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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부터 격화한 태국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11월을 맞았다.
▲ 쁘라윳 짠오차 총리 퇴진 ▲ 군부 제정 헌법의 민주적 개정 ▲ 국왕 권한 제한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지난달 이틀간 특별회기를 연 의회 논의는 이미 ‘빈손’으로 끝났다.
시위대는 정부가 요구를 수용할 때까지 계속 거리로 나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사퇴 불가’에서 요지부동이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군주제 개혁 요구는 누구도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치 상황이 장기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시위대와 왕당파 간 충돌 등 상황이 악화하면 과거처럼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상황 정리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분석도 정치권 일각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가장 현실적이고 대화가 가능한 헌법 개정에 집중해 사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많아 보인다.
일간 방콕포스트가 1일 여야 및 학계 인사들로부터 해법을 청취한 결과도 이를 잘 보여준다.
방콕 중심가 랏차쁘라송 네거리 도로를 완전히 점령한 반정부 집회 참석자들이 연사의 발언을 듣고 있다. 2020.10.15 [방콕=김남권 특파원] [2020.10.16 송고]
“현행 헌법 그대로면 의회 해산 무의미”
연립정부를 이끄는 팔랑쁘라차랏당 차이웃 타나카마누손 의원은 의회 해산은 사태 해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기 총선을 치르더라도 군부정권이 만든 2017년 헌법을 준용한다면, 시위대가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군부가 지명했던 상원의원 250명이 총리 선출에 참여하는 헌법을 고치지 않는 이상, 또다시 여권 인사가 선출될 것인 만큼 시위대가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의 수틴 끌룽상 원내총무도 개헌 전에 현 시스템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선 개헌, 후 의회 해산”이라며 공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반정부 시위에서 쁘라윳 총리 퇴진 촉구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시위대. 2020.10.19 [AFP=연합뉴스]
쁘라윳 총리 사퇴 놓고 여 ‘반대’ vs 야 ‘찬성’
푸어타이당 수틴 원내총무는 현행 헌법을 따르면 쁘라윳 총리 사퇴로 인한 혼란은 없다고 주장했다.
군부정권이 2017년 제정한 헌법은 선출직 의원이 아닌 ‘비선출직 명망가’도 총리 후보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의 연임을 노린 조항이다.
수틴 원내총무는 “총리가 사퇴하면 현 사태의 긴장도가 80~90% 낮아질 것”이라며 이후 추안 릭파이 하원의장을 포함해 다른 이들도 총리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를 이끌었던 꼬깨우 삐꾼통도 총리가 물러나고, 새 총리가 개헌 일정을 제시한다면 반정부 시위가 잦아들 것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나 사팃(민주당) 의원은 똑같은 헌법하에서 이뤄지는 후임 선출은 시위대의 분노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
차이웃(팔랑쁘라차랏당) 의원은 총리 사퇴는 지지 세력을 자극해 더 큰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방콕 시내 승전기념탑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 2020.10.18 [AFP=연합뉴스]
정치권서 솔솔 나오는 쿠데타 가능성
사태가 길어지며 악화하면 군이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솔솔 나온다.
푸어타이당 수틴 원내총무는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시위는 더 강경해질 것이고 사태가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리면서 군부 개입은 더 큰 저항까지 불러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차이웃 의원 역시 쿠데타 관련 질문에 조건이 맞는다면 일어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쿠데타를 문제 해결책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며, 개헌 논의가 교착 상태에 빠져있을 경우 쿠데타가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사팃 의원도 “시위대가 계속해서 요구를 고집한다면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예상하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그는 과거 잉락 친나왓 정부 당시 친왕실 단체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를 이끌며 수 개월간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이는 2014년 쁘라윳 육참총장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태국에서는 1932년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2014년까지 19차례나 쿠데타가 발생했다.
