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1,39-45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 오신 분들은 충청방입니다.
가수 가운데 노사연 씨라고 있죠.
그 사람은 어떤 노래 하나 가지고 한평생 살죠? ‘만남’
그 만남 노래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오. 또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소.’
그렇게 나가죠.
여러분들 인생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은데, 노사연의 만남을 얘기를 꺼내는 거 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만남’이죠.
그래서 ‘인생은 만남이다.’ 이렇게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만남의 연속이에요. 맞습니까?
그런데 이 만남의 무대에서 보면 참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죠.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서 악이 생겨날 수도 있고, 선이 생겨날 수도 있고, 또 빛이 비추어질 수도 있고, 어둠이 비추어질 수도 있고.
아무튼 이 ‘만남’이라는 무대에서는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신의와 배신’,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참 기묘한 것이 바로 만남이에요.
우리 성경에 보면, 또 우리 역사에 보면 수많은 만남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바꾸어 지요.
성경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아주 어두운 만남이 구약에 누구와 누구의 만남일 것 같아요?
그렇죠. 카인과 아벨.
시기 질투 때문에 인류 최초의 살인죄가 모르는 남남이 아니라 형제들끼리 근친 살인이에요.
동생은 그냥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이었는데 질투 때문에 카인이 죽였죠.
카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그 질투로 생긴 살인의 만남으로 인류 최초의 불행한 만남으로 성경에는 나오죠.
예수님과 유다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을까?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죠.
배신과 가책의 만남이었어요.
또 우리 역사에 유명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진리를 사랑하는 내면적인 깊은 만남이죠.
아우구스티누스와 암브로시오 주교의 만남은 아우구스딩을 회개로 이끄는 회개의 만남이었죠.
아우구스티노는 알다시피 마니교에 빠져 있는 굉장히 똑똑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교만했죠.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성녀 모니카죠.
우리 가톨릭 역사에서 엄마와 아들이 둘 다 성인 성녀가 된 첫 번째예요.
물론 제일 첫 번째는 성모님과 예수님이죠.
그 후 이런 거룩한 모자를 따라서 성인 성녀 된 분이 모니카와 그의 아들 아우구스티노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아우구스티노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죠.
아주 반 가톨릭적이고 공격적이었어요.
그리고 마니교라는 이교에 빠져 가톨릭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동네에 당대 설교가인 암브로시오 주교가 설교한다고 하여 쫓아갔죠.
무슨 말 하는지 보려고, 배우려고 겸손하게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싸우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고 그냥 무너져 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유명한 고백록을 쓰죠.
이 암브로시오 주교가 있었기에 우리 가톨릭의 4대 교부 가운데 하나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나오셨다는 거죠.
정말 거룩한 만남이에요.
또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의 만남은 기울어 가고 부패해 가는 중세 교회를 재건하는 계기가 되는 거룩한 만남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생겼고, 또 도미니코 수도회가 생겼죠.
당시 중세 교회는 정치를 쥐고 흔들었고 왕도 교황이 임명하니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었죠.
그때 프란치스코는 맨발로 다니는 탁발 수도회를 만들어서 청빈의 삶을 몸으로 보였습니다.
도미니코 성인과 같이, 거기에 클라라 성녀가 합세합니다.
이 세 분의 만남은 쓰러져 가는 가톨릭교회를 다시 초심으로 돌리는데 큰일을 했던 거룩한 만남이라고 우리는 얘기합니다.
또 조선시대 단종과 성삼문의 만남은 신과 의를 잇는 불멸의 충성을 보이는 만남이었습니다.
단종은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를 가죠.
그래도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 했던 성삼문은 바로 신하와 충신의 관계가 어떤 것이오,
그리고 신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만남이었죠.
또 유교를 처음 만든 양반이 누굽니까? 공자잖아요.
그리고 이 공자의 생각을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이 제자 안연이에요.
