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0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외암민속마을
아산시 송악면에는 외암민속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5백여 년 전에는 강씨(姜氏)와 목씨(睦氏)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 일가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안 이씨의 4백여 년에 이르는 세거지가 되었다. 그 뒤 이정의 6대손이자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이 설화산(雪華山)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짓고서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고 고쳤다. 그러나 한자만 외암(外巖)으로 바뀌었다.
외암마을 전경 © 유철상이곳은 설화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마을 앞으로 작은 내가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설화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이 마을은 맹씨 행단이 북쪽에 자리한 것과 달리 남서쪽에 위치한다.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지형으로 주택은 거의 서남향 또는 남향이며, 마을 앞으로 작은 내가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마을 입지가 좋고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 북서 계절풍을 막아주는 등 지형적 이점이 있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2000년 1월 7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외암민속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아산 외암리 참판댁이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영암댁ㆍ송화댁ㆍ외암종가댁ㆍ참봉댁 등의 반가와 그 주변의 초가집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어 전통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영암댁은 회화나무와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아름답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문화유산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외암민속마을의 전체 가구 수는 모두 80여 가구로, 20채의 기와집과 30채쯤의 초가집이 고루 뒤섞여 있다.
외암민속마을 © 유철상아산시 송악면에 있는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의 세거지이다.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지형으로 주택은 거의 서남향 또는 남향이다.
한편, 외암리 남쪽의 강당리(講堂里)는 영조 때의 학자인 이간과 윤혼이 관선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순조 때 외암서원(巍岩書院)이라 하고 이간과 윤혼을 배향하였다가 고종 때 헐리고 지금은 강당사가 들어섰으므로 강당리가 되었다. 그 아래에 용이 하늘로 오르다가 떨어져서 물이 많을 때는 실이 한 타래나 들어간다는 용추계곡이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또한 강당리에는 오형제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예산군 대술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전부 다섯개의 고개가 있는데 두 개는 온양 쪽에, 두 개는 예산 쪽에, 나머지 한 개의 고개는 가운데에 있다. 가장 높은 가운데 고개에는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 온양장이 선 날 밤, 이 고개에서 여러 사람이 죽는 희대의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한 사람은 온양 쪽 첫 고개에서, 또 한 사람은 예산 쪽 첫 고개에서 모두 칼을 맞아 죽었고, 두 사람은 가운데 고개에서 아무 상처 없이 죽었으며, 다만 술병과 돈 꾸러미만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온양현감은 피의자로 예산 쪽 첫 고개 밑 새술막에 살면서 혼자 술장사를 하는 문 첨지를 유일한 피의자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선량한데다 범행을 일체 부인하기 때문에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 같아 온양읍은 물론이고, 인근의 여러 기관장들을 괴롭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문 첨지의 집에 더부살이하던 단양의 김 도령이라는 자가 그 실마리를 풀었다. 세 도둑놈이 온양장에서 돈 가진 양민 한 사람을 꼬드겨 데려오다가 온양 첫 고개에서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 세 놈이 동행하여 오다가 이 고개에서 한 사람을 시켜 새술막에 가서 술을 사가지고 오게 한 후 두 놈이 합세하여 술을 사오는 놈을 예산 첫 고개에서 죽이고, 그 술을 가지고 이 고개에서 마셨는데, 그 술은 술을 사러 간 놈이 욕심이 나서 술에다 독약을 탄 것이었다. 사건이 그렇게 해결된 뒤 이 사건을 오형제고개 살인 사건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