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사회인야구팀에서 활약한 오상민. 은퇴 후 처음하는 인터뷰라고 한다.(사진=이영미)>
선수 시절의 그는 ‘풍운아’였다. 1997년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쌍방울 레이더스 1차지명을 받은 후 불펜 투수로 활약했던 그는 2000년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가 2001년 12월, 6:2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팀을 옮겼다. 2004년에는 병역 비리에 연루되는 바람에 구속됐었고, 8개월 실형을 살고 나온 후 2007년 방출됐다. 2008년 시즌 중 LG 트윈스에 이적했지만 2011년 4월 22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팀을 무단 이탈하는 바람에 결국 은퇴 수순을 밟게 됐다. 오상민(41) 얘기다. 오상민은 통산 736경기에 등판해 35승 33패, 24세이브, 81홀드, 방어율 4.38의 성적을 올렸다. 
은퇴 후 오상민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야구인들을 통해 그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회인야구 코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였다. 그런 그가 지난 8월 16일, 대전 갑천야구장에서 벌어진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국민생활체육 전국야구대회 3부 결승전에 전북팀 선발투수로 나와 신윤호, 문희성이 뛰는 남양주시 사회인야구 연합팀을 상대로 7이닝 호투를 펼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수소문 끝에 오상민과 연락이 닿았고, 그를 만난 곳은 지방의 한 대학교 앞이었다. 그는 현재 대학 야구팀의 코치를 맡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회인 야구, ‘선출’이라 불리는 그들> 문희성, 신윤호에 이은 마지막 스토리이다. 
‘선출’로 만난 사회인야구팀의 프로 출신 3인방
오상민은 다리를 절었다. 대전의 그 전국야구대회에 출전했다가 종아리 근육 파열을 당했다고 한다.
“준결승전에서 홈런을 치고 뛰다가 이동 베이스를 밟는 바람에 다리를 삐끗했어요(사회인야구에선 고정된 베이스를 사용하지 않아 부상 위험이 높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니 종아리 근육 파열이라 하더라고요. 애들도 가르쳐야 하는데, 몸이 불편하니까 어려움이 많네요. 그래도 모처럼 아는 얼굴들을 보고 같이 경기도 하고, 정말 재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문)희성이 형, (신)윤호 등이 포함된 남양주시 연합팀은 사회인야구팀 중에서도 최강팀이거든요. 직접 상대해보니까 선수 구성이 아주 좋더라고요. 제가 지방에 있어 전국대회 아니면 얼굴 보기가 힘든데 이번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더 큰 의미가 있었어요.”
오상민은 신윤호가 원래 출전할 계획이 없다가 자신이 결승전 상대팀 선수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 전날 뒤늦게 합류했다고 한다.
“원래 그 시합에는 (신)윤호가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문)희성이 형이 그랬거든요. 윤호는 일 때문에 대전에 오지 않았다고요. 결승전이 일요일 오전 10시 게임이었는데 윤호가 토요일 저녁 늦게 대전을 찾은 거예요. 전북팀 선발이 오상민이란 걸 알고 급히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아침에 야구장 나가서 윤호를 봤는데 진짜 반가웠어요. 윤호랑은 2001년 야구월드컵 대표팀에 뽑혀 같이 생활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얘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경기 전에는 화기애애했어요. 그러다 경기 시작하고 나선 아주 치열했죠. 전 이전 경기에서 근육 파열 부상을 당했지만 경기가 6회까지 0-1, 박빙으로 펼쳐지고 있어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우리 팀 모두가 저만 바라보고 있는 터라 불펜 투수를 올리기도 어려웠죠. 결국 0-2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경기였습니다. 마치 올스타전을 치른 느낌이라고 할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오상민의 눈에는 문희성이야말로 사회인야구의 스타플레이어였다. 신윤호는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SK에서 선수로 뛴 이력 때문인지 공 구위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전 야구를 그만 둔 지 4년이 넘었고,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이전의 구위를 선보이진 못했어요. 그래도 마운드에 오르면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 경기를 치르려고 해요. 아무래도 현역 시절, 제대로 선수생활을 마무리 짓지 못한 데 대한 한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사회인야구에서 풀고 있는 셈이죠.”
