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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저자: 戸田郁子(とだ いくこ) 1959년생
1983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유학
일본인 여성과 한국인 남성의 한일 국제결혼 체험기. 출판: 講談社
목차
01 누나를 만나 주세요 – 유씨 집안의 가족회의
02 웨딩드레스는 입고 싶지 않아 – 결혼식까지 한 달
03 결혼식은 끝났지만 – 유교식 가족의 모습
04 습관이 다른 건 당연하다 – 한일 커플 이야기
05 왜 귀화하지 않느냐 – 국제결혼의 혼인 신고
06 개고기를 먹어 보겠습니까 – 한국의 개고기 이야기
08 돈이 생기면 집을 사자 – 주거 사정의 차이
09 회사 파산도 이직도 흔한 일 – 출판업계의 어려움
09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네 – 아이가 생기다
10 고추는 아들 낳는 징조 – 한국의 출산 문화
11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편한 이름을 – 이름 짓는 법
12 김치와 매실장아찌 – 넘기 어려운 식생활 차이
13 죽은 이를 위로하는 화투 – 남편 친구의 장례식에서
14 신을 믿으세요 – 개신교와 가톨릭
15 행복한 무당은 없는가? – 불교와 민간신앙
16 두 개의 국적과 두 개의 이름 – 가족 속의 아이
17 목표는 서울대학교 – 한국의 교육열
18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 신세대의 노동 의식
19 세탁기로 삶은 달걀 – 신기한 생활 습관
20 친일파는 금기어인가? – 현대 한국인의 일본관
21 한국을 통해 보이는 일본 – 혐한과 반일 사이
22 하얼빈에 오다 – 중국에서 본 한국과 일본
23 한국으로 돈 벌러 가는 사람들 – 연변 조선족
24 가족이 함께 사는 자유 – 두 번째 하얼빈
25 보모는 중국인 – 명수의 삼국어 경험
26 언어를 알면 보이는 것들 – 하얼빈에서의 1년
27 후기
28 해설 – 그들과 함께 보낸 여름 – 関川夏央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 01. 누나를 만나 주세요 ― 류가(柳家)의 가족회의
태양이 이글이글 내리쬐는 여름 오후, 나는 익숙하지 않은 원피스 차림으로 약속한 호텔 로비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인 남자친구가 “누나를 만나주기 바란다”고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나였지만, 그날은 “가능하면 치마를 입고 와 줬으면 좋겠다”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가족에게 소개하는 일이 곧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마저도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직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을 어떻게 할지 이전에,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나와는 인연이 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그의 누나는 이미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누나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동생과 사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동생에게서 들었어요. 오늘은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시게 했습니다.” “아, 아… 네…” 한국에 유학 온 지 3년, 그리고 그 뒤로 일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낸 지 벌써 5년째가 된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 받는 질문이라면 보통 정해져 있었다.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 생활에는 익숙해졌는지, 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달랐다. 나는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로 내 동생을 사랑합니까?” “동생과 결혼하면 한국에서 살 생각입니까, 아니면 일본으로 데려갈 생각입니까?” “한국으로 귀화해서 평생 여기서 살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아이를 낳게 되면 한국인으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까?”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면 당신도 일본 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 부모님은 한국인과의 결혼에 찬성하십니까?” 누나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나는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로 손을 뻗었지만 손이 떨렸다. 분명 에어컨이 켜져 있을 텐데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한국에 귀화해서 평생 한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한국인들이 ‘일제 시대’라고 부르는 식민지 시절의 창씨개명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너는 오늘부터 일본인이니 일본식 이름을 써라”는 말을 들었던 한국인들도 이런 식으로 동요했을까. 물론 그것과 이 일을 비교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이 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이번에는 그의 형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나는 원래 내 일이 되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다. 이때도 “기왕 맛있는 걸 대접해 준다니까 가 보자” 정도의 마음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형과 함께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형수님이 과일을 들고 들어왔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저는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부모님이 우리의 결혼을 크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누나와 형은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나를 만나 내 마음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7월이었다. 일본 잡지 취재 일로 한국인 카메라맨을 찾고 있던 나는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그(柳銀珪)를 소개받았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함께 일을 하면서 금세 마음이 통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도대체 언제 둘이서 구체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했는지 신기할 정도지만, 누나와 형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는 사이에 일이 점점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앞으로 일하면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과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내 마음을 충분히 위로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의 순수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여러 출판사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해 왔다. 고등학교 때 사진 동아리에 들어간 이후 사진에 푹 빠져 버렸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전문 기술보다 학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진 전문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부모님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신구(新丘)전문대학 사진과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재수를 해야 했다.
다음 해 어느 대학 법학부에 합격했지만 그는 부모님에게는 불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1년 늦게 원하는 신구전문대학 사진과에 진학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부모님이 모르는, 내 어두운 과거 중 하나야.” 체격이 꽤 큰 그는 “어두운 과거 시리즈”라며 예전에 카페 의자를 부러뜨렸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들려주며 나를 자주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졸업 후의 진로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일본처럼 잡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젊은 프리랜서 카메라맨에게 일을 맡겨 주는 곳도 거의 없었다. 사진으로 먹고살려면 신문사나 잡지사에 취직해야 하지만, 그러면 매일 업무에 쫓겨 자신의 작품을 찍을 여유가 없다. 패션, 요리, 인테리어, 인터뷰 사진 등 무엇이든 찍을 수 있어야 했다. 졸업 후 그는 한동안 취직을 하지 못해 웨딩 사진을 찍는 사진관에서 일하거나 광고 스튜디오의 조수가 되기도 했다. 이것도 그에게는 “어두운 과거 중 하나”였다.
그 후 선배의 소개로 겨우 작은 잡지사에 취직했다. 한국에서는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출판 업계에서도 보통 2년 정도 지나면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 같은 직장에 오래 있으면 오히려 무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잡지사 카메라맨의 일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일을 시작해도 30대 초반에 사진부 데스크가 되면 더 올라갈 곳이 없다.
이렇게 해서 대부분의 카메라맨들은 서른 살 무렵에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때까지 모아 둔 저축으로 사진관이나 현상 서비스를 하는 가게를 시작하기도 하고, 다른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면서 사진을 계속 찍어 나가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광고 사진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독립해 스튜디오를 차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진으로 생계를 이어가겠다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길은, 이제 대학원을 나와 교사가 되는 것뿐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프리랜서에게 일을 맡기는 잡지사도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사진 원고료가 낮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로 계속 사진을 찍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서른을 넘기면서 바로 그런 갈림길에 서 있던 시기였다.
대학 동기들도 하나둘씩 사진을 떠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는 형의 가게를 도우면 지금보다 세 배의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빨리 직업을 바꾸고 결혼도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내가 좋아서 유학 왔던 한국이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갑자기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무엇이 어떻게 된지도 모른 채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게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언제까지나 한국만을 주제로 삼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일에서도 슬럼프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를 소개받았을 때 솔직히 말해 나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몇 명의 한국 젊은 카메라맨들과 함께 일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모두 말로는 그럴듯한 소리를 하면서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찍어 주는 카메라맨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시사 잡지이지만, 단순한 기록 사진이 아니라 수준 높은 사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세요.”
