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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앞 광장에서의 사경회(1)
느 8:1-12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느 8:1-12 / [율법을 읽는 명절] 이렇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옛 고향을 찾아 정착하였다. 그해 7월이 되었다. 유다 전통에서 ㄱ) 7월 1일은 여호와를 위하여 즐겁게 잔치하는 축제일이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이 명절을 이용하여 율법을 배우는 명절을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7월 1일이 되자 온 백성이 수문 앞의 광장에 모였다. 온 백성은 서기관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쳐 주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다가 읽어 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ㄱ. 오늘날의 양력으로는 9월 15일쯤에 해당된다) 2-3) 그러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의 앞에는 남녀 어른들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모였다. 에스라는 이른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여러 시간을 읽었는데, 온 백성은 그동안 계속 에스라만 바라보며 율법의 말씀을 들었다. 4) 그때에 에스라 서기관은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하여 만든 나무 연단 위에 서서 율법책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그의 좌우에는 6명씩 민족 대표자들이 서고, 왼쪽에 한 사람이 더 서서 모두 13명이 서 있었다. 오른쪽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가 섰고, 왼쪽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 섰다. 5) 에스라 서기관이 선 연단은 온 백성이 앉아 있던 자리보다 높았기 때문에, 그가 율법책을 펴자 온 백성이 그를 바라보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였다. 6)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기 전에 먼저 위대한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자, 온 백성이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아멘, 아멘!' 하면서 응답하고 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며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7) 그런데 그 당시 유다인은 아랍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굴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 등의 레위 사람 13명이 백성들에게로 나아가,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8) 다시 말해서 에스라가 율법을 읽으면 레위 사람들이 통역해 주고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해주었다. 9) 온 백성은 율법의 엄한 명령을 듣자 하나같이 흐느끼며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총독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제사장이며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두 백성을 진정시켰다. `오늘은 이렇게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마시오! 오늘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축제의 날이니, 오히려 즐거워하시오' 10) 그러고 나서 에스라가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이제 모두 집으로 가서 잔치를 벌여 배불리 먹고 마시며, 준비된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시오. 오늘은 우리 하나님의 날이므로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시오. 여호와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면 여러분은 다시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11) 레위 사람들도 백성을 진정시켰다. `오늘은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므로 슬퍼하지 마시오. 걱정과 근심은 모두 떨쳐 버리시오!' 12) 그러자 온 백성이 집으로 가서 큰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에스라가 낭독해 준 율법을 정확하게 깨닫고 실천하여 그들 자신이 즐겁게 먹고 마시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좋은 것을 나누어 주었다.
일곱 째 달 초하루에 학사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회중 앞에서 율법책을 읽고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이에 백성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다가 여호와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는 느헤미야의 말에 돌아가서 먹을 것을 나누며 즐거워합니다.
율법책 낭독(1-6) 성도의 진정한 회복은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 째 달이 되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제히 학사 에스라를 찾아갑니다. 성벽이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예루살렘 성읍 내에는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굶주림을 절실히 느꼈기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모여,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여섯 시간 가까이 전한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말씀을 준행하지 않아 이스라엘이 패망했음을 알기에, 에스라가 율법 책을 펴자 모두 경외심을 품고 일어섭니다. 백성은 온몸과 삶으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말씀을 듣는 한편, 땅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무엇보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갈급한 심령을 기뻐합니다.
말씀의 능력(7-12) 성전 건축을 주도한 느헤미야는 말씀의 사역자인 에스라에게 개혁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넘겨주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슈퍼맨 의식은 다른 사람의 권위나 역할을 제한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은사가 적절히 발휘되도록 물러설 줄도 알았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역동적 생명력이 있어서 이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와 각성을 일으킵니다. 에스라와 영적 지도자들이 말씀을 전하며 그 뜻을 해석해 주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말씀을 밝히 깨달아 아는 것은 은혜입니다.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했다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은혜로 인해 기뻐하며 그 즐거움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과 먹을 것을 나누고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존재 목적이어야 합니다.
적용: 성벽 공사를 끝낸 백성이 학사 에스라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당신 자세는 어떠한가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아멘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는 백성에게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나요? 말씀의 은혜와 예배의 기쁨을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나눌지 생각해 보세요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왈가왈부하게 마련입니다. 당신이 똑같은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당신에 대해 나쁘게 평가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의 평가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의 말에 이리 저리 휘둘려서는 어느 순간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뢰할 수 있는 평가만 받아들이세요. 성벽 공사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시나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설 교 >
영성적 기쁨
느 8:10-12 / 이성희목사
기쁨은 세속적 기쁨과 영성적 기쁨이 있다. 세상에서 소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기뻐한다. 논어의 서두에 나오는 기쁨도 억지 기쁨이며, 조건적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조건적이 아닌 절대적 기쁨이다. 느헤미야와 바울은 공통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개인적, 민족적 고통의 시기에 기뻐하라고 권한다. 영성적 기쁨이란 조건적 기쁨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상대적 기쁨이 아닌 모든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다. 그리고 기뻐할 때에 기뻐하는 것이 영성적 기쁨이다.
1. 영성적 기쁨은 주안에서의 기쁨이다.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기뻐하는 사람은 주안에서 기뻐해야 하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여건을 가려가면서 기뻐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주 밖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안의 기쁨이란 영성적 기쁨이며 항상 느끼는 연속적 기쁨이다. 기뻐하라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적이며 습관적으로 기뻐하라는 뜻이다. 칠십 인을 따로 세워 전도하러 보냈을 때에 이들은 기뻐 돌아왔고,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 주안에서의 기쁨은 재물의 풍족과 관계없는 기쁨이다.
2. 영성적 기쁨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기쁨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한다. 참 기쁨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율법의 목적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 있다는 점을 알리려고 하였다. 느헤미야는 먹고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나누어먹고 함께 나누어주는 것을 보시면 기뻐하신다. 염려는 기쁨의 가장 큰 적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3. 영성적 기쁨은 내게 힘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내게 힘이다. 기뻐하면 힘이 되고 기쁨은 에너지이다.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를 나의 힘이라고 하였다. 힘인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그 하나님이 내게 힘이 된다. 기쁨은 힘이라는 에너지이다. 힘의 어원은 산꼭대기이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을 물에 수장하시고 아말렉을 물리친 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은 근심하나 다시 보리니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기쁨 되신다. 이 힘과 기쁨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의 삶을 살자.
말씀 듣고 울며 기뻐하는 백성
느 8:8-18 / 이수영목사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은 느헤미야의 영도 아래 다 무너지고 불타버렸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에게서 재건해야 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너졌던 그들의 신앙적 삶이었습니다. 일단 성벽 재건축 사역을 완수한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의 영적 부흥을 위하여 제사장 겸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느8:1). 이미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졌지만 성전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느8:1에 보면 일곱째 달이 되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23:23-25에 따라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면 신년은 가을에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일곱째 달 초하루가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벽도 방금 완공되었고 새해도 된데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날은 모두가 노동을 하지 않고 쉬며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라 했으니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때를 기해 느헤미야가 백성을 모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남자나 여자나 말을 알아들을 만한 나이의 아이들까지 다 모인 앞에서 에스라는 율법책을 낭독했습니다(느8:2-3). 여기서 율법책이란 모세 오경 즉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또 율법학자로서 페르시아 왕 아다사스다에 의해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도록 임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스7:14, 25). 백성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에스라가 읽는 율법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느8:3). 그 때에 학사 에스라는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책을 낭독했습니다(느8:4).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게 하기 위해 특별히 나무 강단을 지었다는 것은 그 일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잘 계획되고 준비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을 때 그의 양 옆에 열세명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서있게 했는데 그것은 그 행사의 위엄과 진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행사를 얼마나 중요한 일로 여겼는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백성이 잘 보이도록 높은 곳에 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율법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느8:5).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느8:6).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과 절대 순종의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고 있는 동안 백성은 서서 들었으며 레위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 뜻을 해석해주고 설명해주어 다 깨달아 알게 했습니다(느8:7-8). 하나님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낭독도 히브리어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칠십 년간 남의 나라 땅에서 남의 언어로 살아야 했기에 히브리어를 많이 잊어버렸을 수 있습니다. 또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도 당시의 국제적인 외교언어였던 아람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읽는 히브리어 율법서를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이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율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레위 사람들이 통역을 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들은 백성은 다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자기들의 행위 사이의 큰 거리가 있음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본문 9절). 그러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본문 10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듣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무관심하실 수 없다는 보증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백성은 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고 즐거워하며 그 날을 지냈습니다(본문 11-12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며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백성은 다 흩어져 돌아갔지만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율법의 말씀을 보다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였습니다(본문 13절). 그들은 보다 면밀히 율법책을 살펴보다가 초막절 준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명령을 알게 되었습니다(본문 14절).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초막절을 지킬 것을 백성에게 명했고 백성은 그대로 실행했습니다(본문 15-16절). 본문 17-18절을 다시 보면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합니다. 초막절은 추수를 마친 가을에 지키곤 했는데(레16:13)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팔 일 간의 축제기간 동안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던 것입니다. 광야의 삶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리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오늘날 농사의 수확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리라는 신앙을 지켜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여호수아 이후에는 한 번도 초막절을 지킨 적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당시에 초막절을 지킬 때와 같은 정신으로 지킨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뜻대로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바른 신앙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본래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바른 길입니다.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종교개혁은 잃어버렸던 성경을 되찾고 잊어버렸던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신앙은 변질될 수밖에 없으며 교회는 부패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인의 참된 신앙의 회복이나 교회의 거룩함의 복원은 그 무엇보다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때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나 느헤미야 때의 예루살렘 성벽 수축을 통한 유다민족공동체의 복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생활의 회복으로 완성되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 줄도 모르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줄도 모른다면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며 그 말씀에서 모든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힘과 지혜를 얻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힘
느 8:8-12 / 김홍도목사
본문 10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 민족이 범죄하여 B.C. 606년부터 포로로 잡혀가기 시작하여 B.C. 587년에 귀환하였는데 이는 예레미야가 70년 후에 돌아온다고 한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유대 민족이 신앙이 타락하여 안식일도 안 지키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이방 여인과 결혼하면서 타락의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B.C. 445년에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성곽을 재건했는데 먼저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와 함께 큰 부흥회를 열고 말씀을 들려줄 때 큰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느헤미야 8장 6절에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한 말씀을 보면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온 백성이 통곡하며 재를 무릅쓰고 울며 회개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방 여인 아내를 내어보내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나 슬피 울며 통절히 회개하는 것을 보며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하고 위로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회개할 때는 울며 금식도 하고 슬퍼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다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중의 하나로서 옥중에 있으면서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성도의 삼대 생활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왔을 때 기도하시는 중에, 요한복음 17장 13절에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첫째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사탄 마귀는 근심과 의심과 공포를 갖다주지만 성령은 평안과 믿음과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슬픔이나 근심이나 두려움이 오래가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할 때 그 눈물은 진주보다 귀하지만 365일 늘 슬피 울며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자랄 때 늘 징징 울기만 하면 마음이 좋겠습니까? 할 수 있으면 “엄마 앞에서 짝짝꿍, 아빠 앞에서 짝짝꿍” 하며 기쁘게 노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 기쁨이라고 봅니다.
