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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길 2구간
한양도성길 2구간(혜화문-숙정문-창의문-돈의문터-숭례문)
*산행일자; 2020. 02. 16
*오늘의 날씨; 서울내일예보; 새벽 눈오고 흐리며 최저;-1도 최고;1도 바람;h/7~14m
서울; 최저;-4.3도 최고;8.9도 평균운량;8.9 일 강수량;13.4mm
종일 함박눈이 계속내리며 모처람 눈길 산행을 즐길수 있는 아주 좋은 날씨였음
*계략적인 코스; 혜화문-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서울시장공관)-혜성교회-서울과학고등학교
-암문-와룡공원-우수조망명소-말바위안내소-청운각쪽으로 알바(30분)
-숙정문-백악촛대바위-백악곡성-암문-1,21사태소나무-백악마루-백악쉼터
-창의문 안내소-창의문-청운동고개 식사-인왕산 정상-321.4봉에서 다시 백하여
-청운동 고개전에서 인왕산 길 따름-홍파동 홍난파가옥-한옥마을-돈의문터(돈의문 박물관마을)
-경교장-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이화여고정문-정동극장-숭례문
*동행인; 박 창배님과 둘이서
*거리및 소요 시간; 도성길 도상거리; 10.5km 실거리; 15.38km(알바포함)
소요시간; 7시간23분
시간당 평균속도; 2.08km
*소요경비; 21.000원
**산의 높이는 각각의 지도마다 높이를 달리 표기 하는 경우가 많고
저의 gps도 높이를 달리 표현 되기 일수이므로 참고 사항으로 보시기를**
*산행지도 ; 파란선은 신산경표트렉, 빨간선은 본인의 간길
한양도성길 2구간-1, 말바위 갔다가는 백하여 전망대로 와야한다, 알바함
한양도성길 2구간-2, 인왕산에서 계속 성벽길 따라야 한다
인왕산 길은 성길 아님
시내에서 날씨도 춥고해서 대충 따라감
*코스별 시간(봉이라 표시는 지도상높이 이고, m 또는 m봉이라 표시는 내gps상의 높이임)
오늘의 들머리; 서울 성북구 성북동 혜화문
오늘의 날머리; 서울 용산구 동자종 숭례문
09;16 산행시작 혜화역 에서부터 막걸리;1200원
09;19 혜화여고앞지나
09;20 혜화문
09;22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센터
10;07 서울 과학고등학교 앞 건전지;3800원
10;19 암문 지나 113m
10;27 와룡공원 체육시설과 베드민트 장 있음
이후 군부대 바리케이트 에서 성 밖으로 나가 군부대 우회함
10;46 207.9봉, 이후 말머리 전망대 올랐다가 알바 함 삼청각 쪽으로 빠져 나감
10;57 삼청각 쪽으로 한동안 내려 셨다가 다시 백함(알바)
11;09 다시 성곽길 돌아와서
11;14 말바위 안내소 표찰 목에 걸고 신분증은 보자 안 한다
11;17 삼청 터널위
11;23 숙정문 214m
11;30 촛대바위
11;41 310.9봉
11;47 268m봉
12;01 1.21사태 때 총 맞은 소나무 315m
12;05 북악산 정상 백악산이라 했고 다시 백 하여 우측성곽 따른다
12;27 “자북정도”라는 표지석 있는 군부대 후문인 듯
자북정도=자화문 북편산 정의 로운길(즉, 평화의길) 이란다
12;32 창의문 안내소 목에건 표찰 반납하고
12;35 창의문
12;37 창의문 이후 청운동 고개 우측아래에서 식사 15.000원
13;15 식사후 출발
14;01 인왕산 339.9봉
14;04 321.4봉 산불초소 봉에서 다시 백함, 도성길은 이곳에서 성벽 계속 따라야한다
내가 받은 트렉길 따라 볼려고
14;30 백 완료 인왕산길 2차선 도로 따라감
15;06 무학재입구에서 성길 만나 성길 따름 인왕산 호랑이도 보고
15;28 사직터널 위
15;39 서울시 교육청 앞 지나
15;42 돈의문 전시관
15;49 경희궁옆 한옥마을 한 바귀 돌고
15;58 강북 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은 문이 잠겨있다
이 근처가 돈의문 터라 했는데 자세히는 안 찾아보았다,
16;15 이화여고 앞 지나
16;26 정동극장으로 들어 볼일보고
16;39 숭례문 산행끝 완주 기념메달 받고 남대문 시장 둘러보고
17;00 회원역 지하철
*오늘의 산행개요
주중 박 창배 씨 와 안부 전화 중 주말 도성길 간다하니 같이 가겠단다
오랜만에 같이 해보는 산행이다, 지맥 때 같이한 생각들이 많이 나고
그때를 위주로 추억담이 이어진다,
어제 예보상은 09시 이후는 흐린다 했는데 한두방울의 눈발은 계속 이더니.