일본어라면 말하기 어려운 이런 대사도, 이상하게 한국어로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입 밖에 내 버릴 수 있었다. 역시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격이 좀 세진 걸까. 어쨌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듣고 그 역시 발끈했던 모양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약간의 불안을 느꼈고, 그는 건방진 말을 하는 일본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었다. 서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욕에 불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았고, 하루 취재가 끝나면 각자의 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취재가 끝날 즈음에는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앞으로도 둘이 함께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때때로 나를 크게 감동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 둘이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감회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 맛있다. 이렇게 여자와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뭐라고? 지금까지 여자와 데이트해 본 적도 없어?” “응. 나에게는 사진이 전부였으니까. 사진을 계속하려면 결혼도 할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어.”
이 나이가 되어서(?) 나와 만나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말해 주는 남자라니, 아마 일본 전역을 뒤져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라면 일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한편 그는 나와 만나는 일을 곧바로 결혼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었고, 재빨리 가족에게 보고까지 해 두었다.
한 번 사귀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그의 사고방식 덕분에 결국 우리는 순식간에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내가 모르는 사이 그의 집에서는 쪽빠리(일본인에 대한 멸칭)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여부를 두고 중요한 가족회의가 여러 차례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형에 이어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불고기를 대접받았다. 그 결과 아직 나를 직접 만나 보지 못한 어머니만이 끝까지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는 “류가의 가문을 더럽히려는 것이냐. 그래도 결혼하겠다면 나를 죽이고 나서 해라”라는 말까지 들으며 울면서 매달리는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고 한다.
추석(음력 8월 15일)은 한국에서 설날과 더불어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이다.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고 조상의 묘를 찾아간다. 추석 전날에는 어느 집이든 여자들이 부엌일로 바쁘다. 누나가 마침 좋은 기회라며 그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요리 준비를 도우라고 했다. 그의 집에서 유일하게 우리 결혼에 반대하고 있는 어머니와의 대면이었다.
갈까 말까 나는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이겼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에 있던 어머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머리가 아프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형수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은 편이에요. 제가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는 집 안에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거든요”라며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약간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예전부터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편이다.
아마 이때 어머니가 나를 크게 환영해 주었다면 오히려 나는 ‘아직 결혼이라니…’ 하고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내가 모르는 사이 류가에서는 여러 차례 가족회의가 열렸고, 결국 아버지가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했다”고 한마디 하자 어머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문득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얼마나 약한지 떠올랐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에는 누나의 한마디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흑인이나 백인을 데려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같은 동양인이라면 아이가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매우 한국적인 발상 덕분에 미운 일제의 후손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의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일제 시대에 일본인에게 살해된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다행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자마자 이번에는 얼른 결혼식을 올리라며 우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10월. 이번에는 도쿄에서 내 부모님에게 그를 소개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얼른 시집가라”고 말하던 부모님이 크게 당황했다. “조선인이랑 결혼하라고 한 적은 없잖니!” 어머니가 말했다. 신주쿠의 고층 레스토랑에서 부모님과 그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통역은 물론 나였다.
아버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일과 가족에 대해 질문했다. 그가 대답할 때마다 어머니는 얼굴로는 웃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날카로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메라맨이라니, 제대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그쪽 부모님도 반대한다면서요?” “왜 굳이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서 말도 안 통하잖아요.” 그는 1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양복을 답답하게 차려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맞섰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부디 저희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결혼하면 아내의 부모님도 제 부모님과 똑같이 소중히 모셔야 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저에게 효도할 기회를 주십시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통역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식사가 끝났고 그날 밤 그는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체념한 얼굴이었고 어머니는 입만 열면 “조선인이랑 결혼이라니, 이웃들에게 창피해서…”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그는 부모님의 표정만 보고는 결혼을 허락받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다.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한국인과 웃는 얼굴로 날카로운 말을 하는 일본인. 어느 쪽이 더 무섭냐고 하면 역시 일본인이 더 무섭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한일 간의 미묘한 감정의 어긋남도 이런 생활 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아버지!”라고 말을 걸기도 해서 눈총을 받았다. 나는 그 옆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너는 지금까지 부모가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한 일이 하나라도 있었니?”라는 한마디로 겨우 일이 마무리되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 01. 누나를 만나 주세요 ― 류가(柳家)의 가족회의
태양이 이글이글 내리쬐는 여름 오후, 나는 익숙하지 않은 원피스 차림으로 약속한 호텔 로비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인 남자친구가 “누나를 만나주기 바란다”고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니던 나였지만, 그날은 “가능하면 치마를 입고 와 줬으면 좋겠다”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가족에게 소개하는 일이 곧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마저도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직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을 어떻게 할지 이전에,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나와는 인연이 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그의 누나는 이미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누나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동생과 사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동생에게서 들었어요. 오늘은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시게 했습니다.” “아, 아… 네…” 한국에 유학 온 지 3년, 그리고 그 뒤로 일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낸 지 벌써 5년째가 된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 받는 질문이라면 보통 정해져 있었다.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 생활에는 익숙해졌는지, 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달랐다. 나는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로 내 동생을 사랑합니까?” “동생과 결혼하면 한국에서 살 생각입니까, 아니면 일본으로 데려갈 생각입니까?” “한국으로 귀화해서 평생 여기서 살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아이를 낳게 되면 한국인으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까?”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면 당신도 일본 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 부모님은 한국인과의 결혼에 찬성하십니까?” 누나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나는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로 손을 뻗었지만 손이 떨렸다. 분명 에어컨이 켜져 있을 텐데도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한국에 귀화해서 평생 한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한국인들이 ‘일제 시대’라고 부르는 식민지 시절의 창씨개명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너는 오늘부터 일본인이니 일본식 이름을 써라”는 말을 들었던 한국인들도 이런 식으로 동요했을까. 물론 그것과 이 일을 비교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이 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이번에는 그의 형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나는 원래 내 일이 되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다. 이때도 “기왕 맛있는 걸 대접해 준다니까 가 보자” 정도의 마음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형과 함께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형수님이 과일을 들고 들어왔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저는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부모님이 우리의 결혼을 크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누나와 형은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나를 만나 내 마음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7월이었다. 일본 잡지 취재 일로 한국인 카메라맨을 찾고 있던 나는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그(柳銀珪)를 소개받았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함께 일을 하면서 금세 마음이 통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도대체 언제 둘이서 구체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했는지 신기할 정도지만, 누나와 형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는 사이에 일이 점점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앞으로 일하면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과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내 마음을 충분히 위로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의 순수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여러 출판사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해 왔다. 고등학교 때 사진 동아리에 들어간 이후 사진에 푹 빠져 버렸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전문 기술보다 학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진 전문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부모님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신구(新丘)전문대학 사진과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재수를 해야 했다.