반정부 시위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태국 의회 특별 회기2020.10.26 [EPA=연합뉴스]
“당사자 참여하는 대화 열려야…우선 개헌 논의에 집중”
현 사태를 풀기 위해 대화를 통해 개헌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수코타이 탐마라티랏 개방대학의 정치학자인 유타폰 이사라차이 교수는 헌법이 그대로면 의회 해산 또는 총리 사퇴 어느 것도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타폰 교수는 “모든 당사자가 대화할 토론의 장이 필요하며, 이는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며 “비록 모든 개정 요구를 담을 수는 없겠지만, 개헌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쁘라짜티뽁 국왕 연구소의 스띠똔 타나니티촛 소장 대행도 헌법 개정에 초점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띠똔 대행은 “개헌 관련 이슈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화해위원회가 (의회 내에) 설치돼, 찬반 양측을 불러 모아 협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팃 의원 역시 개헌은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하는 문제인 만큼 명확한 로드맵이 나올 수 있다면서 이에 집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출처: 연합뉴스
태국 또 유전무죄?..음주 사망사고 낸 재벌 2세 풀려나
8년 전에도 그랬다. 음주 후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 경찰을 숨지게 한 28살의 재벌 3세(보라윳, 당시 28세, 레드불그룹 창업자의 손자)는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지금 해외에서 잘 살고 있다. 방콕에서 그런데 또 비슷한 사고가 났다. 그야말로 데자뷰다.
지난 22일 새벽 4시, 방콕 도심 한복판 아속(Asok)에서 BMW차량이 어묵 상인을 치었다. 49살의 어묵 상인은 현장에서 숨졌다. 차량은 크게 부서졌다. 운전자는 아라카윈 태차불로 태국의 한 유명기업 오너의 아들이다. 그는 신고없이 현장을 달아났다. 그리고 오후 4시에 경찰에 출석해 범행을 자백했다. 그는 10만 바트(360만원 가량)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가해운전자 아라카윈은 재벌 2세면서 현직 경찰 간부다. 사고로 크게 부서진 그의 BMW차량,태국 부유층들은 비싼 자동차 번호판을 직접 구입한다.
아라카윈은 나르코틱스지방경찰서 마약단속국의 현직 간부다. 사고 직전 우연히(?) 그의 차량을 따라오던 부하 경찰이 그를 태우고 달아났다. 해당 경찰은 사고현장을 목격하고도 가해자를 도주시켰지만, 아직 어떤 혐의도 받지 않고 있다.
사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라카윈의 혈중 알콜농도와 마약 성분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고 12시간이 지나 음주검사가 어렵다는 보도가 나온다.
아라카윈은 2년전 한 유명 여배우와 스캔들이 나면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아라카윈의 아버지 아피차이는 ‘JC 케빈’이라는 거대한 개발회사의 소유주다. 이 회사는 아난타라 방콕 호텔, 사톤 헤리티지 레지던스 콘도, 시암 파라곤의 시그너 사시 레스토랑 등 태국 유명 명소를 다수 소유하고 있다. 아피차이는 또한 태국의 현직 하원 의원이다.
가해운전자 아라카윈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람보르기니 차량. 음주사고로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한 보라윳이 탄 차량도 페라리였다. 태국 부유층 젊은이들은 유행처럼 수퍼카를 소유한다. 사진 아라카윈의 페이스북 발췌.
8년 전 레드불그룹의 3세 보라윳도 그랬다. 경찰을 치어 숨지게 했지만 집으로 도주했다. 경찰은 사고 뒤 불안해서 술을 마셨다는 그의 말을 믿어줬다. 구속없이 풀려났다. 보라윳은 가족의 여객기로 해외로 도주했다. 이후 보라윳 친구들의 페이스북에서 아부다비의 F1경주를 보거나, 홋카이도에서 스노우보드를 타거나, 런던에서 프리미어리그를 관람하는 그의 사진이 올라왔다.
아라카윈은 음주운전 혐의를 빼고, 과실치사와 뺑소니혐의를 받고 있다. 최고 10년 형이 가능하다. 한 현지 신문은 이번 사고야 말로 태국에서 부유한 사람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보도했다(This is an excellent opportunity to show that prison is for the rich as well as the poor).
참, 8년째 해외에 있는 보라윳은 다시 인터폴 수배 명단에 올랐다. 지난 7월 태국 정부가 슬그머니 불기소 방침을 발표하자, 태국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자 갑자기 경찰과 법원은 입장을 바꿔 보라윳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당시 그의 혈액에서 마약성분이 발견됐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부실수사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도 꾸려졌다. 하지만 보라윳이 해외에서 검거돼 올 것라고 믿는 태국사람은 거의 없다. 태국의 감옥은 여전히 부자들에게 낯선 곳이다.
