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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자손의 조사 결과
느 7:61-73
61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62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가 육백사십이 명이요
63 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불린 자라
64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5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66 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7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 있었고
68 말이 칠백삼십육 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오 마리요
69 낙타가 사백삼십오 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였느니라
70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71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72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73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1차 귀환자들의 명단 마지막 부분에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이방의 요소를 제거하고 아울러 이스라엘이 성전 중심과 예배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차 귀환자(61-69)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불릴 수 있는 1차 귀환자는 총 42,360명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혈통별로 기록 명단을 확인하였고 이들 중에는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어느 혈통에 속해 있는지 알려 주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매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계보가 불확실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회중에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자들 가운데는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잇단, 임멜에서 올라온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곳이 유대인들의 정착지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이들은 안타깝게도 조상의 가문과 계보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운데는 제사장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63). 특별히 예루살렘의 성전 제의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제사장 직무는 정지되었습니다(64).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성물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귀환 공동체가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포로 이후 공동체 안에 남아 있던 이방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드린 자들(70-73)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포로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아야 할 집도 지어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찾아야 했습니다. 또한 돌아온 자들에게는 성전 건축이라는 숙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경비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총독은 금과 은과 대접과 제사장의 옷을 드렸습니다. 금, 은, 제사장의 의복을 드린 백성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예물은 성전 건축과 제사 의식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적용: 고향으로 돌아온 모든 자들이 예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이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을 통해 당신도 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수많은 선택과 기회 속에서 모험하지 않고 자신을 헌신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적당히 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인지라 최선을 고집해야 합니다. 기도만하고 헌신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 품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헌신은 인생을 보석같이 만들어줍니다.
< 설 교 >
하나님 나라 명단에 기록된 이름과 헌신
느 7:61-73 / 생명의 삶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한지 알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사장 계보에서 이름을 찾지 못한 자들은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합니다. 온 회중의 수가 42,360명이고, 총독과 족장들과 백성이 금은과 대접과 제사장 옷을 곳간에 드렸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자기들 성읍에 거주했습니다.
1. 엄격한 신분 확인 (61~65절)
성도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누립니다. 느헤미야는 성안에서 살아갈 사람들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제사장의 신분을 철저히 확인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확실히 구분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한 종족과 가문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배제되었습니다. 제사장의 경우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이는 제사장 중 바르실래 자손이 직분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갈 때 다윗과 일행을 도왔던 부유한 사람입니다. 어떤 제사장이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한 후 재산과 기업을 얻고자 자신의 제사장 계보를 포기하고 처가 쪽의 족보를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맡은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 묵상 질문
느헤미야는 계보가 불확실한 제사장 자손을 어떻게 하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직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감당하고 있나요?
2. 자발적 헌신 (66~73절)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드리는 사람을 통해 세워져 갑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의 수와 재산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족장과 총독과 백성은 성전 재건의 역사를 위해 기꺼이 예물을 바치며 헌신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들이 바친 예물은 조목조목 일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그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기록됩니다. 그 기록에 따라서 성도의 영원한 보상이 결정될 것입니다. 스룹바벨 시대에 성전 재건의 역사는 백성의 온전한 헌신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하는 사람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 묵상 질문
성전 재건을 위해 족장과 총독, 백성은 무엇을 했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 이름도 불러 주시니 그 은혜에 감격함으로 찬양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백성이 되어 하루하루가 찬양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소서.
예루살렘 성, 아버지의 품속
느 7:61-73 /
(시작기도)
주님, 어제는 성경 암송과 고사 대회를 치루었습니다.
해마다 하는 것이지만 ‘말씀 속으로’라는 교회 표어와 함께 더욱 의미 있는 행사라 기뻤습니다.
형식의 그릇에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든든한 교회가 되어 사단의 어떤 까불림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맑은 정신과 눈을 주옵소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한 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의 묵상)
61~65절 : 느헤미야는 신분이 검증되지 아니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별된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귀환자 중 조상을 알 수 없는 사람들, 그 조상들의 복잡한 결혼관계로 혈족과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 제사장의 후손들임을 입증치 못한 사람들 가운데 제사장의 권한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제사장의 후손임을 족보로 증명해야 했다.
제사장 직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곧 아론의 후손만이 그 직무가 가능하기 때문에 족보가 분명치 않은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족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믿음의 공동체에 섞여 살았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별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족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란 오늘날 믿음의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들을 의미할까?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한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학식이 있다는 이유로, 돈이 있다는 이유로, 집안이 좋다(세속적으로 짱짱하다)는 이유로, 단지 즉흥적 열심이 있다는 이유로 교회의 중직과 사역을 맡으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확실한 신앙고백, 하나님을 알아가는 훈련(말씀과 기도의 훈련)이 우선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할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의 족보이다.