다음 해 어느 대학 법학부에 합격했지만 그는 부모님에게는 불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1년 늦게 원하는 신구전문대학 사진과에 진학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부모님이 모르는, 내 어두운 과거 중 하나야.” 체격이 꽤 큰 그는 “어두운 과거 시리즈”라며 예전에 카페 의자를 부러뜨렸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들려주며 나를 자주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졸업 후의 진로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일본처럼 잡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젊은 프리랜서 카메라맨에게 일을 맡겨 주는 곳도 거의 없었다. 사진으로 먹고살려면 신문사나 잡지사에 취직해야 하지만, 그러면 매일 업무에 쫓겨 자신의 작품을 찍을 여유가 없다. 패션, 요리, 인테리어, 인터뷰 사진 등 무엇이든 찍을 수 있어야 했다. 졸업 후 그는 한동안 취직을 하지 못해 웨딩 사진을 찍는 사진관에서 일하거나 광고 스튜디오의 조수가 되기도 했다. 이것도 그에게는 “어두운 과거 중 하나”였다.
그 후 선배의 소개로 겨우 작은 잡지사에 취직했다. 한국에서는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출판 업계에서도 보통 2년 정도 지나면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 같은 직장에 오래 있으면 오히려 무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잡지사 카메라맨의 일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일을 시작해도 30대 초반에 사진부 데스크가 되면 더 올라갈 곳이 없다.
이렇게 해서 대부분의 카메라맨들은 서른 살 무렵에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때까지 모아 둔 저축으로 사진관이나 현상 서비스를 하는 가게를 시작하기도 하고, 다른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면서 사진을 계속 찍어 나가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광고 사진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독립해 스튜디오를 차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진으로 생계를 이어가겠다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길은, 이제 대학원을 나와 교사가 되는 것뿐이다. 최근에야 비로소 프리랜서에게 일을 맡기는 잡지사도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사진 원고료가 낮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로 계속 사진을 찍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서른을 넘기면서 바로 그런 갈림길에 서 있던 시기였다.
대학 동기들도 하나둘씩 사진을 떠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는 형의 가게를 도우면 지금보다 세 배의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빨리 직업을 바꾸고 결혼도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내가 좋아서 유학 왔던 한국이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갑자기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무엇이 어떻게 된지도 모른 채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게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언제까지나 한국만을 주제로 삼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일에서도 슬럼프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를 소개받았을 때 솔직히 말해 나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몇 명의 한국 젊은 카메라맨들과 함께 일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모두 말로는 그럴듯한 소리를 하면서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찍어 주는 카메라맨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시사 잡지이지만, 단순한 기록 사진이 아니라 수준 높은 사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세요.”
일본어라면 말하기 어려운 이런 대사도, 이상하게 한국어로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입 밖에 내 버릴 수 있었다. 역시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격이 좀 세진 걸까. 어쨌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듣고 그 역시 발끈했던 모양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약간의 불안을 느꼈고, 그는 건방진 말을 하는 일본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었다. 서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욕에 불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았고, 하루 취재가 끝나면 각자의 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취재가 끝날 즈음에는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앞으로도 둘이 함께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때때로 나를 크게 감동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 둘이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감회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 맛있다. 이렇게 여자와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뭐라고? 지금까지 여자와 데이트해 본 적도 없어?” “응. 나에게는 사진이 전부였으니까. 사진을 계속하려면 결혼도 할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어.”
이 나이가 되어서(?) 나와 만나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말해 주는 남자라니, 아마 일본 전역을 뒤져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라면 일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한편 그는 나와 만나는 일을 곧바로 결혼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었고, 재빨리 가족에게 보고까지 해 두었다.
한 번 사귀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그의 사고방식 덕분에 결국 우리는 순식간에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내가 모르는 사이 그의 집에서는 쪽빠리(일본인에 대한 멸칭)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여부를 두고 중요한 가족회의가 여러 차례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형에 이어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불고기를 대접받았다. 그 결과 아직 나를 직접 만나 보지 못한 어머니만이 끝까지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는 “류가의 가문을 더럽히려는 것이냐. 그래도 결혼하겠다면 나를 죽이고 나서 해라”라는 말까지 들으며 울면서 매달리는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고 한다.
추석(음력 8월 15일)은 한국에서 설날과 더불어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이다.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고 조상의 묘를 찾아간다. 추석 전날에는 어느 집이든 여자들이 부엌일로 바쁘다. 누나가 마침 좋은 기회라며 그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요리 준비를 도우라고 했다. 그의 집에서 유일하게 우리 결혼에 반대하고 있는 어머니와의 대면이었다.
갈까 말까 나는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이겼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에 있던 어머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머리가 아프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형수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은 편이에요. 제가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는 집 안에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거든요”라며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약간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예전부터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편이다.
아마 이때 어머니가 나를 크게 환영해 주었다면 오히려 나는 ‘아직 결혼이라니…’ 하고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내가 모르는 사이 류가에서는 여러 차례 가족회의가 열렸고, 결국 아버지가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했다”고 한마디 하자 어머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문득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얼마나 약한지 떠올랐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에는 누나의 한마디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흑인이나 백인을 데려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같은 동양인이라면 아이가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매우 한국적인 발상 덕분에 미운 일제의 후손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의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일제 시대에 일본인에게 살해된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다행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자마자 이번에는 얼른 결혼식을 올리라며 우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10월. 이번에는 도쿄에서 내 부모님에게 그를 소개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얼른 시집가라”고 말하던 부모님이 크게 당황했다. “조선인이랑 결혼하라고 한 적은 없잖니!” 어머니가 말했다. 신주쿠의 고층 레스토랑에서 부모님과 그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통역은 물론 나였다.
아버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일과 가족에 대해 질문했다. 그가 대답할 때마다 어머니는 얼굴로는 웃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날카로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메라맨이라니, 제대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그쪽 부모님도 반대한다면서요?” “왜 굳이 부모가 싫어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서 말도 안 통하잖아요.” 그는 1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양복을 답답하게 차려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맞섰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부디 저희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결혼하면 아내의 부모님도 제 부모님과 똑같이 소중히 모셔야 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저에게 효도할 기회를 주십시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통역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식사가 끝났고 그날 밤 그는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체념한 얼굴이었고 어머니는 입만 열면 “조선인이랑 결혼이라니, 이웃들에게 창피해서…”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그는 부모님의 표정만 보고는 결혼을 허락받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다.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한국인과 웃는 얼굴로 날카로운 말을 하는 일본인. 어느 쪽이 더 무섭냐고 하면 역시 일본인이 더 무섭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한일 간의 미묘한 감정의 어긋남도 이런 생활 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아버지!”라고 말을 걸기도 해서 눈총을 받았다. 나는 그 옆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너는 지금까지 부모가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한 일이 하나라도 있었니?”라는 한마디로 겨우 일이 마무리되었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 02 웨딩드레스는 입고 싶지 않아 – 결혼식까지 한 달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곧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예전부터 형식뿐인 결혼식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호적 제도에 묶이는 것도 싫어서 사실은 혼인 신고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에서 살게 된다면, 분명 혼인 신고는 하지 않겠다고 우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살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으면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혼식 같은 거창한 일은 그만두고 친척이나 친구들을 초대해 인사하고 간단히 식사나 하고 끝내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의 가족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국에서는 결혼식을 올리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 생각을 주장해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저축이 많지 않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보았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결혼식 비용은 부모가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웨딩드레스가 어울리지 않으니 입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그제야 모두가 납득(?)했다. 성격이 급한 그의 아버지는 바로 다음 날 전통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코리아하우스에 가서, 연내 주말로 비어 있는 날이 11월 30일뿐이었다며 벌써 예약까지 해버렸다.
