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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식 / 왕방연의 눈물, 먹골배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 1편』... 한강문학 2021년 봄. 24호... 2021.3.25. 발행
■ 안재식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 1편 』
- 왕방연의 눈물, 먹골배
。 한강문학 2021년 봄. 24호
。 2021년 3월 25일 발행
。 정가 15,000원
왕방연의 눈물, 먹골배
안재식(1942~)
세종대왕은 이방원의 셋째아들이다. 그의 큰형 양녕은 아버지 이방원과 불목하다가 폐세자가 되었고, 충녕이 왕세자에 책봉되어 나중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후환을 꺾으려고, 큰아들 향을 8살 때에 미리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겠는가. 세종 또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병약한 세자 향이 5대 임금 문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임금이 된 지 2년 3개월 만인 39세에 외아들 홍위(단종)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1명과 딸 2명밖에 낳지를 못했다. 문종은 죽기 전에 믿을만한 신하를 불러 세자의 앞날에 대하여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을 남겼다.
“짐은 이미 명을 다한 것 같소. 어린 세자를 잘 보좌하여 주오!”
세자는 12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6대 임금 단종이다.
나이가 어린 왕은 놀고 싶을 때 놀고, 눕고 싶을 때 누울 수 없는 신세가 불편하였다. 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신하들이 귀찮았다. 또한 하루에도 옷을 몇 차례씩 갈아입히고는 군왕의 길을 가르친다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은 살육을 벌일 만큼 욕심내지만, 단종은 귀찮고 서글프기만 했다. 그럴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혼인 단종은 천애고아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과 왕족들(아버지 문종의 형제들이며, 할아버지 세종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단종은 고명대신들이 하라는 대로 도장만 찍었다.
“전하, 조정 대신들의 인사명단입니다. 여기에다 표시를 해놓았으니, 결재하시면 됩니다.”
이름이 적힌 곳에 대신들이 황색점을 찍어 올리면 그 점 위에다가 낙점을 하면 그만이었다. 이른바 황표정사 제도를 쓴 것이다.
고명대신들을 괘씸하게 여긴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이 왕의 권한을 지킨다는 명분으로‘계유정란’을 일으켰다. 고명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몰살하고, 그의 친동생인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 사약을 먹여 죽였다.
단종은 혈육을 친 수양 숙부 면전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하루하루 벌벌 떨며 연명하였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정신을 놓았다.
그러던 단종이 어느 날부터 아랫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눈이 밝아졌고,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수양이 아니었다.
‘누가 좋을까?’
수양은 단종의 힘없음을 보여 주고, 자신의 세력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궁리를 했다. 그래서 문종의 국상 중임에도 수양은 벼슬이 낮은 송현수의 딸을 간택하고는 혼례를 올리도록 단종을 압박하였다.
“전하, 왕비를 간택하였으니, 혼례를 올리시지요. 적적한 마음도 달래시고요.”
“국상 중인데, 어찌 혼인을 한다는 말이오? 가당치 않습니다.”
단종은 국상 중에 혼인한다는 것이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러나 수양 숙부가 강권하는 바람에 왕비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5살에 왕비로 책봉된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성품이 공손하고, 매무새가 단정했다.
정순왕후는 어린 단종을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수양의 힘에 억눌린 단종은 왕비를 의지하면서 외로움과 무서움을 떨쳐내게 되었다.
단종이 혼례를 올리고 1년이 흘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수양 일파는 마각을 드러냈다. 민심이 흉흉하여 역성혁명이 일어나겠다는 핑계로 왕위에 오른 지 3년 2개월밖에 안되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다.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사형당했다.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당하였고, 정순왕후 송씨는 궁에서 쫓겨나 단종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또한 세조는 정순왕후의 친정 식구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학살을 하였다.
남편을 잃고, 친정 식구들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정순왕후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서 근근이 보냈다.
왕비였던 송씨가 곤궁하게 지낸다는 말이 퍼지자, 세조는 집과 식량을 보내 소문을 잠재우려고 했다. 하지만 송씨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세조의 하사품을 받지 않았다.
“내가 걸인이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와 생이별을 하게 한 조정의 동정은 절대로 받지 않겠소. 당장 갖고 가시오!”