1. 세상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과 세상 것을 기뻐하는 것과는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대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다 못해 세상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바람같이 날아가는 허무한 것인데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욕망을 충동시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어 결국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되고 마는 세상의 물질, 재산, 부, 특권, 쾌락을 충동합니다”(Nee). 한마디로 “세상 것들 배후에는 악령이 악어처럼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달콤하고 아름답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악령에게 뼈를 깎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 다면 가정생활도 하지 말고 사업도 하지 말고 돈도 벌지 말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을 영혼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주께 드려야할 때 드리면 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 31절에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으니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세상의 조직이나 질서 배후에는 악령이 숨어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너지고 파괴되는 날이 옵니다. 다니엘 2장 45절에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주님 재림하실 때 부숴지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것은 장차 파괴되고 바람처럼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고, 세상의 물질문명이나 조직 배후에는 악령이 악어처럼 도사리고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밤 예배에도 이 넓은 자리가 가득히 차고 넘치게 모이는 것은 이 성도들이 세상의 TV 연속극이나 세상 친구나 세상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증거라고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함을 느낍니다. 또 세상 명절이나 연휴가 되어도 별 차이가 없이 주일 예배에 가득가득히 모이는 것을 볼 때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기뻐하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그 영성과 믿음에 감사가 넘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세상을 관할하고 그 조직에 살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기 전에는 세상을 땅(earth)이라고 했고 타락 후에는 세상(world)이라고 했고 주의 재림 후에는 왕국(kingdom)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발전 방향은 적그리스도입니다. 현금과 퉁소는 가인의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음악, 예술, 회화, 조각은 우상숭배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기쁨과 능력
세상의 물질, 조직, 예술 배후에는 악령이 숨어 있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나 성령의 능력이나 기도의 능력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무슨 힘과 능력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줄 압니다.
세상 과학자들도 웃음이 인체의 중요한 기관에 영향을 주어서 건강을 해치는 긴장을 완화시켜 주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큰 유익을 주고 힘을 공급해준다고 합니다. 조지 밀러 씨는 마음에 기쁨이 올 때까지 설교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악가 하이든은 “교회 음악이 어찌 그리 기쁨이 넘치느냐?”라고 묻는 말에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에 너무 기쁨이 넘쳐서 악보가 춤을 추고 뛰어오르는 것 같아지는데 그때 펜을 잡으면 악보가 춤을 추고 뛰어오르는 것같이 기뻐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기쁜 마음을 주시면 기쁜 심령(cheerful spirit)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Adoniram Judson이란 선교사가 Stonington시가를 걸어갈 때 한 소년의 기쁨에 찬 빛나는 얼굴을 보고 매혹이 되어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 소년이 후에 유명한 목사가 되었는데 그가 Henry Clay Trumbull 목사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위대한 힘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또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를 앙망하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사야 40장 29~31절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① 헌신하는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애인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나 바치고 싶고 주고 싶은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어떤 젊은이는 애인을 위해 생명도 바치는 것을 봅니다.
② 시험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불안과 근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어떤 유혹과 시험이라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③ 기도의 힘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기뻐하고 사모하는 사람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고 오래 대면하고 싶어 하는데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기도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능력을 얻습니다.
④ 인내의 힘을 얻고 성공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역겅에서도 인내하면서 성공하게 됩니다.
⑤ 마귀를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시고 피 흘려 구원해주신 것을 믿고 기뻐하는 사람은 마귀를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마귀의 위협이 올 때 겁내지 말고 기뻐하며 웃어보십시오. 승리를 선포해 보십시오. 마귀는 도망가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됩니다. 무서워하고 벌벌 떨면 마귀가 얕잡아보고 더 덤벼들고 공갈칩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겨놓고 싸우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⑥ 질병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백혈구에서 암을 억제하는 림프구가 나와서 암을 억제하게 됩니다. 사람은 매일 3,000~5,000개의 발암 요소가 나오는데 그것을 억제시켜서 암에 안 걸리는 것입니다.
3. 기쁨의 원천
여호와를 기뻐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① 속죄의 확신입니다
나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멸망받아 지옥 갈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으면 기쁨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고 귀신에게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너무 기뻐서 그 비싼 향유옥합을 깨트릴 수가 있었습니다.
②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옵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기뻐하는 것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칠 때 영원한 기쁨이 넘칩니다.
③ 죽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살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깊은 내면의 안심과 기쁨은 잃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안심시켰습니다.
④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라, 느헤미야의 말씀을 들은 뒤에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은 유행가보다 찬송가를 더 기뻐하고, TV 연속극보다 말씀 듣는 것을 더 기뻐하고, 세상 명절보다 거룩한 성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더 기뻐합니다.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이 되는 기쁨
느 8:8-12 / 배 혁목사
한 가정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여쭈었더니, 본인이 관심하면서 즐겁게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한참 말씀에 해 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보시면서 물으시기를 "그런데, 목사님은 무슨 재미로 사시나요?"라고 물으셨습니다.
분명 사람들마다 재미있어 하는 일들이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 보는 재미로 산다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돈 버는 재미로 밤낮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분들은 죽지 못해 산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그들의 슬픔이고 기쁨인지를 깨닫는 귀중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듣게 됩니다.
우리에게 많은 기쁨과 즐거움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그렇게 지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기쁨의 근원으로 삼고 힘써서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커다란 기쁨 가운데서 모임을 가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상태였고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특별히 느헤미야서는 성벽건축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가 힘을 합해서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높고 길었지만,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세워야 할 성벽의 구역을 정해 놓고 힘써서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완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업적이고 축하할 만한 기쁜 일입니다.
이제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며칠 후에 7월 1일, 나팔절을 맞이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회에 모인 것입니다.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기쁨이 되는 것은, 자신들의 집이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성벽이 건축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쁨으로 힘을 내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무너졌던 집을 다시 세우실 수 있도록 힘을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면서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보는 것은 달랐습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외형적인 예루살렘이 건축이 된다고 할지라도 더욱 본질적인 것이 유대인들에게 세워져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부릅니다. 에스라는 학자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이 제대로 재건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외적인 성벽과 성전이 세워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무엇인가를 세우고 업적을 남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루살렘보다 더 튼튼하고 높은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점령했던 여리고 성을 쌓았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참 크고 견고한 성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다가 결국 그 성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예루살렘 성도 무너졌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 앞에서 낭독을 합니다. 아마 당시에 모세 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여서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9절을 보니까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합니다. 성벽을 다 쌓은 기쁨과 감격가운데서 모인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울음바다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울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보니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전철을 밟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기쁨이 현재 있지만, 이대로 살아가게 되면 언제 또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울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는 사람들이 많이 없습니다. 그것은 울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자신들이 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슬퍼하고 근심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과 같은 통곡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진정한 토회의 울음이 언제 가능하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이 깨달아 질 때입니다.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대에 울어야 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며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높이 지어놓은 성벽을 보고서 스스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집과 큰 교회를 지어 놓고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즐거워하는 것 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근심하고 슬퍼하는 일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얼마나 주님의 말씀으로 세워졌고 그 말씀대로 다스려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과연 이 땅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말씀으로 양육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제대로 이 땅을 주의 뜻대로 살아갈 만한 말씀으로 제대로 세워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이러한 울음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경외함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일어서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함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직접 듣는 자세를 가지고 그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왕조시대의 역사를 보게 되면, 왕이 명령을 내릴 때에 직접 당사자들에게 가서 하달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도승지라고 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이 역할을 맡아서 왕의 명령을 받아 적고, 그것을 적어서 교지를 만들어 당사자들에게 알립니다. 그 때에 어명을 적은 교지를 가지고서 신하가 가서 그 당사자에게 말합니다. "어명이요, 어명을 받드시오"하면, 그 당사자는 바닥에 엎드려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서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하면서 왕의 명령을 받들게 됩니다. 어떨 때는 자신을 죽이는 교지라고 할지라도 땅에 엎드려서 전적으로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로 그 교지를 받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낭독할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6절에 보니까 여호와를 경축할 때에 백성들이 손을 들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곧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듣지 않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면서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말씀을 받들 때에 자신들의 죄가 깨달아지고, 그로 인해서 울음이 터지는 진실함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그리고 경외함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게 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이 바로 서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런데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이 우는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10절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슬픔가운데서 애통해 할 때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된 모습을 보면 근심되고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에게 여러가지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커가고 있는 자녀들을 볼 때에 그들로 인해서 기뻐하고 힘이 됩니다. 한국에는 아이들을 부모님, 특별히 아빠가 힘내시라고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도 어려워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기쁘고, 그리고 그 기쁨이 힘이 되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기쁨과 힘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쁜 일을 할 때에 힘이 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시키지 않아도 그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로서는 그 일들이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슬퍼하며 근심했지만, 에스라는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힘을 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에 그들에게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생활에서 이제 구해주셨습니다. 죄인이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힘이 되어서 또한 하나님의 더욱 기쁘시게 하는 말씀을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이제는 여호와로 인하여서 기뻐하고 힘을 내자고 말을 합니다. 이날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슬퍼 근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보면서 기뻐하며 힘있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바뀝니다. 자신들을 생각할 때에 슬픔과 울음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까 기쁨이 되고 그것이 그들의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게 되니 힘이 솟고 기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 된 모습과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볼 때에는 근심과 슬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구원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을 볼 때, 그분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고 힘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심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힘을 내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지혜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쁨의 근원을 세상의 것으로 삼고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이 기뻐해야 할 것은 여호와로 인하여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살아갈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힘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같은 힘을 쓰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쓸 때에 그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고, 그 일을 행하는 자들도 능력 가운데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에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심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시고 그 사랑을 확증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죄가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외형적인 삶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도 관심하시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올 한해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 보다도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성벽이 무너지고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 죄가 많지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과 학교, 일터 위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 안에서 그분이 나의 힘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 생기는 3가지
느 8:7-18 / 이한규목사
1. 애통
당시 강단에서 율법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회중들 사이에 있던 레위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해석해주었다(7-8절). 그때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9절).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 때문이었다. 말씀에 반응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변화와 축복의 서곡이다. 회개가 있을 때 회복도 있다.
