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헤이리> 주변을 걷다
1. 파주의 ‘헤이리’는 나에게 여행의 장소라기보다는 ‘간병’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머니와 S는 헤이리 주변 요양병원에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병원의 불쾌한 소독 냄새를 씻기 위해서 외출하던 곳이 ‘헤이리’였다. 적당한 풍경과 먹을거리가 충분했던 헤이리는 가볍게 외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바람을 만나고 먹을 것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았던 시간의 안타까움과 삶의 마무리가 공존하던 시간이 그렇게 기억으로 남았다.
2. 오늘은 헤이리 주변을 걸었다. 주로 차를 이용하여 이동했기에 헤이리 앞길을 걸은 기억이 별로 없다. 이 길은 거의 사람들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인도는 수많은 낙옆으로 가득차있었다. 시간은 11월 후반, 단풍의 매력을 상실한 채 잎들은 낙엽으로 올해를 끝내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걸어서 만나는 순간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속도가 삶을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 그렇게 천천히 조용히 가을 속으로 헤이리를 만났다.
3. 헤이리 주변에 새로 생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분관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멋진 자료실을 확인했다.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은 박물관의 문화재가 아니라 머물 수 있는 자료실의 유무이다. 파주분관은 책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민속과 관련된 영상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 쉽게 찾을 수 없는 민속자료와 종교자료가 풍부하게 있었다. 헤이리를 중심을 걸으며 쇠락한 한길사의 <책박물관>을 바라본다. ‘한길사’는 파주줄판도시와 헤이리 탄생의 중심이었으며 한동안 다양한 문화적 색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출판도시의 본사는 이제 책을 광고하는 걸개그림을 걸지 않으며 건물내부는 다른 업체가 임대중이다. 헤이리에 있는 카페 겸 책박물관도 짙은 퇴락의 색깔로 가득했다. 카페는 더 이상 영업하지 않고 책박물관만 형식적으로 운영중이었다. ‘한길사’를 보면, 우리 시대의 ‘책문화’가 침몰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도 전체적인 독서의 활성화에는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특정한 쏠림이라는 한국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4. 헤이리 반대편 거리를 걷는다. 이북출신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경모공원>을 지나면 숨겨져 있던 삼국시대 고분이 나타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나면 반갑다. 시간의 연속성에서 지금 존재하고 우리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걷다보니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나타났다. 조용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이 거리에 많은 젊은이들의 웅성거림이 등장한 것이다. 얼마 전 <CJ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가 이 곳에 만들어졌고,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마도 어떤 공연이나 이벤트 행사가 있는 듯한데 거리에 가득차 출입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색하지만 새로운 헤이리 주번의 광경이었다.
5. 헤이리 관광지 내부보다는 바깥의 도로를 걷는 것이 좋다. 헤이리 내부는 왠지 걷기에는 좁고 답답하다. 공간은 카페와 박물관으로 가득차 있고 남아있는 공간에서도 작은 소품을 팔고 있다. 헤이리를 걸으면 길의 동선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 항상 걸을 때마다 연결선과 이동점이 어긋나는 기분이다. 오늘은 비로소 외부로 나왔다. 볼거리는 사라졌지만, 자연스런 풍경과 여유로운 거리가 나타났다. 나에겐 그것이 좋다. 낙엽으로 덮힌 거리를 걸으며 헤이리를 느낀다. 상업적 상징으로 가득찬 헤이리가 아닌 여유로운 공간의 자연스런 헤이리 주변을 걷는 것이다.
첫댓글 ^^^ 걷고 보며 또 걸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