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시편을 시작하면서 제기되는 물음인데, 좁게 보면 시편 1편의 주제이고, 범위를 더 넓히면 시편 전체의 주제이며, 더 범위를 확대하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만약 복 없는 자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자는 애초부터 복 받게 되어 있고, 반대로 복 없는 자는 그냥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라고 되어있다. 이 구절을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1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인간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한두 번쯤은 악인의 꾐에 넘어가기도 하고, 죄인과 함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한두 번이 아니라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는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유혹이나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이 땅에는 복 있는 자는 없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고,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복 있는 자를 거론하는 것일까? 모두가 멸망 받아야 한다면 그냥 ‘너희들은 죄인이기에 멸망 받는다’고 하면 간단할 일인데, 왜 ‘복 있는 자’에 대해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부터 복음이 출발한다. 사실 복 있는 자는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다. 다만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분의 아들이 유일하게 복 있는 자에 걸맞는 분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복 있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하셨다.
우리들이 아는 복 있는 자는 재물이 많은 자,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자, 사회적으로 높은 직위에 있는 자, 큰 권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칭송을 듣는 자 이런 자가 복 있는 자가 아닌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자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복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예수님만이 복 있는 자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예수님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도 예수님이고, 화평케 하는 자도 예수님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 있는 자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복에 동참하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의 채찍 맞으심과 굶주림 때문에 상처가 치유되고 배부름을 얻는 자들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그 죄와 허물이 사함을 받은 자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복에 동참하게 된 자이다.
따라서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복 있는 자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주님의 용서 속에 놓여 있어서 복 있는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2절)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즐겁게 수용한다. 또 이런 자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3절)같이 주님 은혜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은혜에 동참되지 못한 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늘 요동하고 도무지 안정되지 못하고 언제 어떻게 변하고 바뀔지 몰라 초초하고 불안하다. 그리고 이들은 의인과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결국은 멸망이다.
예수님의 복에 동참한 자들이여!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들이여! 주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리시고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복된 소식으로 들려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복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지어다.
시편 2:1-8절
인간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다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기에 한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서 모두를 다 폐기처분해야 할 그런 곳이다.
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이기에 인간은 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만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하는 처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최후 심판의 때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렇다면 성경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터’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땅은 단 한순간도 평화로운 날이 없는 싸움터요, 이 전투의 종국에는 여자의 후손이 승리함으로 최종 마무리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구로도 흘러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이 땅에서 마냥 행복과 쾌락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이런 삶에는 하나님의 뜻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인간들의 자기만족만이 최대의 목적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자기 욕망의 터전으로 삼으려 하고, 하나님은 원래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니기에 멸하기로 작정한 상태에서 서로의 힘을 겨루며 진행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분노하고 모든 힘을 다 동원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거부하려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아야하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을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를 동원해서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며 이후에는 높은 탑을 쌓아 살아남으려는 식으로.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다 헛된 일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창조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눈에 보이지 않고 몸으로 느낄 수 없어서 계속 거부하고 외면해 왔던 하나님을, 이제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도록 육신의 몸을 입혀 직접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건만 이 일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인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고 더 이상은 창조주의 의도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발상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향한 치밀한 계획에 말려들어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죄까지 지었기에 이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대해 항변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을 외면했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12절)는 말씀을 되새겨보자. 이것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마련하신 기준이기에 내가 용납하고 말고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그 아들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진노하신다. 이 철칙은 그 어떤 형편에서도 변개될 수 없는 대 원칙이며, 이보다 더 큰 심판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의 기준을 외면한 채 스스로 기준을 세운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날 용납하시고 사랑을 베푸실 것이라거나, 혹은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성실히 일하면 하나님의 복을 따낼 수 있을 것이라는 등등의 엉터리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런 틀린 기준을 세워놓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생활이라고 우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세워놓고 열심히 제물을 드리고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고대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이 죽을 죄인인줄 알고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알고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이다.
시편 3:1-8절
어떤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인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이 땅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 중 과연 어떤 인물이 훌륭한 생을 살았는지 이것 역시 답하기 곤란하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본 시편의 저자이기도 한 다윗이란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았는가? 만약 그의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다윗은 훌륭한 왕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인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윗의 일생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런 거창하고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만한 면 외에 너무도 고통스럽고 비참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란 사실이 발견된다.