“여기라면 드레스 안 입어도 되잖아.” 일본에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더니 어머니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서둘러서 정할 필요가 뭐 있어…” 그리고 달력을 보더니 “그날은 불멸(仏滅)이니까 절대 안 돼!”라고 외쳤다. “한국에는 대안(大安)이나 불멸 같은 거 없어. 이미 예약금도 냈대.” “너 일본인이잖아! 결혼하는 것도 싫다면서 굳이 불멸 날에 정할 필요가 뭐 있어! 나 안 갈 거야. 절대 안 돼!”
이 이야기를 그의 아버지에게 전하자, 다음 날 또 코리아하우스로 달려가 우연히 취소가 나왔다는 12월 1일로 날짜를 바꿔 왔다. 이 날은 일본식으로 말하면 대안(大安)이다. 어머니는 마침내 반대할 구실을 잃어버렸다. “12월 서울은 아주 춥다면서? 싫다. 차라리 봄에 하면 좋을 텐데…” 어쨌든 결혼식까지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살던 아파트를 정리해야 하고 여러 가지 물건도 사야 했다.
한국의 관습에 따르면 여성은 시댁 가족과 친척들에게 선물을 해야 하고, 신혼집에서 사용할 가구와 식기 등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 남성 쪽은 살 집을 마련하고, 신부가 입을 한복(치마저고리)과 옷, 그리고 예물이라 불리는 액세서리 세트를 사야 한다. 서로 교환할 반지와 시계도 골라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관습이 점점 과열되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의사와 약혼했는데 시어머니에게 밍크 코트를 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투다가 결국 살인 사건으로까지 번졌다는 이야기까지 있고, 예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약혼을 파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여성 쪽 결혼 비용이 평균 3천만 원(1991년 당시 환율로 약 500만 엔)이라는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비용을 부모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는 부모에게 비용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내게 있는 돈은 100만 엔의 저축뿐. 그것도 다음에 중국에 갈 때 쓰려고 겨우 모은 돈인데, 결혼 때문에 써야 한다니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쨌든 100만 엔을 한국 돈으로 바꾸면 600만 원이 된다. 일본과 한국은 관습이 다르다는 것을 핑계 삼아 나는 쇼핑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필사적이었다.그의 형은 예물 반지는 역시 다이아몬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사양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보석을 몸에 지니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다이아몬드는 그야말로 돼지에게 진주다!
내가 계속 “필요 없다”고 말하자 “기껏 사 주겠다고 하는데 받으면 되잖아?”라며 모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나하나 설득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작업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복을 한 벌씩, 그리고 결혼식 당일 그가 입을 물건(속옷부터 신발까지) 한 벌, 순은 숟가락과 젓가락 두 벌, 그리고 이불과 가구 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준비하기로 했다.
그의 집에서는 내 옷과 화장품 일체, 내가 입을 한복 두 벌, 결혼식 비용, 신혼집 준비, 그리고 원래는 신부 측이 해야 할 친척 선물로 여성들에게 한복을 한 벌씩 준비하기로 했다. 반지는 18금 같은 디자인으로 맞추고, 시계는 10월 도쿄에 갔을 때 이미 커플로 산 것이 있으니 새로 사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원래 쇼핑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이런 준비만으로도 기가 질렸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준비를 계속 미루고 있었더니 마침내 그의 가족들이 참다못해 내 등을 떠밀어 시장으로 끌고 갔다. 먼저 동대문 시장에서 한복 원단을 골랐다. 일본에서도 기모노를 직접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 어머니가 기모노를 만들 줄 아는 드문 일본인인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한복을 만들 줄 아는 드문 한국인이었다. 덕분에 맞춤을 맡기지 않아도 되어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원색의 천 더미에 둘러싸여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한복은 원색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차분한 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을 보여줘도 잘 입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때 신부가 입는 색은 정해져 있다. 선명한 빨간 저고리와 초록 치마, 혹은 노란 저고리에 아주 화려한 분홍 치마다.
노란색과 분홍색 천을 집어 드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그저 말문이 막혀 있었다.
식이 끝난 뒤 갈아입을 옷은 좋아하는 색을 고르라고 했지만 내가 가리킬 때마다 어머니, 함께 온 언니, 형수, 가게 아줌마, 심지어 맞은편 가게 아저씨까지 “안 돼 안 돼, 그런 건 할머니 같은 색이야.” “신부는 좀 더 밝은 색을 입어야지.”하며 입을 모아 말하니 도무지 정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입는 건 나다 하고 연보라색 천을 움켜쥐고 놓지 않자 그제야 어머니도 마지못해 승낙했다.
위에 입는 두루마기도 빨간색은 도저히 싫다며 파란색으로 해 달라고 했다. 그 뒤로 가족과 친척들 몫의 천까지 잔뜩 사서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날 밤부터 한 달 동안 수많은 한복을 만들기 위해 계속 재봉틀을 밟게 되었다. 며칠 뒤에는 이불을 사기 위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4층에 있는 시장으로 갔다. 이불의 색감도 한복과 비슷하다.
신혼부부용이라며 색동처럼 여러 원색이 줄무늬로 들어간 것을 추천받았을 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화려한 이불이면 흥분해서 잠을 못 잔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불은 자주 바꾸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 양보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주변에서 “마치 환갑 잔치용 같다”고 비난해도 굴하지 않고 연두색 요 하나, 그리고 손님용으로 회색과 자주색을 골랐다.
일본에서는 신혼부부라 해도 보통 이불을 두 장 한 세트로 사지만, 한국에서는 부부가 쓰는 이불이 당연하다는 듯 한 장이다. 나이가 들어도 부부는 한 이불에서 자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심지어 덮는 이불까지 함께 쓰는 부부도 많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는 폭이 넓은 부부용 이불을 부모 앞에서 고르는 것이 왠지 쑥스럽지만, 이것도 이 나라의 관습이니 신경 쓰는 쪽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마 중국에서도 부부 침대는 하나였던 것 같다.
덮는 이불과 베개, 방석까지 사고 나니 합계 25만 원(약 4만 엔)이었다. 가구는 한국적인 나전칠기라든가 번쩍번쩍한 신혼부부용 디자인은 아무래도 싫었다. 부모가 동행하면 또 고르는 데 한바탕 소동이 있을 것 같아서, 이것만큼은 나보다도 더 느긋한 그를 억지로 끌고 나가 둘이서 사러 갔다. 일본과 다른 점은 한국 집에는 벽장(押入れ)이 없기 때문에 이불장을 따로 사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옷장과 같은 디자인으로 사서 줄지어 놓는다.
나무결 무늬의 차분한 분위기로 통일했는데 우리 둘은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그의 가족들에게는 “전혀 신혼집 같지 않다”며 평이 좋지 않았다. 옷장(대·중·소), 이불장, 식탁, 찬장, 의자, 거울, 책장 등을 합쳐 213만 원이었다. 가전제품은 한국산보다 역시 일본산이 더 싸고 성능도 좋다. 어차피 일본에서 내 짐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등은 나중에 일본에서 사기로 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서울에서 샀다.
