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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훈련소로서의 광야>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이런 광야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 부여 작업입니다.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 없이 40년간의 광야 체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이 걸어야 했던 광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황무지였습니다.
물이나 초목, 생물체라고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곳, 텅 빈 곳, 그저 척박한 땅과 높은 하늘만 끝도 없이 계속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 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 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 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각자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하나의 광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세상,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찌 그리도 숱한 위험요소들과 다양한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지 모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 하나하나가 또 다른 의미의 광야가 분명합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고통스런 광야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그들의 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 쇄신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건설하신 ‘훈련소’였습니다.
훈련병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된 훈련을 이수함으로써 하루하루 자신들의 신앙을 업그레이드시켜나갔으며
그 지긋지긋한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고통의 바다 같은 이 세상 광야를 걷습니다.
40년, 80년, 100년...모든 것이 결핍된 이 광야를 걸어가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반면교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불평불만을 계속하다가 그 길로 광야 생활을 접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태도는 다양한 현실의 결핍 속에서도 불평불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떠나 여행하다보면 불편한 것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불편함과 부족함을 당연시여기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아주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
이런 노력들이 바로 광야를 걷는 우리에게 중요한 태도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유혹을 허락하신 뜻>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첫째 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얘기이고,
둘째 독서 베드로 서간은 과거엔 노아가 물로 구원을 받았음을 얘기하면서
이제는 노아의 홍수보다 그 본형인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 1주일은 먼저 물의 세례를 얘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물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착각치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할 때
물을 섭취하면 살고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 다음 살리시고,
우리는 물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할 내가 있고 살아야 할 내가 있는데,
죽어야 할 나는 육의 나이고, 살아야 할 나는 영의 나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육적인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없는 나와 하느님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와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육의 영은 죽어야 하고,
육의 영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와 헌신의 영이 성령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뒤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복음과 달리
유혹을 받으셨다는 얘기만 할 뿐 유혹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고,
유혹을 받았다는 짧은 보고에 이어 복음 선포의 시작을 짧게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사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것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내보내시어 광야로 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악령과의 대면은 성령께서 원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는 자주 대면하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은 피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고, 대결하여 이겼을 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피하다가는 우리는 교회 안이나 수도원에 갇힐 것이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악령의 유혹과 시련은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레 겁을 먹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성령의 인도를 뿌리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 (디모1,7)음을 믿으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신앙생활을 그만두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6개월 이상의 예비자 교리까지도 마쳤는데,
또한 그 동안 계속해서 미사에 참석하는 노력을 보이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원의가 그렇게 강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빠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보다 가장 큰 이유는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 존재에 대한 확실성도 없기에 약간의 변화라도 느낀다면 열심히 다니겠지만,
열심히 다니나 그렇지 않으나 다른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가톨릭 전례의 엄숙함이 하나의 구속으로 다가오고,
일주일에 한 번 미사 나가는 그 시간이 지루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연히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래전에 세례 받았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왜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열심히 다니려고 했는데, 세례를 받자마자 안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쉬겠다는 마음으로 성당을 안 다니자 그제야 좋지 않은 일이 멈춰서
그 후로는 겁이 나서 성당에 못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
“세례 받으면 은총을 많이 받는다면서요? 저는 벌만 받아서 못 나가겠어요.”
글쎄요.
하느님의 뜻을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잘못 생각하는 하나가 있습니다.
세례 받으면 분명히 은총을 받지만,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등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반드시 은총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세상의 성공만을 원하는 단편적인 면만을 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 곧바로 사십 일 동안 홀로 단식하셨습니다.
사실 세례라는 것은 성령을 받아 영적으로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이제는 광야로 나가실 것이 아니라, 곧바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나 광장으로 가서 당신의 일인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뒤에 스스로 광야로 선택해서 가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늘 깨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례를 받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은총으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면 더욱 더 성령의 열매를 자신 안에서 맺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따를 때,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늘 나라의 가치로 중요하고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유혹은 은총의 시작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덩굴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년의 박해 속에 만 여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신부가 된 지 10여 년 만에 사회복지 공부를 했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대학원에 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충남 조치원역에 새벽0시10분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 앞을 나오기가 무섭게 아가씨들이 달라붙어 말합니다.
“오빠, 따뜻한 방 있어요, 쉬고 가세요!”
그러면 제가 “내 방도 따뜻한데요!”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로만 칼라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들은 여전히 달라붙었어요.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한번 가고 싶었을까요?