그는 작은 시골 마을의 여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목동으로 자라면서 별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난 뒤에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새로운 삶이란 화려하고 찬란한 인생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생활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는 지극히 연약한 나라 이스라엘이 강대국 블레셋에 의해 모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대적을 물리친다. 그 이후부터 그는 수많은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전사가 된다. 이렇게 되니 온 백성들의 추앙을 받지만 사울 왕에게서는 미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고 피해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 원했기에 사울 왕을 전사하게 하셨다. 이렇게 왕이 된 다윗이지만 그 이후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아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하고, 아들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비참한 장면을 목도하는 아버지였다.
본문은 이런 비참한 다윗 생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대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 때 아들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지은 시가 바로 시편 3편이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결코 순탄한 삶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다윗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도무지 다윗의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일 뿐 하나님에 의해 좌우되는 인생은 개인의 목적과 이유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세상의 안목으로 말하는 성공한 인생, 행복한 삶, 본받을 만한 인물은 하나님의 원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는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는 참으로 독특한 기준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알아야 성도로서의 바른 생각을 소유할 수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생을 살았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도 아니며, 많은 재물을 소유해서 풍족하게 누리며 살았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보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은 아들에게 쫓겨 도망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했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1절)라고 하면서도 이것이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아니라 감사와 경배의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국의 왕이지만 자기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광경을 본 신하와 백성들은 왕의 기구한 삶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2절)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며, 어떤 인물도 자신의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란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처한 환경이 다윗같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감사하고 있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4절). 다윗은 도대체 뭘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무엇을 응답하셨다는 말인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붙드셨기에 아들의 칼을 피해 다녀야 하며,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러나 다윗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왕이라는 지위나 군사들의 힘만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윗이 깨달은 바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을 지키실 수 있고, 그분만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자란 사실을.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평안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윗 같은 믿음을 선물 받은 자는 성공한 인생이며, 행복한 삶이다.
시편 4:1-8절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또한 세상 사람들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을 본문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보자.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을 일컬어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했다. 이런 호칭은 너무도 생소해서 어색하게 들려질 정도이다. 어느 누가 상대를 향해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신앙고백이며, 그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나온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인가? 사실 이 부분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도무지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인데, ‘의’는 인간 행위의 결과로 주어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다.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의가 생성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멸망의 길만을 선택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런 절망적인 인간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그분의 행하심 때문에 우리가 의를 덧입게 되고, 그 의의 결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 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고 긍휼을 베푸신다(1절). 여기에서의 응답과 긍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말한다. 죄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어떤 자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이 또한 특이한 사항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3절) 여기에는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의를 제공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무리들 때문에 고난에 처하게 될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여호와를 의뢰하게 되고 의의 하나님을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이런 고백은 비단 다윗 혼자만의 독특한 고백은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하면서,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의를 입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라고 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의의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성도들의 한결같은 신앙고백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닌 인간들은 성도에게 어떤 존재들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고 그 영광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다(2절). 하나님이 자신들의 꿈과 계획을 무산시킨다고 대적하고, 그들의 바벨탑 쌓기를 방해한다고 목숨 건 싸움을 걸어온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행위는 결국 허사가 되고 만다. 온갖 묘안을 다 개발하고 모든 이들이 똘똘 뭉쳐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막으려 해도 다 궤멸되고 말 일들이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인간들이기에 성도들 역시 이들에게 미움 받는 핍박의 대상이 된다.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지만 많은 백성들은 그 일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들 솔로몬, 르호보암으로 왕위가 이어졌는데 이것 또한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았다.
물론 백성들은 나름대로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할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계획을 무산시킬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모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기에 이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이 절대 거부할 수 없고 방해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그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게 된 다윗은 하나님을 감사하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는 결코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신을 죽이려 달려와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말미암아 행복해 하고 즐거워한다.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다(7절).
그리고 성도를 평안하게 하고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8절). 세상 물질이나 명예, 권세 이런 것들이 평안이나 안전을 주는 요소로 여길 수 있겠지만 결코 아니란 사실이다. 정말 성도를 평안하게 보살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다. 그래서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할 뿐이다.
시편 5:1-12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한 왕권을 발휘한 왕이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을 향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왕의 위치는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의 자리이다.
