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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 잠비아 [Zambia]
한국과 시차 -7시간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
공식명칭 : 잠비아공화국(Republic of Zambia)
인구 : 11,288,000
면적 : 752,612
수도 : 루사카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64. 10. 24
화폐단위 : 잠비아크와차(Zambian kwacha/K)
국가(國歌) : Stand and Sing of Zambia, Proud and Free
수도는 루사카이다. 남북 최장길이는 약 821km이고, 동서 최장길이는 1,385km이다. 서쪽은 앙골라, 북서쪽은 콩고 민주공화국, 북동쪽은 탄자니아, 동쪽은 말라위, 남동쪽은 모잠비크, 남쪽은 짐바브웨와 보츠와나, 남서쪽은 나미비아(남서아프리카)와 경계가 맞닿아 있다. 잠베지 강이 짐바브웨와의 국경을 이룬다. 면적 752,612㎢, 인구 10,812,000(2003 추계)
잠비아 국기
▶잠비아 빅토리아 폭포 관광
01월 11일 토요일 짐바브웨, 잠비아
01월 12일 일요일
SAROVA PANAFRIC HOTEL NAIROBI 또는 동급 (254 20 271 3333)
*잠비아 자연환경
주로 해발 1,000∼1,500m의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표는 구릉과 능선이 넓은 간격을 두고 간간이 나타날 뿐 거의 균일하다. 콩고 강과 잠베지 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북부의 무칭가 산맥에 이 나라의 최고봉(2,200m)이 있다. 그밖의 고지대는 북부의 음발라 고원(1,500∼1,800m)과 북동부의 무핑가 구릉지(2,100m)이다. 잠비아 내에 몇 개의 지구(地溝)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560km 길이의 루앙과 강 하곡이다. 북동부에 있는 방궤울루 소택지는 세계 최대의 내륙습지의 하나로 면적이 1만 400㎢에 달한다. 잠베지 강은 광대한 유역을 가진 제일의 강이지만 급류와 폭포들 때문에 수운에는 한계가 있으며, 최대의 폭포는 빅토리아 폭포이다. 므웨루 호, 방궤울루 호, 탕가니카 호 및 낙차가 220m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칼람보 폭포가 북부에 있으며, 인공호인 카리바 호(440㎢)는 남부에 있다.
기후는 세 계절이 뚜렷한 아적도기후(亞赤道氣候)로, 8∼10월은 매우 덥고 건조하며, 11∼4월은 따뜻하고 습하며, 5∼7월은 건조하고 서늘하다. 최난월(10월)의 평균 낮 최고기온은 남서부 발로발레의 39℃에서 북부 음발라의 31℃ 사이이며, 최한월(6월)은 남부 루사카의 26℃에서 음발라의 31℃ 사이이다. 비는 대부분 열대성 폭우로 내리는데, 남부 하곡들에서 600∼800㎜, 중부와 동부의 고원에서 800∼1,000㎜, 북동부의 산지에서 1,000∼1,380㎜의 강우량을 기록한다. 다년생의 키큰 풀과 키작은 나무들이 자라는 입목(立木) 사바나가 대부분의 지역을 덮고 있다. 남서부에는 값비싼 로디지아 티크나무의 숲들이 있고, 호수 연변지역에서는 파피루스가 무성하게 자란다. 초원에서는 가축(육우와 젖소)이 풀을 뜯지만, 코끼리·사향고양이류·하이에나·표범·얼룩말·기린·영양·비비·원숭이 등 야생동물도 서식한다. 여러 종류의 체체파리가 널리 퍼져 있다. 루사카에서 서쪽으로 240km의 거리에 있는 카푸에 국립공원은 잠비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수렵조수보호구역이다.
잠비아 중부에 있는 길이 110km, 너비 50km의 구리대(Copperbelt)는 1930년대에 개발된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광산지대이다. 사암과 셰일과 돌로마이트가 교대로 겹쳐 이루어진 이 구리대의 구리 매장량은 채광 가능한 세계의 구리 총매장량의 약 1/8에 달한다. 잠베지 강 하곡의 탄전과 카브웨(브로컨힐)의 납·아연 광상도 중요하다. 그밖의 광물로는 바나듐·망간·코발트·귀석(에메랄드와 자수정)·석회석 등이 있다.
