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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군동면 라천리에 있는 강덕사는 강당과 외삼문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탐진최씨 시조 최사전을 주벽으로 최응규, 최표, 최부, 최극충을 배향하고 있다. |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원조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을 지낸 최철(崔哲, 시조의 祖)이며, 시조는 장작감 최정(靖)의 아들 장경공 최사전(思全)이다. 최사전은 의술(예종의 內醫)로 조정에 진출하여,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탐진(강진의 옛 이름)백에 봉해졌다. 의종 1년 제겹공신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기록에 "한지(寒地)에서 몸을 일으켰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가족적인 배경없이(祖는 종7품, 父는 토목 영선업무) 독자적인 노력과 능력으로 정상에 도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묘소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에 있고 향사일은 음력 10월 14~15일 이틀이며, 봄제사는 음력 3월15일이다. 최사전의 두 아들 최변(弁)과 최효인(孝仁, 원래의 이름은 烈) 이하는 문헌이 실전되어 세계(世系)를 밝힐 수 없어 최사전을 시조로 하고, 각 계파별로 파조를 중시조(1세)로 하고 있다. 계파를 보면 화성파(파조: 應奎), 강진금천파(俊良), 보성조내파(彪), 만경파, 광주성서파(允德, 송암공파), 금남파(井元), 만경율리파(海) 등이며 그 외 효노, 총, 홍건, 유각, 맹상, 제노, 심충, 계, 승태, 장보파 등 많은 지파가 있다. 한편 '경주최씨상계세보'에 탐진최씨는 최치원의 지손 쪽에서 분파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어필로 이름을 하사 받은 崔孝仁
탐진최씨에는 많은 인물이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이부상서 최승(弁), 중서령 최응규(應奎), 중랑장 최원길(原吉), 병부상서 최용승(龍陞), 참지정사 최표(彪) 등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였으며, 최상(尙)은 고려 정종 1년 문과에 급제(5/15위)하고 좌유덕, 예부상서, 동지중추원사, 지공거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탐진최씨는 문무과 20여 명, 사마시 20여 명 등 40여 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최중일(中一)은 진사를 거쳐 세종 32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 지평, 사간을 지냈으며, 최경은 세종 때 도화서화원을 거쳐 별제에 이르렀다.
영암군 군서면 동호리에 있는 입향조 돈재 최대천 선생의 유적비. |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강진현 인물편에는 시조 최사전과 그의 아들 최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최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최사전이 일찍이 아들 형제에게 금잔(金盞) 한 벌씩을 주었는데 최사전이 죽은 뒤 그의 첩이 그 중 하나를 훔쳤다. 큰 아들 최변(弁)이 노하여 채찍으로 치려 했으나 작은 아들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서라도 도와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물건 쯤을 가지고 그럴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받은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고 형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성이 있고 어진 사람이다.” 하며 친히 '孝仁'(효인)이라는 이름을 써 주었다.
영암에는 군서면 동호리에 집성촌
탐진최씨 항렬자는 파별로 다른데, 강진 금천파. 효노파. 광주 주서파. 광주 성서파. 광주 주남 급서남파. 광주 주북파 등은 오생상생법(木-火-土-金-水순서 순환)을 채용한 항렬표이고, 청양 예산 판서공파는 鉀-鳳-炳-寧-茂-起-康-新-任으로 천간(십간)형, 총파는 胃-旭-丙-寧-成-起-鏞-宰-瑞-春-洛-植-炯-均-鍾-浩-根-烈-堯-鎬로 오행상생과 천간 혼합형이다.
탐진최씨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전남 강진군 강진읍 송덕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영암군 군서면 동호리, 금정면 용흥리, 시종면, 전북 옥구군 임피면 술산리, 김제시 만경읍 소토리(입향조: 최경난), 충남 예산군 광시면 노천리,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 경남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등이 있다.
탐진최씨 인구는 2000년 조사에서 21.191가구 68,127명으로 나타나, 최씨의 3.1%, 전국민의 0.15%를 차지했다. 시도별로 보면 광주,전남에 18,000여 명으로 서울보다 많이 살고 있는 등 탐진최씨는 호남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이 중 영암의 탐진최씨는 191가구 464명으로 영암 인구의 0.77%를 차지했는데 이는 전국 비율의 5배 이상이다.
영암 군서면 동호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탐진최씨들은 효노파 진사공파 후손들로, 입향조는 돈재 최대천 선생이다. 동호리 마을입구에는 입향조 돈재 선생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 마을회관 앞 동네 중심에는 오돈제라는 문각이 있어 후손들끼리 모여 문중 일을 상의하고 평소에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탐진최씨 영암인물로는 학계에 최석진 전 전남대 교수, 최석창 조선이공대 교수, 최형택 전주 기전여대 교수, 관계에 최영호, 최창균 전직 공무원, 경제계에 최현, 금융계에 최창남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