단종을 향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동네 아녀자들은 관군의 눈을 피해 송씨를 도와주었다.
입으로 공자왈, 붓으로 맹자왈 하면서 저지른 잔인무도한 세조의 악행이었다.
유배지로 떠나게 된 단종은 마음과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귀양을 명한 숙부를 원망하면서 단종은 울부짖었다. 돌부처라도 참지 못할 피눈물의 설움이었다.
“숙부, 나더러 영월로 가라니요? 임금 자리도, 왕비도, 신하도, 모두 뺏어가고도 뭐가 그리 모자라십니까? 나는 노산군이란 칭호도 필요 없소. 모든 것을 내준 어린 조카에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단종의 피울음을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옆에 없었다.
궁궐을 벗어난 단종의 귀양행차가 청계천 영도교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정순왕후 송씨가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송씨는 다리 입구에서 단종의 행차를 막아섰다.
“전하!”
“부인!”
초라한 행색을 한 단종과 정순왕후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허망함에 눈물만 흘렸다.
“부인 행색이 말이 아니구려! 당신과 나의 인연이 오늘로써 마지막은 아닐 것이오. 걱정일랑 모두 잊어버리고, 몸성히 지내시구려. 곧 돌아오리다.”
“전하,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사옵니다. 다시 영도교를 건너오시는 날만을 만백성과 함께 손꼽아 기다릴 것이오니, 전하께서도 근심을 모두 털어버리고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짧은 4년간이었지만 격변의 세월을 사느라,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다. 부부의 정을 절절하게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눈가가 붉게 젖어들었다. 죽은 고목에 꽃피기를 바라는 어린 부부의 가슴은 씁쓸하고 서러웠다.
결국 이날의 만남이 두 사람에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영도교는 순식간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책임지고 호송하는 단종의 영월 귀양행차는 10리를 가고 한 번 쉬었다.
중랑천을 지나 송계원(묵동에 있었던 국립여관)에 머물렀을 때였다.
양성(陽城)에 사는 차성복이라는 사람이 주막 주인을 통하여 보따리 하나를 전하고 갔다. 풀어보니 백설기에 대추를 박아 만든 떡이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성복을 붙잡아 사연을 물었다.
“죄인에게 백설기를 전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듣자하니, 고단한 어린 임금님을 귀양 보내면서 굶기기까지 한다면서요? 귀양 가시는 길, 허기로 쓰러지시면 안되겠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싸가지고 온 것이오. 나를 죽여도 좋으니, 꼭 좀 드시도록 전달해 주시오.”
사연을 들은 왕방연은 차성복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를 눈치껏 놓아주었다.
행차가 양원리를 지나갈 때, 단종이 금부도사에게 청하였다.
“금부도사, 저 우물물을 태조대왕이 마시고 물맛이 좋다고 했던가?”
“예, 그러하옵니다.”
“목이 타니 우물물 한 바가지만 떠주시오.”
“참으셔야 합니다. 어명이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 단종이 더위에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갑갑하고 애가 탔지만 왕방연은 단종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죄인에게는 물 한 방울도 주지 말라’는 칼날처럼 서슬이 퍼런 세조의 어명을 지키기 위해서 왕방연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언제 금부도사의 목도 잘려나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햇볕이 내려쬐는 길가에 배나무가 서 있었다. 단종이 그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배나무에 열매가 익어 수확을 할 때쯤이면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있을런지……. 으흠.”
단종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왕방연은 흙먼지를 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귀양행차는 온갖 시름을 없애준다는 망우고개를 넘어갈 때도 쉬어가지를 못했다. 왕방연은 주위의 눈이 무서워 온정을 베풀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하였다.
왕방연은 가문의 영광인 금부도사 직책이 추악하고 원망스러웠다. 권력 앞에서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되고, 개처럼 충성해야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개도 주인을 알아본다는데, 자기가 섬기던 주인을 호송하는 일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단종은 왕방연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더우신지요? 얼마나 불편하신지요?”
“참아야지, 얼마나 왔는가?”
“아직 많이 오시지는 못했나이다.”
“영월까지 며칠을 더 가야 하나?”