*잠비아 국민
잠비아의 인종 구성은 산족(부시먼족)의 2, 3개 집단을 제외하고는 트와족(피그미족)을 포함하여 거의 전적으로 반투어족(語族)의 아프리카인으로 되어 있다. 반투어족의 언어 가운데 많이 쓰이는 것은 멤바어(語)·니안자어·바로체어·맘브웨어·툼부카어·스와힐리어 등이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주로 인도인)도 소수 거주하는데, 인도인은 대부분 이민이 자유로웠던 1945∼54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 공용어는 영어이며, 약 70개의 지방어와 방언이 있다. 벰바어·통가어·니안자어·로지어·카온데어·룬다어·루발레어는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된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데, 그것은 주로 출생률이 아주 높은 반면 국외 이민은 거의 없고 사망률이 비교적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아사망률이 세계 수준에 비하면 높지만 주위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낮다. 인구밀도와 성장률이 높은 지역들은 코퍼벨트 주와 중부 지역에 모여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취업과 주택 구입의 꿈을 안고 이 지역들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총인구의 약 4/10가 구리대 내의 철로에서 가까운 40km 길이의 단일지구에서 산다. 수도인 루사카는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다.
*잠비아 경제
잠비아의 경제는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병존하는 혼합경제체제로 나뉘어 있다. 구리의 생산과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커서, 1970년대 중반 세계 구리 가격이 떨어진 후 잠비아의 경제는 1980년대말까지 비틀거리며 재조정의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었으며, 농업과 공업 생산을 증대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미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중반 이래 마이너스 실질성장률을 기록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세계 수준에 비해 낮지만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평균 정도이다. 농업은 GNP의 약 1/8을 차지하지만 총노동력의 약 2/3가 종사하고 있다. 토지 보유는 관습에 따르는 것이 보통이며, 국유지에서 농사짓는 농부는 100년의 임대 혜택을 받는다. 화전이 흔하며, 자급 농업으로 옥수수·카사바·낙화생(땅콩)·수수를 주로 재배한다. 대규모의 상업적 농장들은 주로 유럽인이 관리하는데, 잠비아 농업생산의 절반을 차지한다. 북부와 동부 지방에서는 체체파리가 번성하여 소 사육에 제한을 받는다. 농부들은 전통적으로 부의 상징이 되어왔던 소를 도살하기를 꺼려 쇠고기와 우유의 생산이 국내 수요에도 미치지 못한다. 삼림은 대부분 화전이 일구어지고 난 뒤에 자란 식생(植生)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60년대에 대대적인 조림 사업이 시작되었다.
광업은 GNP의 약 1/8을 차지하며, 구리가 가장 중요한 채굴광물이다. 1969년 구리산업의 51%가 국유화되었다. 제조업은 GNP의 약 1/5을 점하지만 노동인구의 소수만이 이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규모 공장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국유화되어 있다. 제조품으로는 직물·화학비료·벽돌·폭약·자동차가 있다. 전력 생산은 거의 전적으로 수력발전에 의존하며, 카리바 댐, 빅토리아 폭포, 카푸에 강이 주된 전력 공급원이다. 구리가 수출품의 주종을 이루며, 주된 외화 획득원이다. 자본·소비재·연료가 주된 수입품이다. 잠비아의 무역수지는 수출고의 감소로 인해 1970년대 중반 이래 계속 악화되었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일본·영국·이탈리아·사우디아라비아·독일·프랑스·미국 등이며, 중국은 중요한 소비재 공급국이다.
*잠비아 정치와 사회
잠비아는 1당 체제의 독립공화국이다. 잠비아의 헌법(1973)에 따라 5년 임기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행정권이 부여된다. 입법기관은 국회이며, 대통령은 선출된 국회의원들 가운데서 총리를 포함한 내각의 각료들을 임명한다. 1964년 독립 이래 잠비아를 통치하고 있는 국민연합독립당(United National Independence Party/UNIP)이 이 나라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당이다. 내각은 이 정당의 중앙위원회에 종속되며, 누구든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이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최고법원과 상소법원은 대법원이며, 그 밑에 고등법원, 치안판사 재판소, 지방법원이 있다. 법은 영국의 코먼 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보건과 의료 시설로는 종합병원, 지방 보건소, 도시 진료소, 나병원이 있다. 영양실조·결핵·기생충병·나병 등의 질병은 모자보건교육의 개선을 위한 5세 미만의 소아진료소들, 예방접종과 면역, 영양교육에 의해 어느 정도 퇴치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육받은 의료진과 보건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급속히 확장되는 도시권에서는 일부 민간기업들이 종업원과 부양가족들에게 의료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출생시의 기대 수명은 남자 50세, 여자 53세가량으로 아프리카 전체 평균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의연기관(義捐機關)인 국민공제기금이 많은 고용인에게 퇴직수당을 지급하며, 많은 임의 기부단체가 정부를 도와 청소년 비행, 입양, 난민 관리와 노령자·극빈자·장애자 보호대책에 참여한다. 한편 급격한 도시화는 심한 주택문제를 야기했으며, 사회개발부는 도시와 농촌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잠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초등과 중등 수준의 교육 확대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잠비아대학교에는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교육·법률·사회사업·경영·행정·농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2개의 일간신문과 다수의 지방신문이 있으며, 언론은 상당히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방송은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라디오 방송에는 교육 프로그램과 농업기술 프로그램이 있으며,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은 전부 영어로 방영되며 주로 오락물이다.