눈물을 회복하라. 눈물이 없으면 마음에 메마르게 된다.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은혜도 없다. 눈물이 마르면 언젠가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눈물이 난다. 그때 어떤 남자가 생각한다. “남자가 눈물을 보이면 되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잘못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고 약함의 표시도 아니다. 슬픔의 눈물은 힘써 줄이되 회개의 눈물은 힘써 늘리라.
은혜가 무엇인가? 작은 감사거리에도 감사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작은 죄에도 애통하는 것이 은혜다. 예배에 한번 빠지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은혜이고, 기도를 작정하고도 금방 나태해지는 자신을 생각하며 애통하는 마음이 복된 마음이다. 회개의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웃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먼저 잘 울라. 힘으로는 안 되도 눈물로는 된다. 눈물의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고, 눈물 안에 문제극복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
2. 기쁨
당시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9절).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그치는 ‘자기 연민의 눈물’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눈물을 흘린 후 바로 넘치는 기쁨으로 승화되는 눈물이 복된 눈물이다. 말씀을 듣고 진지해지되 슬픔이 기쁨을 압도할 정도로 진지해지지는 말라. 그러면 그 진지함이 우울함으로 변질된다.
어떤 사람은 너무 진지해서 웃는 것과 즐겁게 얘기하는 것까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오해한다. 사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셈이 된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삶을 누릴 필요도 있다. 땀 흘려 얻은 물질로 얻는 적절한 누림은 잘못이 아니다. 물욕에 빠지지 말되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적절하게 누리라. 누리지 않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니다.
청빈이 꼭 미덕은 아니다. ‘깨끗할 청’자는 미덕이지만 ‘가난할 빈’자는 미덕이 아니다. 억지로 가난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누림의 축복을 중시한다.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울상을 하고, 수심에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 살지 말라. 즐겁게 살고, 때로는 먹고 마실 줄도 알라. 삶을 비관적으로 보고 즐겁게 사는 것을 나쁘게 보는 염세주의적 종교인이 되지 말라. 사는 모습과 얼굴 표정에서도 남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라.
3. 순종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성일에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하자 백성들은 그 말대로 즉시 순종해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했다(12절). 또한 율법 책에 나오는 초막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초막을 짓고 초막절을 지켰다(13-18절). 초막절 관습은 여호수아 때부터 오랫동안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그 초막절 관습을 지키면서 규례를 따라 7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고 마지막 8일째에는 폐회 성회를 열었다. 그 모습은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려는 백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말씀을 반응할 때 눈물과 기쁨으로 나타내는 감정적인 반응에 그치지 말고 최종적으로는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라. 아무리 많은 눈물을 쏟아도 순종이 없으면 그것은 감정풀이이고, 아무리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도 순종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 없는 교제와 쾌락으로 변질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살려는 것이다.
가끔 말씀을 받을 때 마음이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져도 실천이 없으면 결코 복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멘!”소리를 크게 냈으면 ‘행동으로 반응하는 아멘 소리’도 키워야 한다.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왜 교회와 성도는 많은데 세상은 그대로인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결국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교회에서 울 수 없다면 더 이상 울 데가 없습니다
느 8:6 / 이윤재목사
8월 마지막 주일에 긴 여름을 살아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축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남아서 축하드립니다”. 우리 삶의 최고 감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입니까?”. 인터넷에 “고민”이라고 쳤더니 “세대별 고민”이라는 것이 떳습니다. 사람들의 고민은 새대별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10대, 키, 성적표, 여드름, 다이어트. 10대의 고민이랍니다. 20대, 연애, 취업, 얼굴, 다이어트, 돈. 20대부터는 돈이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30대, 취업, 결혼, 탈모, 돈, 탈모가 눈에 띕니다. 40대, 승진, 자식걱정, 탈모, 돈입니다. 자식걱정이 시작됩니다. 50대, 자식걱정, 은퇴, 노후준비, 돈. 자식걱정이 맨 먼저로 올라오고 돈 걱정은 계속됩니다. 60대, 건강, 노후걱정. 60대부터는 건강이 최고 걱정입니다. 70대 이상, 질병, 그리고 죽음. 70대부터는 질병 때문에 걱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생에 고민이 없고 걱정이 없는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고민들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겨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해도 속에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주기는 커녕 듣고 소문안 내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참고 지냅니다. 그러니까 외로워서 늘 T,V, 인터넷앞에 앉습니다. 한국 사람이 하루 평균 TV보는 시간이 4시간, 핸드폰, 인터넷 시간이 4시간, 신문보는 시간이 30분이라고 합니다. 대략 하루 9시간 정도를 매스미디어앞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외로우니까 앉아 있고 앉아 있다 보면 더 외롭습니다.
어느 성탄절에 한 할머니가 우체국앞에 긴 줄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남자 직원이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다리도 아프신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응, 나, 우표 두 장만 사려고”. “그래요? 그러면 할머니, 저 앞에 있는 기계에 돈만 넣으면 우표 두장이 나와요. 저를 따라오세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 여기 서 있을래”. 직원이 “할머니, 왜요?”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서 있을거야. 저 기계앞에 가면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세요? 손자들은 잘 있어요?하고 묻지 않거든”. 참 지혜로운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기계가 편하기는 하지만 사람처럼 자기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가르칠 “교”, 모일 “회”,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거기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내 생각과 항상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곳입니다. 교회오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교회 나오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배말고 또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요 하나님께 받는 은혜라면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드려지는 예배와 사람과 함께 나누는 사랑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안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제가 우리 교인들의 목장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느낍니다. 한 목장에 갔는 데 그 목장은 70대 이상 장로님 두 가정, 50대 안수집사, 권사, 집사, 40대 집사 부부, 30대 부부, 그리고 중학교, 초등학교, 영아부 자녀로 구성된 그야말로 전 세대 목장입니다. 이 분들은 하는 일도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교회 오기전에는 서로 몰랐는 데 얼마나 서로 행복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모든 식구가 형님, 아우 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 눈물나게 아름답습니다. 최근에는 장로님 부인이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개 되었는 데 목원들이 다 장례식에 참여해 외로운 장로님을 위로했습니다. 홀로 남아 외로운 장로님을 자주 찾고 음식도 만들어 주는 등 아들, 며느리처럼 섬깁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을 아들, 며느리처럼, 젊은 사람은 나이많은 분들을 아버지, 어머니처럼 따르고, 시간만 나면 음식 싸들고 함께 여행을 다닙니다. 교회 아니면 어디서 이런 행복을 경험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교회 생활하면서 행복합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느헤미아가 그 해답을 줍니다. 느헤미아는 두 주 전에 제가 설교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주전 5세기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느8장은 느헤미아가 52일만에 성벽을 다 재건하고 당시 영적 지도자 에스라를 모시고 백성들과 말씀축제를 갖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수문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습니다. 이 광장에서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성벽재건뿐 아니라 영적 재건도 하자고 선포했습니다. 이때 백성들의 반응을 보시겠습니까? 6절입니다. 느8: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반응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에스라앞에서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히브리어로 예배를 “샤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구약에 170번 이상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엎드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몸만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엎드리는 것, 존경과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면류관를 벗어 던집니다. 면류관은 왕관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앞에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던지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던지고 겸손히 그 발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날 말씀축제에는 예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예배와 소그룹이 함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설교가 위대한 것은 예배뿐 아니라 한 가지가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7절을 보면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금 지루하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읽겠습니다. 느8: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 실명으로 13사람이 나오고 또 “레위 사람들” 했으니 더 있습니다. 모두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에스라가 설교를 마치자 이 사람들이 앞으로 쭉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각각 그룹을 짓게 하더니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7-8절입니다. 느8:7-8, “이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이 사람들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세 가지를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깨닫게” 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입니다. 느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여러분, 이것은 특이한 반응입니다. 에스라가 설교할 때만 해도 이런 반응은 없었습니다.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지만 울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흩어져 여기 저기 모이면서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7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소그룹 리더들입니다. 교인들을 영적으로 케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 목자,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에스라가 설교를 마치자 백성들을 여덟명, 아홉명, 열, 열두명으로 나뉜 뒤 소그룹을 인도하며 에스라가 설교한 내용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은 크게 셋입니다. “읽고”, “해석하고”, “깨닫게 하고”, 이 세 과정은 설교와 달랐습니다. 설교는 목회자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설교는 듣기만 하지 반응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말할 수도 없습니다.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그룹은 수가 적기 때문에 둘러 앉아 자신이 들은 설교를 기억하며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읽고, 자기가 느낀대로 소감을 말하며, 각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랬더니 은혜가 넘쳤습니다. 보통 은혜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라의 설교를 들을 때는 잘 몰랐던 말씀이 함께 나누면서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은혜받고 너무 우니까 진행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느메니아와 에스라까지 나서서 백성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느8“9,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아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울지 말라“.