초등학교 교사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 증명서가 있으면 가전제품 등을 30% 할인받을 수 있다. 그래서 동네 전파상에 갈 때 그의 누나가 함께 가 주었다. 구입한 것은 냉장고, 세탁기, 밥솥, 가스레인지 네 가지뿐이었다. 전기청소기는 친구가 결혼 선물로 사 주었다. 어디서든 흥정을 하는 누나는 가게 주인에게 “신혼부부용인데 좀 더 깎아 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오히려 “어? 신혼부부인데 이것밖에 안 사세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스테레오는 필요 없으세요?”라는 말을 듣고 말았다. 합계 98만 원(약 16만 엔)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가 입을 옷 한 벌을 사는 데 100만 원(17만 엔)이 들었다. 그 밖에 자잘한 물건도 샀지만 어쨌든 내 손에 있던 돈으로 충분히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그의 가족들은 “일본인은 부자라서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절약하는 것 같네” 라는 감상을 흘렸다. 물론 내가 전형적인 일본인이라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좀 이상한 일본인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신혼집은 그의 아버지의 강한 요구로 그의 본가 바로 근처의 아파트로 정해져 버렸다. 그는 막내이고, 게다가 그 며느리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걱정되어 눈이 닿는 곳에 두고 싶다는 배려였다. 하지만 나는 부모에게 그렇게까지 부담을 지우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하숙이든 셋방이든 우리 형편에 맞는 집을 우리가 찾고 싶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좁은 원룸 아파트에서 당분간 살아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너는 외국인이니까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있다. 내가 형편이 안 된다면 모르겠지만, 너희가 살 집 정도는 마련해 줄 능력이 있으니 아무 말 말고 내가 정하는 대로 하거라.” 장소는 올림픽 경기장 바로 옆이었다. 이 근처는 취재 때문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는데, 새로 지은 경기장 옆에 꽤 낡은 아파트가 있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설마 거기에 내가 살게 될 줄이야. 정말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은 지 18년 된 5층짜리, 전형적인 ‘공단 아파트’ 같은 분위기였다. 실제로 한국주택공단이 지은 것이지만 일본과 다른 점은 모두 분양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입주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구입, 전세, 월세다. 전세란 큰 금액의 보증금을 맡기면 매달 집세는 내지 않고, 이사할 때 그 보증금을 그대로 돌려받는 제도다. 금리가 높은 한국에서만 가능한 시스템이다.
큰돈이 없는 사람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매달 집세를 내는 월세를 이용한다. 전세로 내놓을지 월세로 내놓을지는 집주인이 결정한다. 15평짜리인데 구입하려면 1억 원 이상이다. 설마 이런 비싼 집을 “사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전세금은 3,400만 원(약 570만 엔). 이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미안한데 그는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참고로 그의 저축은 60만 원(약 10만 엔)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도 카메라 장비는 많잖아.” “그, 그것만은….” “그럼 렌즈 몇 개라도 팔아서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드리면 되잖아.” 한국에서는 이사를 하면 천장을 포함한 벽지와 바닥 비닐 장판을 전부 새로 바꾸는 것이 거의 당연하다. 부엌 싱크대까지 바꾸는 사람도 있다. 벽에는 어디든 못을 마음대로 박을 수 있다.
어차피 다음 사람이 들어오면 못을 빼고 그 위에 새 벽지를 붙이기 때문에 상관없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인이 일본에 살면 기둥이나 바닥에 상처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고 꽤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는 그의 형의 가게는 꽤 잘 된다. 우리 이사 때도 마치 당연히 자기 일이라는 듯이 수리와 인테리어를 맡아 주었다. 원래라면 이 비용만 해도 꽤 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가족의 호의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식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도리라고 큰소리를 친다. 부모에게 빚을 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부모의 것은 자기 것, 가족의 것은 곧 자기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상호부조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본만큼 보험이 일반화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유 있는 사람이 여유 없는 가족이나 친척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도시의 신혼집 방 하나를 시골에서 올라온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당연한 듯 쓰기도 한다. 집이 좁고 불편하니 하숙을 구하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식비도 방세도 내지 않는다. 그것이 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가족의 생일이나 어떤 행사가 있으면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라도 달려가야 한다.
그의 집은 한국인 중에서도 특히 가족 결속이 강한 편이었다. 술도 담배도 도박도 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와서 반드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한 달에 한 번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가족 모두가 모여 외식을 한다. 가족 단위로 하이킹 가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반면 우리 집은 전형적인 샐러리맨 가정의 모자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아버지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족 여행을 간 기억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없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부모와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나는 한국에 유학을 왔고 귀국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서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많아야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일본의 본가에 국제전화를 한다. 서로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내가 하루에 한 번 이상 그의 집에 전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전화하지 않으니 오히려 그의 아버지가 매일,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온다.“밥은 제대로 먹었니?” “방은 춥지 않니?” “김치는 아직 있니?” 정말로 정반대의 집안에서 자란 우리 두 사람이다.
결혼 준비도 그랬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이런 가족의 결속이라는 것도 좋은 것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남은 문제는 나의 국적과 이름 문제였다. 그의 가족들은 내가 한국인으로서 여기서 살아가기를 바랐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국적과 이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받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버릴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살기 때문에 더욱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잊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파문 없이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나는 번뜩 떠올랐다. 한국 사람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다. “제 부모님은 딸이 일본 국적을 버리면 분명 슬퍼하실 겁니다. 저는 그런 불효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겨 일본을 오가야 할 때도 일본 국적이 편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일본 국적 그대로 있고 싶습니다.” 아마 내 부모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런 핑계를 잘도 생각해 냈네!” 하며 크게 웃었을 것이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03 결혼식은 끝났지만 – 유교식 가족의 모습
결혼식 이틀 전, 일본에서 부모님이 도착했다. 보니 짐이 엄청나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줄 선물이며, 우리가 쓰라며 식기까지 가져오셨다.
“수하물 속 냄비가 금속탐지기에 걸려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알아?”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누가 냄비까지 가져오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 하긴 관광비자로 입국한 사람의 가방에서 냄비가 나왔으니 공항 직원들도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그날 밤이 양가 부모의 첫 대면이었다. 문득 보니 모두 정장을 입고 있는데 나와 그는 둘만 청바지 차림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그의 친척이 자리에 함께했기 때문에, 나와 그는 그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정말 부모 말을 통 안 듣는 아들이라서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노려보자, 우리 어머니도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제멋대로인 딸이라서 곤란해요.”
아버지들끼리는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 다 이제 애도 아니고, 본인들이 결정한 일이니까요.” “부모가 자식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뭐, 둘이서 어떻게든 잘 해나가겠죠.” 아버지들끼리, 어머니들끼리 하는 말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닮아 있어서 묘하게 우스웠다.
결혼식 당일이다. 부모님은 친구에게 부탁해 두었다. 아파트에서 혼자 눈을 뜨니, 이사 준비 때문에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냉장고 속 음식은 다 처분해 버렸고, 냄비와 휴대용 가스버너도 이미 포장해 버려 라면도 끓일 수 없다. 배는 고팠지만 혼자 밖에 나가 밥을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어서, 일단 빨래나 하기로 했다.