특히 고대 다윗이 나라를 통치할 시절에는 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시대였다. 이런 자리에 있는 자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 라고 했다는 사실은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하고 큰 의미를 내포한 발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전권을 인정하고 그분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란 사실에 대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 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분이시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할 수 있고 부르짖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신하가 왕에게 아무것이나 함부로 요구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기도는 철저히 왕권에 대한 순복과 왕이 지시하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8절에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라는 했는데, 이것은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세요. 그리고 둘러가는 수고를 면케 하셔서 곧바로 내 길을 찾게 해 주세요.’라는 식의 요청이 아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고 그 자리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세상 권력을 가진 정치세력들이 다윗을 죽이려 하고, 그의 책무를 감당할 수 없게 온갖 핍박과 멸시를 일심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주여, 어떤 악한 세력이 나를 에워싸도 결코 하나님이 저에게 맡기신 사명은 어김없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라고.
이어서 10절에는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라는 간구를 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들을 원수가 방해를 하니까 하나님은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언약하신 내용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뤄지기를 믿고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들이 당연히 멸망할 것이라는 믿음이 내포된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외면할 수 없다. 기도를 하건, 대적 앞에 놓여있건, 원수의 핍박으로 고난에 처해있건 그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왕이시며, 그 왕 되시는 주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하고, 심지어는 왕이 내 생명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바쳐야 할 입장에 놓여있다.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는 자가 성도이다. 이런 자들은 왕 되시는 주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살아간다는 사실을 안다(7절). 결코 자신의 노력이나 열성, 지혜와 충성의 결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우리는 죄인이며 늘 허물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좌절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용납하시는 사랑이 아니면 도무지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란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죄 씻음을 위하여 주께서 대신 희생당하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에 경악하며 그 주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된다. 이런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향해 ‘나의 왕이시여!’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진정 당신의 왕은 누구인가? 혹시 내가 나의 왕은 아닌가?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정치적인 왕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각자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했고, 그 결과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각자 자신의 소견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만이 팽배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진멸의 대상이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11절)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성도는 주로 인해 기뻐하는 자이며, 그분의 보살핌 속에서 즐거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산다.
시편 6:1-10절
오랜 세월 대적에게 쫓겨 다니면서 몸도 마음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른 한 인간이 자신에게 닥친 환경을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로 간주하고 마지막으로 그분께 용서를 구하는 이런 그림을 본문을 보면서 그려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을 책망하시기 위해 역경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성도들이 겪는 고난이 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더 많은 경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해 복음으로 인한 이유 없는 고난을 성도는 겪게 되어 있다.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는 인구조사나 밧세바 사건 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기간을 대적에게 쫓겨 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런 세월들을 보냈다. 이 경우는 죄로 인한 책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다윗이 감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물론 인생이 허물없을 때가 없고, 책망 듣지 않을 만큼 지혜롭게 행할 수 있는 자들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일이 그들의 허물과 죄 때문에 채찍을 드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시기에 인생이 겪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말이다.
너무 힘들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게 된다면 그 어떤 인간도 좌절치 않을 수 없다. 또 이런 환경에 다다르게 되면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게 되고, 이런 역경에서 건져주시기를 부르짖을 것이다. 물이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러나 성도가 호소하는 외침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나 붙잡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함이요, 여호와께 아뢰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분께 의지함이기에 전혀 결과는 다른 것이다.
내 심정을 토로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성도에게는 큰 소망이다. 총체적인 역경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게 되는데,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고 그분께 의지할 수 있기에 다시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내 힘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건져주심 때문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다윗과 견줄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그 숱한 사건들이 염려였고 근심이었고 아픔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사건 자체가 유익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롬8:28). 여기에서 선(善)은 내 개인의 유익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는 측면에서의 선이다. 이것이 결국은 그 나라의 백성인 나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이 고통이요, 두려움이요, 아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에게는 좌절이 있을 수 없다. 절망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왜 염려와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는가?
우리는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주님만 의지하고,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를 원망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이런 측면보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사랑을 배반하고 엉뚱한 길로 걷는 자를 끝까지 찾아오셔서 용서하시고 친히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분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향한 극진하신 용서의 사랑이다. 이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는 자신에게 닥치는 환란과 핍박이 좌절과 불평으로 이어짐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여겨질 것이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을 피하려고 한다면 하루하루가 근심과 염려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닥쳐와도 성도는 주님의 품안에 거하는 자며,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주님 사랑에 더욱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됨을 믿는 자는 평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맞이한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시편 7:1-17절
“주께 피하오니---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1절) 라는 구절이나,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2절)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다윗의 처지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3-5절에서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라는 말씀으로 보아 그가 지금 너무도 억울하게 고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억울한 도망자의 입장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겨 다니는 신세지만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10절)고 하면서 공포와 두려움 대신 평안을 누리며 전전긍긍하지는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과 경배를 드리고 있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절)라고 하면서.
