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극히 개별적, 이기적으로 진화해온 인간이 어떻게 집단적 협력망을 구축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해봐야 한다. 핵심은 빼어난 상상력을 통해 구축된 신화와 문자체계다. 이 협력망을 지탱하는 가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언제든 분쟁의 소지가 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조직은 10%의 엘리트 계층이 90%의 하위 계층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구조로 유지되어왔다. 2014년 5월 16일 이후 식물인간 상태로 연명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생명 회장이 2015 회계연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772억 원의 배당금을 받은 게 엘리트 계층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대표적 사례다. 귀족‧평민‧노예의 신분을 명시한 「함무라비법전」의 신화가 오늘날까지 연연히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근무하던 김용철 변호사가 용감하게 삼성의 비리를 고발했지만, 돌아온 건 삼성의 비리가 밝혀지는 대신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게 전부였다.
미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합리적으로 자리잡은 모범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76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화를 핵심으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 거기 서명한 식민지 엘리트 대부분은 거대한 농장의 노예주였다. 그들의 의식세계에 흑인은 ‘모든 사람’에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전쟁에서 노예제 폐지를 내세운 북군이 승리를 거둔 뒤 1865년 12월 18일 제정된 수정헌법 제13조를 통해 공식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지만, 상굿도 백인들은 흑인을 동등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외칠 정도로 흑인을 비하하는 인식은 견고하다. 현재 진행 중인 미국의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미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0년 이후였다.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쉽게 정착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함무라비법전」이나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인간의 신분을 神이 부여했다고 하는 오류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유민에게는 자유로운 본성이 있고 노예에게는 맹종의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도 시대적 가치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한계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상존하는 이유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수백 년 동안 노예제도가 지속되면서 흑인들에게는 공정한 분배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무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육수준이 낮다 보니 좋은 직업을 선택할 기회도 적어 상굿도 가난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 백인에 비해 흑인은 지능이 낮고 불결하고 폭력적이라는 편견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칠거지악 시행에 앞장선 쪽이 남자인 시아버지가 아니라 같은 여자인 시어머니였던 것처럼. 영화 「자이언트」에서 흑인 친척의 입장을 거부하던 식당 주인에게 대들었다가 흠씬 두드려맞은 록 허드슨과, 그의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남편의 휴머니즘에 찬사를 보내던 아내 리즈 테일러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국의 흑백차별은 20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그처럼 상존했던 것이다.
인도에는 인간의 신분을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로 구분하는 카스트제도가 있다. 1947년 독립헌법을 통해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지만 택도 없는 일이다. 현재도 수드라 총각과 브라만 처녀의 결혼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카스트제도는 지난 3천년 동안 인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해왔으며, 요즘도 길거리에서 상위 계급자가 하위 계급자를 구타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인 인도인들은 神들이 계급이 높을수록 인간을 더 우월하게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독교의 구약성서보다 먼저 여와(女媧)라는 여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창작했다. 황토로 정성껏 만든 인간은 왕족과 관료가 되었고, 잡토로 아무렇게나 만든 인간은 평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역시 차별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배계층에서 만든 신화가 아닌가 싶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고대 국가의 이러한 불평등 신화들은 모두 상상의 산물이다. 브라만과 수드라의 신분 차이는 최초 인류인 호미니드 시절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불과 3천 년 전 소수 엘리트들이 만든 법에 의해 임의로 규정된 것일 뿐이다. 카스트제도 또한 인도의 북부지역을 점령한 유럽계통의 아리아인들이 현지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규정한 잣대였다. 미국의 흑백갈등도 단지 피부색에 대한 후천적인 편견일 뿐 지능이나 도덕성의 차이는 아니다. 왕족과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럽 각국은 흑백갈등 대신 귀천의 장벽을 가지고 있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부자와 빈자에 대한 인식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평민 고현정이 부자 정용진과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다. 평민 이우재 역시 부자 이부진으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 게 빈부격차가 자아낸 심각한 넘사벽이다. 어떠한 조건으로도 신분 차별을 하지 않는 절대평등의 이상향,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다.
