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중보적인 화신으로 나타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받아 이 땅 위에 어떠한 악한 사람 앞에도 하나의 소망의 실증체, 믿음의 실증체, 사랑의 실증체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그 어디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기준, 믿음의 기준, 사랑의 기준을 탕감하는 조건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사탄세계 앞에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소망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믿음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사랑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라 전체에 대해 보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 하나의 기준을 이 땅 위에 찾아 세우고 보답하고자 했지만 전체를 보답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제자를 통하여 그러한 과정형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또 소망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야고보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요한이 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한 부분부분을 책임맡아 가지고 하나 되어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내가 소망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고 믿음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고 사랑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섭리역사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이 화합하여 하나의 완성체로 완결지어야 할 것이 최후의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남기신 최후의 가르침이었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최후의 완성자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신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세 제자를 뿌리로 한 하나의 불변의 실체로서 서지 않으면, 세 제자를 세워놓고 가셨던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은 내 한 자체에서 베드로를 세우셨던 그 믿음의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를 세우셨던 소망의 열매를 내 한자체에서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을 세우셨던 그 사랑의 열매를 내 한 자체에서 거두어야 되겠습니다.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