그는 스스로 원수를 만들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고, 어디로 가든 그곳에도 그를 해치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고, 심지어는 혈육이나 친구들마저도 그를 대적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그야말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지만 낙심하거나 망하지 않았다.
대적들이 그의 하는 일을 방해하고, 죽이려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 스스로의 신앙 인격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인내하고, 지혜를 써서 위기를 극복한 탓인가? 결코 그렇게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윗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키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믿는 여호와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칼을 갈고 활을 당겨 원수를 멸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알았고(11절), 악인들은 죄악을 품었기에 결국은 완악함을 낳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파 만든 함정에 그들 스스로 빠지게 되고, 그들이 준비한 무기는 자신들의 정수리를 내리치게 될 것(14-15절)을 알았기에 대적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신약 시대의 바울과 너무 흡사하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9)고 했다.
사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옥에 갇히고, 매 맞고,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떨어야 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의 나날을 보냈지만 그것을 불평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성도의 삶은 이와 같은 것이다. 개인에 따라 상황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몸으로 나타낼 자들이며, 그의 영광을 찬미할 자들이기에 그가 가신 길을 따를 수밖에 없고, 그분이 당하신 일을 맛보며 그분의 심정을 알아가도록 하신다.
성도를 향한 사단의 공략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 어떤 장사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를 상대해서 이길 수 없다. 과거 다윗처럼, 혹은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한다고 옥에 갇히거나 매를 때리는 자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단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온갖 것들로 현혹하고 있다. 그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다윗이 주께 피하면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외쳤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피해야만 살 수 있다. 그분의 희생과 죄 씻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심판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이 있기에 그 어떤 악한 세력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어진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대적이 없어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사단은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밑에 있기에 성도는 평안을 누리며 찬양할 수 있다. 마치 다윗이 원수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평안히 잠들 수 있었고, 언제나 기쁨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처럼.
시편 8:1-9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요, 그 이후 주님의 놀라운 권능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만약 자신의 허물과 죄를 모른 채 주님 은혜를 말한다면 이는 필시 가상의 주님을 말하게 될 뿐이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다윗)의 초라한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찬양하는데,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시면서도 도무지 쓸데없는 미물보다 못한 자신을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긍휼에 대해 감격하며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도록 만드셨기에 피조 된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 주님의 솜씨와 권능이 아름답고 경이로울 수밖에 없고 감사와 존귀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일에 빠져있어서 무엇을 하든 자기만족과 자기 이름을 더 높이려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이용하려 든다. 그러기에 창조주의 솜씨를 보아도 찬양할 줄 모르고, 그 모든 것들을 자기 영광을 위해 이용할 생각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처럼 주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자기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는 도무지 공통분모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된다면 나의 영광은 눈곱만큼도 생각할 여유가 없고, 반대로 내 영광을 꿈꾼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주님 영광을 바라보고 그 권능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찬양하는 성도에게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가 보여진다는 사실이다. 분명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인데, 그 작업 속에 자기 백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있고, 그 사랑을 들여다보니 보잘 것 없는 죄인을 용납하시고 보살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그분의 희생이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2절) 라는 구절은, 막강한 대적 앞에 선 다윗이 자신의 모습을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젖먹이가 대적을 꺾어 그들의 교만을 잠잠케 했다. 다윗은 이것이 바로 주님의 권능임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서 잠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셔서 자신의 성전 됨을 나타내셨건만 당시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 그런 중에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찬양했고, 이 찬송을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21:16) 고 하시면서 본 시편을 인용하셨다.
무서운 대적 앞에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되겠는가? 그런데 구약에는 다윗이, 신약에는 정말 어린아이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고전1:27-28)는 작전이다.
그리고 또 히브리서 2장 6-7절에도 본 시편 4-5절을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는 말씀을.