공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차별은 신분의 차별을 능가하는 강도를 지니고 있다.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근세 이전의 서양에서는 강간을 재산권 침해로 다루었다. 여성에 대한 성적 폭행이 아니라 그 여성을 소유하고 있는 남성의 재산상 손해로 본 것이다. 父 先亡 처녀나 이혼녀처럼 어느 남자에게도 속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죄가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상굿도 결혼을 하면 아내는 남편의 성(姓)을 쓴다. 작고한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2011)의 경우, 일곱 남자와 여덟 번 결혼하면서 그때마다 성을 바꿔야 했다. 리즈는 리처드 버튼(1925~1984)과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는데, 임종의 순간에도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버튼이라고 얘기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각설하고, 결혼 후에도 父系의 성을 계속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호적제도는 매우 합리적이다. 혈통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용석 변호사가 국회의원 시절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어린 여대생들을 앞에 두고 ‘아나운서 하자면 다 줘야 한다는데 그래도 할 수 있겠니?’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은 뿌리가 깊다.
남녀 차별 역시 상당부분 후천적으로 생겨났다. 가장 민주적이고 지성적이었던 옛 도시국가 아테네에는 역사에 남은 철학자‧교육자‧예술가‧웅변가‧정치인‧상인 가운데 여성이 한 사람도 없다. 현대에 와서도 그리스 국회의원 가운데 여성은 12%밖에 안 된다.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성적 차별의식 덕분이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도 13.7%로 대동소이하다. 성적 편견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참고로 아프리카와 남미 등 일부 독재국가를 제외하고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30%를 넘는 나라는 스웨덴‧노르웨이‧네덜란드‧오스트리아‧독일 등이다. 모두 성의식이 매우 개방적인 북유럽 국가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영국은 29.4%, 미국은 19.4%다. 여성 차별은 종교계가 가장 심하여, 모든 종교는 여성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 신부와 목사가 생긴 것은 최근의 일로 일부 교파에 국한된 일이다. 이슬람교는 한술 더 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출할 때는 얼굴을 꽁꽁 싸매도록 규제하고 있다.
남성의 우월성은 생물학적이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다. 수렵‧채집 활동으로 무리를 부양하면서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BC 69~BC 30),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등은 성차별의 장벽을 극복한 위대한 여성들이다. 이들이 자국을 통치하는 동안 국가를 이끌어가는 모든 조직의 고위층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부장제도는 원시 농경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정치적 격변이나 경제적 난관에도 굳건하게 유지되어오고 있다. 이집트를 예로 들자면, 수천 년 동안 아시리아‧페르시아‧마케도니아‧로마‧아랍‧맘루크‧터키‧영국에게 점령되어 식민통치를 받았지만, 1만 년 전부터 유지되어온 가부장제는 철옹성보다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콜럼버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를 침공했을 때도 점령국과 피점령국 모두 동일한 가부장제를 견지하고 있었다.
가부장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성의 근력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조직의 수장이 힘의 우위로 결정된 적은 없다. 레슬링이나 권투로 왕이나 대장을 뽑지는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육체노동은 하층계급이 맡는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근력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사피엔스는 아마도 동물 가운데 중간쯤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사피엔스가 먹이사슬의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인이 지혜와 교육 덕분이었듯이, 인간사회의 지도자도 정신적‧사회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제의 정당성이 남성의 근력에 기반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남성의 폭력성을 내세우는 게 더 합리적이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전쟁은 남성에 의해 일어났다. 남자들은 전쟁을 통해 국가나 사회의 통제권을 강화해왔다.
첫댓글 두 여인 다...
참 곱다.
거기에 마음씨까지 고운 여자들이 이 세상에 넘쳐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