출처 : KBS
주요 인물로 살펴보는 쿠데타와 태국의 현대사
2014년 5월 22일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태국 육군 총사령관 ‘쁘라윳 짠오차’가 이끄는 군부가 제 60대 ‘잉락 친나왓’ 총리 내각에 반기를 들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쿠데타 이후 군인과 경찰로 구성된 국가평화유지위원회(NPOMC)는 기존 입헌군주제 하에 군정(軍政) 지배를 받는 과도 의원내각제 군주국으로 태국의 정부형태를 전환시켜 현재까지 집권해오고 있다. 국가평화유지위원회 의장은 쿠데타 주동자인 쁘라윳 짠오차 육군 총사령관이 맡았으며, 5월 26일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 라마 9세는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처럼 최근 100여 년 동안 태국에서는 무려 21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15차례는 라마 9세 재임 기간 중에 일어났다. 대부분의 쿠데타는 사후 국왕의 추인을 받는 것으로 사실상 왕권-군권 결합 형태로 일어나고 있어서 ‘친위 쿠데타’라고 불리기도 한다.
쁘라윳 총리
소위 ‘도서 동남아’라 불리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싱가포르’와 ‘대륙 동남아’ 혹은 ‘인도차이나’라고 불리는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9개 국가들은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굴욕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태국만은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어서 이것이 태국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초 까지 태국은 식민지 제국주의의 위협 속에, 20세기 초반에는 1차 세계대전과 경제대공항의 도전 아래, 20세기 중반에는 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유명한 ‘대나무 외교’를 통해 국가를 보존한다. 대나무 외교란 태국이 당시 대부분의 동남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지정학적으로 완충지대 역할을 하다가, 1, 2차 세계대전으로 서구 영향력이 약화되던 시기에는 식민지 후발주자인 동아시아 맹주 일본에 기대어 친일 외교노선을 펼치고, 2차 대전 중 미국이 급부상하자 다시 친미 외교로 연합국에 가담하여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옐로셔츠(태국 국민민주주의연대, 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
레드셔츠(반독재 국가민주연합전선, The National United Front of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
또한 1970년대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가 차례로 사회주의 국가 체제로 편입되며 인도차이나반도에 공산화 바람이 불자 태국은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태국 내 미군주둔기지와 공군 비행장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친미 노선을 취하여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태국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태국 국가정체의 존속과 더불어 동전의 양면 같은 근대화와 국가 발전이라는 과제는 흥미롭게도 쿠데타와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번 호 ‘이슈 인사이드(구 기획특집)’는 ‘왕실-군부-민간정부’라는 태국의 엘리트 지배 트라이앵글 구조가 어떻게 형성 발전되었는지 ‘시대 환경과 인물’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봄으로써 태국이라는 나라와 선교 현장을 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지난 100여 년 동안 일어난 무려 21번의 태국의 쿠데타와 관련해서 네 명의 인물들이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태국의 오늘을 형성한 인물들이자 태국 정치, 사회가 어떠한 미래로 갈 것인지에 있어서도 여전히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먼저 출생순으로 피분 송크람(Phibun Songkhram,1897~1964),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 1900~1983), 푸미폰 아둔야뎃(Phumiphon Adunyadet, 1927~2016),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1949~1983)이다. 앞의 두 사람은 절대왕정체제를 무너뜨린 근대 태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이고, 세 번째 인물은 현 짜끄리 태국 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자 국민들의 신적 추앙을 받던 인물로 지난 2016년에 사망한 라마 9세 전 국왕이다. 마지막 네 번째 인물, 탁신 전 총리는 소위 엘로우 셔츠(Yellow shirts)에 대항한 레드 셔츠(Red shirts) 붐을 몰고 온, 2000년 이후 태국 관련 검색어 1위에 오를 만큼 대중적 이슈가 되는 인물이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피분 송크람
1. 피분 송크람(Phibun Songkhram,1897~1964)
짜끄리 왕조 라마 7세 때인 1932년 6월 24일, 피분 송크람(혁신 군부), 쁘리디 파놈용(소장파 관료) 등 프랑스 유학파 엘리트로 구성된 카나랏싸던(1)이 쿠데타/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시암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짜끄리 왕조로는 150년, 과거 수코타이 왕조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7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태국 절대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서구식 민주제도를 도입하여 입헌군주제 정체를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간과 군부집단이라는 상호이질적인 두 집단이합동으로 일으킨 혁명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훗날 이 둘은 프랑스의 드골과 페탱처럼 함께 혁명을 일으켰던 혈맹 동지에서 영원한 정치적 숙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현재 피분 송크람은 ‘태국 군부독재의 아버지’로, 쁘리디 파놈용은 ‘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서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97년에 방콕 인근 논타부리에서 중국계 태국인으로 태어난 피분 송크람은 태국 군사 엘리트 코스인 ‘출라촘클라오 왕립군사학교(Chulachomklao Royal Military Academy)(2)를 거쳐 1924년 국방부유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1934년에 국방장관이 되고, 1938년에 총리직에 올라 당시 태국 제 3대 총리(1938년 12월 26일~1944년 8월 1일)가 된다.