이 구절은 다윗의 자기 고백이다. 도무지 쓸모없는 죄인인 자신을 생각하시고 권고하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인용되는데 거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둔갑된다. 즉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노래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심정을 토로했는데 그것이 신약에 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었는가? 이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윗이든 아브라함이든 아담이든 모두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고, 그렇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 해석된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다윗의 시편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담겨 있기에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시편 9:1-20절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이 있는데, 이런 말씀을 대할 때 너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완악한 내 모습이 한 없이 부끄럽다. 내가 소망하는 일이 이뤄져서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하고, 너무도 아프고 슬픈 일이 벌어져도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을 보면서 그가 여호와께 드리는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틀림없음을 본다. 분명 그는 대적에게 쫓겨 다니고, 평생을 원수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았지만, 그런 위협과 고난의 순간에도 감사와 찬송이 끊이질 않고 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1절)라는 표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 사랑에 깊이 감동하고 있고, 그 은혜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이런 바울이나 다윗의 감사와 우리들의 감사를 견줘보면 우리들의 감사가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었나 하는 점이 탄로 난다.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돌이켜 봐도 감사가 순수하지 못했고,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차지했음이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2절) 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심정이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가 세상 물질이나 명예, 권세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이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다윗의 이런 기쁨과 즐거움은 이 땅의 그 무엇을 소유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것들은 잠시 우리에게 웃음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지속될 수 없는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목을 축이는 것과 같이. 그러나 그 목마름은 다시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주께서 주시는 생수는 영원히 갈함이 없는 것으로, 그것은 뱃속에서 생수가 흘러 넘쳐 나온다. 이렇게 여호와로 말미암는 감사와 기쁨은 육적인 외부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에 영원한 것이며, 그 누가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3절) 라는 구절을 보면, 원수를 내 힘으로 대적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께서 원수를 직접 상대하시고 꺾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겁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원수는 나를 핍박하고 은혜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들인데, 이것이 꼭 외부에서 오는 적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윗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하고, 이웃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는 등등의 일을 놓고 보면 적들이 외부에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는 교만함이 바로 여호와의 원수이며 이것은 자기 자신이 여호와의 대적이 되는 경우이다. 설사 여호와의 원수가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원수는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해야 한다. 이것이 다윗의 시편에 그대로 녹아있는 신앙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5절)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열방의 번성이나 한 인생의 성공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만다. 그리고는 영원히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즉 영원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들은 세상의 영광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외한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8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17절)는 말씀을 주의 깊게 보라.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는 기도이다. 어떤 인생도 승리하는 인생이 없으며, 세상 나라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어 있다.
이러할진대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번성을 꿈꾸고 있지는 아니한가? 내 인생의 찬란함을 소망하며 살지는 않는가? 만약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다면 속히 어리석은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주를 노래하고, 주님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성도야 말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자이며, 주님의 증인이다.
시편 10:1-18절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짓밟히고 불의가 횡행하는 것을 무작정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고통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우리가 고대하는 것은 주님의 즉각적인 간섭하심인데, 이럴 때도 주님이 개입하시지 않고 침묵을 기키고 계신다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방법이 없다.
지금 시편 기자는 이런 상황에 봉착해서 침묵하시는 주님을 향해 “어찌하여 --- 어찌하여”(1절)를 연발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상식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불의가 판을 치고, 악인이 연약한 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현실은 지속되고, 이런 완악한 자들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견고해 가는 것을 보면서 무작정 기다리고 인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심지어는 악인들의 입에서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하나님이 없다” (4절)고 까지 뇌까린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심판을 죄인의 안목으로는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어떤 이가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것이 부러워 그들의 행위를 본받아서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에 이르기를 꿈꾼다. 설사 그들의 행동에 야비하고 무자비한 면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로 인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게 된다면 그런 치사한 방법도 외면하지 않는다.
또 불의를 행하고도 책망과 심판은커녕 더욱 세상에서 번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인식한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불의가 승리할 수 없어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불의가 승리하고 있으니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하게 느껴진다.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그 진리가 오히려 손해를 안겨주고,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외면을 받는데 굳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갈림길이 생긴다. 불신자는 자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발생한다면 두 번 다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진리니 선이니 하는 개념들도 자기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수용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자기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줄 때에만 섬길 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망발이다.
신자는 주님의 영광이 최대의 목표요 목적이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만족과 쾌락이 모든 행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이 진리요 생명이다. 설사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포기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 권력에 의해 외면당하는 것 같고, 오히려 불의가 진리를 이기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거짓으로 판명될 수 없고, 여호와의 통치가 끊길 수 없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심판의 때가 있고 진리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둘 때가 있다. 아직도 모든 것이 종결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성급하게 판단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무능해서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의 승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창세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에 따라 진행하시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완성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중간 과정에서 무엇이 바른 것인지 분별하기 힘들어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방황하게 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공의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악인이 득세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들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란 사실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성도는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당장의 권세와 부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주님이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 해서도 아니 된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응하게 될 것임을 믿고 그 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며 살자. 주께서 최후 승리하시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