여러분, 왜 이런 변화가 임했습니까? 두 가지가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소그룹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 중심은 설교입니다. 소그룹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중심은 나눔입니다. 둘다 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으로 합니다.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고 소그룹은 말씀을 나눕니다. 예배의 목적은 감동이요 소그룹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둘 다가 성령님이 감동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다릅니다. 예배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고 소그룹은 적은 사람이 모여서 합니다. 예배는 주로 주일날 드리고 소그룹은 주로 평일날 모입니다. 예배는 목회자가 인도하고 소그룹은 평신도가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자, 보시겠습니까?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 기둥이 둘이 있었습니다. 보아스와 야긴입니다(성전 기둥, 그림1). 이 두 기둥이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소그룹의 두 기둥입니다. 이것을 독수리 날개로 비유하는 분도 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가 조화를 이루어야 멀리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 날개, 그림2).
어떻습니까? 이 두 그림으로 여러분의 교회생활을 점검해 보시겠습니까? 교회생활의한 축은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니까? 교회생활의 또 한 축은 소그룹입니다. 소그룹을 우리 교회에서는 목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목장모임에 참여하십니까? 그래서 두 기둥, 두 날개로 신앙생활하십니까?
교회는 가정이요 목장은 가족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 가장 성경적인 대답은 “교회는 가정이다”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교회가 갖고 있습니다. 가정은 친밀합니다. 교회도 친밀합니다. 가정은 육신의 피를 나눴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피를 나눴습니다. 가정은 서로 의지하고 책임집니다. 교회도 서로 의지하고 책임집니다. 가정은 운명공동체입니다. 교회도 운명공동체입니다. 이 땅에 함께 살다가 천국까지 같이 갑니다. 가정에 가족이 있듯이 교회에도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이 교회안에 작은 교회, 목장입니다. 목장은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요 영적인 가족입니다. 미국 애틀란타의 노스포인트교회의 앤디 스탠리 목사님은 목장의 세 가지 기능을 A.B.C로 말했습니다. A는 Acountability(책임감), B는 Belonging(소속감), C는 Care(돌봄), 세 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려면 영적 소그룹인 목장에서 이런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1) Acountability, 책임감입니다.
가족이 갖는 가장 큰 힘의 비밀은 책임감입니다. 가족은 서로 피를 나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버릴 수 없습니다. 운명을 같이 하며 끝까지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옛날에 부흥회때 그런 이야기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아들을 다섯 둔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들이 없는 친구가 이렇게 부탁했답니다. “자네는 참 복도 많네.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 말이야. 그 중 하나만 내게 줄 수 없겠나?”.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술도 한 잔 했겠다 웃으면서 쉽게 말했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구. 자네와 나 사이에 그것도 못하겠나?” 그리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더니 안된다고 반대하더랍니다. 그래도 친구와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 한다며 아들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답니다. 한 명씩 보는 데 큰 아들을 줄까? 장남이라서 안 되겠고, 둘째는? 다섯 놈 중에 제일 똑똑해서 안 되겠고, 셋째는? 자기를 쏙 빼닮아 안되겠고, 넷째를 줄까? 넷째는 늘 몸이 약해서 불쌍해서 안되겠고, 막내밖에 없는 데 막내를 줄까? 했는 데 막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서 도저히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회요 목장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이 그 사랑이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지셨다는 것입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롬5:10,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잖습니까? 누구 하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책임짓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초대교회가 어떻게 했습니까?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초대교회는 거기 들어온 모든 사람을 책임졌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들이든 누구든 자기 것을 내서 책임졌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교회 목장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은 목장안에 형편이 여려운 교인 하나가 다른 교인에게 돈을 꾼 것 같습니다. 그 액수가 몇 천되는 큰 돈이었는 데 문제는 약속한 날에 갚지 못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업이 어려워지고 신뢰관계에도 금이 갔습니다. 같은 목장에 이런 일이 있으니 만날 때마다 얼마나 괴롭웠겠습니까? 목자가 그 형편을 알고 고민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편과 상의했습니다. “여보, 우리 목장 안에 누구 어려운가 봐요.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우리는 오랜 믿음의 형제들 아닌가요?우리가 돈을 잃을 수 있지만 형제를 잃을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대신 내주면 안될까요?” 결국 이들은 어렵게 마련한 적금을 깨서 돈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불러 이젠 옛날을 잊어버리고 다시 형제처럼 지내자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묻지만 하나님은 책임을 집니다. 세상은 잘못을 물어 책임을 따지지만 교회는 잘못을 덮어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목장은 서로 서로 사랑하고 상호책임지는 곳입니다.
(2) Belonging, 소속감입니다.
기족이 갖는 힘의 두 번째는 가족은 하나의 뿌리에 같이 소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이 같고 고향이 같고 부모가 같습니다. 서로 서로 개성은 다르지만 근원이 같습니다. 같은 목표, 같은 가치, 같은 생각을 갖습니다. 목장이 그런 곳입니다. 교회에 등록하면 호적을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호적은 있으나 가족과 만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목장에 참여하십니까? 한신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등록했건 안했던 신자입니다. 저는 등록 안하고 교회 나오는 분들에게 과도하게 권유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분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다니면 편하기s하지만 믿음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장안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신의 비밀이 노출되지도 않지만 친구도 사귈 수 없습니다. 가족이 가정에 속하듯이, 가족이 다른 가족과 만나듯이, 신자는 교회에 속해야 하고, 가족은 목장에서 영적 가족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나 중심의 시대”, 소위 “me-generation"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개인주의적이기 이기적인 시대라는 뜻입니다. 한국교회 통계를 보면 10% 이상의 신자가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다닙니다. 그리고 등록한 교인의 50% 정도가 목장모임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세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교회 소속감에 없어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떠돌이 신자가 됩니다. 둘째 교회에 깊히 들어오지 못하고 교인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의미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위기를 만날 때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최근 한 청년이 이런 내용의 글을 저에게 썻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 사는 이 청년은 판교로 이사온 후 가까워서 우리 교회 나왔습니다. 그래서 주일예배를 몇 달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만 드리고 가는 자신이 외로워 보였습니다. 우연히 전도사님의 권면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예배는 좋은 데 청년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용기를 내서 청년 예배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뭔가 모르게 미흡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청년예배만 나가고 청년 목장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부 목장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부터 소속감도 생기고 믿음도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로 제대로 신앙생활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소속이 필요합니다. 소속감이 곧 가치감이요 유대감입니다. 10% 남짓 우리 교회 미등록자도 때를 봐서 등록했으면 좋겠습니다. 50% 남짓, 우리 교회 목장모임 불참자도 오늘부터 시작하는 목장모임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고전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중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3) Care, 돌봄입니다.
가족이 갖는 힘은 서로 돌본다는 데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를 돌보고 자라서는 형제가 형제를 돌보고 늙어서 자녀가 부모를 돌봅니다. 히10:24절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목장의 첫 번째 일은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교회나오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 때문에 은혜받으러 교회 나왔다가 나중에 자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냥 교회만 나와서는 돌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목장은 돌봄의 공동체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돌보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돌보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목장에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은 눈물겹습니다. 어떤 목장에는 몸이 아픈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자주 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때마다 꼭 병원에 동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장식구들입니다. 수술할 때는 새벽마다 기도하고, 입원할 때는 동행하고, 퇴원하면 집으로 찾아갑니다. 어떤 목장의 집사님이 사고가 나 다리 수술을 했습니다. 목자가 주야로 좇아다니며 입원, 퇴원 수속해주고 퇴원하자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교회, 시장을 데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둘이 자매간 인 줄 알았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장에는 목원의 식구 부모가 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목원들이 밤을 새워 영정을 지키며 외로운 목원을 지켰습니다. 세상에 이런 의리가 없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고3 자녀를 둔 목원이 직장 때문에 바쁘자 시간있는 목원들이 돌아가면서 차를 태워 학교에 인도해 주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유학가는 목원의 자녀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장학금으로 주고 공항까지 따라가 전송해 주었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목원의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한 것을 알고 목원들이 음식을 만들어 교대로 방문하고 위로했습니다. 다른 데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니는 한신교회 목장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어떤 목장의 목원은 의사입니다. 이 분이 여름에 해외선교때가 되자 한 주간동안 자기 병원 문을 닫고 병원에 있는 모든 간호사들을 자기 비용으로 비행기표 사서 함께 선교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목장의 목원은 공무원입니다. 여름에 일년에 한번 쓰는 휴가를 내 딸과 함께 땀흘리며 해외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어떤 목장의 식구들은 모든 목원, 자녀들이 함께 자전거를 빌어 주말에 양평으로 자전거 드라이브를 다녀왔습니다. 어떤 목장에서는 전 목원이 여름 휴가를 내서 아이들과 함께 여름 가족수양회로 2박 3일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다른 데서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 한신교회 목장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서로 돌보고 사랑합니다. 시133:1 말씀대로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말씀대로입니다. 히10:24도 아십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교회가 가정이라면 목장은 가족입니다. 가족들이 하는 일은 서로 돌보고 책임지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악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데 교회에서라도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가 들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힘든 세상에 어디가서 아픈 가슴을 하소연하겠습니까? 이 세상 어디 가서 울고 싶을 때 실컷 울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마음껏 울 데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교회는 은혜 때문에 웃는 곳이면서 또한 사랑 때문에 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울지 않으면 이 세상에 울 데가 없습니다. 맹인 가수이며 작사가인 켄 미드머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언제나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을 나는 필요치 않아. 나에게는 마음껏 울 곳이 필요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우는 곳이 내가 살 곳이야.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작은 교회가 목장입니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예배와 소그룹입니다. 예배는 주일날 우리 모두가 함께 드립니다. 목장인 소그룹은 사랑하는 형제, 자매와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마음껏 이야기하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자라납니다. 외롭습니까? 힘듭니까? 교회가 울 곳입니다. 마음껏 울 곳이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아멘.
영적 부흥
느 8:5-6 / 안양준목사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신약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면 본문은 구약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와 보니 성읍은 황무케 되었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고, 성벽은 훼파되었습니다.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고, 또 훼방하는 세력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로 오십 이일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개혁, 겉으로 드러난 성공보다 심령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겉으로 볼 때 아무리 화려하고 또 교인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교인들의 심령의 부흥에 달려 있습니다.
