장 가문들은 훗날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스 8:2-3). 귀환한 제사장들의 총수는 4,289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레위인은 호드야 자손,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에서 찬양을 인도한 아삽의 자손들을 가리키며 문지기들은 성전과 그 안의 창고를 지키고 관리하는 레위인들을 말합니다. 레위인들의 전체 숫자는 제사장들의 숫자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예루살렘 귀환에 소극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성전의 일을 돕는 자들(46-60) 성전을 섬기던 자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 그들 전체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은 종교적인 일들을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전의 일을 돕는 자들로 성전 주변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일들을 책임지고 행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느디님 사람들로 불리는데, 전체 35명의 이름들이 기록되었고 시하, 하수바, 르신, 바르고스, 시스라 모두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이들이 이방 민족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금 내는 것이 면제되었으며 예루살렘에 그들만의 지역을 갖고 있었고, 또한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참여했으며 느헤미야 10장에서는 율법 준수를 서약했던 사람들로 소개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일은 여러 사람의 협력과 동참으로 인해서 더욱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적용: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된 것 즉, 자격 없는 자들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자격을 얻었던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 계획이 보이지 않고 답답할 따릅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 섭리를 보여주며 인도해 가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루신 그분의 아름다운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자손대대로 예배하는 축복:느디님의 축복
느헤미야 7:39-60 / 삐뚤목사(주만나 & 주틴)
1. 자손대대로 예배하는 축복
직접 제사를 섬기던 제사장들에 비해 뒤에서 제사를 돕는 레위인은 고된 일에 비해 섬김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리고, 70년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어느정도 삶이 안정을 얻게 되었을 꺼에요. 그런데, 이 안정적인 삶을 두고, 눈에도 잘 안 띄는 굳은 일 감당하러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라면 선뜻 따라 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귀환한 제사장은 4,289명이었는데, 레위인은 74명뿐이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돌아온 자들을 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계세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자녀들까지 에스더서를 보면, 보호하시고, 그곳에서 하만으로부터 승리를 누리게 하셨어요. 그럼에도 돌아온 74명의 레위인의 섬김을 통해, 무너졌던 예루살렘은 다시 제사 드리며, 예배가 회복되었어요. 돌아오지 못한 자들은, 제사가 없는 땅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게 되었을꺼에요.
우리 각자는 사명이 달라요. 고향으로 돌아가던지, 포로로 가게된 땅이든지, 하나님이 오늘 나를 부르신 곳에서, 주신 삶을 살아내기 바래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1차적 목적이 있어요. 레위인은, 제사를 섬기는 일이였어요. 그런데, 이름이 드러나는 명예가 없고, 쌓아온 안정적인 삶을 놓아야 하는 손해가 온다고 그 사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책에 이름이 기록될때, 이름이 빠지게 될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손해를 무릎쓰고 드러나지도 않는 일을 향해 달려가는 바보같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지게 되었어요.
오늘 우리는 선택할 수 있어요.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며, 손해보는 자리에 가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도전하고 싶어요.
손해가 오고, 명예가 없다고 해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달려가는 74명의 레위인이 되기를 바래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해주실꺼에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레위인 가정은, 제사를 섬기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하는 이방땅의 신앙인이 되었을꺼에요.
그러나, 이렇게 달려온 74명의 레위인들의 후손은, 이후에 계속 제사를 섬기는 예배자로 그 후손들이 살수 있게 되었어요.
이 축복이 오늘, 손해를 무릎쓰고, 이름이 없다고 해도, 달려가는 섬김의 예배자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느디딤 가정과 솔로몬의 종 가정에 임한 축복
그런데, 돌아온 무리 중에 특별한 사람들이 있어요.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라고 번역된 솔로몬때 종이었던 자손들이에요. "(느 7:57,새번역) 솔로몬을 섬기던 종들의 자손은"
느디님 사람은 그 이름만 봐도, 이방인에요.
그리고 솔로몬 신하의 자손, 즉 솔로몬때 노역에 동원된 종들도, 이방인이에요.
느디딤 사람들은, 페르시아에 살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제사 섬기는 굳은일 감당하지 않아도 되요.
솔로몬도 죽고, 솔로몬의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갔으면, 이제 더 이상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요. 페르시아에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어요.
페르시아에 살면,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요.
그럼에도, 이들은, 예루살렘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고자 달려왔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인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셨어요.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가 다시 세워지는 현장에 달려온 이 가정!
하나님이 참 기쁘셨던거 같아요. 그래서, 제사장들의 이름을 기록하는데, 이들의 이름을 가문별로 기록하고 계세요.
특히, 느디님 사람들은, 부족한 레위인들 대신하여, 제사, 즉 예배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어요(스7:24,8:16-20). 그리고 이후 이들은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삼가고 말씀을 지킨 사람들로 기록되고 있어요(느10:28). 그리고, 이들의 후손은 예배를 섬기는 가정이 되었을꺼에요.
이들은, 유대인들 따라서 예루살렘에 오지 않아도 되요.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온 이들의 이름은 하나님은 기억하셨고, 후손 대대로 예배를 섬기는 가정으로 세워주셨어요.
오늘 이 축복이 우리 가정들에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3.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질까?
하나님 나라는, 계산해보고 손해 보지 않는 길에 서는 똑똑한 사람들로 세워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 이름이 없어도, 빛이 없어도, 달려가는, 한 가정! 세상의 가치로 보면, 바보소리 듣는 이 한 가정을 통해 세워지게 되어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 느디님 가정의 축복을 받았어요.
우리는 죄의 종으로, 하나님 자녀는 커녕, 백성이 될 수도 없는 존재였어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어요.
그런데,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자격도 없는데...
원수인데..
이 사랑을 받은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또 계산기 꺼내서 손해따져가며, 살아야 할까요?
