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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의 책읽기】 정구복 교수의 옥고를 받아 문예지에 싣다
■ 역사학자 정구복 교수의 독후소감이 실린 《한국문학시대》겨울호
계간 《한국문학시대》겨울호가 어제(22.12.12) 발행됐습니다.
출판기념회에 다녀왔습니다.
▲ 《한국문학시대》 발행인 김명아 시인 인사말
우선 정구복 교수님 옥고가 실린 문예지 지면을 올립니다.
서적은 우편으로 배달될 것입니다. (옮긴이 윤승원)
―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카페 【책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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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승원 수필문학인이 역사학자 정구복 교수의 독후소감 옥고를 받아 문예지에 싣다
순수종합문예지 《한국문학시대》 2022 · 12월 겨울호 【평론】
정구복 역사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오자 수정한 부분(해당 지면 캡처) |
※ 정구복 교수 댓글 /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책읽기>에서
독후감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 한 가지를 댓글로 올립니다. 《김홍신의 대발해》 각 책의 뒤쪽에 부록으로 붙인 것 중 관서명칭을 관부 <7사>라고 명칭을 달고 이하 관청명을 <사>라고 했습니다.
관청명일 경우 <寺> 자는 <시>로 읽어야 합니다. 이는 국어대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에서 <시>자를 한자로 검색하면 <寺>자가 나오지 않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빈시, 종부시, 태복시, 전의시, 사도시, 등 궁중에 소속된 관청 명칭으로는 <寺>로 쓴 것을 시로 읽어야 합니다.
다음 수정할 기회가 있으면 <7사>와 관청명을 <시>자로 바꾸어주시기 바랍니다. (정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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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김홍신의 대발해』 (2007. 아리샘 刊)를 읽고
정구복 역사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들어가기
이 글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올사모)』 에 필자가 올렸던 간단한 독후감이었다. 올사모 회원이자 전 대전수필문학회장이었던 윤승원 수필가가 이를 계간 문예지 『한국문학시대』에 그대로 싣겠다고 하여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보완한 글이다.
『김홍신의 대발해』라는 책을 다 정독하고 깊이 있게 쓴 글이 아님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역사가가 이 책을 평한 글이 있는지도 검색하지 못했다. 한 역사가의 촌평이라고 이해하여 주시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말씀드린다.
나는 《한국문학시대》 70호에 실린 김현종 작가의 ‘한국문학기행 7’, 「김홍신 문학관 탐방」을 읽고 지역 도서관에서 『김홍신의 대발해』를 빌려다 대충, 대충 보았다. 이 글을 다시 쓰면서 읽지 못한 ‘권 5~8권’까지 다시 빌려다가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았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하지만, 발해사의 전공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독후감을 전문 역사학자의 견해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전체를 깊이 있게 읽지도 못한 사람이 독후감을 쓴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대단히 결례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저자는 이 점을 양해하여주시기 바란다.
■ 저자의 저작 동기
김홍신 씨의 제1권에 실린 ‘작가의 말’인 ‘아! 대한민국의 기품이여’라는 글에 작가의 저술 동기가 잘 밝혀져 있다. 저술 동기는 30년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염려함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2030년대에는 ‘웅혼한 한국인의 기개가 널리 알려져 문명대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을까? 아니면 중국의 거대한 경제 블랙홀에 빨려들어 간난신고를 겪게 될까?’
이에 대한 작가의 결론은 다음 문장에 은유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는 소설 ‘김홍신의 대발해’를 구상하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웠다.”
이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은 없이 다음 대목으로 넘어간다. 마치 시를 읽는 기분이다.
“1986년,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조선족 향토사학자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와 북한을 속방으로까지 만들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 이야기이었다.
이는 작가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한 알의 민족혼이란 씨앗이었다고 한다. 이 씨앗이 움터 자라서 『대발해』 10권의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는 정신적 스승인 법륜스님의 말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작가에게 법륜스님은 “국회의원 10번 하는 것 보다 발해의 역사에 대한 소설을 씀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에 대한 창작 동기가 부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소설을 ‘발해공정’이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중국의 간계한 화이사관과 중화사상의 오류를 파헤쳐야겠다는 분노가 국회의원직의 계속함을 포기하고 소설을 집필함에 착수했다고 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쏟아부은 정열은 가히 초인적인 노력임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작가는 10차례 발해의 고지를 방문하여 자료를 얻고 구상을 깊게 하였다. 중국 당국의 감시 속에 자유로운 답사가 아니었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10권 맨 뒤에 붙인 참고도서 500여 권을 열거한 것에서 이 준비에 얼마나 철저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말’ 마지막에 “3년간 이를 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이에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면서 굳은 의지를 밝힌 점에서 ‘초인적 김홍신’을 생각하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글쓰기 집념에 무한한 존경을 드린다.