계 3:1에 사데 교회를 향해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으로 자랑하겠습니까? 화려한 건물과 숫자의 많음이 교회의 부흥인 것처럼 착각한다면 그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대형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면서 물론 열심이 특출난 사람들도 많지만 개중에는 그 속에서 안주하는 자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실제로는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교회의 유명세를 타고 그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마치 자신의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고,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한 일을 마치 커다란 신앙의 업적을 이룬 것처럼 포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향해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내 속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겉으로 치장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에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면에 일어난 영적 부흥에 대해“진정한 영적 부흥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성도님들의 내면에 그리고 안산경신교회에 영적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심령에 사모함이 있을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 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모으게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것입니다.
시 137: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의 노래가 있습니다.
저희 어릴 적에 Boney M이라는 그룹이 이 시편의 내용을 인용하여 ‘Rivers Of Babylon’이란 제목으로 부른 것을 자주 들었는데 여러분 중에도 들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했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입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낙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전의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마침내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즉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일제히 수문 앞 광장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위한 제 1의 조건은 심령의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갈급한 마음으로 사모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냉랭한 가슴에는 불을 지필 수가 없습니다. 불꽃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모여들어야 합니다.
히 10:24에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같이 하여 온전히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핑계 삼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때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심령의 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먼저 요구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의 율법책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령의 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벽돌로 쌓아 세울 수 있지만 살아있는 성전, 즉 우리 마음의 성전은 생명이 없는 벽돌로는 세울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롬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장애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수많은 시간을 시온만 생각하며 울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까?
신앙생활은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지 않으면서 자신은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옛날에 어느 시골에 할머니들이 한 방에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호도를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 안에 있는 할머니들이 전부다 호도를 처음 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것이 뭐여?”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이리줘봐, 무엇인지 모르겠네” 그러니 그 옆에 있던 할머니가 “눈으로 본다고 아나? 흔들어 보아야지” 또 그 옆에 있는 할머니가 “내가 한번 볼께(혀로 핥으며) 잘 모르겠네” 그러니 또 옆에 있는 할머니가 “(냄새를 맡아보며)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러자 호도를 가져온 사람이 호도를 문턱에 대고 재떨이로 깨 가지고 나눠줍니다. 그제서야 “왜 이렇게 꼬소하디야!”
이렇게 해서 할머니들이 호도가 어떤 것인지,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그 맛이 어떤 것인지는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5절에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서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3절에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었다고 했습니다.
새벽을 6시라고 잡아도 6시간 동안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서서 들었습니다. 다른 시간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기도 시간만 되면 하품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내내 정신이 또렷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하다고 여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히 1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둘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창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계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여러분의 자세는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자들과 비교할 때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 앞에 스스로 귀하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할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7절에 보면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했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책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있던 바벨론에서는 아람어를 썼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읽어줄 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레위인들이 아람어로 통역을 하며 그 뜻을 설명하니까 백성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울기 시작하는데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파고들어 우리의 영혼을 수술할 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 청중들이 가슴을 치며 “형제여 어찌할꼬?”하며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적 부흥은 참된 회개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느 1:에 보면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성경에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죄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그 죄 때문에 울며 금식했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가장 큰 힘입니다.
이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느헤미야가 뭐라고 합니까?
9절에 “오늘은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12절에 이 말을 들은 모든 백성들은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며 크게 즐거워하였다”고 했습니다.(12)
회개할 때는 물론 울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의 삶 자체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일이 왜 주일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주일 만큼은 기뻐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성도의 얼굴에 밝은 빛이 감돌아야 합니다.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는데 보통 장례식 분위기가 어둡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족들이 하나같이 손님들을 웃으며 맞는 겁니다. 그리고 영정 사진은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로님의 영정은 환하게 웃는 사진을 걸어 놨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이 분의 유언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장례식에 참석을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아! 이 분은 웃으면서 천국에 가셨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장례식 사진도 웃는 얼굴로 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느 때나 기뻐할 수 있고, 세상 것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도 본문에 기록된 영적 부흥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늘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인하여 참된 기쁨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된 기쁨을 주는 말씀
느 8:5-12 / 연제원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고 무려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있게 됩니다. 그러던중 하나님의 은혜로 제2의 출애굽 사건과 같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 이스라엘로 세 번에 걸쳐 귀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성벽과 성전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것만 같습니다. 힘도 없도 물질도 없고 모두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느헤미야가 그들을 격려합니다. 용기를 줍니다. 그안에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들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리더쉽으로 온 백성이 힘을 합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무너진 성벽이 겨우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성전도 리모델링을 합니다. 이제 멋진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들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일들이 끝나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성전 동편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어른 아이 남녀 노소 무론하고 다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빽빽이 모인 그 광장에서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그가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서서 좌우에는 레위인 13명이 도열해 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채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두루마리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에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장장 6시간을 서서 성경 말씀을 읽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며 손을 들어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백성들의 회개와 통회가 시작되고 수문광장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날이 일곱째달 초하루 7월1일 이었습니다. 이날은(유대력/태양력 8-9월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한 날입니다. ‘당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날을 나팔절이라고 말합니다.
민수기나 레위기를 보면 이 날에 사람들은 일을 쉬고, 성회를 열어, 희생제사를 드려야하는 귀한 절기였습니다.(민 29:1-6, 레 23:24-25).
그야말로 말씀의 축전이며 민족적인 페스티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하늘과 땅이 함께 하는 축복의 잔치날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다시보십시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yKi hk;B; = ‘키 바카’ = ‘통곡했다’ ‘애통했다’ ‘너무 너무 슬퍼서 울고 또 울고...’
그런데 여러분! 이날은 좋은 날입니다. 나팔절입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잔치를 벌이는 민족적인 페스티벌입니다. 뿐만아니라 성벽도 완전히 재건되었습니다. 지도자도 세워졌습니다. 감격과 기쁨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통곡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애통하고 통곡하게 하고 있습니까?
좋은날입니다. 기쁜날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통곡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말씀 때문입니다.
아니 말씀이 무엇이길레 백성들이 이토록 통회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도데체 무엇이길레 모든 백성들이 울고 또 울고 슬피우는 것입니까?
아이가 울고 젊은이가 울고 여인이 울고 늙은이들이 울고 온 백성이 왜 웁니까?
자식이 죽었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까?
말씀이 무엇이길레 이들이 이토록 대성통곡을 하는것입니까?
대하34:19절 말씀을 보면 서기관 사반이 읽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자기 옷을 찟었다’고 말합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자기 옷을 찢더라”
말씀 때문에 죄가 드러나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롬 3:2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죄가 드러나면 자기 옷을 찟고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가 드러나면 그 드러난 죄 때문에 대성통곡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눈물로 회개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 덩어리인줄 알게되자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신들 의 추악함을 알게되자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절기들을 의롭게 지키지 않았던 죄악들이 그들을 애통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고 죄악된 모습이 드러나니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스러운 예배 분위기 때문에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그 상황이 너무도 감동이 되어 통곡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 때문에 통곡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만 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교훈과 도덕 윤리로는 결코 죄를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죄를 보고 통곡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돌이킬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성통곡하는 그들에게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사람들이 말합니다.
9-10절입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나팔절 좋은날이니 슬퍼하지말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가 드러나면 대성통곡하고 회개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울지말고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이 나팔절인데 축제 분위기 망치니까 울지 말라고 하는것일까요?
이렇게 좋은날 우는 것이 재수없으니까 울지 말라고 하는것일까요?
사실 지금 백성들은 애통해야합니다.
은밀하게 죄악을 즐기고 이방인들과 놀아나고 타락한 그들은 당연히 애통해야합니다.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다보니 통곡할 수 밖에 없는데 ‘왠 기쁨’입니까?
그래도 공사가 잘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것인가?
10절하반절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우리도 동일하게 기쁨이 됩니다.
그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우리도 동일한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기쁨과 감격속에 살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정한 감격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은혜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매너리즘 빠져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녀도 믿음으로 교육하지 않습니다. - 과외, 공부, 경쟁, 과열교육...세상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 나만 주님과 바른관계를 유지하면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줄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 내 삶의 우선순위가 나 자신이고 가족이고 물질이고 운동이고 건강입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채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냥 웃음을 띠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죽겠다해도 여전히 쌀독에 쌀이 있고 먹을것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별탈없이 잘 커줍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훈련, 예배 기도 이런데서 오는 기쁨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세상사람들과의 관계에서오는 기쁨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것보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기쁘고 즐겁습니다. 뿐만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더 기대를 가집니다.
여러분! 이런것들로 오는 만족의 웃음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자녀들 잘되게 하기 위해 공부 열심히 시켜야 합니다. 서울대학도 가야하고 장관도 나오구 의사도 나오고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건강해야 합니다. 아프신데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한채 타락하면 안됩니다. 돈 많고 타락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좋습니다. 사랑도 나누어야 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세상사람 만나는 것이 더 즐겁고 기쁘고 더 소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진정한 만족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곤고함을 보지 못하고 살면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왜 이땅에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상실했습니까?
왜 이땅에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언제 한번 크게 웃어본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웃지 못하고 기쁨속에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예수님은 산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절)
세상 사람들은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얼굴에 인자한 웃음과 상냥한 웃음을 나타내고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보다는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웃기 위해서는 먼저 울어야 합니다.
참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먼저 슬퍼해야 합니다.
그래서 눅 6:21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시 30:5절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전7:3절입니다. "슬픔이 웃음 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우는 자가 웃습니다.
슬퍼하는 자가 기뻐합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것이 복된 심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데, 애통이 없는 자는 지옥의 가장자리에 서있어서 까닥하면 미끄러질 수있는 상태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죄를 미워하면서 통곡하게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슬픔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눈물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죽었을 때에 눈물을 흘리며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눅 22:60-62절을 보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마지막 세 번째로 부인하자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울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통곡하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애통하게 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죄를 통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죄를 보면서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통곡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느껴지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느껴지면 이것이 기쁨인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고 있는 자녀의 상한 마음을 오래 갖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음이 상하여 상처가 깊어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이 기뻐하고 웃음가운데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죄를 보게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알게 되니 처음에는 회개하여 근심하여 슬피 애통했지만 나중에는 말씀 때문에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오직 말씀만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말씀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은 삶의 에너지입니다.