자신이 어떠한 영적 상태의 존재인지를 보여줄 족보이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이 써 주시는 족보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직해야 할 것이다.
66~73절 : 성벽 재건에 드린 헌물
느헤미야는 회중의 합계와 노비와 노래하는 사람들(여흥을 위한 가수들이라 한다),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또 성벽 재건 사역을 위하여 헌물을 바친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족장들의 모범적인 헌물이 눈에 뜨인다.
족장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물질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모든 백성의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만큼 미치지는 못하지만 백성들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범을 보여 할 자들의 모범은 따르는 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족장들은 자신이 가진 물질로 모범을 보였다.
교회 안에서도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영역은 사람마다 다르다.
주님께서 주신 자신의 재능을 사람 앞에 자랑하고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께 헌신하고 드릴 때야말로 제대로 쓰임 받는 아름다운 재능, 모범인 것이다.
족장들과 백성들의 하나된 마음이 성벽 재건 공사를 넉넉히 끝낼 수 있게 한 것처럼 교회의 모든 지체들의 각 방면의 헌신이 교회를 든든하게 할 수 있겠다.
이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 본성에 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거함은 하나님의 장중에 들어감이요, 은혜 속에 거함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성 재건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고 승리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날마다 말씀으로 믿음의 성벽을 쌓는 자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안전하게 거하는 복을 받는다.
또한 이것은 장차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얻게 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묵상기도)
주님, 우여곡절 끝에 성벽을 재건하게 하시고 이 백성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예루살렘 성에 거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품속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매순간 요란하게 저를 들쑤시지만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달려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의 예루살렘 성입니다. 주님의 말씀 속, 안전한 아버지 품속입니다. 그 품속에서 얼굴을 비비고 지상최고의 자세로 편안함을 누립니다.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까불기도 하고, 힘을 얻습니다. 이 은혜를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족보를 모르고 헤매던 자가 드디어 족보를 찾다
느 7:61-73
* 시작 기도
주님... 사랑하니까 되네요. 사랑하니까 일어나지고, 사랑하니까 끊어지고, 사랑하니까 마음이 가고, 사랑하니까 빨리 만나고 싶네요. 이 마음, 오직 주를 향한 이 마음이 변치 않고 주께로만 온전히 나아가 사랑하게 하소서. 나의 마음이 나누이지 않게 하시고 기울어지지 않도록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 주의 보혈로 날 씻으사 모든 불의에서 나를 깨끗케 하시고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주소서.
주님으로만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나의 묵상
앞서서 8-24절은 가계별 귀환자들의 숫자를, 25-38절은 출신지 또는 귀환지 별 귀환자들의 숫자를, 39-42절은 귀환 제사장들의 가계별 숫자를, 43-45절은 귀환 레위인들의 가계별 숫자를, 46-60절은 성전 봉사자인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 종들 중 귀환자들의 가계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오늘 61-65절은 제1차 포로 귀환자 중에서 어느 가계에 속했는지 불분명한 자들의 명단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61-62절은 평민 귀환자 중에서 계보를 분실했거나 조상들이 살던 지방조차 알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이 이스라엘 혈통임을 입증할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63-65절은 자신들이 제사장의 후손임을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한 자들의 명단이다.
일반 평민이든 제사장이든 그들의 혈통과 제사장의 계보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 공동체, 즉 소속이 불분명하므로 선민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영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소속을 분명히 알지 못할 때 그들은 이 땅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영적으로 혼미하며 결국 땅의 것에 천착하여 살아가게 됨을 보여준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교회 공동체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이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하나님 나라 백성인지 아닌지는 종말의 때, 곧 주님의 재림 시에 판명될 것이다.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계보나 혈통을 알지 못하여 그 공동체에서 부정한 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은 결국 가라지와 같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공동체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나 위치, 직분이나 할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맬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속, 즉 주소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의 영적 주소를 알지 못하였던 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자칭 영적인 존재라고 하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않고 목사이면서도 성도들을 땅의 것으로 만족시키려고 했던 계보를 찾지 못하던 제사장들과 다름없는 자였다.