“꼬박 일곱 날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금부도사, 나는 이 길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겠지?”
왕방연은 목이 메어 대답을 못했다.
삼복더위에 끌려가는 단종도, 끌고 가는 왕방연도 고생이 심했다. 침이 마르고, 온몸의 피가 마르는 아픔이 밀려왔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淸 浦)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과 합치는 평창강(平昌江)의 마지막 줄기, 남쪽을 빼고는 동·북·서쪽이 강물에 잠기고, 주변의 높은 산마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한 곳이었다.
소임을 마친 왕방연은 단종의 옥체 만강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영월을 떠나게 되었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에 홀로 두고 가는 마음은 괴롭고 울적했다. 그는 평창강 나루터에 이르러 한참동안 울었다. 울고 나니, 속이 조금은 후련했다.
왕방연이 애끓는 마음을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나 되는 멀고 먼 길에서 고운 임(단종)과 이별하고 / 내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냇가에 앉았더니 / 저 냇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며 밤길을 흘러가는구나〉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57년 10월, 단종은 마루에 걸터앉아 뻐꾹새를 읊었다.
뻐꾹아 뻐꾹아
산마루에 울고 가는 뻐꾹아
초나라 망한 지 어제 오늘 아닌데
너는 혼이 되어 숲속을 헤매이느냐
뻐꾹 뻐꾹 뻐꾹새야
산송장이 된 나의 혼도 실어다 주렴
구름처럼 솟아 있는
저 산 너머로 실어다 주렴
늙은 나인이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해 깊이 상심하면 해롭다고 만류하였다.
“아는 이마다 뻐꾹새가 되었으니, 나만 몸을 돌봐 무엇하리오?”
“그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무슨 죄가 있으시다고요?”
“그래요? 나쁜 소식이 아니 오면 다행이겠소.”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요?”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단종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립문 밖이 떠들썩하며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명이요, 어명! 죄인은 속히 나와 어명을 받으시오!”
금부도사 왕방연이었다.
단종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다시 나왔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왕방연에게 물었다.
“상감마마는 강녕하시오?”
“예.”
“금부도사,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근데 어인 일로 온 것이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왕방연이 댓돌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조아렸다. 한참을 엎드려 어깨를 들먹이더니 부스스 일어났다. 두 손으로 남빛 보자기를 쳐들고 단종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엎드리고 말았다.
단종은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아니! 이건 뭐요?”
“…….”
“상감께서 내게 사약을 보냈다는 말이냐?”
“예, 어명입니다.”
“죄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이냐? 어찌 상감께서 내게……. 이런 억울한 일은 세상에 없다!”
단종은 참았던 피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삭히고 삭힌 그동안의 분노가 핏덩이가 되어 솟구쳤다.
권력의 제물로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한 단종은, 17세 어린 소년이었다.
잔악무도한 세조의 폭력을 전달하게 된 왕방연도 분노와 설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종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순왕후 송씨는 소복을 하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바위(동망봉-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 숭인공원에 있음) 위로 올라가 영월을 향해 애간장을 쏟아내듯이 통곡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모진 세월을 산 비운의 왕비 송씨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가 1521년(중종 때) 82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하늘나라에서 단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단종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왕방연은 서둘러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관직을 사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왕방연은, 단종이 귀양 갈 때 백설기를 먹었던 송계원 근처, 지금의 봉화산 아래 중랑천변 먹골(묵동의 옛이름)로 거주지를 옮겼다. 마침 그곳에는 선산도 있었다.
단종에게 물 한 그릇 바치지 못했던 자신을 뉘우치고, 사죄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왕방연은 필묵(筆墨)과 벗하며 초야에 이름 없는 묵객으로 살았다.
무채색의 묵향 속에서 지내던 왕방연은 어린 단종의 애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시도 괴로워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이 앞마당에 내려앉고, 고적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더욱 잠들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앞마당을 서성이며 영월 쪽을 향해 눈시울을 붉혔다.
“전하, 소인이 어찌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요?”
눈물로 단종을 찾다 잠이 든 왕방연의 꿈속에 단종이 귀양행차 당시의 행색을 하고 나타났다. 단종은 몹시 피곤하고 주눅이 들어 지쳐 보였다.
