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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가
인간의 삶이란, 지식을 증가시키고 경험의 폭을 늘려 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더 자유로워졌는가? 더 유연해졌는가? 눈매가 더 그윽해졌는가? 상상력과 창의성도 더불어 늘어났는가? 이런 질문들에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지식과 경험이란 게 우리에게 무엇일까? 지식을 쌓은 것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 지식을 손 안에 놓고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의구심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 닿아 있다.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우리는 ‘개념’이라 부른다. 개념(槪念)의 ‘개(槪)’라는 글자를 보자. 쌀가게에서 쌀 한 되를 살 때, 우선 됫박에 쌀을 수북이 담는다. 그리고 정확히 한 되가 되도록 싹 깎아 낼 때 쓰는 도구를 평미레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개(槪)’라고 쓴다. 곧, 공통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여분의 것이나 사적인 것 또는 특수한 것은 제외하고, 공통의 것이나 일반적인 것만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다. 따라서 개념은 출발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식은 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어떤 특정 유형을 잠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개념’에 굴복 당한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일’ 대신에 ‘바람직한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 대신에 ‘해야 할 일’을, 내가 ‘좋아하는 일’ 대신에 ‘좋은 일’을 하는 데 애쓴다. 자기 욕망을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과 이념에 이끌리는 사람은 사명감에 쉽게 포박 당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겠다는 따위가 그렇다. 그 무거운 사명은 누가 준 것인가? 이념과 신념이 만든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여러분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인문적 통찰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 사태나 사건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위에다 올려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 값진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냉철한 이성, 체계에 대한 습득, 본질에 대한 숭배, 정치적 계산, 이념에 대한 철저한 수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최진석 교수는 묻는다. “지금,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까?”
👨🏫 저자 소개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다. 건명원(建明苑)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작은 섬 장병도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을 연구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硏究)』(巴蜀書社, 2010)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가(道家) 철학자인 그는 원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고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독일철학을 공부할 때는 미간을 찌푸리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책을 읽곤 했는데 우연히 책꽂이에서 발견한 장자를 읽으면서 재미에 푹 빠져 편안하게 즐겼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면 재미있고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란 생각으로 동양철학으로 바꿨다. 게다가 유가(儒家)보다는 도가(道家) 책을 읽을 때 더 영감이 떠오르고 짜릿짜릿했다. 저자가 노장 철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유다. 저자는 우리에게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이고 욕망에 집중하며 살라고 권한다.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가 주체적이고 욕망하는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은 책으로는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2021)』 『나 홀로 읽는 도덕경(2021)』 『탁월한 사유의 시선(2018)』 『경계에 흐르다(2017)』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2015)』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2001)』 등이 있고, 『장자철학(2021)』 『노장신론(1997)』 등을 해설하고 우리말로 옮겼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은 『聞老子之聲, 聽道德經解』(齊魯書社, 2013)으로 중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 목차
인문의 숲 속을 산책하는 순서
인문의 숲 속으로 들어가며 ― 저기, 사람이 내게 걸어 들어오네
첫 번째 인문의 숲 ― 인문적 통찰을 통한 독립적 주체되기
인문학, 넌 누구냐?
스티브 잡스와 소크라테스
현재를 통찰하는 인문의 더듬이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라
내가 동양학을 공부하는 까닭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
이념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그 무거운 사명은 누가 주었을까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두 번째 인문의 숲 ―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마주 서기
우리는 더 행복하고 유연해지고 있는가
요즘 애들은 언제나 버릇없다
인문학은 버릇없어지는 것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고유명사로 돌아오라
세계와 개념, 동사와 명사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
멋대로 해야 잘할 수 있다
노자, 현대를 만나는 길
지식은 사건이 남긴 똥이다
인간의 무늬를 대면하라
세 번째 인문의 숲 ― 명사에서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덕’이란 무엇인가
툭 튀어나오는 마음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힘
멘토를 죽여라
구체적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릇이나 씻어라
동사 속에서 세계와 호흡하라
나를 장례 지내기, 황홀한 삶의 시작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일’을 보라
네 번째 인문의 숲 ―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철학의 시작, 낯설게 하기
타조를 잡는 방법
내 털 한 올이 천하의 이익보다 소중하다
대답만 잘하는 인간은 바보다
자기를 만나는 법
욕망, 장르를 만드는 힘
장르는 나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온다
욕망을 욕망하라
명사로는 계란 하나도 깰 수 없다
이성에서 욕망으로, 보편에서 개별로 회귀하라
인문의 숲 속에 머물며 ― 욕망으로 새기는 인간의 무늬
🖋 출판사 서평
소크라테스와 한나절만 보낼 수 있다면…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손 안에 세계를 쥐어 주었다. 그의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세계인이 열광하고 긴장했던 까닭이다. 즉 그는 세기(century)를 다르게 했기에 신화가 되었다. “소크라테스하고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주겠다.” 잡스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언뜻 생경하게 들릴지 몰라도 잡스의 생각은 분명했다.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하고 한 끼 식사를 하면 그 밥값으로 지금 가진 재산을 다 쓸지언정 더 큰 돈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잡스가 이룬 성공이 아니다. “애플의 기술은 인문학과 결합되어 우리의 심장이 노래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라는 또 다른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 잡스는 ‘인문학’을 ‘생존’과 연관시키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人文, 인간이 그리는 무늬