실제로 마치 역사기술인 것처럼 서술하기 위하여 당서의 측천무후의 기록을 원용하고 연원 일을 밝힌 기록이 많지만,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이를 근거로 역사 사술이나 이해에 이용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은 역사가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했다는 인상이나 느낌을 주려고 시도했다고 짐작된다. 더구나 220년간의 한 나라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연대로 구획되는 시간의 나눔이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를 구상하기 위한 엄청난 설계도를 작성했을 것이다. 이에는 작가 김홍신의 역사의식, 역사 인식의 총체가 밝혀져 있다고 할 수 있다.
■ 발해사의 역사기록과 역사학계의 동향
발해는 당시의 역사기록을 스스로 남기지 못했고, 당시의 기록으로 남은 것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써진 외국 열전으로 쓴 ‘발해전(渤海傳)’이 유일한 것이고 금석문 세 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발해전’은 중국인이 접촉한 사방의 민족을 서역, 북적, 동이, 남만이라고 하는 4방의 방향과 종족적 개념으로 나누어 쓴 외국 열전 중 북적(北狄) 조에 써진 열전이다. 고려(고구려), 백제, 신라, 왜는 동이 편에 써넣고, 발해는 북적으로 다룬 점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분리해 보려는 의도가 짙게 작용했다고 이해된다. 아마 이는 『당서』 편찬자의 고의적 의도라기보다는 발해의 종족을 말갈족(후일 여진-만주족)으로 파악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발해 당시의 금석문으로는 현재 3가지가 알려졌는데 3대 문왕(생시의 칭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40세 사망) 묘지명(780년 작)과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지명(782년 작), 고진(高震) 묘지명(779년 작)이다.
세계사에서 서양 역사학자들이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는 학자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가 중에도 발해사가 우리의 역사인가에 회의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도 있음이 사실이다.
우리 역사라고 하기에는 고구려의 국가적 계승의식이 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 등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일부로 보기를 주저하는 학자는 동양사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한국사 개설에서 발해사를 언급한 서술에도 발해를 고구려의 부흥국가로 해석하고 있으나 고구려 역사의 계승의식이 좀처럼 밝혀져 있지 않다. (이기백, 《한국사신론》일조각, 2014년 판) 고구려를 계승했다면 고구려 시조에 대한 제사, 전 수도의 중시 등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아야 한다는 본격적인 주장은 조선 후기에 조선학계에 새로이 일어난 역사지리학의 영향으로 유득공(1748~1807)의 《발해고》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을 일으킨 백암 박은식(1859~1925)에 의해 제기되고 특히 그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백암 박은식 전집》 ‘몽배금태조’)
이후 현대에 우리 역사에 발해사를 포함시킨 것은 삼국통일론에 대한 이해에서 종래 신라의 통일론을 수정하여 고려조에 삼국이 통일되었다는 학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신라의 통일론은 근대 역사학을 정립한 단재 신채호에 의해 부정되었고, 특히 북한 학계에서 민족의 통일을 고려의 왕건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나타나 이는 남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추세이다.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주장한 것은 황의돈(1890~1964 : 《대동청사》)과 이우성(1925~2017)에 의하여 주장되어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추세가 현재 남북한 역사학계의 공통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발해학회』도 구성되어 활동 중이다.
고대에 고구려보다 강역이 훨씬 넓은 발해가 우리 역사였다는 점은 우선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자긍심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 리였는데 발해의 강역은 사방 5천 리였다고 한다.
이처럼 발해의 강역이 크게 확대된 것은 당나라의 영토였던 현재 북경의 인근에 있는 등주와 유주를 공격하여 탈취하여 산동반도까지, 남으로는 평양 이북의 땅과 함경도 지역을 아우르고, 북쪽으로 현재 러시아 영토인 목단강 유역까지 즉 옛 읍루, 숙신 지역까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의 인구는 고구려 당시보다 3분의 1이었다고 한다.