안연이 없었다면 유교가 오늘처럼 학문으로 내려올 수가 없었을 거예요.
이렇게 공자와 안연의 만남은 유교를 창립하게끔 한 만남입니다.
또 불교의 첫 번째 깨달으신 분이 누구죠? 석가모니시죠.
불교는 계시종교입니까, 자연종교입니까? 차이가 뭐예요?
계시종교는 인간 쪽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3대 계시종교가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이죠
거기와 비교하면 자연 종교는 인간이 만든 거예요.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보리수 앞에서 생로병사를 깨닫죠.
그래서 불교는 참 어려워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본인의 노력 플러스 하느님의 은총이 있잖아요.
내가 완벽하지 못해도 내 부족한 부분을 하느님이 채워주시죠.
그렇지만 불교는 끝까지 본인과의 싸움이죠.
도를 닦다가 무너져 파계하는 스님도 많이 봤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는 불교보다는 훨씬 더 수행하는 것이 쉬워요.
‘신부님,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교리가 다르죠.
한국에 들어와 있는 불교는 대승 불교예요.
원래 석가모니가 만든 건 소승불교, 인도 네팔 이런 쪽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샤머니즘, 토속 신앙과 같이 섞였어요.
그래서 절에도 칠성당 같은 것도 있고 스님이 점도 봐주고, 뭐 짬뽕이 되어 있죠.
원래 불교 교리의 정통인 소승불교는 누구의 도움이 없어요.
본인이 죽어라 도를 닦아 각자가 되어야 해요.
깨달을 각, 각자(覺者).
힐링 가든에 보리수가 큰 게 있는 거 아세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보리수만 낙엽이 안 되고 지금도 파래요.
그래서 저 보리수를 보면서 ‘석가모니가 깨달았던 나무라 좀 다르구나.’ 생각합니다.
보통 침엽수들은 잎이 뾰족뾰족하니 겨울에도 파랗잖아요.
그런데 저건 이파리가 크거든. 그런데도 잎이 그대로 있어요.
이렇게 석가모니가 깨닫고 난 다음, 석가모니의 머릿속에 있는 교리를 정립하는 데 큰 힘이 됐던 제자가 아난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아난의 만남은 불교의 기본 교리를 정립시키는 만남이었다.
또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뭡니까? 인류의 구원 기관인 교회를 탄생시키는 만남이었죠.
그럼, 우리 신자들과 김웅렬 신부와의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
행복한 만남일까, 아니면 불행한 만남일까? 아니면 헷갈리는 만남일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당연히 그 말이 나오겠죠.
그리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잖아요.
내가 왜 이렇게 만남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했냐면 오늘 두 여인이 만나요.
그리고 두 여인만 아니라 두 여인의 태중의 아기들까지도 만나요.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너무 기뻐서 뱃속에서 엄마 배를 차면서 뛰어놀았다고 나와 있거든.
그래서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 그걸 이루기 위해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만난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두 여인의 만남.
인간 역사 이래 여자끼리 만남 중 이렇게 거룩하고 흥분되고 짜릿한 만남이 또 있었을까?
없을 거예요.
인간이 선하게 변하느냐 악하게 변하느냐 하는 것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어떤 만남이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동의하십니까?
예를 들어 성경 공부하는 자매들의 만남은 어떤 만남이 될까요?
성경 공부를 하면서 치고받고 싸울 수 있어요? 아니죠.
성경 공부할수록 회개하는 마음이 들고 또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으며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하는 자매들의 만남은 회개와 감사의 분위기가 주된 분위기였을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 공부하면서 남을 흉볼 수는 없잖아요.
성경에는 남을 축복하려는 말이 있지 흉보라는 말은 없거든.
그 때문에 성경 공부하는 그런 공동체 분위기는 분명히 어둠의 분위기가 아니라 밝은 빛의 분위기, 회개의 분위기,
감사의 분위기, 행복한 분위기고, 집에 올 때는 행복할 거예요.