그동안 계속 바빴던 탓에 빨랫감이 산더미였다. 기껏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더러운 빨래 더미가 있으면 너무 처량할 것 같았다. 약 세 시간 동안 빈속으로 묵묵히 빨래만 했다. 오후가 되자 근처에 사는 일본인 유학생 S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늘 신부인 나를 따라다니며 도와주기로 되어 있었다. “좀 일찍 나와서 같이 밥 먹자.”
도착한 친구가 “버스 타고 갈까?”라고 말했다. 유학생답게 어디까지나 절약이 우선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 결혼식이다. “택시 타고 가자. 내가 낼게.” 식장 앞에서 내려 식당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갔다. S씨 "된장찌개라도 먹을까?” S씨는 끝까지 소박하다. “불고기 먹자. 내가 쏠게.” “근데 비싸잖아.” “괜찮아.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은 내 결혼식이잖아.”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고기를 굽는다.
“결혼식 직전에 불고기 먹는 신부는 처음 들어.” “식 도중에 배고파서 쓰러지는 것보단 낫잖아.” “불고기 냄새 나는 신부라…” S씨는 계속 나를 놀리며 재미있어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정된 미용실로 가니, 그의 누나가 신부 옷을 가져다 주었다. 화장과 옷차림이 끝나자 어디서 보아도 완벽한 한국인이었다. 평소 하지 않던 화장을 해서인지 얼굴과 머리가 무겁기만 했다.
대기실에 들어가자 부모님은 멍하니 서 있었다. 어차피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순수 한국식으로 할 거라는 이야기는 해두지 않았다. 신부를 식장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어머니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아버지는
“내 딸 같지가 않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한국에서는 다 이렇게 하니까.”
사실은 거짓말이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대부분 웨딩드레스로 결혼식을 올린다.
코리아하우스의 젊은 여성 직원은 우리 어머니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따님 결혼식인데 왜 한복을 안 입고 오셨어요?”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도 몰라 “에? 뭐야, 뭐라고?” 하며 당황해 했다. 하지만 막상 끝나고 나니 허무할 정도였다. 그렇게 싫다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빨래도 다 말랐다. 다행이다…
그날 밤 우리는 부모님이 묵고 있는 롯데월드호텔에 방을 잡았다. 일류 호텔에서의 첫날밤! 하고 기뻐한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우리는 그저 시체처럼 침대에 쓰러져 깊이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부모님이 귀국하기 때문에 아침 9시에 로비에서 양가 부모가 만나 인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8시 50분. 갑작스러운 전화에 우리는 벌떡 깨어났다. “언제까지 잘 거야! 사돈댁 부모님도 벌써 와 계신데 얼른 내려와!” 아침부터 어머니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크, 큰일이다! 9시야!” 세수할 틈도 없이 허둥지둥 뛰어 내려가 보니, 양가 부모님이 로비 소파에 앉아 서로 말없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나타나자마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우리 부모는 나에게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로 마구 소리를 질렀다.
“부모를 기다리게 하다니 무슨 짓이야!” “얼른 내려와야 말이 통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꾸물거리고 자고 있을 거야!” 마치 그동안의 어색한 침묵 속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듯한 기세였다. 신혼 첫날 아침부터 왜 이렇게 혼나야 하는지 서글퍼졌다.
다행히 비행기 시간이 촉박했다. 시간이 없다며 겨우 부모들끼리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그의 부모와 거기서 헤어져 공항으로 갔다. 부모님을 무사히 배웅하자마자 나와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일단 아침 먹자.”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별로 맛도 없는 아침을 거의 말없이 먹었다.
“피곤하지?” “응.” “그래도 일단 끝났다.” “응.” “우리 결혼했네.” “응.” “왠지 이상한 기분이다.”
“응.” “이제 뭐 할까?” “신혼여행 갈까?” “좀 피곤해. 잠깐 쉬자.” “그래.” 일단 내 아파트로 가서 숨을 돌리기로 했다. 방 안 가득 널어 두었던 빨래를 개면서 우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로 들어갈 아파트는 이전 세입자가 아직 이사 갈 집을 못 구했다며 일주일 정도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이 아파트를 정리하는 일을 미루었다.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이대로 여기 있어도 소용없으니까 일단 신혼여행 가자.” “그래. 밖에 나가면 기분도 좀 나아질 거야.” 한국에서 신혼여행이라 하면 보통 제주도나 설악산이 정해진 코스다. 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규슈, 괌, 사이판, 태국, 싱가포르 등 해외로 나가는 커플도 급격히 늘었다.
신부는 한복이나 화려한 예복, 신랑은 새 양복을 입고 여행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 로맨틱한 첫날밤을 일류 호텔에서 보내는… 그런 전형적인 패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일 때문에 휴가도 거의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처럼 청바지와 스웨터 차림으로 그의 차를 타고 서울에서 두 시간쯤 떨어진 수안보 온천으로 향했다.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타미나 닛코로 신혼여행 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직업이 사진가인 그는 일로 사진 찍는 건 좋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에는 카메라를 잡기도 싫다고 한다. 그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 돈이 되는 원고는 부지런히 쓰면서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좀처럼 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평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라며 그의 아버지에게 빌린 포켓 카메라를 가져갔다. 그날 밤 호텔 바에서 바텐더에게 팁을 주고 둘이 함께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다음 날은 수안보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대학 시절 친구 부부와 점심을 먹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잠시 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필름을 꺼내려고 카메라를 열어 보니, 세상에 필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신 프로 사진가잖아. 필름 들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잖아!”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익숙한데 자동 카메라는 거의 만져 본 적이 없어서…” 그는 큰 몸을 미안한 듯 움츠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우리는 곧장 그의 집으로 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가족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곧바로 노란색과 분홍색의 그 한복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조상님께 내가 새 가족이 되었다고 인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조상 이름을 적은 종이와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그 앞에서 한국식 절을 세 번 했다.
그리고 시부모님께 절을 하며 신혼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간단한 일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식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쪽바리’와 ‘조센징’은 서울에서 결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한국과 계속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 같은 것을 거의 다 알게 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바라보았던 한국, 취재 대상으로서 보았던 한국, 일터로서의 한국 사회, 그리고 결혼한 지금의 한국은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어디까지나 ‘손님’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 음식이 좋아서 이것저것 많이 먹어 보았지만, 막상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차례가 되어 보니 어떤 재료를 얼마나 써야 하는지, 양념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취재를 갈 때는 그 집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아 대접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만드는 것을 도와야 하고, 맨 마지막에 식탁에 앉아 먹은 뒤에는 뒷정리까지 해야 한다.