정읍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은 오상민
오상민이 사회인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정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정읍에는 사회인야구팀이 단 한 팀도 없었는데 지인의 도움으로 정읍에 사회인야구팀을 만들게 되었고, 덕분에 그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오상민에게 도움을 준 그 지인은 정읍시 통합야구협회 하재훈 전무이사였다.
“그 형님이 야구에 대한 미련이 있으면 정읍으로 내려오라고 하더라고요. 정읍에 실내연습장을 운영하며 사회인야구팀 창단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로선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읍을 찾았어요. 그 형님의 도움으로 연습장을 운영하며 야구 레슨을 했고, 동호인 야구 경기에서 심판을 보며 지역인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사회인야구팀이 창단됐는데 선수 출신은 제가 유일했어요. 그렇게 구성된 팀이 지난해 경기도 안성에서 열린 국민생활체육대회 정읍 대표로 출전해 우승을 거뒀습니다. 상대팀들은 ‘선출’이 많았지만 우리는 저 혼자 ‘선출’이었고, 팀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덜컥 우승까지 차지한 거예요. 정말 기분 좋더라고요.”
정읍시가 구기 종목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오상민은 일반 야구선수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고 경기에 임했단다. 그런 모습을 본 일반인들이 자극을 받고 몸을 사리지 않는 플
레이를 펼치며 훈련을 했던 부분이 우승으로까지 연결됐다고 설명한다. 
 
<LG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조인성과 오상민.(사진=연합뉴스)>
오상민이 LG에서 무단이탈했던 속사정
오상민은 사생활로 인해 팬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긴 선수이다. 여러 차례 구설에 휘말렸고, 그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기자 입장에선 이런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은퇴 당시의 그는 팀을 무단으로 이탈한 이유로 웨이버 공시를 당했고, 은퇴 수순을 밟으며 야구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무단이탈이었지만, 그 안에는 말 못할 속사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전 개인적으로 엄청난 일을 겪었어요. 그 일로 인해 경찰 조사도 받았고요. 그런데 야구를 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란 사람이 우리 팀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았고, 온전한 정신으로 마운드에 오를 자신도 없었습니다. 결국 구단과 상의 끝에 무단이탈로 인해 야구를 그만두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오상민이 말한 ‘개인적인 일’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오상민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2011년 4월, 오상민은 아는 사람의 자살 사건에 휘말렸다. 
“어느 날 선수들도 잘 아는 유흥업소의 한 관계자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살하기 전에 저와 지인들 몇몇과 함께 술을 마셨거든요. 술자리에서 헤어진 후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는데, 경찰 입장에선 당시 술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불러 조사를 벌일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포함됐었고요. 감독님과 코치님께 상황을 설명 드리고 경찰 조사를 받은 후 이틀을 고인의 빈소에 머물렀습니다. 야구계에선 그 고인이 저의 내연녀라고 소문이 났고, 돈 문제에 얽혀 있어 자살을 했다는 얘기가 떠돌았습니다. 진실이 아닌데도 진실처럼 알려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어요. 경찰 조사 후 전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밝혀졌고, 경찰이 직접 구단에 전화를 걸어 ‘오상민은 그 여자 사건에 아무 연관이 없다’는 얘기를 전했지만, 무엇보다 제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수단에 있는 게 민폐일 정도였습니다.”
결국 은퇴를 결심한 오상민은 구단과무단이탈로 정리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갑자기 은퇴를 발표하면 그 이유에 대해 또 관심이 쏠릴 것이고, 그러다보면 다시 구설에 휘말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단이탈로 마무리 지은 것이고요. 그 후에도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무성했어요. 일일이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선수 생활을 접는 것으로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가족’
오상민은 그 일이 있기 전에도 도박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해서 “도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같이 도박을 했던 사람들로부터 협박을 받았고, 그들이 내게 사기를 친 정황과 계속된 협박으로 인해 대구 남부경찰서를 찾아가 고소장을 접수하는 중에 실명으로 기사가 나가면서 일이 크게 불거졌다”라고 설명했다.