말씀은 봄기운과 같은 에너지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족 여러분!
가정문제로 부부문제로 기쁨없이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업문제로 물질문제로 고통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모양 저모양의 얽히고 설킨 문제 때문에 고통가운데 계신분도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인 문제로 고통가운데 계신분들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오후 2시에도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수요일저녁에도 금요일저녁에도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매일 새벽마다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에 여러분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느 8:4-6 / 이한규목사
< 말씀을 높이라 >
수문 앞 광장 집회에서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섰을 때 그의 우편에는 6명의 리더들이 도열해 서 있었고 좌편에는 7명의 리더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4절). 그 장면을 보면 말씀을 높이고 경외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그때 에스라가 두루마리로 된 하나님의 율법책을 펼 때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5절). 그 모습도 말씀을 높이고 경외하는 모습으로서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면이 새로워지길 원하면 자신에게서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게 하라. 또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높이며 소중히 받으라.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진다. 참된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어느 날 기도 중에 말씀을 받았다.”라고 하면서 말씀에서 벗어난 얘기를 한다. 말씀에서 벗어난 말에 현혹되지 말라. 오직 말씀 안에만 참된 자유와 치유와 축복과 행복이 있다.
가끔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 딱 서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좋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어도 말씀을 주시고 책상에 앉아 묵상해도 말씀을 주신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사전에 준비도 없이 강단에 딱 서서 말씀을 받기만을 바란다면 위험한 일이고 게다가 그것을 자랑까지 한다면 그것은 신령한 모습이 아니라 어리석은 모습이다.
엄밀히 말하면 준비 없는 설교는 죄악이고 기도와 땀이 농축되지 않는 설교는 말의 유희가 된다. 그것은 말씀을 가볍게 보는 태도다. 사람은 즉석에서 주일말씀을 전하는 것을 더 신령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주초부터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것을 더 신령하게 보신다. 그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잘 준비해야 하지만 말씀을 받는 사람도 열린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 그냥 듣기보다는 최소한 예배 10분 전에 와서 기도하며 “하나님! 오늘 말씀을 잘 받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말씀이 더욱 은혜가 된다.
< 말씀으로 돌아가라 >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기 전에 먼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며 반응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6절). “아멘!”이란 말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다양한 뜻이 내포된 표현이다. 말씀에 “아멘!” 하고 열정적으로 반응했던 당시 백성들처럼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 새로움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커진다.
어떤 교회는 ‘아멘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졸다가도 “할 줄 믿습니다!”라는 어투가 들리면 무조건 “아멘!”을 한다. 그러다가 엉뚱하게 “아멘!”을 할 때도 한다. 그래도 밉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반응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제일 “아멘!”을 많이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 말씀에서 ‘진실로’라는 말이 바로 ‘아멘’이란 말이다.
모세도 말씀을 전하면서 백성들에게 아멘을 하라고 명령했다(신 27:16-26). 미국에 가면 흑인 교회는 대개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반응한다. 반면에 백인 교회는 대개 점잖게 예배를 드린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동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고 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말씀에 대한 반응만은 다 뜨거워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찌릿찌릿한 감정이 생긴다. 말씀을 들을 때도 그런 영적 감응이 있기를 구하라.
한국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성도는 없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정직한 사람이 가끔 실수하는 것은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이다. 남이 뒤에서 딴 소리하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다. 사람을 믿어주되 의존하는 믿음은 갖지 말라. 사람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느 8:4-12 / 이민성목사
여러분 세상에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찾으시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실까요?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인을 찾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있던 그곳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성을 사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지만 의인을 확신하지 못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타협하면서 계속해서 숫자를 줄이는데 30명 20명으로 줄이다가 마지막에는 10명까지 타협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셨을까요?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 를 찾으신다고 하셨는데 곧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 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고 다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는다고만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께서 찾으신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가 많지 않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으면 굳이 찾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면 굳이 찾으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받으시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냥 예배의 시간에 참여한다고 그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예배를 하나님께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에 중요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중에 공적인 예배 시간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예배가 있습니까?
매일 새벽,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목장예배, 주일 낮 저녁등등 이렇게 많은 예배의 시간이 있는 이유는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시간, 많은 횟수의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보듯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똑같은 예배의 시간과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있는데 그러한 예배가 되기 위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영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만나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부모님의 생신을 차려드리는 것과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을 차려드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생일잔치는 축제입니다. 기쁨입니다.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익을 자르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웃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제사 드리는 집에 가보면 음식은 생일잔치 때 차린 것보다 오히려 더 좋은 재료를 준비하지만 왜 제사 드리는 집은 기쁨도 없고 웃음소리도 없을까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생일잔치에는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지만 제사상 앞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우리가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주인공 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영으로 임재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일단 우리가 예배드릴 준비를 한다면 무슨 생각부터 하십니까?
일단 음향에는 문제가 없는지, 예배순서대로 찬양대는 준비가 되었는지, 기도는 누가 준비하였는지, 헌금은 누가 준비하는지 그런 것들을 확인하고 예배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준비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준비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각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준비해야 할 것이 ‘영과 진리’ 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만일 내 감정이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도저히 예배드릴 수 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감정에 너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지금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배에 빠지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에 좌우되는 예배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죄에서 사함 받고 영원한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요?
슬퍼할까요? 우울할까요? 괴로워할까요? 아닙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렇지 못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며 ‘지금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에 우리의 감정에 휩싸여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의 감정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 드려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영으로 드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놀랍게도 구원의 감격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가 나오며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이 되고, 죄로 인해 통회하며 회개의 눈물이 흘리고, 찬송을 불러도 감동이 되고 기도가 은혜가 됩니다. 왜입니까? 영으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영으로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마음을 뛰어넘어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닌 반드시 영으로 드려야 할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 다음은 진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진리로 드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죄사함 받고 구원 받았음이 진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는 예배, 십자가가 없는 예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곳에 임재하시고 그러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느헤미야서는 1-7장까지는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쌓아 회복한 내용이고, 8-13장까지는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적인 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의 회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예배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배였습니다.
구약시대는 ‘제단을 쌓았더라’ 는 말씀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와 같은 의미로 오늘 말씀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다 재건한 후에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모든 백성’ 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녀노소 모두가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느헤미야나 에스라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곱째 달에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3절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서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다 모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여야 합니다.
물론 신앙심이 아직 제대로 생기지 않거나 믿음생활 잘하다가도 시험이 들면 자발적으로 참여함이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자발적으로 참여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일이든 수요일이든 예배에 참석하실 때 억지로가 아닌 자원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할 때에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것으로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예배는 말씀을 사모하고 반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목적이 무엇 때문입니까?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지 못하는 환경에 처했거나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동안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인 백성들은 말씀을 가져다가 읽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읽으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요청 하였고 5절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서 말씀을 펴니까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일어섰다는 것은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앉았다가도 어른이 들어오시면 일어서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생각하여서 말씀을 펼 때에 일어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손을 들고 아멘하며 몸을 굽혔다는 것은 말씀에 구체적인 반응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또 이들은 9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다 가르쳤을 때에 이것을 깨달은 백성들은 모두가 다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씀에 반응하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신 말씀과도 같이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며 읽고 듣고 지키며 말씀에 늘 반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며 바로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예배는 감격과 기쁨이 있는 마음입니다.
백성들이 회개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느헤미야와 제사장인 레위 사람들이 ‘오늘은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며 울지 말라’ 고 하면서 오히려 음식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고 구원자 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0절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된다’ 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은 지금의 환경을 보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너희의 힘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의 예배의 자세와 태도는 어떠하셨습니까?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이 날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사모할 말씀의 부흥
느 8:1-9 / 이동원목사
유명한 전도자 요한 웨슬리의 집에 청년 강도가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자기 지갑에 있었던 돈 모두를 끄집어내어 그에게 주면서 “형제여, 이렇게 합시다. 이것을 당신이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합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란 말이요“대꾸하며 돈을 받아들고 돌아서서 집을 나가는 강도를 요한 웨슬리는 다시 불렀습니다. ”잠간만 내가 당신에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오. 이 책을 가져가시오.“ 강도는 황급하게 그 책을 나꿔채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책은 웨슬리가 귀한 손님들에게 전달할 용도로 준비된 잘 포장된 성경이었습니다. 수년후 어느 집회에서 웨슬리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웨슬리에게 이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해 전 목사님의 집을 방문해서 선물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때 돈과 함께 선물로 주신 성경을 읽고 저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저도 오늘 목사님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때 받았던 돈의 갑절입니다. 이 돈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써 주시고 저를 목사님의 동역자로 받아 주십시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로 한 가정의 운명이 때로는 한 민족의 운명이 바뀔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런 힘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어떠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되고 지탱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거듭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후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에스라(학사:서기관)라는 영적 지도자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재건하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의 재건은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마음의 재건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내일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마음의 재건을 가르쳐 부흥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수문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은 부흥이었습니다. 이 시대 이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이런 말씀의 부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부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 우리의 소망과 승리의 삶을 위해 이 책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이, 이 성경이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책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예루살렘 성의 건축에 바빴던 이 백성들은 이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성의 건축만으로 그들의 내일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토라, 모세 5경)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1절을 읽어보십시오. 당시에는 성경 사본이 희귀했기 때문에 개인 소장은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적으로 모여 말씀을 읽고 들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5절에는 이 성경이 읽혀지기 시작할 때 온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말씀의 권위앞에 존경을 표현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 말씀의 한절 한 절이 읽혀 질 때마다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볼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는 그들이 성경을 읽는 일에 어떻게 몰두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3절에 의하면 그들이 성경을 혹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 봉독을 얼마동안 했습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적어도 6시간 이상을 한 것입니다. 지금 주일 아침에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 도망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루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8장 마지막 구절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초막절 절기가 계속되는 한주간 이상 날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부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휴가철에 조용한 곳에 가서 가족들이 돌아가며 하루에 4시간이상(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성경읽기를 하는 이런 휴가도 계획할수 있기를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가정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읽기는 모든 축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바람직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계1:3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본문에는 깨달음의 중요성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무려 6번이나 이 깨달음이라는 의미, 영어로는 ‘understanding'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선2-3절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알아들을만한 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기록됩니다. 7-8절에 보면 여러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는‘일에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12-13절에 보면 ’밝히 알게‘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자, 이런 목적으로 그들은 수문앞 광장에 온 백성이 모여 에스라가 읽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목적으로 집중하여 듣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의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한 소명은 이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변함없이 설교자의 소명이 바로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교의 여러 가지 스타일 중에 강해설교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강해설교는 제목설교와 달리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하여 그 뜻을 깨우치는 것을 생명으로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왜 깨달음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깨달은 만큼만 실천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QT의 생명도 본문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깨달은 그 만큼만 그 말씀을 붙잡고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씀을 많이 읽어도 깨달음이 없이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장에 성육신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우리가 그 음식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그 음식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소화하지 못하고 다 토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많이 읽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적절한 분량을 읽고 성령님의 깨우치심을 기도하며 묵상하십시오.