예수 믿어서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 양 호도했던 나는 양 떼를 푸른 초장 맑을 시내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결국 죽음의 사지로 몰고 가는 악한 목자요, 양을 키워서 잡아 먹는 삯군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의 영적 주소를 모르니 나 자신부터 흔들리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헤매곤 하였다.
그래서 전혀 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온갖 교회 부흥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이것저것을 적용해 보기도 하고, 성도들에게 전도하라고 독려하기도 하며,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우니까 그것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성도들에게 전도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위해서 성경을 읽거나, 다독을 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많이 읽으려는 욕심이 앞서기도 하였다.
그런 나의 욕심을 성도들에게도 강요하면서 그들도 다독하도록 하였다.
물론 다독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근저에는 자기를 주장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나에게 복음이 찾아왔고, 그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서 나는 더 이상 영적으로나 목회 차원에서 흔들리거나 혼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의 소속이 분명해졌으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요 8: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 만물 위, 위, 하늘로부터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가셨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우리 주님의 소속은 바로 창세전 만물 위 곧 하늘이다.
그곳이 바로 주님의 집이요 주소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주소는 그곳, 곧 창세전 만물 위 하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신 후에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아들의 생명을 주어 영생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따라서 우리의 주소지 역시 창세전 만물 위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분리된 자로 태어났다.
말씀이신 아들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아들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나게 하신 것이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born of God)들이니라.
누구나 사람은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한 번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 태어나는데 이를 일컬어 거듭남 또는 위로부터 내어난 자라고 한다.
이 거듭남은 성령과 말씀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거듭남은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제 나의 주소는 분명하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다시 그곳으로 가셨기에, 그의 생명을 얻은 나 역시 그곳으로부터 와서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주소지는 이 땅이 아니라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 창세전의 세계이다.
이 진리를 막연하게 알고 있었을 때,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 결론을 내려고 아등바등 했었다.
그러나 나의 육신의 발은 이 땅을 딛고 있으나 나의 영혼의 현주소는 그 나라이기에 오늘도 그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삶에 비록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그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한 은혜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받고자 하는 자는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당연하다.
고난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이므로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과 말씀으로 성전을 짓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롬 8:17-18)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복음을 모를 때는 고난을 해결하고자 얼마나 애를 쓰며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내 주소와 소속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영적 현주소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고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한다.
그 자리가 주님과 사귐을 갖는 성소가 되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예배 때 강강도사가 설교하였다.
우리 성도들은 4고(four go)를 해야 한단다.
one go는 고백,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two go는 고마움, 즉 죄 용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three go는 고마해, 이제 죄를 끊어야 하며
four go는 고대, 즉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고스톱을 예를 들어서 말을 하는데, 고스톱은 보통 three go를 하면 최고인데, 우리 믿는 자들은 four go를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four go를 외쳐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현주소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이는 이 땅에서 영생의 삶을 누릴 수가 없다.
그저 막연히 미래적으로 올 영생도 아니고, 죽어서 가는 천국도 아닌, 오늘 우리의 삶에서 누리는 영생을 통해서 또한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 나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진정한 주소를 알지 못할 때는 헷갈리고 혼미하여 늘 헤매기만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이 늘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으로 가득한 나의 인생이었나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나의 영적 현주소를 알고 난 후로는 더 이상 헤매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영원한 집은 거기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만이 기쁘고 참된 평화가 있사오니 비록 오늘도 고난의 태풍이 몰려올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던 그 곳, 거기가 내가 가야 할 집이오니 오늘도 나를 인도하사 주의 품에 거하게 하소서. 아버지 집에서 거하는 자가 누릴 영광을 보여주소서. 그곳이 아버지 품속임을 아오니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나를 품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온전한 예배를 위한 아낌없는 헌신
느 7:61-73
출신을 알 수 없는 사람들(느 7:61-66)
귀환자들이 가져온 재물(느 7:67-73)
<말씀묵상>
귀환자 중에서 제사장 계보를 엄격하게 파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귀환자 중에는 출신을 알 수 없는 이도 있습니다. 61~62절에 언급된 사람들은 일반 백성 중 출신 지역이나 가문을 알 수 없는 이들로, 바벨론 포로지에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제사장의 경우는 반드시 레위 지파의 제사장 가문 사람이어야 하기에 계보를 엄격히 확인했습니다. 제사장 계보에 이름이 없는 사람이나(64절) 혈통과 무관하게 결혼해서 계보에 들어간 사람은(63절) 제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대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내가 기준을 낮추면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귀환자들이 많은 재물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환자들은 재물도 가져오고 노비도 데려옵니다. '노래하는 남'(67절)는 찬양대가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며 오락거리를 제공하던 이들로 봅니다. 말, 노새, 낙타, 나귀 등은 재물을 운반하는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가축 수가 많은 것은 귀환자들이 상당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음을 보여 줍니다(68~69절). ‘보물 곳간'과 '역사 곳간'은 성전을 짓기 위해 재물을 모아 놓는 창고를 가리킵니다(70~71절). 하나님은 포로 생활 속에서도 그분 백성의 삶을 지키시고, 일부는 부유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거나 성전을 유지하는 데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헌납했습니다. 신앙 공동체 회복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기꺼이 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주신 재물을 어떤 일에 사용해야 보람될까요?