선하게 분명히 변화시킬 겁니다.
또 반대로 돈으로 연결된 계 모임의 만남은 어떨까요?
자칫 잘못하면 시기와 질투 허세 등으로 만나 떠들고 웃고 남편 흉보고 누구 씹고 밥 먹고.
인간적인 재미는 잠깐 있을지 모르지만, 내적 평화 기쁨과는 분명히 거리가 멀죠.
‘나는 성체를 영하는 것보다 계모임 갔다. 오는 것이 더 행복해’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에요.
또 시집가기 전에는 착했던 자매가 남편 잘못 만나서 성격이 이상해지고 피폐해지기도 하죠.
반대로 남자도 여자를 잘 만나야 하죠.
제가 다큐멘터리를 잘 보는데, 한동안 ‘꼬꼬무’라는 프로를 보았어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게 심층 취재를 하는데, 그것을 계속 보니 내가 좀 어두워져.
어떻게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고 이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또 ‘만남’ 하나 때문에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안이 다 망하는구나.
어떤 여자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무너져 가던 가정을 일으킬 수도 있고, 망가뜨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위를 맞아들이냐에 따라서 이게 또 다 달라요.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분명히 성령이 충만한 만남이었습니다.
또 여자끼리의 만남 중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흥분되고 거룩한 만남은 없을 것이다.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에서 위대한 만남을 갖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거룩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 그들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거룩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만남의 질은 언어의 내용에 따라서 결정이 돼요.
만나면서부터 쌍소리 하는 그런 만남이 있어요. 그죠?
초등학교 지나가다 보면 애들끼리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닌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욕이야.
모두 그렇지 않겠지만 욕을 그냥 일상적인 언어로 써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말에 대하여 뒤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만났던 사람에게 어떤 말을 했던가?
말의 내용은 뭐고 말이 겸손한 말, 공손한 말이었느냐?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말이었느냐?’
‘1년 동안 내가 만났던 형제자매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거짓말한 적은 몇 번이나 되는가,
또 상처 주었던 말들, 책임질 수 없었던 말들을 함부로 남발한 것, 또 남에 대한 말을 근거 없이 퍼뜨린 것은 없었는가?’
하는 것이 이번 판공성사 거리 중 하나입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은 신비스럽고 귀한 것이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내 경솔함 때문에 그리고 시기하는 마음, 악한 마음 등으로 인해서,
정말 아름다운 만남일 수 있었던 것이 추하고 냄새나는 만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뒤돌아보면 참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두 여인의 만남을 위대한 만남으로 만들게 했던 것은 주고받은 말의 내용이다.
어떤 말을 했는가.
두 번째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엘리사벳의 찬사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엄마뻘인 큰 언니, 훨씬 위였지만 마리아에게 찬사를 드리죠.
제일 큰 이유가 뭐죠? 누구 때문에?
세상 법으로 보면 딸 같은 동생인데 저 아이 뱃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안 거예요.
메시아, 예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언니한테 그렇게 찬사를 받은 거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존경받아요.
우리들은 성체를 영하면 즉시 감실이 돼요.
감실은 성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하면 우리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고, 걸어 다니는 감실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서 그 거룩한 몸뚱아리 입에서 남을 험담하고 살기에 찬 말을 하면,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엘리사벳이 마리아보다 훨씬 위지만 마리아에게 극존칭을 쓴 이유는 바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님 때문이었죠.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감실인 우리도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으려면
내 안에 주님이 함께한다고 하는 것을 내 주변 사람들한테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만일 지금 내가 내 가족들과 세상 사람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거죠.
이탈리아는 가톨릭 국가라 종교적인 행사가 마을마다 많았죠.
어떤 축일이 되면 당나귀 등에 예수님 성화를 세워 동네를 돌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성호를 긋죠.
그런데 문제는 이 당나귀가 착각을 한 거야.