*잠비아 문화
잠비아의 전통미술은 주로 목각, 도기제조, 바구니 세공, 담벼락 그림으로 되어 있다. 음악과 춤과 노래는 부족 의식에서 북, 활시위, 플루트, 뿔피리·파이프, 종, 딸랑이, 산사('아프리카 피아노')의 반주에 맞추어 행해진다. 도회의 공연에서는 전통음악이 서양악기에 맞추어 수정되는 경우가 흔하며, 리빙스턴 야외음악당에서는 지방의 무용수들이 정기적으로 공연을 갖는다. 리빙스턴에는 국립박물관이 있고, 구리대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아프리카 중부의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인공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잠비아 역사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100만∼200만 년에 현재의 잠비아 지역을 원시인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석기시대의 유적과 인공물 또한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약 2,000년 전에는 초기 철기시대의 종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현대의 통가족의 선조들은 약 2,000년 전에 이 지역에 당도했지만, 다른 현대 종족들은 17,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콩고 민주공화국과 앙골라로부터 이곳으로 들어왔다.
1798년 므웨루 호(湖) 부근에 포르투갈의 교역소가 설치된 데 이어 1835년에는 반투어족에 속하는 응고니족이 니아사 호와 루앙과 강이 분기하는 지점에 정착했으며, 수토족과 콜롤로족(마콜롤로족)은 잠베지 강 상류를 건너 바로첼란드를 점거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51년 잠베지 강 상류에 도달했고, 1855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으며, 이어 잠베지 강 유역 전체와 탕가니카 호 이남의 고원을 탐험했다. 세실 로즈와 영국령 남아프리카회사의 사자(使者)들은 1890년대에 잠비아의 추장들 대부분과 조약을 맺었다(→ 색인 : 대영제국). 영국령 남아프리카회사는 이 지역을 192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될 때까지 관리했다. 1911년에 이 영토는 북(北)로디지아로 알려졌으며, 당시 약 1,500명의 유럽인이 정착하고 있었다.
광업 개발은 20세기초에 시작되었다. 구리대가 개발되기 시작한 1924년까지 북로디지아에는 약 4,000명의 유럽인이 있었다. 영국 남아프리카회사는 1924∼ 60년에 채광권을 보유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935년 수도가 리빙스턴에서 루사카로 이전되었다. 20세기초에는 아프리카인이 정치권력구조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지만, 1930년 이후에는 사정이 바뀌기 시작하여 그들의 정권 참여가 확대되었다. 1950년대초에는 UNIP와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ANC)에 의해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2년까지는 유럽인의 인구가 약 4만 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그들은 대부분 코퍼벨트 주에 거주했다.
1953년 북로디지아는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니아살란드(말라위) 및 남로디지아와 연합하여 중앙 아프리카,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연방을 결성했다. 이 연방은 1963년에 해체되고 이듬해에 이 나라는 영연방 내의 잠비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획득했으며, UNIP가 집권당이 되고 케네스 카운다가 대통령이 되었다. 카운다는 1980년대까지 잠비아의 정치를 좌우하는 인물로 군림했다. 1969년에 그는 상공업의 국유화 정책에 착수했는데, 이 정책은 구리 산업으로 시작하여 토지 소유, 영화, 신문, 연초공장과 임대주택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또한 1973년 새 헌법으로 UNIP의 일당 지배를 굳건히 했으며, 로디지아의 다수결 원리와 더불어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독립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여 이 나라의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잠비아의 경제는 1965년 인접국 로디지아에 대한 제재가 시작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세계의 구리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구리 수출에 더욱 의존함으로써 1970년대 내내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옥수수와 그밖의 곡물생산도 1970, 1980년대초에 감소했으며, 그 감소의 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많은 농부가 이 나라를 떠난 후에 특히 커졌다. 1970년대 내내 잠비아는 앙골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게릴라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한 이들 나라에서의 독립과 다수결 원리가 1980년대초에 이 문제를 완화시켰다.
*잠비아와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90년 9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이듬해 3월 상주공관을 설치했으며, 두 나라의 관심사인 경제협력에 바탕을 둔 실질적인 관계에 주력해왔다. 1991년 대한 수입 261만 달러에 대한 수출 756만 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잠비아는 북한과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는데, 1969년 4월 수교에 이어 1970년 1월 상주공관을 개설한 이래 지금까지 통상협정(1975. 2)·무역협정(1980. 4)·방송협조협정(1982. 9) 등을 맺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