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던 대야성은 전략적으로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습니다.
백제 입장에서는 대야성을 점령하면 신라 공격에 최일선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고 신라 입장에서는 마지막 방어선이 대야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기에 서로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인데 통일신라시대를 지난 이후의 후백제로서의 대야성이 지니는 의미는 컸습니다.
땅따먹기 싸움에서 강성한 호족이 없었던 강주, 양주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관문인 대야성을 함락해야만 했고 백제를 계승한다는 후백제가 마땅히 얻어야 할 곳이 대야성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견훤이 대야성 점령 이후 구사군, 진례군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북에는 왕건이 버티고 있었고 아버지인 아자개의 상주 지방도 고려에 귀부를 하였기에 이제 남은 것은 강주, 양주 땅이었습니다.
고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 강주, 양주 땅을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고 옛 백제의 동맹국이었던 가야의 영토를 찾는다는 명분, 그리고 유독 구사군(지금의 경남 창원), 진례군(지금의 경남 김해시)을 공격한 것을 보면 일본과의 교역, 해상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