어떤 착각? ‘나만 나서기만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네, 내가 대단한 당나귀인가 보다.’
당나귀한테 고개를 숙인 게 아니었죠.
당나귀가 모시고 다니는 예수님한테 고개를 숙인 건데 당나귀는 착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꼴값을 못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은 우리 안에 주님이 현존할 때, 성체를 영한 사람답게 살아갈 때이고,
그때 내 가족들을 회개시키고 이웃 사람에게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엘리사벳의 겸손은 우리들이 정말 늘 묵상해야 하는 거죠.
나이로 보나 족보로 보나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예를 갖췄다고 그랬죠.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듯이
그 엄마도 마리아를 대할 때 그렇게 내려갑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런 어머니였기에 이렇게 겸손한 아들을 낳을 수 있었구나.’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메시아로 알았죠.
만일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깔아뭉갰다면, 예수님은 앞길이 막막한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분의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 이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하면서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합니다.
최상의 자리에서 밑에 자리로 내려가는 건 쉬운 게 아니죠.
가만히만 있어도 왕이 될 처지였고, 메시아가 될 처지였고, 세리가 와서 어떡하면 구원받느냐 묻는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그래서 태교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인성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결정이 된다.
인성이 중요한지 영성이 중요한지 제가 참 많이 이야기하죠.
피정 때도 얘기하고 영성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이 인성이에요.
인성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영성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세례받고 삼사십 년이 됐는데도 뒤돌아보면 세례받았던 몇 년 동안이 제일 깨끗하고 열심히 했던 것 같아..
해가 갈수록 타성에 졌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이상해져.
왜 영적으로 성장이 안 될까, 완덕의 길로 나아가지를 못할까?
영성의 발전이 없는 것은 인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성 안에 어떤 상처가 있다든지, 어떤 죄의식이 있다든지.
그걸 해결 못 하고 세월만 자꾸 가는 거야.
그러니까 자꾸 형식적일 수밖에 없고, 그냥 성사 보기 싫으니까 미사 또 나가고,
교만한 부모 밑에 교만한 자식이 나올 수밖에 없죠.
욕심 많은 부모 밑에 욕심 많은 자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부모 밑에서 기도하는 자식이 나와요.
겸손한 부모 밑에서 겸손한 자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성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정해진다.
하지만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모두 행복한 아이들이었다고 얘기 못 하죠.
여러분들 자식들 10달 동안 뱃속에 뒀을 때 그 열 달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뒤돌아보세요.
분노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그 아이는 탯줄을 통해서 분노를 먹고 열 달 동안 산 거죠.
예를 들어서 원하지 않았던 아이가 임신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 부모들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나아야 하냐, 떼어야 하나?’
남편이 얘기하죠. ‘가서 해결해. 한 살 터울인데 어떻게 길러, 조심하지.’
조심은 자기가 조심해야지, 아내한테 잘못이 뭐가 있어?
하지만 엄마는 애를 뗄 수가 없는 거야.
산부인과 앞을 왔다 갔다. 하니, 그때 배 속의 아이는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배 속에 아이가 손톱만 하더라도 영혼은 완전한 거예요.
영혼이 손톱만 한 것이 아니죠,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그 아이의 영혼은 모든 걸 다 알아요.
내가 축복의 존재인지 암보다 더 더럽고 무서운 존재라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아이는 의식 속에는 기억 못 하고 무의식 속에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아이들은 보면 대부분 되게 거칠고 사나워요.
그리고 커가면서 이유 없이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요, 부모를 싫어해요.
그러는 본인 자신도 자기가 왜 그런지 모른대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한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환시가 보이거든, 태아가 보여.
그러니까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10달 동안 어쩌면 칼에 찍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감 때문에
그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애들이 세상에 나와서 올바른 인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세월이 지나도 늘 어둡죠. 행복하질 않죠.
그래서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태교의 모습.