문(文)이란 원래 무늬란 뜻이다. 따라서 인문(人文)이란, 인간의 무늬를 말한다. ‘인간의 결’ 또는 ‘인간의 동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곧 인문학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와 인간의 동선을 알기 위함이다. 과거는 ‘인간의 동선’ 뒤쪽이고 미래는 앞쪽 방향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 ‘인간의 무늬’를 가늠하지 않고 가능할까?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교수에 따르면, 인문학은 고매한 이론이나 고급한 교양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구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인문학 열풍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도 대학 안팎의 연구자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이 움직이는 흐름을 읽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성공할 수 있음을 기업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앞다투어 말하고 있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최진석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일지 꿈꿔 보는 능력이다. 상상은 망상과 다르다. 망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과 아무런 관계없이 멋대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또한, 창의성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이 어디로 갈지 꿈꿔 보고 또 꿈꿔 보다가 그 나아가는 방향 바로 앞에 점을 찍고 “우뚝!” 서 보는 일이다.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인문의 향기를 피하면 안 된다. 상상력과 창의성을 최대의 핵심 문제로 생각하는 기업에서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인문학 없이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없기 때문이다. 인문적 통찰의 힘, 그것은 바로 생존의 무기이다.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라
우리가 어떤 사태나 사건을 만났을 때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판단을 한다면, 우리는 그저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일 뿐이다. 인문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얘기다.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이 세계가 움직이면서 그려 내는 도도한 흐름과 방향, 그 큰 흐름을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작은 일이나 현상들을 최진석 교수는 ‘조짐’이라 말한다. 이 조짐을 통해서 우리는 밑바닥에서 도도하게 작동하고 있는 큰 흐름에 올라탈 수 있다. 따라서 조짐은 문명의 방향이나 사태의 진행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조짐으로 읽힐 만한 어떤 현상을 보고 단지 ‘좋다’라거나 ‘나쁘다’는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은 문명의 큰 흐름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시켜 버리고, 인식을 바로 거기에서 정지시켜 버린다. 인문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좋다’라거나 ‘나쁘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인문적 통찰의 힘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고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사람은
“봄이 왔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흔히들 우리는 “봄이 왔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봄’이 존재할까? ‘봄’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개념일 뿐이다. 땅이 부드러워지고, 새싹이 돋고, 잎이 펼쳐지고, 처녀들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쯤 어딘가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봄’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봄이 왔다!”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에서 감탄의 언사가 될 수 없다. 익숙한 개념을 그저 답습하여 대충 말해 놓고, 무슨 큰 느낌이나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기만이다. 진정으로 봄을 느끼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대충 말하지 않는다. ‘봄’이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는다. 대신 바투 다가선 봄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사건들을 접촉한다. 얼음이 풀리는 현장으로 달려가 손을 대보고, 새싹이 돋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의 온기를 살갗이나 코로 직접 느낀다.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봄’을 맞이한다.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 봄을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과, 봄에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예민한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성숙과 인격의 깊이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직접 새싹을 보지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론을 보지 않아요. 문제를 봐요.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성적 대답을 하지 않아요. 욕망에 기초한 질문을 해요.
문제에 집중하고, 일상에 집중하고, 구체에 집중하는, 이런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들은 유연해요. 욕망이 활동하기 때문이에요.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가
인간의 삶이란, 지식을 증가시키고 경험의 폭을 늘려 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더 자유로워졌는가? 더 유연해졌는가? 눈매가 더 그윽해졌는가? 상상력과 창의성도 더불어 늘어났는가? 이런 질문들에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지식과 경험이란 게 우리에게 무엇일까? 지식을 쌓은 것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 지식을 손 안에 놓고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의구심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 닿아 있다.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우리는 ‘개념’이라 부른다. 개념(槪念)의 ‘개(槪)’라는 글자를 보자. 쌀가게에서 쌀 한 되를 살 때, 우선 됫박에 쌀을 수북이 담는다. 그리고 정확히 한 되가 되도록 싹 깎아 낼 때 쓰는 도구를 평미레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개(槪)’라고 쓴다. 곧, 공통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여분의 것이나 사적인 것 또는 특수한 것은 제외하고, 공통의 것이나 일반적인 것만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다. 따라서 개념은 출발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식은 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어떤 특정 유형을 잠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개념’에 굴복 당한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일’ 대신에 ‘바람직한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 대신에 ‘해야 할 일’을, 내가 ‘좋아하는 일’ 대신에 ‘좋은 일’을 하는 데 애쓴다. 자기 욕망을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과 이념에 이끌리는 사람은 사명감에 쉽게 포박 당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겠다는 따위가 그렇다. 그 무거운 사명은 누가 준 것인가? 이념과 신념이 만든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여러분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인문적 통찰은 우리 앞에 등장하는 사태나 사건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위에다 올려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 값진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냉철한 이성, 체계에 대한 습득, 본질에 대한 숭배, 정치적 계산, 이념에 대한 철저한 수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최진석 교수는 묻는다. “지금, 자신만의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