피분 송크람의 총리 재임기간에 태국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국가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 ‘타일랜드(Thailand)’로 변경한 것이었다. 이는 태국 왕국이라는 기존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근대국가로 발전하고자 하는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피분 송크람은 그의 재임기간 동안 극단적인 태국화와 태국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다. 중국계 태국인들을 비롯한 화교들의 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모두 태국식 이름을 가지도록 강요했으며, 태국어 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게도 이들을 진정한 태국인으로 개조시킨다는 미명하에 언어, 문화는 물론 태국 소승불교로 강요하고 이슬람교를 탄압했다. 이 때문에 당시 불교도들에 의한 무슬림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태국민족주의 정책을 ‘랏타니욤(Rathaniyom)’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국수주의적 애국주의 정책이었다.
그 후 피분 송크람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기화로 태국을 통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의 진입하려던 일본의 위협에 일본과 방위동맹을 체결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이로 인해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1946년 석방 후 1947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태국의 제 11대 총리(1948년 4월 8일~1957년 9월 17일)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951년에는 해군에 의한 반(反) 피분 쿠데타의 위기를 극복하고, 1952년 제7차 내각을 조직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비(非)승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가입 등 반공친미(反共親美)정책을 전개했다. 그러나 1957년 쿠데타로 실각 후 1959년부터 일본에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쁘리디 파놈용
2. 쁘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 1900~1983)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쁘리디 파놈용은 중국계 태국인으로서 선조는 중국 광동성 출신이었다. 쭐라롱꼰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태국 국가 장학금으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 공화정 체제에 매료당한다. 귀국 후 “시암 혁명”을 성공시키며 바로 태국 신(新)헌법을 제정하였으며, 라마 7세 퇴위 후 아직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새로운 왕 라마 8세를 대신해 섭정역할도 맡게 된다.
그러나 쁘리디 파놈용은 당시 소련의 경제정책을 모티브로 한 프랑스식 사회주의 정책을 태국 신(新)경제정책으로 도입하여 기득권층이던 왕족과 고위관료, 보수파 군부로부터 불만을 사기 시작한다. 그 정책들의 골자는 곧 토지국유화, 노동자의 공무원화 같은 급진 개혁정책이었다. 그로 인해 같은 인민당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리 대립이 일어나게 되고, 1933년 4월에는 국회에서 신경제정책을 강행처리에 반대한 당시 수상과 군부가 국회를 정지시키고 공산주의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쁘리디 파놈용은 일단 프랑스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이후 돌아온 쁘리디 파놈용은 1934년에는 ‘탐마삿’이라는 명문대학을 설립하였으며, 내무장관, 외무장관, 재무장관 등 현대 태국 내각제에서 주요한 요직을 섭렵했다. 하지만 피분 송크람과는 정치체제와 국가관에 있어 현격한 노선 차이로 대립하다가 결국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피분의 친일적 행위에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드러내면서 완전히 정적(政敵)이 되어 양립할 수 없는 길을 가게 된다.
