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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雁(낙안 : 기러기가 날개를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다) 왕장(王昭君 : 왕소군)
왕소군 (王昭君)
閉月(폐월 :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貂蟬(초선)
초선 (貂蟬)
羞花(수화 : 꽃마저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리다) 양옥환(楊貴妃 : 양귀비)
양귀비 (杨贵妃)
중국의 4大 추녀
그녀들처럼 역사를 장식하여 온 또 다른 여인들이 있으니
바로 4大 추녀 鍾離春(종리춘), 孟光(맹광), 阮氏(완씨), 嫫母(모모)이다.
미녀들이 悲劇的(비극적) 삶을 산 반면 그들은 正反對(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戰國時代(전국시대) 齊나라 宣王(선왕)의 妃 종리춘.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 때 齊나라 無鹽縣(무염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鍾無鹽(종무염)이라고도 稱했다. 그녀는 이마와 두 눈이 모두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상하 비례가 맞지 않았으며 살갗이 숯보다 더 검었다 한다.
당시 齊나라를 다스리선 임금은 政治權(정치권)이 부패하였는데도
정사를 잘 돌보지 않았으며 성격이 불같았다.
종리춘은 나라와 백성을 救하기 爲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齊宣王(제선왕)을 만나,
'지금 齊나라는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멸망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험을 해결할 방도에 關해 상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제선왕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의견을 수렴하고,
왕후로 封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全心全力(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이후 그는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추녀 종리춘을 총애하였고,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미모가 뛰어난 夏迎春(하영춘)을 총애하였다 한다
東漢(동한)의 大學者(대학자) 梁鴻(양홍)의 妻 맹광.
몸집이 크고 얼굴이 검은 추녀였지만 덕행이 높았다.
'擧案齊眉(거안제미)'라는 고사를 들어봤을 것이다.
남편에게 음식을 올릴 때마다
밥床을 눈썹까지 들어올렸다는 成語(성어)의 張本人(장본인이) 맹광이다.
平陵(평릉)사람으로 뚱뚱하고 매우 못생겼으나
힘이 무척 세 돌절구를 머리 위까지 들어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그녀는 30歲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갔다
(사실 맹광은 중매가 들어올 때마다 모두 거절하였던 것으로
오래 前부터 마음에 둔 사내가 있었다).
그녀는 양홍이라는 선비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또한 청혼하는 처녀가 많았으나 다 마음에 안 들어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맹광이 가난하지만
품행이 고상한 자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혼인하였다.
첫날밤, 맹광은 자신의 못생긴 얼굴이 걱정스러워 얼굴 화장과 옷 치장에 신경을 썼고
이런 행동이 계속되었는데 남편이 며칠이 지나도 신부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지 않자
맹광이 그 연유를 물었다.
'내가 바라던 아내의 모습은 짙은 화장을 하고 緋緞(비단) 옷을 걸친 여인이 아니라
누더기 옷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山中(산중)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인이였소.'
이후 맹광은 누더기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고 생활하다
양홍의 뜻에 따라 산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며 생활하였다.
그녀의 극진한 내조에 양홍은 마음놓고 학문에 파고들어 數많은 명저를 남겼다.
東晉(동진)의 名士(명사) 許允(허윤)의 아내 완씨.
허윤은 阮德慰(완덕위)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첫날밤, 華燭洞房(화촉동방)에서 신부의 머리에 쓴 붉은 천을 걷은 그는
그녀의 못생긴 용모에 너무나 놀라 도망갔다.
이후 신방에 들어기지 않고 신부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허윤의 벗인 桓範(환범)이 사정을 듣고,
'阮 어르신께서 그런 추녀인 딸을 그대에게 시집을 노낸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아내에 對해 다시 한 番 생각해보게.'하고 충고하였다.
이에 느낀 바가 있어 허윤은 그날 밤 신방으로 들어갔지만
신부의 못생긴 얼굴을 마주하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신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고로 婦女子(부녀자)에게는
四德(사덕 : 言(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가려서 하며 거친 말을 쓰지 않는다),
容(먼지나 때가 없이 옷을 깨끗이 하여 옷차림을 청결히 하며 몸에 더러움이 없게 하다),
工(길쌈에 전념하고 놀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술과 밥을 정결하게 장만한다),
德(맑고 고요하며 절개를 지킨다)이 있어야 하거늘, 당신은 과연 해당되는 것이 있소?'
'제가 모자란 것은 오직 아름다운 용모 하나뿐입니다.
낭군께서는 문사가 지녀야 할 百行(백행) 가운데 몇 가지나 해당되는 것이 있습니까?
백행 中 첫 番째로 갖추어야 할 것은 德行(덕행)이라 하였습니다.
낭군께서는 여인의 용모만을 밝히고 덕행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백행 가운데 가장 첫 番째인 好色不好德(호색불호덕)을 지키지 못하는데
과연 해당되는 것이 있습니까?'
이후 허윤은 완씨의 덕행을 알고 百年偕老(백년해로)하였다.
전설 속 黃帝(황제) 軒轅氏(헌원씨)의 넷째 부인 모모.
생김새는 못났으나 지혜화 덕행을 겸히하여 여성의 모범으로 꼽혔고
황제를 도와 炎帝(염제)를 격파하고 蚩尤(치우)을 무찔렀으며
神農(신농)을 굴복시켜 3大 부락을 통일하는데 힘을 보탠 여인이었다.
외모가 매우 醜했던 가련한 모모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조롱과 우롱을 當하고 부모에게까지 내버려였다.
또한 이웃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자매들마저 모모를 避해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부지런하고 선량하였으며 진심으로 사람을 對하고 사리에 밝았다.
다른 이를 돕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기에 사람들은 漸漸(점점) 모모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와 親하게 지내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도록 데려가려는 사내가 없자
사람들은 모모가 평생 시집을 가지 못하겠다며 탄식을 하였는데,
어느 날 황제가 순시를 하다 여인들이 뽕을 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는데 뱀에 다리를 물려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한 처녀가 고함을 치며 달려와
신속하게 두 名의 여인에게 맑은 물을 떠오라 시키고
다른 여인들에게 몇 가지 약초 이름을 알려주며 캐오라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 뱀에게 물린 여인의 다리 상처 위쪽을 꽉 동여맨 뒤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아 상처를 벌린 뒤 엎드려 입으로 상처의 毒을 빨아냈다.
이를 본 황제는 신하를 시켜 그녀의 이름이 무언지 알아오게 하였다.
그들이 물어보니 그녀는 모모였다.
황제는 외모는 몹시 醜하나 용감하게 나서 남을 도울뿐 아니라
사람을 잘 다루는 그녀를 宮으로 데려가 妃로 맞아들였다.
이 중국의 4大 추녀가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또 어떻게 운명이 달라졌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