과감히 계산기 밧데리 빼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달려가는 삶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가정은 대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축복의 가정으로 세우시고, 우리의 작은 삶과 가정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통로가 될꺼에요.
느헤미야 7장 39 – 60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역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은 총 4,289명으로, 이는 전체 포로 귀환민의 약 1/10에 해당하는 숫자로 매우 많았습니다. 반면에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일할 레위 사람들의 숫자는 74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제사장의 숫자는 많은데 제사장을 도와 여러 수고스러운 일들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눈에 띄는 사역에는 사람들이 몰리지만 수고스러운 일에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게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똑같이 중요하게 보십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묵묵히 섬기고 있는 지체들에게 감사하며 내가 맡은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내가 마음속으로 기피하였던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할 사역은 무엇입니까?
자부심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 중에는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들은 솔로몬을 위해 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이 솔로몬을 섬겼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의 소유나 현재의 모습과 관련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합니다.
오늘의 만나
성도는 어떠한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권세를 누립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정작 하나님의 백성은 성 안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을 기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척박하고 황폐한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명처럼 지켜야 할 성전 중심의 삶을 포기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다수의 의견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흑암 속에서 느헤미야의 가슴은 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되어 스룹바벨이 인솔한 1차 포로귀환자들의 이름을 놓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1차 포로귀환자 명단의 일부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이름을 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죠.
그들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회복하길 강력하게 권면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강력한 부르짖음과 희생과 헌신은 잠든 이스라엘을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치, 도미노 하나가 넘어지자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회복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오늘의 말씀 뒤에 있는 느헤미야 8장 1절 상반절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본 구절에서 수문 앞 광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편 문과 성벽의 수문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입니다.
성경기자는 신이 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모든 백성은 일반 백성부터 시작해서, 제사장, 레위 사람, 문지기 등등의 이스라엘의 모든 그룹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반성문에 인봉하지 않았던 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느헤미야 8장 1절 하반절 말씀에 보니까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 두 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 두 지파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 4만명에서 5만명 사이로 추산합니다. 약5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인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결단합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느헤미야 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이 5만 명을 변화시킵니다.
0.002%가 나머지 99.99%의 이스라엘을 변화시킵니다. 느헤미야는 다수를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너무나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5절 말씀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아멘!
믿는 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에끌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0.002%가 99.99%를 변화시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감동이 있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이는 비전이 있습니까? 가족들도 안될 거라고 하고, 주변의 동역자들도 안된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그 비전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다수를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느헤미야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도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느헤미야처럼 다수를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창조적 소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통해 나의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가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역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은 총 4,289명으로, 이는 전체 포로 귀환민의 약 1/10에 해당하는 숫자로 매우 많았습니다. 반면에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일할 레위 사람들의 숫자는 74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제사장의 숫자는 많은데 제사장을 도와 여러 수고스러운 일들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눈에 띄는 사역에는 사람들이 몰리지만 수고스러운 일에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게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똑같이 중요하게 보십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묵묵히 섬기고 있는 지체들에게 감사하며 내가 맡은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내가 마음속으로 기피하였던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할 사역은 무엇입니까?
자부심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 중에는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들은 솔로몬을 위해 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이 솔로몬을 섬겼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의 소유나 현재의 모습과 관련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합니다.
오늘의 만나
성도는 어떠한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권세를 누립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정작 하나님의 백성은 성 안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을 기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척박하고 황폐한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명처럼 지켜야 할 성전 중심의 삶을 포기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다수의 의견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흑암 속에서 느헤미야의 가슴은 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되어 스룹바벨이 인솔한 1차 포로귀환자들의 이름을 놓고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1차 포로귀환자 명단의 일부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이름을 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죠.
그들에게 성전 중심의 삶을 회복하길 강력하게 권면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강력한 부르짖음과 희생과 헌신은 잠든 이스라엘을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치, 도미노 하나가 넘어지자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도미노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회복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오늘의 말씀 뒤에 있는 느헤미야 8장 1절 상반절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본 구절에서 수문 앞 광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동편 문과 성벽의 수문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입니다.
성경기자는 신이 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모든 백성은 일반 백성부터 시작해서, 제사장, 레위 사람, 문지기 등등의 이스라엘의 모든 그룹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반성문에 인봉하지 않았던 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느헤미야 8장 1절 하반절 말씀에 보니까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 두 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 두 지파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 4만명에서 5만명 사이로 추산합니다. 약5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인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결단합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느헤미야 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이 5만 명을 변화시킵니다. 0.002%가 나머지 99.99%의 이스라엘을 변화시킵니다. 느헤미야는 다수를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하나 됨을 너무나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5절 말씀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아멘!
믿는 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에끌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0.002%가 99.99%를 변화시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감동이 있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이는 비전이 있습니까? 가족들도 안될 거라고 하고, 주변의 동역자들도 안된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그 비전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다수를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느헤미야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도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느헤미야처럼 다수를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창조적 소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통해 나의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가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요약)
오늘 본문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은 총 4,289명으로, 이는 전체 포로 귀환민의 약 1/10에 해당하는 숫자로 매우 많았습니다. 반면에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일할 레위 사람들의 숫자는 74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제사장의 숫자는 많은데 제사장을 도와 여러 수고스러운 일들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 중에는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들은 솔로몬을 위해 일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이 솔로몬을 섬겼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깨우침)
이스라엘 백성이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담당하고 예루살렘 성에서 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성도는 영적 전투를 잘 담당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거하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 사단의 방해가 많이 있더라도 실망치 말고 소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붙잡았던 포로로 잡혀 갖다가 다시 돌아온 이 보배로운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루살렘과 유다로 갈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세상의 즐거움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우리가 가야 할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잃지 않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아름답게 서게 하시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인 성전으로 지어져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