여러분 좋은 대로 생각하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따듯한 방 있어요!”하고 아가씨가 달라붙는다면 한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니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내에게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는 사람이야 어디다 한 눈을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악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내가 약해 졌을 때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교묘하게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데
“여자가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다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다 주었다.” (창세 3,6)
고 했습니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게 문제 입니다.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밟고 올라서게 하는 죄로 이끕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기심, 미움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식욕이 때로는 탐식하게 만들고 성적인 욕망이 음란의 죄로 이끌고, 휴식에 대한 욕망이 게으름에로 젖어들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
“달콤한 말로 꾀고 꿀맛 같은 말로 유혹하자 젊은이가 따라 나서는데
마치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와도 같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사슴같이 제 발로 창애에 걸려드는 새 꼴이 되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결국 간에 화살이 박히고야 말리라.” (잠언 7,21-23)
하고 말합니다.
결국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입니다.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
(이사 47,10).
둘째로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1역대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 마디도 숨길 수 없다.” (집회 42,20).
잠언서에는
“사람의 길은 주님 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 (잠언 5,2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야고 1,14-15).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가정이 파탄되기도 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속이고, 뇌물 받고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뇌물 받아 망한 사람 많지만 요즘 대통령 주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국회의장, 국회의원, 경찰청장 대기업 사장 등 모든 명예를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술과 도박, 권세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분도 많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카드 빚 쓰다가 감당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 6,11-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마태 26,40-41)
한탄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 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에페 6,10-17)
하고 권고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히브 2,18)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유혹은 더없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 앞에서도 분명히 대답하십시오.
“좋은 일에는 ‘예’, 나쁜 일에는 ‘아니오’. 하느님의 뜻에는 ‘예’, 인간의 뜻에는 당연히 ‘아니오’”,
대답은 이렇게 하시면서도 속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열차를 타고 의자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할머니께서 앉으셨답니다.
할머니께서 피곤하신지 꼬박 꼬박 졸다가 젊은이에게 기대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복이 많은지 예쁜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 겁니다.
여인도 피곤했는지 졸더니만 급기야 젊은이 어깨에 기대어 자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혹 우리의 마음이 아닌지요?
세례를 받은 후 더욱더 심하게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
왜 나에게는 이런 유혹이, 시련이 오느냐 투덜대지 말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고 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루카복음 4,1-1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1) 돌더러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악마의 경제적 유혹 앞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셨습니다.
2) 내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정치적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떠받쳐 주리라고 하며 자신을 위해 기적을 남용하라는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시며 유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유혹을 극복할 수 있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닷가에 가보면 벼랑 끝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가지를 튼튼하게 뻗었습니다.
우리도 유혹과 시련의 시험을 통해 더 강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 당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신 것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내적 준비'를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행과 수련을 하신 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리시자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셨는데(요한 2,4),
바로 그 '때'를 기다리시면서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광야에서의 단식기도도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예수님처럼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준비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자마자 바로 활동을 시작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사도 9장),
갈라티아서를 보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뒤에 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삼 년 동안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 1,17-18).
아마도 아라비아 사막에서 고행과 기도를 하면서
사도로서 활동할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단식기도와 비슷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부활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사순 시기를 지내는데,
부활절 준비만을 위한 시기는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시기입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잘하고 있으니 따로 사순시기가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이 정도면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회개했습니다.
깨끗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깨끗해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광야'는 보통 시련과 고난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40'이라는 숫자도 보통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련과 고난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과 고난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더 잘 깨닫고, 더 잘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내리는지를 잘 알게 됩니다.
사람의 인생 자체를 하나의 사순 시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생'을 귀양살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느님 나라에서 떨어져 있다는 점만 생각한다면 귀양살이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은 '벌'을 받는 귀양살이는 아닙니다.
인생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성 여행'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힘든 여행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도 사탄이 유혹을 했다는 것은,
즉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사탄은 언제나 어디서나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고, 사탄이 유혹하지 못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유혹하고, 우리가 성전에 있을 때에도 유혹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유혹도 더 심해집니다.
기도를 시작하려고만 하면 뭔가 급한 일이 생기거나,
기도하는 동안에 자꾸만 잡념이 생기거나...
성경을 읽으려고만 하면 졸음이 쏟아지거나...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그런 일들도 사탄의 유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에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는 것.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물리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유혹에 빠질 때, 그때부터 죄가 시작됩니다.
많은 경우에 유혹이 유혹인 줄도 모르고 유혹에 빠집니다.
바로 그 점이 유혹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올 때 그게 유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 무척 중요한데,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마태 26,41).
유혹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도 '기도'뿐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그곳에 사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마르 1,13).
이것은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주님께서는 그 유혹을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탄이 우리 곁에 있을 때, 천사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천사는 그 유혹을 물리치려는 우리의 노력을 도와줍니다.