쁘리디 파놈용이 수상으로 있던 1946년에 라마 8세의 총기사고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태국 국내 정세의 혼란 방지를 빌미로 피분 송크람이 그 다음해인 1947년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자 쁘리디 파놈용 역시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49년에 태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기치로 정변을 시도했지만실패하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1965년에 타이 애국전선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고국을 찾지 못한 채 1983년 5월 2일에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세운 탐마삿 대학교는 쁘리디 파놈용의 민주주의와 자유, 국가와 헌법을 향한 투쟁과 열정, 정신, 영향력이 깃든 학교이다. 쭐라롱꼰 대학교 다음으로 태국에서 두 번째로 정식 국립대학이 되기도 하였다. 이 대학은 원래 ‘법정치대학’으로 불리며 주로 정치학과 법학을 중심으로 가르쳤던 학교였는데, 현재도 이 분야에서 태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학교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76년에 일어난 태국의 민주화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군부세력에 대항한 많은 학생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태국 수도 방콕에 가면 쁘리디 파놈용 소이(Pridi Panomyong Soi)라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가 국왕에게 하사 받은 이름인 프라딧마누탐(Praditmanutham)이라는 지명(地名) 역시 존재한다. 또한 그를 현대 태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민주화의 국부(國父)로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 1900년 5월 11일을 쁘리디 파놈용의 기념일로 지정했고, 방콕에 그가 주도한 ‘자유타이운동(Free Thai Movement)’을 기념한 공원과 기념 도서관이 있으며, 유네스코는 그의 불굴의 정신과 정치적 이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2000년에 ‘세계 위인 역사 달력’에 쁘리디 파놈용을 추가시켰다.
라마9세 푸미폰 아둔야뎃
3. 푸미폰 아둔야뎃(Phumiphon Adunyadet,1927~2016)
라마 9세로 불리며, 지금도 태국 전역의 관공서, 학교, 시장, 호텔을 비롯한 곳곳에 그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1946년에 등극하여 2016년 10월 16일에 서거하기까지 70년 동안 재위한 왕이다.
푸미폰은 1946년 자신의 형 아난다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국왕이 총상으로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한 이후 즉위했는데, 당시 만 18세의 나이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태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갑자기 죽은 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푸미폰 아둔야뎃은 입헌군주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왕이 되었다.
푸미폰 아둔야뎃의 초기시대는 당시 반(反)왕실적인 피분 송크람에 대해 1957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사릿(Sarit)과 타놈(Thanom)이라는 친(親)왕실적인 군인출신 총리들이 등장함으로일단 전화위복을 맞게 된다. 이들은 태국의 존속과 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親)일본, 반(反)국왕 노선을 견지하는 피분 송크람도, 소련이나 프랑스의 급격한 개혁과 좌익적 민주화 노선을 추구하는 쁘리디 파놈용도 아닌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이는 몰락해가는 국왕과 왕실을 태국적 가치를 지닌 구심점이자 상징으로 다시 추대, 선전하면서 태국사회의 안정과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하게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군부 네트워크와 함께 5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었다. 소위 사릿 시대라 일컫는 이 시대에 푸미폰 국왕은 총리와 그 지지 세력에 의해 이미지 제고가 가능했고, 국내 이산 지역 등 빈곤지역 순방, 해외 23개국 순방, 기업가들과의 관계구축과 국교인 불교에의 기부금 증대를 통한 부의 재분배 등은 국왕의 이미지와 왕실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푸미폰의 중기에는 1973년 10월 혁명과 그 후 계속된 1976년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과 민간관료들의 민주투쟁과 유혈사태로 도전을 맞게 된다. 특별히 1976년 탐마삿 대학교 학살 사건, 태국 공산당의 영향력 증대, 국왕과 불교, 군인에 대한 학생들의 노골적 모욕과 경멸, 주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공산화에 대한 불안으로 결국 푸미폰 아둔야뎃은 태국 왕실과 사회 안정을 유지시켜 줄 군부에 손을 들어줌으로 1980년대 ~ 2000년대까지 태국이라는 국가와 불교의 명실상부한 구심점이자 조율사, 해결사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시대 특이한 것은 왕실에서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행함으로서 태국 국민들에게 왕실 이미지가 절대 왕정 시대만큼 제고되었다는 점이다. 푸미폰 국왕이 1986년 12월 5일 6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 태국 역사상 살아 있는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마하랏(Maharat)’, 즉 ‘대왕’ 칭호를 획득했다. 또한 1992년 5월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가 왕실 찬가를 부르자 발포 사격하던 군인들이 사격을 중지한 것도 태국 사회에서 푸미폰 국왕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준다. 1992년에는 푸미폰 국왕이 군부독재 수장 수찐다 장군과 반대편 민주화 시위 대표자인 짬렁 시므앙 두 사람을 불러 국왕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중재하는 장면과 사진이 전 세계 TV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태국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발전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푸미폰 아둔야뎃의 말기시대는 큰 위기와 도전을 맞았다. 시기적으로는 그가 80세를 넘긴 200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다. 직접적인 이유는 푸미폰의 신체적인 노화와 질병, 그리고 왕실에 대한 불만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푸미폰 국왕은 젊어서 왕위 등극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척추를 크게 다쳤을 뿐 아니라, 한쪽 눈이 실명되어 의안을 장착하고 있었다. 이후 후유증과 건강문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와 더불어 그의 후계 문제와 관련된 왕실에 대한 불만과 우려가 누적되었고, 이것이 다시 태국 국민과 사회 발전에 대한 새로운 갈망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셔츠들의 등장이다.