재물 자체가 죄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그 재물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다 벌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탐욕이 생겨서 적절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하고, 감사도 하지 않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보답하지 못하는 거싱 죄악입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만 의지하다가 참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을 애석하게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늘 깨달아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영광돌리는 일에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계보를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던 저를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도록 저를 부르셨으니, 주신 직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순종으로 화답하게 하소서.
온전한 예배를 위한 아낌없는 헌신
느 7:61-73 / drcello
포로로 귀환한 인원과 가축, 그리고 그들이 바벨론에서 가져온 재물 중 성전을 위해 드려진 것까지 그 사람과 포함하여 하나도 허투루 기록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과 그들의 삶의 헌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록 중 성전을 관리한 제사장과 레위인, 찬양하는 자들과 성전의 문지기 등에 대하여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은 예배와 신앙을 느헤미야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고 여호와께서 자신을 통하여 회복될 일들이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부르심임을 그가 얼마나 확실하게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는 성경에서 마지막인 말라기 선지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그 후 400년, 곧 세례 요한이 오기 전까지 신구약 중간기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대망하는 기간을 준비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신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세운 성벽과 예배의 토대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진 곳에서 회당을 세우고, 랍비들에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읽었고, 학사 에스라를 이어 서기관들, 바리새인이 율법을 전심으로 일상 가운데 세우기를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고, 에세네파와 같은 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거룩의 삶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느헤미야는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로마를 거쳐 핍박과 지배를 당하던 그 백성들에게 신앙을 바로 세우고, 메시아를 대망하며 준비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운 중요한 지도자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신 매일의 사명, 평생의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정된 것으로, 그에게 주신 달란트로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배정된 것들입니다. 느헤미야처럼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고, 여호와께 구하며 그 음성에 따라 넉넉히 그 뜻을 이뤄가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로마서 11:28~29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르신 자리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일상 가운데 이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되길 소망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한 영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일상 가운데 예배자로, 청지기로 또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위에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의 놀라우신 구원을 선포하는 광야의 소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
느 7:61-73
1. 시작기도
주님! 살았다고 생각하고 숨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 속에 살아나는 자아가 있습니다. 내가 잘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참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성령님 내 속에 충만히 거하셔서 나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말씀 안에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을 누리는 삶의 증거가 날마다 드러 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본문기록(주해)
느헤미야는 성안에서 살아갈 사람들과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사장의 신분을 철저히 확인한다(61,64절). 종족이나 계보가 불확실하거나 증거가 없으면 어떤 식으로든 배제 되었다. 제사장의 경우에 있어서도 바르실래의 자손들도 제사장 직분을 행할 수 없었다. 바르실래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할 때 다윗과 일행을 도왔던 사람이었으나 어떤 제사장이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 후 재산과 기업을 얻고자 자신의 제사장 계보를 포기하고 처가 쪽의 족보를 따랐기 때문에 자신의 제사장 직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으로 인해 비록 바르실래가 다윗왕을 도운 공로가 있다고 해도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가치는 맡겨주신 직분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느헤미야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의 수와 재산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족장과 총독과 백성은 성벽 재건의 역사를 위해 기꺼이 예물을 바치며 헌신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한 그들의 헌신은 조목조목 기록되었다(66-72). 대적들의 계속되는 반대와 위협, 공격이 끊이지 않았지만 성벽 재건의 역사는 백성의 온전한 헌신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다(73절).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신다.