나는 이제 외국인 손님이 아니라 유(柳) 씨 집안의 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그 집안 안에서도 내 위치는 가장 아래이다. 시아버지도 일곱 형제 가운데 막내이기 때문에 친척들이 모두 모이면 역시 내가 제일 아래가 된다. 이것은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집안일이나 음식 간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 내가 의견을 낼 권리는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편하기도 하다.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될 뿐이다. 그가 장남이 아니라는 점도 우리 결혼에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만약 그가 장남이었다면 그의 가족은 틀림없이 끝까지 우리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한국은 유교의 나라니까 친척 관계나 집안일 같은 게 여러모로 힘들겠지?” 내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걱정했다. 나 역시 결혼 전에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나에게 사촌이 몇 명이나 있는지도 나는 모르고, 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던 어머니는 친척들에게도 부끄러워서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결혼식에도 우리 쪽 친척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한국인의 상식으로 보면 이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결혼하고 얼마 동안은 누구의 제사다, 누구의 생일이다 할 때마다 마치 내가 노예로 팔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몹시 싫었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면 여자들은 하루 종일 부엌에서 거의 서서 지낸다. 가장 아래인 나는 그저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나르는 일만 한다. 그렇게 정성껏 예쁘게 차려 놓은 음식도 먼저 남자들이 먹고, 여자들은 그 남은 것을 구석에서 급히 먹어 치울 뿐이다. 아무리 바빠도 남자들은 결코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들은 화투를 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놀고 있으면서 물 좀 가져오라, 사과 좀 깎아 오라, 담배 좀 사 오라 하고 시킨다.
나는 몇 번이나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겁먹은 듯 슬쩍슬쩍 바라보면서도, 주변에 어른들이 있으니 도와줄 수도 없고 그저 몸을 움츠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더 화가 났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는 어떻게든 폭발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 어쨌든 나는 유 씨 집안에서 가장 아래인 며느리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는 어떻게든 내 기분을 풀어 보려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늘 피곤했지? 집에 가면 발 마사지 해 줄게.” “기분 전환으로 어디 드라이브라도 갈까?” “배 안 고파?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그래, 초밥 먹고 싶다고 했었지? 지금 갈까?” “으앙, 무서워. 뭐라도 말 좀 해.” “시끄러워! 조용히 운전이나 해!” “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술을 못 마시는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에 안 좋으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 않는 게… 이불 깔아 줄게, 좀 누워…” 하고 말한다.
술에 취한 내가 그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친척 관계로 힘들었던 것은 오히려 그쪽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때는 시아버지, 형부, 시형,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먼저 식탁에 앉고 여자들은 시중을 든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웃는 얼굴로 시아버지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 집에서는 남자들만 먼저 먹나요?” “식탁이 좁아서 같이 앉을 수 없잖아. 그래서지.” “그럼 다음에는 어머니랑 우리들이 먼저 먹어도 되나요?” “남자들이 먹을 때는 우리가 고기를 구워 주는데 우리는 차가운 고기를 먹어야 하네요.” “제 남편은 저와 같이 먹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중에 먹겠습니다. 아버님 먼저 드세요.”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작아져 있을 뿐이었다. 그 다음부터 그의 집에서는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 커다란 접이식 식탁을 꺼내 모두 함께 먹게 되었다. 나와 형수님이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을 때, 먼저 식사를 마친 시아버지가 부엌에 서서
“오늘은 우리 며느리들 맛있는 고기 먹게 해 줘야지” 하며 즐겁게 고기를 구워 주신 적도 있었다.
시어머니는 “결혼하고 이런 일은 처음이야”라며 놀라워했다. 이런 변화를 속으로 가장 기뻐한 사람은 형수였다. 한국인 며느리가 이런 말을 했다면 당장 쫓겨났을 것이다. 아니, 한국 여성이라면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데리고 집에 갈 때마다 내가 또 이상한 말을 할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훨씬 뒤에 그는 당시의 심정을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한편 나는 점점 이런 생활에도 익숙해져 지금은 새로운 세계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해지고 보니 결코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곤란할 때 달려와 줄 가족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 든든하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겠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지내 왔지만, 막상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이제는 솔직히 기쁘다.
힘든 것은 오히려 그다. 가끔 “한국인과 결혼했으면 이런 일은 절대 안 했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매일 기특할 만큼 성실하게 집안일을 하고 있다.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하지?” “무슨 소리야. 나 하나만 믿고 한국에 시집온 너에게 절대 고생 같은 건 시키지 않을 거야.” 세상에는 내가 한국에 살고 싶어서 위장결혼을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역시 그에게는 비밀로 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05 왜 귀화하지 않느냐 – 국제결혼의 혼인 신고
국제결혼에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절차다. 외국에 살기 위해서는 비자나 재입국 절차가 필요하다. 어느 나라에 살든, 혹은 서로에게 외국인인 상태로 살든, 이런 절차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외국인의 경우라면 이런 절차를 밟을 때마다 참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절차의 방식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무엇보다 나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이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점에서 국제결혼에 관한 책을 사 와서 나에게 해당될 것 같은 부분에 빨간 줄을 그어 가며 읽어 보았다. 결혼 후 내가 한국 국적이 되었느냐, 성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실제로는 국적도 그대로 일본이고, 이름도 그대로 도다 이쿠코였다.
일본에서는 여성의 대부분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한국에서는 결혼해도 여성의 성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가정에서는 어머니만 성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성이 바뀌지 않는 것은 봉건적인 유교 제도 때문으로, 여자는 끝까지 시댁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름이 바뀌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리했다.
나는 일을 시작한 뒤로도 필명을 사용한 적이 없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다 이쿠코’라는 이름 하나뿐이기 때문에, 만약 갑자기 강제로 다른 성을 쓰라고 했다면 결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내 혼인 절차를 되돌아보면 이렇다. 1991년 12월 1일 결혼식을 올리고, 1992년 3월 9일 남편의 본적이 있는 서울시 동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필요한 서류는 양쪽의 호적등본과 정해진 혼인신고서 세 통(증인 두 명과 양쪽 부모의 기명날인이 필요하다)이었다. 이 신고서의 마지막에는 ‘인구동태 사항’이라는 질문이 붙어 있어 실제 결혼 날짜, 동거 시작일, 결혼 경위(연애, 맞선, 절충), 결혼 장소(자택, 예식장, 기타), 직업, 교육 정도(미취학,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이상), 혼인의 종류(초혼, 재혼) 등 꽤 사적인 내용까지 적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결혼 경위 항목에 있는 ‘절충’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혼인신고를 늦게 낸 이유는, 당시 내가 취업비자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고 그 비자가 3월 말에 만료될 예정이어서 결혼하자마자 서둘러 비자 갱신 절차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3월 9일은 서로 시간이 있어 신고하러 갔던 것이다. 혼인신고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 제출해야 한다.
내 경우에는 일본에 있는 짐을 정리해 이삿짐으로 한국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 김에 일본에 돌아가 신고를 하고 비자도 새로 받기로 했다. 일본에 갈 필요가 없다면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에 일본식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일본과 한국의 새로운 호적을 가지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면 취업비자에서 동거비자로 자격을 변경할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주한 일본대사관이 발행하는 ‘혼인요건구비증명서’가 필요하다.
양쪽의 호적등본 두 통, 한국 호적의 일본어 번역문 두 통(번역자 명기), 세대주가 한국인일 경우 주민등록등본, 본인이 서명날인한 신청서와 도장, 신분증을 가지고 가서 신청하고 며칠 뒤에 받아 온다. 다음으로 동거비자를 신청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한다. 초청장과 신원보증서는 공증을 받아야 하며, 결혼 사실이 기재된 호적등본이 필요하다.
이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살 수 있게 된다. 일본과 다른 점은 한국에서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에게 한국으로 귀화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화교 중에는 이렇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적지 않다. 유명한 사례로는 가 주현미(周炫美), 배우 하희라(夏希羅)가 있다.