부모들이 아름다우니까 뱃속에 든 아이들도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러니 사실 요한과 예수님의 제일 처음 만남은 바로 이 부모님들끼리의 만남이었던 거죠.
그래서 인성이라고 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신부님이 되는 그 순간에 신부님의 인성이 아름답게 바뀌냐, 아니에요.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하면서 개떡 같은 인성이 아름답게 바뀌냐, 아니죠.
신학교에서는요. 7년 동안 남들 하는 것만큼 하면 웬만하면 신부가 돼요.
속에 그 사람이 어떤 상처가 있어도 그걸 드러내 놓으면 혹시 잘릴까 얘기 못 해요.
그걸 다 드러내놓고 치유를 받고 신부가 되면은 괜찮은데,
그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남 기도할 때 기도하고 공부하고 방학 때도 생활 잘하고.
그러면 교구에서는 서품을 줘요.
그런데 신부가 되고 나서 ‘이제는 누가 나 못 건드려.’ 그땐 그게 다 드러내는 거야.
그리고 드러나는 것이 신자들한테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자들이 우리 신부님 웃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우리 수녀님 곁에 가면 찬 바람이 쌩쌩 나요.
저 신부님 오고 나서 본당이 다 깨지고 막 분열되고 이상해졌어요.
어느 신부님이 어린 시절에 돈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고 합시다.
너무 가난해서 맨날 빚내서 사니 집 안에는 빚쟁이들만 들락거리고 아버지는 도망 다니고.
어린 마음에 가진 자에 대한 어떤 적개심이 있었다는 거죠.
하여튼 신학교 들어가 신부까지 됐어요.
신부가 되고 나서는 강론에 가진 자에 대한 공격, 흑백 논리로 나가요.
사제는 흑과 백만이 아니라 회색도 받아들여야 해요.
모든 색깔을 다 끌어안는 것이 사제들이죠.
어떻게 흑백 논리로 나갑니까? 세상 논리랑 다르죠.
교회는 죄인이건 아니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 강론을 듣는 신자들 가운데는 흰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많잖아요.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죠.
뱃속에서 엄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은 자식은 커서도 열심히 기도해요.
내가 피정 때 가끔 그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어린 옛날 시절을 뒤돌아보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지겹게 하기 싫은 기도뿐이에요.
저녁에 만과 드리고 아침에는 조과를 드리죠. 그걸 신공, 거룩한 공로라고 그랬어요.
내가 자랄 때는 기도라고 하는 말은 천주교 신자들 입에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 드리는 거룩한 공로인 조과, 밤에 잠자기 전에 만과를 드렸어요.
‘과’자가 한문으로 ‘일 과(課)’예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밥 먹는 게 아니라 신공 드리는 거예요.
잠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에 묻어 있는 화장품 지우는 게 아니라 만과를 드리는 거예요.
우리 형제들은 아침 기도 안 하면 아침밥을 안 먹였던 것 같아요.
벌로 밥을 굶고 도시락도 안 싸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맨날 나는 제일 혼났죠.
‘제일 맏인데 네가 하느님한테 사랑받아야 동생들이 본받지.’
공부 잘해도 다 쓸데없는 거예요, 하느님이 첫 번째예요.
그때는 엄청나게 저항감을 가졌죠.
저녁에 졸려 죽겠는데 만과를 해야만 잠자리에 들게 했거든.
여러분들은 옛날 만과가 얼마나 긴지 모를 거예요.
지금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저녁 기도는 5분도 안 걸려요.
옛날에는 기도서에 기도는 엄청 길었어요.
그리고 묵주 기도 5단 다 바쳐야 하고, 보통 1시간이에요.
아이들은 십자가 밑에 무릎 꿇고 부모님은 뒤에 계시다가 졸면 그냥 귀퉁배기 막 날아오지.
그때는 ‘힘도 약하고 아버지보다 어리니까 내가 대항 못 하지만 나중에 커봐라. 내가 저녁 기도하나 봐라. 바로 자지.’ 했죠.