그 도움을 제대로 받는 방법도 바로 '기도'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너와 나의 광야>
인생의 축소판인 사순절에 우리는 유혹의 광야에서 부활이라는 약속된 땅으로 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온 인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광야로 내보내시어 유혹을 받게 하셨다(1,12).
이렇듯 성령께서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주신다.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으로부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하는 기쁜 소식이 울려 나온다.
광야는 식물이 거의 자라지 못하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며, 사탄의 영토요 들짐승들의 땅이다.
허기짐과 목마름, 불편함과 적막함, 생명의 위협과 약육강식이 거친 광야의 상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상황 한복판으로 들어가셨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 내 마음과 세속의 정신에 물든 자신이 광야요,
빈곤과 불의와 인간적 비참함과 집단적 이기주의가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 바로 광야이다.
그래서 광야는 하느님께로 되돌아가 참 나를 발견해야 하는 자리이자,
인간 존엄을 위한 사회 정의와 사랑의 연대를 살아내야 할 선택과 결단에 직면하는 곳이다.
이렇듯 광야는 유혹의 장소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장소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이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유혹, 곧 이집트 병사들에게 쫓김, 목마름, 배고픔의 유혹과 예수님의 유혹은 나의 유혹이요 이 사회의 유혹이다.
재물, 명예, 권력으로 표현되는 이 유혹은 결국 왜곡된 힘의 덩어리이다.
마귀는 교만, 소유욕과 명예욕, 식욕과 성욕, 집단적 이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마귀는 '나의 의지'라는 금송아지를 받들어 모시라고 부추긴다.
마귀는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여자나 남자로, 때로는 권력이나 육신의 안일함 등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의 끈질김과 교활함을 간파하였던 성 프란치스코는
“감춰진 유혹이나 드러난 유혹, 갑작스런 유혹이나 끈질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 묵상, 9절)
라고 기도하였다.
내 인생의 광야,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받는 세상의 광야에서 찾아드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 존재의 중심을 하느님께로 이동해야 한다.
이 세상의 가치들과 사물들과 사고방식들을 하느님 위에 두려는 일체의 성향과 행위가 곧 죄이다.
회개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며,
복음적 가치를 내 삶의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며, 하느님의 힘에 철저히 의탁하도록 하자.
우리는 자기 애착과 편의주의 때문에 삶의 광야에서 은총을 체험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욕과 오해와 멸시와 매 맞으심과 죽으심이라는 삶 전체를 통째로 바친 희생에 뒤따른 것이었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들은 한마디로 하느님을 인간의 가치나 질서 아래 두려는 왜곡된 인간 삶의 질서 의식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자기 의지를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며 그는 참으로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된다.
내가 가난한 영을 지닐 때
비로소 광야에서 참 나를 만나고 정의와 사랑이 꽃피는 세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하느님께 친교의 예물을 봉헌하시자 광야가 성전으로 바뀐다.
이처럼 내 인생은 유혹이 많은 광야이지만 성전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는 점에 주목하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을 지니려는 노력이며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겸손한 자세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결의를 받아들여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깨어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단식 또한 온전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것으로서 온몸으로 기도하는 길이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이다.
자선으로 구체화하지 않는 단식이나 기도는 거짓일 뿐이다.
나아가 우리는 세상의 광야인 사회적 불의와 무관심,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온갖 차별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슴 절절한 참회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 경제 정의와 분배 정의의 실종,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자본의 권력화와 우상화, 사회 갈등 속에 삶의 자리를 잃고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정치권력에 맞서는 연대 없는 회개는 거짓이다.
나아가 나의 참회와 사랑을 통해 한국 사회의 광야가 사랑 가득하고 정의롭고 인간다운 은총의 바다가 되도록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정신적 사치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그리스도의 전사(戰士) - 자기와의 싸움>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전사'입니다.
전역이 없는 죽어야 제대인 평생 현역의 전사입니다.
사고사, 객사, 병사가 아닌 싸우다 죽어야 즉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입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입니다.
지난 설날 83세로 선종하신 민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죽음도 제가 보기엔 거룩한 전사(戰死)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지난 월요일 돌아가시기 3일 전,
편치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 들려 30여명의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셨다 합니다.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그 사명에 충실하셨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영적 전쟁의 요체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자기입니다.
하여 날마다 주님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니고 따르라 하십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새로웠습니다.
마치 내가 내 껍질 안에 들어가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습니다.
누가 나를 부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든 자기라는 틀 속에 들어가 스스로 부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영적 전쟁의 핵심입니다.
누가 자유롭지 않게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에 들어가 안주하기에 자초한 부자유한 삶입니다.