말머리 안내소 근방에서는 함박눈으로 변하고, 북악산(백악산) 에 오르니 5cm이상의 적설이
나뭇가지에 살포시 앉아 온 천지가 힌 꽃 밭이다,
창의문 지나 청운동 고개에서 식사하고,
눈길 미끄러운 나무 테크 계단 오르기는 쉬지 않아 두어번 엉덩방아도 찧는다
그리고 꾸역 꾸역 오르니 앞에 알 만한 사람 보인다,
눈 구경 나왔나 보다 서울둘레길 이후 대충 여러분들의 안부 여쭙고 헤어져 오르니
인왕산 정상이고 다음봉에서 보니 내가 가져간 트렉길이 아니다
다시 백하여 청운동 고개 전에서 인왕산 길 따라 무악재 입구까지 갔는데
백 하지 않고 그냥 내려서면 성벽길인데 혹여 특이한게 있나 싶어 백 한게 헛고생 만 햇다
이후 숭례문에 도착 한양 도성 길도 마친다
이 코스는 언젠가 다시 한번 더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간별 산행 일지
구간별 산행일지는 유명한 명승지나 유적지를 중심으로 설명 하였음
**카메라 건전지 교체했더니 날자 시간이 변해서 잘 안맞움**
청운동 고개 음식점에 핀꽃
혜화문으로 오르는 중간의 교회 와 동성중학교 쪽
혜화문으로 가면서 본 언덕에 혜화문이 살작 보인다
혜화문의 뒤쪽( 성 안쪽)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혜화 도성 안내센터 예전에는 시울시장 공관 이였었단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옛 시장공관)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다양한 서울시의 정책이 논의되는 일터이자, 서울시장이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이였다. 공관은 국내외의 손님이 초대되는 행사장 이였으며 1981년 박영수 시장부터 2013년까지 역대 서울시장이 거주했다. 한양도성의 성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하기로 결정하여 한양도성 순성길의 쉼터이자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전시실에는 순성놀이 기록, 혜화동 주변 모형지도, 지도로 보는 한양도성과 역대 시장의 영상 및 기증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양도성과 혜화문 안내판
한양도성의 안내판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혜화동 안내센터의 관광 해설사 님
혜화동 안내센터를 나와
우측으로 본 성북동의 산비탈의 집들이 도시라고는 생각dl 안든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성벽과 민간인들의 담장이 구별이 안되는 곳이다,다 **서울 한양도성의 흔적들 경신고등학교 뒷길에서 혜화문까지 이어지는 골목길. 성벽이 심하게 훼손되어 군데군데 흔적만 남은 길이다. 경신고등학교 뒷길 초입에서는 성벽이 학교 담장으로 쓰인다. 경신중 · 고등학교를 지나면 ‘ㄱ자’ 모양으로 꺾인 주택 담장 아래에서 축대로 사용된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혜성교회 계단 길 양쪽에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100m 정도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가 두산빌라 건물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서부터 구 서울시장공관 담장까지 150m 가량 성벽이 이어진다.
약간 틀어서 본 성북동 쪽의 풍경, 눈 방울이 약간 굵어진다
서울 과학고등학교의 정문을 지나고
이 마을이 북정마을인가 보다 **북정마을 와룡공원 옆으로 도성 안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성북동으로 빠지는 암문이 나온다. 문 밖에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이 바로 북정마을이다. 북정마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과 '성북동 비둘기'를 지은 김광섭 시인의 집이 있었다. 성벽 밑에 5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1960~70년대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암문을 지나
암문을 지나면서 본 성곽길
와룡 공원 근방에서는 길이 조금 넓어진다
와룡공원 근방에는 각종 운동 시설은 물론 배드민턴 장도 있다 잠시 휴식하고 **와룡공원 ;[ 臥龍公園 ] 1984년 4월 1일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서울성곽을 따라 조성된 공원이다. 북악산 말바위에서 서울 성곽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내려가면 와룡공원이 나타나며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공원아래는 명륜동과 성북동을 잊는 와룡터널이 지난다. 공원에는 인근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서울성곽탐방로가 이어지며 와룡공원이 성곽길 탐방로 중간에 있다. 높은 산비탈에 위치하여 서울시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룡공원 근방의 눈꽃, 설백 천지백(雪白 天地白) 이다,
군부대로 인해 이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한동안 우회한다(말바위 전망대까지)
군 부대 안내문과....
