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강
군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아이들이 열심히 불렀던 색다른 창가(唱歌)가 있었다 "♪ 나무베고 새끼꼬고 짚신을
삼아서 부모님 공양하고 아우를 돌보고 형제사이좋게 효행을 다하니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二官金次郞)...."
전시의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운동장을 모두 아주까리 밭으로 만든 교정 한 구석에 그 노래의 주인공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등에는 나뭇짐을 지고 손에는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이 우리 또래의 아이라고 하는데도 늙어 보였다
'바쿠단 상요시(爆彈三勇士)' 구군신(九軍神) 그리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천황을 위해 죽자는 세상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있게 자라면서 열심히 책을 읽는 니노미야 긴지로는 분명 일본사람 인데도 이웃동네 할아버지 쯤으로 보였다 더구나
그는 짚신과 관계가 깊다 밤마다 짚신을 삼고 아침 일찍 그것을 팔아 푼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작해 몰락한 집안을 살리고 물건을
아껴쓰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여 나중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을전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쿠라마치'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농촌을 빈곤과 게으름과 기근에서 구해낸 '니노미야'는 총칼이 아니고서도 영웅이 될 수있는 길을 걸었다
그의 농사법 개량과 수차(水車)와 제방을 쌓는 신기술 그리고 고리대금을 하지 않고서도 돈을 당당하게 증식하는 그 모든 놀라운
철학들은 한켤레 짚신 한권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 할수있다 그는 길가에서 다 해어진 짚신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짚신공양(供養)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네몸을 해칠때까지 나에게 바쳤으니 이제는 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 논에서 퇴비가 되어 새 볏짚
으로 자랐다가 다시 짚신이 되거든 또 함께 살자" 할머니의 기원대로 짚신은 순환한다 논에 버린 짚신은 다시 벼가 되어가지고
그 벼는 짚을 남기고 죽는다 짚은 새 신발로 태어났다가 닳게 되면 다시 죽어 논바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끝없는 순환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발견하고 그 소모와 재생산의 되풀이에서 부를 얻는 니노미야의 마을 부흥의 정신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한권의 책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지만 책의 힘이 어떤것인지를 어린나이에도 잘 알고 있었다
뜰 아랫방에는 신조사(新潮社)판 '세계문학전집' 36권 한 세트가 고스란히 서가속에 꽂혀있었고 형님들이 방학때 읽다가 두고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등화관제 속에서 나는 전구에 검은 갓을 씌워놓고 몰래 그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일장기와 군가와
노기다이쇼(乃木大將)와는 다른 이야기들 그리고 일본 신들과는 또 다른 신들의 신화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나는 고본 책갈피 속에서 찢긴 노트장에 쓴 시 한편을 발견했다
"아 내동생아 너를 운다/ 너 부디죽지 말거라/ 막내둥이로 태어나 부모정을 독차지한 너/ 부모님이 너에게 칼날 쥐어주고 사람
죽이라고 가르쳤으리요/ 사람을 죽이고 죽이라고 스무네해동안 너를 키웠으리요" 좀 어려운 고전체로 쓴 시였지만 아들을
징용보내고 딸을 정신대에 보내고 장독대에서 몰래 숨어서 우는 여인네들과 같은 목소리였다 교정을 아주까리 밭으로 갈아
엎어도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는 공터가 남듯이 아무리 등화관제로 칠흑같은 어둠을 만들어도 찢어진 노트장위의 시를
읽는 빛을 가리지 못하듯이 (뒷날 나는 그것이 러일전쟁 때 쓴 여류시인 오사노 아키고의 반전시라는 것을 알게된다)
강은 얼어도 그 얼음장 밑으로는 따뜻한 물이 흐른다 식민지 교실에서도 그렇게 배웠다 간물의 비중은 섭씨4도 일때 제일 무겁다
이 때문에 윗물은 빙점하에서 쉽게 얼지만 그 바닥에 가라앉은 물은 얼지않고 흐른다고 겨울 낚시꾼처럼 식민지의 얼음장을
조금 뚫고 들여다보면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치고 있는 고기떼들의 아가미가 보인다 고기만이 아니라 숨쉬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작은 생물들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채 초승달처럼 자라고 있다 섭씨4도 생명의 강바닥에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미나 미나 고로세(모두 모두 죽여라)" 라고 노래했던 짱꼴라 시니징(중국)도 있었고 고무나무가 있다는 열대의 남방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치구 베이에이(鬼畜米英)" 라고 불렀던 서양사람들도 살고있다 알고보면 일본사람들도 니노미야 긴지로처럼
요사노 아키고 처럼 얼음장 밑의 강물처럼 함께 흐르고 있었다
2009년 6월 9일 중앙일보 이어령의 한국인이야기 에서 옮겨 씀
첫댓글 다 해진 짚신을 안고 하는 할머니의 기도가 인상적입니다..언니, 병원 잘 다녀오셨나요?고생하셨어요.. 피곤하시지요? 씻고 푸욱 쉬셔요~~~
아우 낼도 아침굶고 병원으로 .... 결과는 모레~~ 한국인 이야기는 오후에 올리도록 할게요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