“이제 와서 사실을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모든 문제가 저로 인해 불거진 것인데. 그래서 남의 탓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 사연은 존재하지만, 결국 제 탓이기 때문입니다. 은퇴 후 제 생활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기도 했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가드레일을 박고 사고를 낸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죽지 않더라고요. 3개월가량 컴컴한 방에 처박혀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폐인이나 다름없었죠. 제가 만약 그날 그 술자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제 야구인생은 좀 달라졌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억울해 하며, 마음속의 분노를 안고 지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를 버티게 해준 힘은 가족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오상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 가운데 전북 정읍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 것은 다시 살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을 부산에 두고 혼자 정읍을 찾았어요. 지역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인야구팀에서 땀을 흘리며 야구할 수 있는 환경이 행복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 정읍에서 막노동판을 찾은 적이 있었어요. 공사판에서 먹고 자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은 집으로 보냈죠. 정읍에서 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프로 선수의 삶은 끝났지만 일반인 오상민으로 새로운 삶을 찾은 셈이었어요.”
오상민은 지난 4월 정읍 사회인야구 팀원들이랑 함께 대전 한화야구장을 찾았다고 한다. 은퇴 후 4년 만에 야구장을 찾는 셈이었다. 한화와 LG전이었고, 9회 봉중근이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야구장을 빠져나왔단다.
“잘 던지던 중근이가 흔들리더라고요. 계속 보고 있으면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아서 연장전에 돌입하는 거 보고 야구장에서 나왔어요. 후배들이요? 많이 보고 싶죠. 그래도 제가 어떻게 연락할 수 있겠어요. 당시 김기태 감독님이 2군 감독이셨는데, 그 일 터졌을 때 절 많이 배려해주셨어요. 끝까지 절 믿어주셨거든요. 고마운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팀 코치로 새로운 인생 도전
정읍에서 사회인야구를 하던 오상민은 지난 5월 지금의 대학팀으로부터 코치직을 제안 받았다. 아마추어 지도자도 자리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오상민으로선 그 제안 자체가 감개무량이었다고 한다.
“지방의 대학팀이라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많지 않아요. 실력이 조금 모자란 선수들, 다른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는 선수들, 그로 인해 상처받은 애들이 모인 팀이라 전 야구보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시키고 신경써줘야 해요. 그게 더 중요한 일이었어요. 풍운아, 문제아로 선수 생활을 했던 경험이 지금 애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야구계의 소문을 믿지 않고, 오상민만 믿고 채용해준 대학과 감독님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해도, 선수들과 재미있는 야구를 펼쳐나가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기자에게 오상민이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준 데 대한 고마움을 전하면서 그는 행여 자신의 인터뷰에 이전의 아픔을 끄집어내며 악성 댓글이 달릴 것을 두려워했다.
“전 참을 수 있지만, 딸들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댓글을 보고 상처받을까봐 걱정돼요. 비난하고 욕하는 건 순간이지만, 그 상대는 평생 갖고 가거든요. 부디 우리 아이들이 댓글에 상처받지 않도록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당시 LG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도망치듯이 팀을 떠난 부분이 항상 죄송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자세히 말씀 드릴 기회가 있겠죠. 그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평생 마음의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야구판에서 살아남겠습니다.”
 
<사연 많은 선수 생활을 보냈던 오상민. 지금은 대학팀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사진=이영미)>
사회인야구에서 ‘선출’로 뛰는 프로야구 출신의 선수들을 만나며 다양한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다. 프로 유니폼을 입고 다 풀어내지 못한 야구를 사회인야구에서 펼치고 있는 그들은 돈을 받지 못해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프로란 보호막을 벗어난 사회는 그들에게 냉정함으로 다가왔다. 문희성 ‘선수’, 신윤호 ‘선수’, 오상민 ‘선수’가 아닌 코치, 감독, 이사 등의 수식어는 화려함 이면의 절실함이 존재한다. 이들 외에도 사회인야구에서 뛰는 ‘선출’은 굉장히 많다. 그들에게 프로야구는 부러움, 그 자체이다.
기자가 만난 3명의 ‘선출’들은 선수였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무더위에, 빡빡한 경기 스케줄에, 누적되는 피로에, 혹사에 시달리고 지친다고 해도 선수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걸 선배들은 얘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