우회길 따르면서 본 눈 세상
취병에 대한 설명인데.. **취병 취병은 관목류, 덩굴성 식물 등을 심어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밖에서 내부가 직접 들여다 보이는 것을 방지하고 공간을 분할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관을 조성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취병용 수종은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상록수로 대나무, 향나무, 주목, 측백, 사철나무 등과 고리버들, 화목류, 등나무 같이 가지가 연한 수종이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林園十六志》의 관병법에는 취병의 소재와 방법이 나와 있다.
말바위 조망처에서 본 삼청각 쪽 조망, 원안이 삼청각이다 **삼청각(三淸閣)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1972년 건립되어 1972년~1980년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었다.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2000년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문화시설로 지정하였으며,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후 2001년 10월 새로운 전통 문화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다.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연중 전통공연이 열리고 혼례나 약혼식 장소로도 사용되며 운영은 세종문화회관이 맡고 있다.
말바위 안내판 **말바위 안내소와 우수조망명소 말바위는 삼청공원 안에 있는 바위로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백악의 끝자락에 있는 바위여서 말(末)바위라 하였다고도 하고,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이 바위에 말을 매어 두어 말(馬)바위가 되었다고도 한다. 동쪽 능선을 따라 백악에 오를 때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을 매어 두는 바위라는 설이 유력하다. 우수조망명소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에서는 성북구 방향이, 다른 한 곳에서는 종로구 방향이 보인다. 우수조망명소는 숙정문 안내소 · 말바위 안내소 · 삼청공원 ·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들이 갈라지는 분기점이기 때문에 안내표지판을 잘 확인해야 한다. 창의문·숙정문·말바위 안내소와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말바위
말바위 안내소에서 표찰을 받아 목에 걸고 진행한다
말바위 안내소의 안내판
탐방로를 두께있는 판으로 만들붙였는데 그 판 위에 오늘 눈이 약 5cm정도 앉아 있다
말바위 안내소에 핀 눈꽃1
말바위 안내소에 핀 눈꽃 2
숙정문의 성 안쪽 **숙정문 ; [ 肅靖門 ]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숙정문의 성 밖쪽
숙정문의 측면
숙정문을 나서면서본 북악산 쪽의 성벽
촛대바위, 촛대모양이 안보인다
요레 보아도 모르겠고
지붕 뚫고 나온 멋들어진 소나무와 지붕
1.21 김 신조 사태때 총맞은 소나무
**1·21 사태 소나무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이곳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북악산(박악산) 정상의 백악산 표지석
**백악마루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天), 끝나는 구간은 조(弔)였다. 이곳이 바로 천(天) 구간에 해당한다.
백악산 정상부
**백악 곡성 곡성(曲城)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인왕산과 백악에 하나씩 있다. 이 중 백악 곡성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북악산 ; [ 北岳山 ] 고려 숙종 때 북악산 아래는 남쪽의 수도인 남경(南京)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당시에는 북악산을 면악이라 기록하여 전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북악산을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된 이름이다. 이후 도성(都城)인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악산(北岳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남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을 남산(南山)이라고 불렀다. 북악산의 높이는 342m이며 남쪽으로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모양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난 형상으로 주변의 산에 비해 도드라져 보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의 신망이 두터웠던 무학대사(無學大師)에 의해 왕가의 기운을 받은 명산으로 칭송되었으며 그 아래 조선왕조의 궁궐을 세우고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산정부에는 백악산신을 모시는 신사가 만들어졌다. 1394년(태조 4년)에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축성하였으며 대한민국에 들어서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景武臺)도 이곳에 위치했다. 현재도 대통령의 집무실인 청와대(靑瓦臺)가 북악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북악산(北岳山) 북악산은 높이 34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40m), 남쪽의 남산(南山, 270m), 동쪽의 낙산(駱山, 124m)과 함께 서울의 사산(四山) 중 하나로, 북쪽의 산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시대까지 백악산(白岳山), 면악산(面岳山), 공극산(拱極山), 북악산(北岳山) 등으로 불렸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악 또는 백악산으로 불렸으며 일부 북악이라고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부대 문 같은 곳에 서 있는 자북도정 표지석
창의문 안내소, 목에 걸었던 표찰은 이곳에서 반납 한다
창의문 안내소의 안내문 과 창의문 안내글
창의문 안네소의 간판
창의문의 측면
창의문 내쪽에서 본 그림
**창의문 ; [ 彰義門 ]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2015년 12월 2일에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의문 외쪽에서 본 그림
**창의문~백악마루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로 이어지는 구간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성곽을 쌓았는데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으뜸가는 절경이라 할 만하다.