3. 묵상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거룩함에 있다.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백성으로 부적합한 대상의 공통점은 종족이나 계보가 불확실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의 사명을 세속적인 가치 때문에 포기한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종족이나 계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이방 백성들과의 혼인 관계 등으로 섞였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서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 땅에서 정착해서 살기 위해 섞여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함이요 약속의 말씀에 헌신하고 순종하기 보다 먹고 살기 위한 만물 안의 것에 굴복해 버린 결과이다. 또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부요한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하여 자신의 제사장 직분을 망각하고 포기한 이들도 그들의 조상의 수고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만물 안의 화려함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에서가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과 같은 망령된 행위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수고로운 헌신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신다. 그들의 헌신의 공통점은 바로 충성됨에 있었다. 이 충성됨이 새롭게 회복된 예루살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나는 충성된 종인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상태는 섞여있는 상태일 것이다. 섞여 있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수한 것, 깨끗한 것을 요구하신다. 충성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언약 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인 것이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자아를 굴복시키고 그 말씀을 먹고 살아갈 때 나를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는 증거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언약 백성의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공로가 아니다. 나의 의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에 섞여있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의-성공, 명예, 물질-를 위해 기도하고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끊어놓지 않으시면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섞여 있으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였다. 순전한 것은 썩지 않으나 섞인 혼합물은 썩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이 말씀을 하늘로부터 얻어 먹어야 나도 썩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낭비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 내가 아니다 내 안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생명 안에 살아가는 나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사명과 정체성을 깨닫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심으로 얻는 열매이다. 그 분의 말씀 안에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그것이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제일 가치이며 사명이다.
4. 나의 결단과 기도
하나님! 충성되지 못함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따르기를 결단하는 마음을 날마다 부어 주옵소서. 세상 속에 섞여 버려서 하늘의 생명없이 바닷물과 같고 신기루와 같은 야곱의 우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날마다 하늘 양식을 내게 주시고 그 생명의 양식을 얻어 먹고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거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돌아온 선민들, 헌신의 여정
느 7:61-73
약속의 땅에 돌아왔다. 성벽도 성전도 없다. 황폐한 땅이다. 그들은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쌓았다. 이미 나라는 망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후손들은 택하심, 곧 언약 민족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조상들의 땅에 돌아와 거룩한 나라의 회복을 꿈꾼다. 과연 꿈은 이루어질까? 그 고난의 긴 과정을 생각한다.
믿음으로 시작하는 선민 공동체의 역사다. 성경도 예배당도 없던 시대, 우상들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을 보았다. 말씀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수천 킬로 떨어진 가나안으로 갔다.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다. 영광의 주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좋은 가치들을 하나씩 마음에서 내려놓는 믿음의 여정을 걸었다. 약속의 땅과 아내, 아들 등 받은 복과 육신의 관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나님을 놓치는 것을 아들을 잃는 것보다 더 아까워했다. 그 마음, 그 믿음의 양심이 삶으로 드러났다. 주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경외하는 온전한 믿음이다. 그가 하나님 신앙의 조상이다. 그 씨를 통해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저주에 갇힌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며 아까워하는 세상과 육신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사탄과 세상의 미혹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말씀을 떠났다. 마음이 먼저 포로가 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 이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한다. 다윗의 나라, 그 영광을 꿈꾼다. 성전과 성벽을 세운다. 거룩한 공동체를 소원한다. 기부와 헌신이 필요했다. 고난 속에서 그렇게 그 땅에 정착한 선민들이다. 소중한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다. 거룩한 공동체는 헌신하는 자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시험과 고난은 계속된다. 믿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인생처럼 긴 여정을 통해 자라며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눈물과 회개, 기쁨, 성취와 승리가 끝이 아니다. 세상의 환호와 영광을 받고 물질과 육신의 복을 누린다면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십자가의 주님을 잊고 다시 세상과 육신의 영광으로 돌아가 기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민이라면 고난 속에서도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평강과 기쁨이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를 잊고 세상의 것들에 미혹될 때 곧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며 돌이키는 삶이 그 믿음의 증거가 아닐까? 그런 믿음과 헌신이 없다면 선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민조차 시험에 걸려 실족할 수 있다. 믿음은 세상 끝까지 평생 이어져야 한다. 빗나간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실패와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가 그렇지 않은가? 오늘도 날마다 세상에 집착하는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 오르기를, 성령을 받으며 그 뜻을 이룰 수 있기를 소원한다.
거룩하신 주 하나님, 만물을 짓고 보존하며 이끄시는 주를 찬양합니다. 주를 등지고 죄와 저주의 길을 쫓는 죄를 심판하시나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영생의 구원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 중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삭을 택하셨습니다. 사실은 버림당할 모든 죄인 중 하나를 남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내 구원의 길을 여시고 택하신 자를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택하심을 받았다면 세상과 육신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헌신하며 천국을 소망할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채우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감사와 기쁨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끝까지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