발해는 5경 62주, 16부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5경이 여진족이 살고 있는 현재의 만주동북부와 시베리아의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국가체제였다.
발해가 926년에 거란족에 의하여 멸망하자 왕자 대광현 등이 발해유민이 고려에 대거 망명하였는데 전후 총 5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광종대에 크게 활약한 듯하지만, 고려에서 발해의 역사를 쓰지 못한 점이 아쉽다.
왕건 태조는 ‘고려’라는 장수왕 이후 개칭된 고구려의 후기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고구려의 부흥국가 또는 계승국가로 자임했기 때문에 발해를 고구려 부흥국가로 보는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발해의 주 종족이 여진족이었다고 해도 발해의 황실과 정치지도자들은 고구려의 지배층이 크게 장악했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사는 주민 20만 명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지만, 지방에 남겨진 고구려 관료집단을 모두 잡아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발해는 자신들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발해는 초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황제국이었다. 국왕을 고구려적 전통에 따라 대왕으로 칭하였다. 이런 발해와 고구려를 현재 중국에서 동북공정에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고 날조이다. 이는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는 독자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기에 잃어버린 역사라고 칭한다. 문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이 지역에는 문화유적과 유산도 많이 전하지 않는다.
■ 소설 발해사
소설가가 발해왕조의 전시대 역사를 얽어매기에는 고정적인 역사자료의 못이 너무나 부족하다. 이 소설에서 역사적 근거는 당나라 정치상황에 대한 설명과 발해의 황제들의 이름이 있다. 『신·구당서』에서는 발해의 연호 사용을 빠짐없이 기술하고 군왕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정치제도에 대한 아주 개략적인 서술이 있을 뿐이다.
소설의 대부분이 허구이기 때문에 역사가인 나에게는 역사 사실과 작가가 서술한 픽션의 내용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비록 역사소설이라고 하지만 문학가는 너무나 많은 허구적인 픽션을 서술할 수 있다.
이 책 10권 각 권에는 ‘주요 등장인물’을 밝히고 있는데 역사기록에 나오는 사람은 군주된 사람과 장문휴, 고선지, 이정기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발해라는 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작가는 역사기록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하였지만, 일반인은 이를 사실로서의 역사와 픽션으로서의 소설과의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이 소설의 서술은 작가 김홍신의 발해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깊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일반 국민에게 주는 강조된 내용은 무엇일까를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역사의식 중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저자는 발해사를 역사적으로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와 연계시키려는 노력이 강하다. 도처에서 단군조선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20년 만에 고구려의 유장이었던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의 부흥국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구려 시조 신화이야기, 천신족(天神族) 신화, 거문고 이야기 등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백두산을 태백산이라고 하여 이를 중시하는 서술이 곳곳에 보인다.
그리고 금강산에 대한 아름다운 경치의 서술을 상세히 함에 현재 우리가 금강산을 유람했던 기억을 소설화했다고 읽혀진다. 요컨대 이 소설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작가는 당나라와 발해의 군주를 죽은 후에 올린 시호를 쓰지 않고 모두 이름으로 쓰고 있다. 이는 중국 정사 동이전의 기록에서 군주의 이름을 쓴 것을 중국 군주에게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당나라 정치 상황을 기술함에 중국 측 자료를 반영하여 역사기록의 사실성을 강화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대의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당나라 자료를 기초로 하였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사신 왕래의 자료를 함께 엮어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중화사상과 화이론을 깨는 데 얼마의 효과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는 하나의 작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하는 모든 사람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3) 불교 신앙에 대한 강조가 돋보인다, 안국사에 있었던 무명(無名)선사에게 3대 대흠무(문왕)는 석가의 진시사리를 구해오도록 국왕이 직접 찾아가 왕이 그에게 절을 함으로써 그 청에 응하였다고 서술하고 무명이 인도에 가서 이를 구해오는 과정에 대한 서술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진신사리를 구해온 결과의 처리는 조금 가볍게 처리한 감이 있다. (5, 6권의 ‘주요 등장인물’ 조에는 무명선사(無明)로 달리 표기하는 오류가 보인다)
4) 한의학에 대한 서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백제에서 귀화한 신재용과 그 아들 신석정을 등장인물로 만들어 의학이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하며 특히 신석정은 중요한 고비마다 의학적, 약학적 지식을 통해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고 인도에 갔다 왔다는 무명의 여행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삼공의 지위인 태부의 직책으로 대흠무황제에게 아주 소중한 정치적 조언을 했다고 한 점에서 정치 행위에서 백성을 사랑해야 하며 원로가 국가를 위해 정직한 충언을 해야 함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정치가의 견해가 투영되어 있다. 요컨대 이 소설에는 작가의 문화의식, 정치의식, 민족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나가는 말
좀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10권의 마지막 부분에 발해 멸망의 요인을 여러 각도로 서술하고 있으나 마지막 말은 허무하게 끝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여 살펴본다.