“여보게 금부도사, 귀양행차 길에 보았던 배나무 열매는 익었는가? 희고 달디단 속살 한 입 베어 먹으면 타들어가는 이내 마음, 조금이나마 시원해지겠구려.”
꿈에서 깬 왕방연은 갈증을 호소하는 단종을 생각하면서 배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하얗게 핀 배꽃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이른 봄, 뻐꾹새가 날아와 한나절을 배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 그 풍경을 지켜보던 왕방연의 가슴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왕방연은 배꽃에 단종의 눈물어린 넋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배나무를 정성껏 보살폈다. 배나무에 달린 열매는 날이 갈수록 단단하게 여물었다.
단종이 승하한 날은 배 수확을 하는 날이었다.
왕방연은 향기가 좋고, 달처럼 탐스럽게 익은 배를 골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영월 청령포를 향해 절을 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왕방연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짓찧는 고두배(叩頭拜)를 올렸다.
“전하, 배를 수확할 때쯤 다시 궁으로 돌아오고자 하셨지요. 돌아오시지 못하게 한 소인이 죄인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왕방연은 눈물로서 속죄를 하였다. 벼슬과 권력을 버리고 묵객으로 살고 있는 왕방연은 세조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단종에게 속죄하는 길은 배나무를 잘 키워서 달고 맛있는 열매를 익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왕방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다음해도 배나무는 어김없이 배꽃을 피워 하얀 꽃잎을 흩날렸고, 뻐꾹새도 어김없이 날아와 슬피 울었다. 배꽃이 피는 달밤이면 왕방연은 배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영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
그해 10월에도 왕방연은 단종의 제삿날에 수확한 배를 골라 청령포를 향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고두배를 하였다.
그날 밤 제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왕방연에게 단종이 다시 찾아왔다.
“금부도사의 눈물과 충정으로 가꾼 배를 먹으니, 이제껏 꽉 막혀 있던 체기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소. 고맙소. 그나저나 언제쯤에나 나도 귀양살이를 끝낼 수 있을까? 귀양살이를 끝내고, 바람따라 훨훨 날아다니고 싶구려. 하얀 배꽃처럼, 뻐꾹새처럼, 훨훨 말이야.”
단종의 혼령은 죽어서도 귀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방연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머리를 땅에 짓찧으며 피를 흘리고 통곡을 하였다.
단종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렸던 왕방연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속죄를 하면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켰다.
“내가 죽으면 영월 가는 길에 묻어 주고, 주변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라.”
후손들은 왕방연의 유언대로 신내동과 묵동의 접경지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 연유로 그가 살고 묻힌 곳을 왕방골이라고 불렀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후손들이 왕방골에 있던 무덤을 이장하였다.
왕방연이 손수 심었던 배나무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으로 가꿔진 배는, 오늘날에도 ‘먹골배’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충절의 고장 중랑에서 키운 먹골배는, 모래가 많은 토양에서 자라 유달리 단물이 많고, 과육을 한 입 깨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달빛이 지면
배꽃도 진다기에
봉화산 둘레길 돌고 도네
삽살개 짖는 밤하늘
별도 지고
하냥,
서러워
사발막걸리에 서글픔 담아
살포시
그대 품으니
톡톡 터지는 꽃잎
아뿔싸,
배꽃은 지지 않고
달빛을 마시네
― 배꽃 연가 / 안재식
배꽃이 흩날리는 달밤, 한잎 한잎 속절없이 쌓이는 하얀 꽃잎은 어린 단종의 슬픔과 억울함이 깃든 눈물방울이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 열린 먹골배는, 충절의 눈물을 흘리며 매일매일 속죄하듯 살다간 왕방연의 마음을 하얗게 담아내고 있다. 지금도 달처럼 익어가고 있다.
▶안재식(安在植) 약력 1942년 서울 신설동 출생.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회 지도위원, 「소정문학」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수상 : 환경부장관 표창(1997. 문학부문), 한국아동문학작가상 외 시가곡 : 「그리운 사람에게」 등 20여곡 저서 : 『야누스의 두 얼굴』 등 20여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