탁신 친나왓과 잉락
4.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1949~현재)
2천 년 대 이후 태국 관련 뉴스들은 옐로셔츠와 레드셔츠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간단히 말하면 옐로셔츠란 태국 국민민주주의연대, PAD(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를 의미하며 이들은 왕당파로 불리며 태국 보수층을 대변한다. 여기에는 군부 엘리트 집단, 방콕 등 중부와 남부 중심의 상류층과 중산층, 사회 안정을 바라는 기업가 계층과 민간 엘리트 등이 속해 있다. 반면 일명 레드셔츠는 반독재 국가민주연합전선, UDD(The National United Front of Democracy Against Dictatorship)로서 개혁파, 급진파로 불리며 태국북부의 치앙마이와 가난한 태국 동북부 이산지역, 도시 빈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레드셔츠의 지도층들은 군부 독재 및 왕실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 활동가들, 친(親) 탁신 경찰, 군부, 민간관료, 기업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태국왕실 모독법’에 의해 처벌받은 진보성향 학자집단도 가세하고 있다.
탁신은 1949년 태국의 중국 객가계(하카계: 客家係) 화교 출신으로 치앙마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계적인 화교자본가로서 1987년에 그는 친나왓 그룹을 설립했으며, 1994년에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고, 1997년 8월에는 태국 연립정부 부총리를 역임하다가, 1998년에 대중들의 정당인 타이락타이당(TRT: 태국을 사랑하는태국)을 창당하고, 2001년 2월에 제 31대 태국 총리(2001. 2. 9 ~2006. 9. 19)가 되었다.
그러던 2006년, UN 총회 참석차 뉴욕방문 중 부정부패 혐의등이 빌미가 되어 군사 쿠데타(3)를 당해 실각하였다. 이후 탁신은2008년 태국으로 돌아온 후 자기 계열의 총리를 후임으로 세웠으며, 다시 여동생 잉락 친나왓을 총리로 선출하는데 힘썼다. 잉락 친나왓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였다. 탁신 계열의연속적인 총리 선출은 태국 빈곤층과 대중적인 지지, 인기와 선거로 인한 영향력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6년 쿠데타 이래 등장한 레드셔츠들은 2008년, 2009년 방콕에서 소요를 일으켜 이로 인한 비상계엄령 선포, 파타야 가두시위와 소요 등을 일으켰으나 모두 무력 진압되었으며, 2009년에는 탁신의 일반여권 말소, 2010년에는 탁신의 재산 절반의 국고 몰수 등으로 태국 보수파와 왕당파들이 기선을 잡게 된다. 이후 2014년 5월 22일 다시 발생한 쿠데타로 보수파의 육군 총사령관 쁘라윳짠오차가 전임 잉락 친나왓의 후임으로 제 38대 총리가 되었다.
라마 10세 와치라 롱꼰
나오는 말
지금까지 현대 태국의 정치사회적 굴곡과 발전을 쿠데타라는렌즈를 통해 중요한 4대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은 결국 태국 현대사에 등장한 3개 그룹의 신흥 지배 엘리트층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바로 ‘군인-민간관료-왕실’이다. 1945년 이후 이들이 태국 민족국가 건설, 공산주의의 위협, 1990년대 후반 IMF경제위기라는 대외적인 도전,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대내적인 과제 앞에서 이 반복된 쿠데타를 통해 태국을 이끌어오고 있다.
2년 전인 지난 2016년 10월 13일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의 사망과 이후 12월 마하 와치랄롱꼰(1952년생)의 라마 10세 즉위를 거치면서, 2018년 현재 태국은 폭풍 속 고요한 찻잔처럼 전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조용한 과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그고요함 이면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갈등과 뇌관이 숨겨져 있다.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내각은 계속되는 총선요구 압력에 직면해 있다. 내년 2019년 총선이 실시될 것이라발표되었는데 과연 태국인들은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 태국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체제가 가장 바람직할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정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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