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난의 현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보이는 영상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 왔고 영상으로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해졌습니다. 매우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볼거리 하나는 끝내준다 이겁니다. 어쩌면 이야기보다 그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됩니다. 하기는 재난 속에 빚어지는 이야기는 다소 국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애 또는 가족애를 재난 속에 깔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실 그 외에 달리 쓸 만한 소재가 있겠습니까? 가장 무난한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보게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재난의 현장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 모범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어마어마한 재난을 보는 것에 주의가 집중됩니다. 고층빌딩이 운집해 있는 대도시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이기에 만약 내가 저 상황에 놓인다면, 하는 상상을 더불어 갖게 합니다. 재난영화가 갖는 특징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그 상황을 가상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런 재난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적 이론이 뒷받침됩니다. 그렇게 상상으로 이루어진 영화들이 시간이 흘러 현실로 나타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냥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니지요.
재난구조대의 활동이 어디까지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먼저 보입니다. 참으로 대단하다 싶습니다. 승용차가 굴러 떨어지다 낭떠러지 중간 부분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좁은 협곡 사이입니다. 그 차 안에 젊은 여자가 갇혀있습니다. 다행히 재난 현장이 휴대폰으로 연락이 되어 구조헬기가 현장에 당도하기는 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 조금만 움직여도 그대로 추락할 것입니다. 공포에 질린 여자와 죽음을 무릅쓰고 구조에 달려드는 구조대원, 도대체 어떻게 구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영화는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지진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여진의 수준도 아니지요. 오히려 급이 높아집니다. 분명 이상 증후입니다. 지질 연구소 직원이 현장에 나가 확인하다가 오히려 희생을 당합니다. 마음 아파할 여유가 없습니다.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 연구해온 결과가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며 믿지 않고 무심하게 넘겼던 예측활동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는 좀처럼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하기야 현실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론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재난을 맞고야 깨닫지만 시간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재난 앞에는 부도 권력도 아무 힘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습니다. 당장 내가 살기 바쁜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쏟아지는 건물의 파편들을 자기 몸으로 막아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나마 가족이라면 모르되 돈으로 계약한 사람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까짓 돈은 다른 데서 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다른 데서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잃으면 끝이지요. 그러니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면 그것도 어쩔 도리 없이 포기해야 할 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명입니다. 웬만해서는 죽음을 무릅쓸 수 없습니다.
비록 이혼할 입장의 아내이지만 그러나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응낙은 하지만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아내가 위경에 놓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딸이 위기에 처합니다.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갑니다. 그 과정 속에서 주변에 벌어지는 놀라운 변화들이 화면을 채웁니다.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세워진 도시가 어떻게 힘없이 무너지는지 보게 됩니다.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그런 외부적인 재난이 가족 내부에 생긴 틈을 메꿔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재난이 꼭 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잃었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의 문제가 꼭 어느 한 편의 잘못이나 죄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흔하면서도 개선이 잘 안 되는 부분 곧 소통의 부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픔, 그 자책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혼자서 묻어두니 아내는 답답하다 못해 분노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혼으로 끝장을 내려는 것이지요. 함께 재난을 겪으며 속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비로소 오해가 풀립니다. 재난을 통해 다시 합쳐진 가족 그리고 덤으로 얻은 친구, 재난은 또 하나의 관문일 뿐입니다. 영화 ‘샌 안드레아스’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