이 구간의 순성길은 안전을 위해 모두 계단으로 조성해 놓았는데,
운동량은 많지만 등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에서는 숨을 고르며 수려한 풍경을 감상해도 좋다.
청운동 고개 우측에서 점심 먹은 음식점
배 곱은 김에 맛도 괜찬아 싹 먹었다, 물론 막걸리도 한잔 했고
청운동 고개위로 지나는 육교 밑을 지나
인왕산 오르면서 뒤 돌아본 백악산쪽
소나무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
다시 한번 더 뒤돌아본 백익산 쪽의 성벽
연리지
인왕산 오르면서 본 풍경
**
인왕산 오르면서 본 눈꽃들
인왕산 정상은 뒷봉이다,
**
인왕산 정상을 힘겹게 올라왔다
**인왕산(仁王山)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인왕산 정상의 종로구 경계표
인왕산 정상부를 뒤로 하고
인왕산에서 내림 길의 눈꽃
인왕산 성곽의 안내판
321.4봉 산불 감시 초소봉에서 다시 백한다
청운동 고개 전 인왕산 길로 내려서서 인왕산 길을 따른다
석굴암 입구의 바위굴
인왕산 호랑이 있는 곳에서 성곽을 다시 만난다, 백하지 않고 직진하면 요기로 내려온다
사직 터널 근방에서 본 성곽, 남산 타워가 바로 앞에 보인다
**사직근린공원 부근 성곽
한양도성 전 구간 중 성 안과 성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성벽 안쪽의 넓은 길에서는 도심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편히 걸을 수 있고,
바깥쪽 오솔길에서는 담쟁이넝쿨과 고풍스러운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경 및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밤에 보는 성벽의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성곽을 다시 한번 보고
**
조망처에서 본 북악산 밑 청와대가 보인다
경복궁, 대한문, 종합 청사도 근처에 있고, 종로 뒤쪽으로 이런 산이 있는줄 처음 알았다
홍난파의 가옥은 빈집 인듯하다, 문 잠겼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제90호> ‘봉선화’, ‘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1898~1941)가 살던
집.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1930년대 서양식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당에는 홍난파의 상과 안내판도 있다
서울시 교육청앞도 지난다
경희궁 옆의 한옥마을
집집마다 특색 있는 한가지의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체험 현장 모양으로
돈의문 전시관인데 2층으로 되어 있다
돈의문 안내문
돈의문 근방의 엣 모습
**돈의문 터 (敦義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정동의 시가지
정동의 이화 여교와 기념관도 있단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등록문화재 제3호>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왕후가 지어준 것이다.
학교 경내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와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
유관순 동상, 손탁호텔 터 표석 등이 있다.
덕수궁 중명전인데 안 들어갔다
유명한 정동 극장이다, 볼일 있어 들어가 본다
극장의 한쪽에는 명창 이 동백님의 동상이 있다
중앙일보 빌딩 앞 로타리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기념물 제16호>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동관은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호암 아트홀앞도 지난다
호암아트홀 ; [ Hoam Art Hall , 湖巖─ ]
서울특별시 중구 중앙일보 사옥에 있는 무대예술 공연장.
다목적 공연장으로 1985년 5월 개관하였다.
국제수준의 최첨단 기술로 제조된 음향 ·조명시설과 200명의 공연자가 동시에 출연할 수 있는
무대를 갖추었다.
특히 7개의 가동무대(可動舞臺)로 구성되어 있어 입체적 이동이 가능하다.
객석은 무선 헤드폰을 사용하는 6개 국어 동시통역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대규모
국제회의장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렇게 한양도성 길을 한바귀 돌아 보았다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 복구되었다. 이
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숭례문을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완주 기념폐라고 이런걸 준다
후기
뭔가에 홀린 개 모양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백두대간 길 이라 하면 무조건 따라
세월 보내며 지맥까지 완주 하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는 것 같더니
지난번 서울 둘레길은 걸을때는 이제껏 하든 버릇으로 하루 20여km이상을 가느라
역시나 바빳 던게 사실인데 이번 한양 도성길은 아닌 듯 싶다
보고 배울 것도 많고 내가 사는 서울이 크고 넓은 줄만 알았는데 도심에도
낮은 산과 공원들이 있고 그 각기마다 자기들 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도 알았고
내 옆에는 각가지 유적지와 유물들이 있음도 새삼 느끼게 했다,
많은 공부를 해가면서 천천히 글고 또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 보는것도 괜찬을 것 같아
시간이 허락하면 한양 도성 긿은 한번 더 답사해 보고픈 생각이 간절한 코스다,
금년은 눈 구경 재대로 못하나 싶었는데 뜻밖에 한양 도성길 완주하는 날
눈 밟으면서 해냈다는 기쁨도 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