'자기로부터의 탈출'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 감옥 안에 갇혀 수인(囚人)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자기로부터 탈출했는가 하면 다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영적 전쟁 상황을 파악할 때 영적 전쟁에 승리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 죽어야 끝나는 전쟁입니다.
첫째, 광야가 우리의 전장(戰場)입니다.
삶은 광야입니다.
광야 인생입니다.
어디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광야가 삶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수도원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때로는 보이는 것이 없는 막막한 광야 인생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 전쟁 상황을 상징합니다.
복음의 서두가 의미심장합니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에 내보셨다.'
예수님을 광야에 내보내신 성령은 우리 모두 인생 광야로 내보셨습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광야 시기입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셨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기에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진 않으셨습니다.
바로 성령의 도움이심을 깨닫습니다.
둘째, 광야가 낙원(樂園)입니다.
여기 사탄의 유혹이 있는 광야가 바로 낙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 치열해 보이는 여기 삶의 자리가 바로 낙원입니다.
사막같이 보이는 수도원이 낙원인 이치와 똑같습니다.
바로 복음의 다음 대목이 광야가 낙원임을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를 통해 회복되는 낙원이요, 광야와 낙원은 삶의 양면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바로 피조물과 공존의 평화를 누리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혹하는 사탄만 있는 게 아니라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이 함께 계시며 천사들이 우리를 시중들고 있습니다.
마치 평화로운 영적 전쟁터 같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광야와 낙원이 역설적 일치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그러니 영적 전쟁이라 하여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셋째, 참 좋은 계약의 표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1독서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에 대한 상황 묘사가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 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이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하늘과 땅을 잇는 하늘길 같은 무지개가 계약의 표징, 구원의 표징입니다.
무지개에 대한 묘사 중 이보다 아름답고 신비한, 심오한 묘사는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무지개가 계약의 표징이라면
신약의 완전한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늘 하늘 높이 솟아있는 성전의 십자가, 제대 중앙 뒷면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보다 더 좋은 계약의 표징은 없습니다.
간혹 교회 큰 행사시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난 사진을 보여주는데,
바로 무지개를 대체한 계약의 표징,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입증하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바로 오늘 2독서 베드로 1서가 이런 진리를 확증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르치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낙원이 완전히 실현된 장면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런 낙원의 예표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영적 전쟁의 승리에 새로운 계약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순시기는 인생 광야에서의 영적 전쟁이라는 우리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사탄의 유혹 중에도
성령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은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시며
계약의 표징인 십자가는 늘 우리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힘차게 살아갑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적 전쟁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끝으로 기도와 같은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
주님,
제 몸이 어디 있나요.
제 몸이자 당신 몸이 아니던가요.
당신의 손이,
당신의 귀가,
당신의 다리가 아니던가요.
당신의 뜻이라면
제몸이자 당신 몸의 불편함을
고쳐 주십시오.
제몸은 당신 몸이니까요.
-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태초에 창조의 땅 에덴에서는 햇빛이 전등이었고 구름은 승용차였다.
흙은 살갗이었고 뼈는 바위였다.
강은 핏줄이었고 나무는 피부에 난 솜털이었다.
숲은 꽃과 열매가 가득한 슈퍼마켓이자 한약방이었다.
늦게야 아담이 태어났는데 의식주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땀 흘리는 수고도 없었고 죽음도 두려움도 없었다.
보고 들으면 그대로여서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과 동식물과 사람은 하느님의 가족이었고, ‘평화’와 ‘행복’은 동사(動詞)였다.
하느님께서도 할 일이 없으시어 자연과 사람은 생성, 변화, 소멸의 운동이 없었다.
다만 사악한 뱀이 속삭이는 유혹의 소리를 아담이 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태양은 빛을 잃고 강은 멈추었으며 사자에게는 이빨이 생겨났다.
사람에게는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노고가 시작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꽃이 다시 피게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감언이설로 아담을 유혹했던 사탄이 거기까지 따라왔지만 하느님의 참사람이 가진 말씀에 이겨 낼 수 없었다.
메마른 광야에 다시 강이 흐르고, 사자들은 어린양과 놀며,
어린이가 독사로 장난치고, 천사들은 호위 무사를 맡았다.
평화와 행복은 다시 ‘동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창조의 원형을 복구하신다.
창조성이란 자기다움이다.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자기다움의 회복을 하기 위한 수행의 시기다.
인간다움, 교회다움, 신앙인다움, 부모다움, 자식다움, 국민다움, 대통령다움 …….
나는 누구이고 나를 만든 분은 누구신가?
사람은 자신과 하느님을 알기 위해 종종 광야로 나가 자신을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사순 시기의 수행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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