그런데 뒤돌아보면 기도의 훈련을 배운 건 신학생 때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기 싫었던 부모님에게 훈련받은 기도 생활이 지금까지 나를 잡아주고 있거든.
지방으로 피정에 갔다가 새벽 두세 시에 올 때 많잖아요, 온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죠.
그래도 바로 침대 들어가면 안 돼.
왜? 만과 드리고, 성무일도도 하고, 묵주 기도도 하고 자야 하잖아요.
이런 훈련이 신학교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리고 내가 그런 얘기 가끔 하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처음 입학해 선생님이 내 이름으로 안 부르는 거예요.
나는 내 이름이 김웅열이 아니라 토마스인 줄 알았다고 성이 ‘토’, 이름이 ‘마스’인 줄 알았어.
선생님이 토마스를 안 부르고 김웅렬은 계속 불렀대.
선생님 ‘너 왜 대답 안 해?’, ‘제 이름 아직 안 불렀는데요?’
우리 아버님 어머니 입에서는 호적에 올라가 있는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어요.
우리 부모님들은 세례명 하나 부르는 거 가지고 신앙 교육을 시킨 거예요.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어릴 적부터 세례명을 불러준 자식은 절대 냉담할 수가 없다.
항상 토마스 내 밑에 동생 이냐시오, 셋째 신부 동생은 사베리오, 여동생 레지나, 아네스.
내 동생들도 자기 이름이 뭔지 몰랐대.
웅열이라고 불러도 내가 대답을 안 할 때가 많아 처음엔 선생님이 내가 귀먹은 줄 알았대요.
세례명은 하느님의 자식이라고 하는 거죠.
그 세례명 하나 가지고도 우리 부모님은 철두철미하게 신앙이 뭔지를 알려주셨구나.
자기 세례명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그 자식은 절대 하느님 배반하지 않는다.
비록 사춘기 때 버티기면서 안 나가고 그럴지언정, 항상 세례명이 박혀 있기에.
그리고 기도하는 부모님을 어릴 때부터 본 그 자식은 절대 기도를 놓을 수가 없다.
오늘 이 두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만남이에요.
이 두 만남이 거룩했던 건 첫 번째가 ‘말’이라고 그랬죠.
그 말의 내용이 거룩해요.
거룩한 말만 하려고 애쓰다 보니 당연히 태중에 있는 아기들도 거룩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또 엘리사벳의 겸손을 우리 배워야 하죠.
세례자 요한이 저절로 생긴 게 아니죠.
교육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 엘리사벳이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 나온 거예요.
제대로 된 역사에 남을 인물 하나 만들려면 보통 3대에 걸쳐서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요.
집 안에서 사제가 나오더라도 정말 거룩한 사제를 하나 만들려면,
몇 대에 걸쳐서 가족들이 신앙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말이죠.
오늘 이 두 여인의 만남처럼 우리 신자들의 만남도 거룩하고 복된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 이제 4주일, 주님 오실 날 얼마 안 남았죠. 판공성사 다 보셨죠?
예수님에게 드릴 선물이 무엇일까?
구유함에 돈 집어넣는 게 선물 아니죠. 그거 원하고 계신 거 아닌 거 알죠?
영적 선물을 드려야죠.
지난 1년 동안 주님께서 많은 만남을 허락하셨는데 그 만남을 대하는 자세가 어땠을까?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서 그 만남이 나로 인해서 어둠의 만남이 된 적은 없었을까?
수많은 상처를 뿌리고 다녔던 만남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는 마지막 한 주간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성탄절 맞이하기 전에, ‘그래, 그때 그 사람 상처받을 수 있었겠다.’ 생각이 들면
카톡이든 전화라도 해서 ‘지나간 거 살다 되돌아보니까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혹시 상처받았다면 용서해 주시오.’
뭔가 그런 회개의 작업,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