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관찰 - 12연기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생 노 병 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 노 병 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生)이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참다운 지혜로써 알게 되었다.
즉,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 그러면무엇이 있어 존재가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는가?
그렇다, 취(取)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인연하여 노 병 사와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오래 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이 무더기는 더하고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 병 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노 병 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 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노 병 사와 걱정 근심과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얼마 아니하여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멸하는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어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로 멸해 없어질 것이다."
- 雜阿含 佛經(잡아함 불경) -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땅(地)이라는 것은 만물의 본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모두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물(水)이라는 것은 땅의 피(血)요, 기(氣)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근육과 혈맥이 있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고 흐르게 해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함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물은 부드럽고 유약하여 깨끗하기때문에 인간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기를 좋아하니 인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깊은 물을 쳐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미로운 성질이다.
물을 됫박에 잴때 위를 고르는 막대기를 쓰지 않아도, 그것은 됫박에 차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바른 미덕이다.
물은 차이가 있을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균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위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물은 자기홀로 항상 밑으로 간다. 이것이 물의 겸양(낮춤)의 미덕이다.
낮춤(겸양)이라는 것이야말로 도가 깃드는 곳이요, 왕자의 그릇이다. 물은 진정코 항상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물의 무색이야말로 모든 색깔의 바탕이다. 물의 담백함이야말로 모든 맛의 중용이다. (진미(珍美)는 지시담(只是談)이요 지인(至人)은 지시상(只是常)이라 했다 즉 참된 맛은 담백한데 있고 기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지 평범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만물의 기준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는 담백한 체액이며 모든 시비와 득실의 바탕이다.
카페 / 一寸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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