3.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고 깨달은 말씀이 육화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그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반응을 다시 두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정서적 반응과 의지적 반응이었습니다. 어떤 정서적 반응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 눈물과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왜 울었을까요? 말씀에 감동된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전체의 문맥을 읽어보면 이 눈물은 그들의 죄에 대한 말씀의 지적앞에 흘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깨달은 말씀을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12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때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고 선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최근에 눈물과 기쁨으로 말씀을 읽고 받으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한 때라고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본문에서 이런 진지한 정서적 반응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보다 중요한 의지적 반응을 준비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의지적 반응은 다시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이 말씀을 통해 받은 축복을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그것이 바로 성령을 경험한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동일한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느헤미야 9장이하를 읽어보면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이 듣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보여준 궁극적인 반응은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돌아온 에스라의 비전이 아니었습니까? 에스라7:10을 읽어보십시오.“에스라가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느헤미야의 비전이 성벽재건(하드 웨어)이었다면 에스라의 비전은 마음의 재건(소프트 웨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먼저 이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안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부흥은 새 시대를 가져오는 부흥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말씀의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수년전 공산주의가 무너지기전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서는 “턱시도를 입은 예수”라는 제목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반신적인 연극이 상영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주인공 예수 역으로 출연한 사람이 알렉산더 로스톱제브(Alexander Rostovzev)라는 미남배우 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교회 나가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그가 주인공으로 결정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극의 절정에서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 두 구절을 낭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5:3-4) 이 말씀을 읽던 그는 두차례 더 반복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연극을 지휘하는 스탭들은 다음을 진행하라고 무대뒤에서 싸인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무대에 무릎을 꿇습니다. 무대의 막은 내려졌고 연극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날 그는 예수를 모독하는 역할대신 예수앞에 돌아와 예수를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말씀이 가져온 승리요 부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使役)
느 8:1-6 / 김장환목사
★ 신비의 책
말씀이 빠진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말씀이 빠진 사역도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전도도 전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선교도 선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세계에서 가장 쉬운 책입니다.
1,850종류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중의 말씀입니다. 정치 연설에서, 교육 훈화에서, 소설과 시에서, 그리고 희곡과 드라마에서 성경 말씀이 많이 인용되는 줄 압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금서가 되고, 추방당하기도 하고, 불에 태워지기도 하고, 찢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담배 마는 종이로도 사용되며, 먼지가 수북히 쌓이도록 방치되어 괄시 받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흐르며,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혁명의 책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반성케 하는 책이며, 기도하게 하는 신비의 책이 바로 이 성경책인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에 일본 군국주의가 몰락되어 가는 때에 일본 동경 제국대학에 기독교인인 「야나이」씨가 신임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자 당시 고분(古墳)학계의 권위였던 「운천 運天」교수가 "도대체 총장의 취임 연설이 마치 기독교 교회에서 하는 설교와 같은데, 저래도 되는가?"하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불평을 들은 야나이 총장은 운천 교수를 만났습니다.
"교수께서는 성서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일이 있으십니까?"하고 묻자, 운천 교수는 읽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야나이 총장은, "한번이라도 성경을 읽고 난 다음에 저를 비판하십시오!" 운천 교수는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전서를 사서 창세기서버텀(부터) 읽어내려 가다가 여러번 중단을 했으나 시편과 잠언을 읽어 가는 동안에 기독교의 깊은 도리를 깨닫기 시작했고, 예언서를 거쳐서 누가복음에 이르러,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내용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여 신학을 공부한 후에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가 담긴 책인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느헤미야 8장은 그 성경 말씀의 위력이 담겨져 있는 내용의 말씀인고로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행여나 성경 말씀을 등한시하거나, 읽는데 게을리 한다면, 다시 한번 분발해서 이 성경을 붙잡고 믿음 생활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 「에스라」
느헤미야 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증거자, 말씀을 낭독하는 낭독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메신저 Messenger」가 누구입니까?
느헤미야 8장 1절 2절을 합독 하시겠습니다. 주보에도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水門)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메신저가 누구였습니까?
'제사장(祭司長)「에스라」' 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말씀에 능한 자입니다.
제사장은 말씀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말씀의 뜻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먼저 1절에서는 이 사람을 학사(學士)라고 했습니다. 학사는 말씀의 전문가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자입니다. 말씀을 기록하는 자를 바로 학사라고 합니다. 제사장이며 학사인 「에스라」가 율법 책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책 '느헤미야'의 1장에서 7장까지에는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가 주도한 제 3차 귀향과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重建)에 관해 서술되어 있으며, 8장서버텀(부터) 13장까지에는 느헤미야가 에스라와 함께 추진한 종교 개혁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무사히 완공했습니다만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유대 사회 내부에 영적인 부흥을 도모하기로 결심하고, 그 첫 단계로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 책을 낭독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인 까닭에, 또 「에스라」는 학사로서 진리를 잘 터득한 사람인 까닭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능력 있는 말씀이 낭독되면은 반드시 거기에는 변화가 옵니다!
엊그저께 저는 우리 교회 몇 분들하고 함께 도라산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거기는 통일의 첫 단추를 끼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인 18일부터 경의선 철도 연결 작업이 남북간에 시작되는데, 그 비무장 지대에는 아직도 지뢰가 무수히 깔려 있습니다. 그 지뢰 제거 작업을 하는데, 행여나 우리 국군들 사고나지 않도록 군단장이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 데려다 예배를 먼저 드리고 작업에 들어가야 되겠다"면서 저더러 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만약에 군단장이 만약 예수 안 믿는 불신자였다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곧장 제거 작업에 들어갔겠지요.
그 날 장병들이 도라산 전망대에 꽉 차도록 모였습니다. 앞에는 개성이 훤하게 보이는데, 거기서 철도 연결 작업을 하기 전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경기장 열 개를 지어서 다섯 군데에서 지난 부활절 연합 예배를 드렸고, 일본에서도 열 개를 지었는데, 거기서는 예배가 통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4강에 올랐고, 일본은 16강에 주저앉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는 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18일 날서버텀(부터) 공사가 시작될 겁니다. 뉴스에 계속 나올 겁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교회에서 수건 등 몇 가지 위문품과 떡을 해 갖고 가서 예배드리고, 말씀 선포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쁘게 봐주시고 사고 없이 연결이 될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 어디 강대상이 광장으로…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한 장소가 어딥니까?
본문 3절에 보십시오.
『수문(水門) 앞 광장에서~』
수문 앞은 열린 광장입니다. 그 당시에는 상수도가 없으니까, 모두다 우물로 물을 길러 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말씀을 낭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요.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더라!
열린 광장에서 말씀을 낭독하게 되니까 사람들이 서로간에 개인적인 체면이나 부끄러움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어요.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축복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에스라가 어디에 서서 읽었다고 했습니까?
여기 보니까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서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강대상을 두드리며) 이 강단은 성전에 있어야지, 어디 강대상이 광장으로 나오고 거기서 읽습니까?
그러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낭독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대상을 광장을 옮긴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성전이라고 한다면은 성전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강대상을 광장으로 옮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외쳐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고, 인간의 사상, 인간의 사고, 인간의 철학, 인간의 과학, 인간의 심리학, 인간의 생각을 전파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강대상을 광장으로 옮기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聖殿)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패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강대상이 번화한 광장으로 이동이 되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주로 어디에서 말씀을 증거 하셨습니까?
「베드로」의 배(船),
'쪼끔 멀리 띄워라!' (하시고)
거기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얼마나 반대를 했습니까?
(그러니) 말씀을 선포하는 강대상이 열린 광장으로 이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강대상을 열린 광장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낭독에 귀 기울인 사람들
「에스라」가 낭독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2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느헤미야 8장 2절에,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많은 숫자가 들었다고 하는 얘깁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귀향을 해 가지고 성을 재건한 다음,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일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고 들려줘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올 것 같으니까, 선지자요,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를 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 월남 이상재 선생님은 구한말에 일제 시대에 살던 민족의 지도자요 애국자이십니다.
그는 YMCA 총무로 있으면서 기독교 복음화 운동으로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데 노력하고, 독립을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당시 서재필 박사, 이승만 박사로부터 수 차례 예수를 믿으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자기가 숭배해온 유교의 도리와 너무 거리가 멀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핑계로 번번이 거절 해 왔습니다. 그러한 그가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감방 마루 틈에 때가 잔뜩 묻은 종이 조각 하나를 발견해 끄내(끄집어내어) 보니, 마태복음 5장 38절, 39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이 말씀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원수인 일제(日帝)와 끈덕지게 싸워나가야 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니, 그건 일제에게 "잡아 잡수시오!"하고 내 맡기는 것 밖에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씀을 읽은 후에는 계속 그의 마음이 울렸습니다. 꼭 자기에게 하는 말씀인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 말씀의 진리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해, 마침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한 그 말씀에 이상재 선생이 무릎을 꿇고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 8장 5절에 보니까,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 가면 성경 낭독할 때에는 교인들이 다 일어서는 교회가 있더라고요. 최대의 경의를 하나님의 말씀에 보여주는 겁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느헤미야 8장 6절)』
'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간절한 감동의 표현이며, 절대적인 순종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뜻입니다.
