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저널리즘의 탄생
(퓰리처와 허스트)
1880-90년 대에는 도시의 팽창이 급속하게 나타났다. 1840년에는 25만이 넘는 도시는 한 개 였으나 1890년에는 11개이고, 이 중 3개는 100만이 넘었다. 도시 인구가 전체 인구의 1/3이 되었다.
도시의 팽창은 대중신문의 성장을 가져왔다. 일간지 발행부수가 1850년의 75만부에서 1890년에는 880만부로 늘어났다. 1900년의 미국인 평균 교육수준은 학교교육 5년이었다. 신문은 이들일 읽을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어야 했다. 신문은 가격이 싸야 했고, 개혁적이어야 했고, 읽기가 쉬워야 했고 뉴스 기능이 강화되어야 했다. 이런 신문을 ‘뉴저널리즘’이라고 했다. 이 시대는 바로 ‘뉴저널리즘 시대’였다.
뉴저널리즘의 선두 주자는 퓷리처였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을 실었다. (예로서 여자들은 겉으로는 경멸하지만 귀족들의 사생활을 듣기를 좋아했다.) 퓰리처는 최초로 체육부를 두었고, 범죄사건을 상세히 다루었다. 잔인한 살해방법까지도 상세히 설명하면서 스케치 그림까지 신문에 실었다. 이런 보도가 성공을 거두자 다른 신문들도 이대로 베꼈다.
퓰리처 자신은 많은 돈을 벌어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아메리카 드림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아메리카 드림을 미화했다. 그러면서 돈이 많은 부자를 공격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성공적으로 해냈다.(이것을 두고 정신분열증 보도 태도라고 했다. 정신분열증은 함께 가질 수 없는 가치를 동시에 소유하려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퓰리처는 개혁적이었지만 인종의 편견이 매우 심했다. 아일랜드인, 독일인, 헝가리인을 제외한 외국인을 혐오했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인에게 거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퓰리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외국인이라서 대통령은 될 수 없어. 그러나 대통령을 만들 수는 있어.’ 실제로 1884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클리블랜드에게 승리를 안겼다. 뉴육 시장도 그가 민 시장이 당선되었다. 퓰리처는 미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언론인이 되었다.
1887년에는 23세의 여기자 넬리 브라이를 앞세워 사건 현장에 직접 잠입시켰다(위장취업등). 이로서 잠입취제 라는 새로운 경지를 선 보였다. 이 여기자는 ‘탐정 저널리즘’ 또는 ‘스턴트 저널리즘’의 원조가 되었다.
퓰리처는 1889-90년에 쥘 베른의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신문판매에 이용했다. 퓰리처는 블라이에게 직접 80일 간 여행을 하면서 기사를 써도록 했다. 일주를 할 수 있는 날자를 가장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에게 공짜 유럽 여행을 상품으로 내놓았다. 100만 통의 응모가 있었다. 1893년에는 판매부수가 50만 부를 자랑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퓰리처에게 강력한 도전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나타났다.
허스트는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퓰리처의 신문사에게 기자 수업을 했다. 1887년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사를 창간했다. 선정적이고, 개혁적인 색깔로 1890년에는 재정적으로 성공했다. 철도회사의 무법적 권력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벌인 것은 순수한 정의감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랐던 것이다.
1896년에 ‘뉴욕저널’을 인수해서 퓰리처의 ‘뉴욕월드’에 도전하면서 두 신문사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이때 두 신문사는 대중신문의 모든 본색을 드러냈다. 이때의 저널리즘을 가리키는 말로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이 신문은 선정적인 기사를 실으므로 ‘열쇠구멍 저널리즘’이라는 말도 들었다.(은밀히 엿보기를 하는 것을 peeping Tom이라고 한다.)
황색 신문에 대한 비난도 많았다. 고드킨은 ‘사실을 전반적으로 왜곡하고, 대중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지어내고, 심지어 이런 지어낸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엉터리 제목을 달았다. 더 많은 신문을 팔기 위해서 인간이 이런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황색 저널리즘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만큼 커져 버렸다. 1900년에 발행되는 신문의 1/3은 황색 신문이었다. (신문사는 황색 저널 이외에도 광고에도 목숨을 걸었다. 광고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1897년에 ‘북맨’이라는 잡지가 ‘가장 잘 팔리는 책’을 처음 소개하면서 신문에서도 ‘베스터 셀러’라는 고정란을 실었다. 문학 작품 시장에 소설과 신문이 결합한 형태가 베스터 셀러 발표였다.
미국의 저널리즘이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척했다. 저널리즘의 프론티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