“정월 정축(20)일. 야울아보기는 궁성으로 들어와 말 아래 엎드린 발해 황제 대인선을 모질게 끌고 성문을 나섰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는데, 허공에서 해동청 두 마리가 바람과 눈발을 가르며 야율아보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대원수 야울요골이 휘두른 칼날에 참매 한 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러나 참매 한 마리는 야율아보기의 뒷머리 쪽 오목한 풍지혈을 모지게 쪼고 창공으로 한껏 날아 올라갔다. (중략)
대인선은 바둥거리다가 사지를 쭉 뻗은 해동청을 쓰다듬었다. 참매는 숨이 멎었다.
마치 발해처럼”
이 마지막 부분은 독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 못하고 처량한 느낌마저 준다. 해동청 한 마리가 거란의 야울아보기를 복수한 것이라든지, 해동청의 숨이 넘어간 것이 발해의 멸망처럼 끝맺음은 너무 단순하고 무기력함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대인선의 참회문이나 꿈자리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의 역사 계승의식, 왕조 멸망에 대한 책임 등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관점의 문제가 심도 있게 서술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역사소설은 문학가가 역사를 대상으로 창의적이고 많은 상상력을 가지고 서술하는 픽션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써도 좋을는지는 앞으로 문학평론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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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구복 교수 댓글 /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책읽기>에서
독후감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 한 가지를 댓글로 올립니다. 《김홍신의 대발해》 각 책의 뒤쪽에 부록으로 붙인 것 중 관서명칭을 관부 <7사>라고 명칭을 달고 이하 관청명을 <사>라고 했습니다.
관청명일 경우 <寺> 자는 <시>로 읽어야 합니다. 이는 국어대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에서 <시>자를 한자로 검색하면 <寺>자가 나오지 않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빈시, 종부시, 태복시, 전의시, 사도시, 등 궁중에 소속된 관청 명칭으로는 <寺>로 쓴 것을 시로 읽어야 합니다.
다음 수정할 기회가 있으면 <7사>와 관청명을 <시>자로 바꾸어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 정구복 교수 댓글 /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책읽기>에서
독후감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 한 가지를 댓글로 올립니다. 《김홍신의 대발해》 각 책의 뒤쪽에 부록으로 붙인 것 중 관서명칭을 관부 <7사>라고 명칭을 달고 이하 관청명을 <사>라고 했습니다.
관청명일 경우 <寺> 자는 <시>로 읽어야 합니다. 이는 국어대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에서 <시>자를 한자로 검색하면 <寺>자가 나오지 않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빈시, 종부시, 태복시, 전의시, 사도시, 등 궁중에 소속된 관청 명칭으로는 <寺>로 쓴 것을 시로 읽어야 합니다.
다음 수정할 기회가 있으면 <7사>와 관청명을 <시>자로 바꾸어주시기 바랍니다.
본 게시물은 책의 저자는 물론 역사와 문학에 관심 있는 많은 독자가 보게 될 것입니다.
저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올렸습니다.
귀한 옥고를 주시고, 미처 지적하지 못한 부분을 추가로 댓글로 올려 주신
정구복 박사님의 세밀함과 자상함에 감탄하면서 깊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에서
◆ 지교헌(필명 청계산, 철학박사, 수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2.12.14 23:03
김홍신 작가가 발해를 주제로 하는 대하소설을 쓴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여러 가지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역사소설을 대하소설 분량으로 창작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 가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온갖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것만으로도 매우 훌륭하고 칭송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깊이 탐구해야 하고 실지로 탐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창작된 문학작품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김홍신 작가의 대하소설 《대발해사》에 대하여 사학자로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알찬 평론을 제시해 주신 낙암 정구복 박사님 글을 통하여 발해에 대한 인식을 높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1987년에 국립대만대학에서 《발해》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형구 박사의 견해도 들을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낙암 정구복 박사님의 노고에 대하여 거듭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청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