'아멘으로 응답했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때마다, 말씀이 끝날 때마다, "아멘!"하는 것은 '나도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고, '몸을 굽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을 표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교회는 별로 그런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만, 찬송가 부를 때 입도 안 벌리고, 기도 할 때는 눈을 멀뚱멀뚱, 설교 할 때는 꾸벅꾸벅 자고 있어요.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낭독했을 때에 포로에서 귀환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지혜를 얻고, 변화되고,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읽어 준 말을 밝히 알게 되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사람의 태도가 또한 중요합니다.
느헤미야 8장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이념, 자기의 사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율법을 낭독했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이렇게 말씀을 선포할 때 결과는 반드시 나타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9절을 한번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말씀을 듣고 나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복의 눈물을 흘립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했는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얻고, 얼마나 울었나?
그런데, 계속해서 그 말씀을 보십시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무슨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결과가 나타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면 결과가 나타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결과가 나타나야 되는데, 그 결과가 8장 12절에 나옵니다. "8장 12절은 빨간 줄을 쳐 놓으세요!"
『모든 백성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울던 사람들이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며 학사인 「에스라」그리고 또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주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어라!' 왜? "이는, 그 읽어 준 말을, 밝히 알게 되었느니라!"
■ 「짐 보스 Jim Vaus」라고 하는 사람은 젊은 시절에 성경학교에 들어갔으나 학교에서 도둑질하다가 들켜 쫓겨났습니다. 다른 대학에 들어가서도 무장 강도 짓을 하다가 실형을 선고받고 퇴학을 당했어요. 2차 대전 때에는 육군 대위까지 진급을 했으나, 미 연방 정부의 재산을 훔쳤다고 실형을 받고 불명예 제대를 했습니다. 그렇게 제대하고 나서 1949년에는 군에 있을 때에 배운 것을 이용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도청 사업자와 결탁하여 도박꾼들로 하여금 경마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에 승산이 있는 말에 돈을 걸게 하는 전자 장치를 만들어서 「메케이 코헨」이라고 하는 범죄 조직단에게 팔았습니다. 이와 같이 도적질에 관한 일이라면 안 끼는 곳이 없던 그가 「빌리 그레함」목사님 전도 집회에 참석해서 통절하게 자기 과거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남의 물건 훔친 것을 깊이깊이 뉘우치고, 가지고 있던 전 재산 1만 5천불, 자동차, 집 등을 모두 내놨습니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깨끗한 몸이 된 그는 「유쓰」개발 회사의 사장으로 일하면서 뉴욕시 동부 할렘의 깡패 두목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전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던 그의 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물질을 나누어주는 귀한 손으로 바뀐 것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나오고 있지만 술 담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이 해결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 당신도 꼼짝없이 하나님 앞에
이번 추석에 선한 일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에 떡 혼자만 먹지 말고, 어렵고 나보다 더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추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엊그저께 '경안전선'(교회 성도가 창업한 회사) 준공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교인) 김 0 0 사장하고 합작하신 회장이 아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에 내가, "왜 교회 안 나가십니까?"하고 물어봤더니 "교회 가면 십일조 내라고 해서 안 나갑니다." 그래요. "우리 교회 나오면 내가 십일 조 내라고 안 그럴테니까 우리 교회 나오십시오!" 하니까, 싱그레 웃어요. 그런데 그 분과 제일 친하게 지내는 분 세 사람이 계시다는데, 그중 두 사람이 마침 장로님이고 내가 아는 분이어서 내가 그 두 장로님한테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래는 거여~ 왜? '그 친구가 어떻게 김장환 목사 데려다가 준공 예배에 설교를 시키느냐?' 그 사람이 시킨 게 아니라 우리 김 0 0 사장이 합작하기 때문에 갔었다고 얘기하면서, 내가 전도를 시작했다고 말했지요. 그 회장이 자기는 '교회 안 나간다.'고 말할 때, "내가 당신을 끌고 올 힘은 없지만은 우리 교인들이 기도하고, 성령께서 역사하면은, 당신도 꼼짝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랬어요. 왜? 그 부인이 또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신자래요! 그러니 마누라가 기도하지, 우리가 기도하지, 그 친구 장로 두 사람이 기도하지, 끈질긴 이 김 목사(자칭)가 전도하지.(웃음) "자기가 어딜 가? 갈 데가 없지!" 거기다 우리 김 0 0 사장도 집사를 빨리 맨(만)들어야 되겠는데-, "집사하고 집사 아닌 거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여~" 왜?
이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들만 직분을 받는데, 어떤 사람은 마누라한테 인정받아 가지고 집사 된 사람을 나는 더러 봤어! "하아~" 그 마누라 집사가 그냥~ 우리 부목사 찾아와서 자기 남편 집사 시켜달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그냥 난리를 떼리는지, 할 수 없이 명단에 집어넣었어요. 그렇게 집사가 되어서 가나다 순서로 예배에서 기도할 차례가 돌아왔는데, '죽어도' 자기는 기도 못하겠대요, 왜? 여기만 올라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대요. 목이 "콰악!" 잠기고-, 그래서 자기는 기도 못하니까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그냥 넘겨 뛰라고 "맨날 그랜대(그런대요)!" 그래 내가 그 부목사한테 "어이! 과외 공부 시켜!" (웃음)
집사가 되어가지고 대표 기도 한번 못하면은 하늘 나라에 가서 주님 만나서 뭐라고 대답할거여!
"어이 너 대표 기도 많이 하고 왔지?"
"한 번도 못 해고(하고) 왔습니다."
"왜~? 안 시키더냐?"
"아닙니다. 제가 건너뛰라고 그랬습니다."(웃음)
어차피 교회 발을 들여놨으면 열심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에 선한 일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 시대를 여는 힘
느 8:1-12 / 오정호목사
지난주간 군복음화(軍福音化)를 목적으로 설립된 계룡대 본부교회에 있는 군선교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6.25 전쟁 중 어떤 카투사(KATUSA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United States Army, 미 육군에 파견 근무하는 한국군인) 병사가 미군처럼 출전하기 전에 목사님께 기도 받고 전투에 임하게 해 달라고 이승만대통령에게 간청을 올려서 군종목사 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도나 좋은 일은 우연히 생기지 않고 어떤 사람의 희생과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말씀의 부흥, 심령의 부흥, 가장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회복하는 은총의 현장입니다. 이 부흥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사용하신 결과입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5절).
이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6절). 특별히 말씀강단에 선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거듭 반복해서 백성들이 손을 들었다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아멘 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부흥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부정적인 시대입니다. 탈권위(脫權威)시대입니다. 이 부정적인 시대에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아멘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입술로 주님을 송축하고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바로 영적부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통해 영적 부흥을 일으키셔서 새 시대를 열어 가시는지 그 원리를 함께 나누시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믿음의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느 1: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矜恤)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헤미야 1:5).
느헤미야서 전체를 주도하는 두 사람은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흥을 가져오게 한 영적 채널로 쓰임 받은 느헤미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적어도 두 가지를 믿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① 느헤미야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할 때 바벨론 포로라는 심판의 채찍을 내리시지만 회복의 약속을 이루어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포로 생활로부터 되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석같은 비전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사람이 이끄는 교회가 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이끄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주님이 약속해 주셨습니다(마태복음 28:20).
사람의 잔재주와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 이끄는 가정과 사람이 될 때 그의 삶은 일시적으로 흔들린다 해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약속은 과연 무엇입니까?
② 느헤미야는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긍휼은 히브리말로 헤세드(Lovingkindness, Steadfast love)인데 헤세드는 인자, 사랑이란 말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라고 느헤미야는 고백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향하신 그 긍휼하심과 사랑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귀한 일을 감당할 때 반대하거나 음해하는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확신했습니다.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느헤미야 2:20).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신뢰하십니까?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되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하고 우리 교회가 이끌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헤세드의 은총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있는지 점검을 해 봅시다.
둘째,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 새시대를 열어갑니다(느 1:2-3).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느헤미야 1:2).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의 최측근으로 수산궁에 있었던 출세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동포를 향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또한 그는 형제와 예루살렘의 소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느헤미야 1:3).
새 시대를 열어가는 첫 번째 힘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그 두 번째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곧 이웃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의식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우리 스스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달라는 것이 우리를 향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요구입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우리가 실천적인 사랑의 삶으로 부응해야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 이웃, 시민, 민족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사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느헤미야 1:4-5).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그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사랑의 힘을 가진 교회가 되어 교회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의해 "이스라엘을 흥왕(興旺)케 하는 사람"이란 별명까지 붙었습니다(느헤미야 2:10). 여러분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리적인 논리로는 그들의 머리를 얻지만 가슴을 데우는 사랑으로 그들의 인생을 얻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삶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삶의 능력은 도덕적인 탁월성, 삶의 모범, 진리의 일상화, 말씀의 성육화(incarnation)라고도 합니다. 지난번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는 히딩크 감독에게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삶으로 우리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삶으로 말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입을 닫고 묵묵히 서 있을 자리에 서서 봉사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실천되었을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절기를 지키는 것, 언약을 갱신하는 것, 가정생활에 있어서 안식일을 회복하고 십일조를 회복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율법주의는 법이 앞서는 것이지만 복음주의는 사랑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내면의 상태를 잘 분별하는 가운데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제 우리가 고백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믿음의 자세와 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내일이 결정됩니다. 느헤미야의 마음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신앙인격과 비전은 온 이스라엘의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을 꼭 이루시고 형통케 인도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힘을 가집시다.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사랑을 가지고 가족, 이웃,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 넘읍시다.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함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 갑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도덕적인 탁월성, 삶의 탁월성으로 삶의 능력을 보여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시대를 힘있게 열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