나도 혼인신고를 낸 뒤 6개월 동안은 이중국적자가 되었고, 남편의 호적 안에 내 이름이 독립된 형태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6개월 후 스스로 국적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일본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선택했고, 1992년 9월 9일자로 한국 국적을 상실했으며 호적 안의 내 이름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다. 내가 이중국적이 된다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어서 어딘가 묘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지금 나는 진짜 ‘반쪽 쪽바리(직역하면 반쯤 일본인. 재일 코리안에 대한 멸칭)’야” 하고 자랑하기도 했다. 참고로 요즘 중국의 조선족 여성과 한국 농촌 청년 사이의 결혼이 급증하고 있는데, 한국 국적을 얻은 여성들이 가난한 농촌 생활을 싫어해 도망가는 사건도 늘고 있다고 한다. 여성 쪽이 처음부터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위장결혼을 할 생각으로 한국에 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일본 남성과 결혼해도 상대 여성은 쉽게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런 문제를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일본 쪽 호적은 내가 호주가 되어 결혼 사실만 기재되었다. 주민등록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지만 당분간 한국에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민세 납부나 확정신고가 번거로워 해외로 전출한 것으로 처리해 일단 말소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연금과 국민건강보험도 중단되었다. 이것은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 가입할 수 있다. 일본에 주민등록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나는 일본 선거에 투표권이 없다. 물론 한국에서도 참정권은 없다. 어딘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어디에 살든 나는 여전히 나인데, 여러 절차를 거치다 보니 내가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나는 호적제도라는 것이 번거롭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누구와 결혼했다는 것을 굳이 국가에 보고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끼리 결혼하면 성까지 바꿔야 하니, 만약 상대가 일본인이었다면 나는 아마 혼인신고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결혼의 경우 비자 절차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결국 호적이 필요하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나는 한국에 계속 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한국은 사회제도가 남성 우선이어서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이 한국에 사는 것은 쉽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이 한국에 살려고 하면 꽤 번거롭다. 동거비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성은 스스로 장기 체류 비자를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 등록해 학생비자를 받거나 취직해서 취업비자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다른 사정으로 이런 비자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3개월짜리 초청비자밖에 없다. 이것은 연장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계속 살려면 기간 안에 한 번 출국했다가 다시 비자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가 한국에서 취직해 있고 남편은 아르바이트로 일본어를 가르친다면, 3개월마다 초청비자를 다시 받기 위해 한일 사이를 오가야 한다. 그러나 초청비자로는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일할 수 없고 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아내가 사회보험에 가입해 있어도 배우자로서 가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언젠가 한국 여성과 결혼해 10년인가 20년이 되었다는 일본인 미용사가 한국으로 귀화했다는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 남성이 한국으로 귀화했다는 사실을 한국 언론은 마치 한일 우호의 모범 사례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적어도 1년에 네 번은 일본에 돌아가 비자를 신청해야 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다른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비자를 다시 받아야 한다. 번거롭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손해다. 이런 일을 3년, 5년 계속하다 보면 누구라도 지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귀화하지 않았던 것은 본인이 귀화에 어떤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거의 30년 가까이 살았던 미국인 지인도 최근 한국에 귀화했다. 미국에 있던 부모도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도 모두 한국인, 일터도 한국이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모아도 외국 국적 상태로는 자기 명의로 집을 살 수 없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독신인 그에게는 의지할 가족이 없다. 50대 중반이 지나 노후의 불안도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귀화였다.
나 역시 한국에 있으면 왜 귀화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한국인을 차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귀화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으로서는 한국에 귀화할 생각이 없다. 앞으로 계속 한국에 산다면 비자나 재입국 문제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불법취업으로 잡힐 걱정도 없으니 귀화하는 편이 편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화’라는 말에는 마치 동화를 강요당하는 듯한 거부감이 있다. 귀화하면 몸도 마음도 한국인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민족의 피’도 흐르고 있지 않고,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갖게 될 것 같지도 않다. 설령 서류상으로 귀화한다 해도 정체성까지 동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외국 국적의 사람에게 “일본으로 귀화하든지, 아니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쉽게 말하는 일본인이 가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태어난 곳도 학교도 직장도 일본이라면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나는 우연히 일본에서 일본인 부모 아래 태어나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았지만,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내가 일본인이며 가해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 귀화하면 나는 더 이상 가해자의 후손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에 불만을 말할 수 있는 피해자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가 된다. 앞으로 생활의 거점은 아마 한국이 되겠지만, 앞으로 몇 년간 일본에 살 수도 있고 또 다른 나라에서 살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면 지금 서둘러 한국에 귀화할 필요는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일본 국적 그대로 한국에 살고 있다. 동거비자와 재입국 허가만 제대로 갱신하면 현재 생활에는 별다른 불편이 없다. 다만 곤란한 점이 하나 있다. 이 비자로는 허가 없이 한국인에게 돈을 받고 일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남편이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해도 내가 외국인인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도 없다.
그게 싫으면 한국에 귀화하든지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자는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말투로 했다. 어느 날 내가 일본어 편집 일을 하던 한국의 한 편집 프로덕션에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조사하러 와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목차에 내 이름이 있어 불법 취업이 아닌가 하는 신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원망을 살 만한 일을 했던가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유학 시절부터 실명으로 한국 잡지에 기고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법 취업으로 적발된 일본인 이야기를 가끔 들었기 때문에 나름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학이나 관광 비자가 아니라 동거비자이니 아르바이트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게다가 그 크레디트는 영문 표기로 아주 작게 실려 있어서 굳이 그런 데까지 신경 써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출두해 보니 마침 불법 취업 일제 단속 기간이어서, 이 기간 안에 자수한 사람은 벌금 없이 국외 추방 처분을 받는다고 하며 동남아시아와 중동에서 온 노동자나 중국 조선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하 입국관리 담당자와의 대화. “동거비자라는 것은 주부로서 가사에 전념하라는 의미로 발급된 비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일본에서도 프리랜서로 일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한국 회사에 취직한 것도 아닙니다. 일본어 편집이라는 일은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외국인이니까 한국인에게 돈을 받고 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한국 잡지에 글을 쓰거나 TV나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도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일을 하고 싶다면 취업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 학교에서 비자를 받았다고 해도 다른 일을 하면 역시 불법 취업입니다.” “그렇다면 신문기자 자격으로 한국에 온 일본인이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것도 모두 불법입니까?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까?” “엄밀히 말하면 비자를 발급해 준 곳 이외에서 일하는 것은 전부 불법입니다.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한국에 귀화하면 됩니다. 당신에게는 귀화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글을 쓰는 것은 내 개인의 권리 아닌가요?” “한국 법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화홍보부 장관의 허가가 있으면 특별히 인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겨 내가 일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한국에 귀화하기만 하면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원고료를 받지 않는 조건이라면 잡지에 기고해도 됩니까?” “원고를 쓰고 원고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니 안 됩니다.”
“한국 출판사에서 내 책을 출판하는 것도 안 됩니까?” “출판사 요청으로 일본에서 나온 책을 번역 출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당신이 한국 출판사에 직접 책을 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안 됩니다. 또 당신이 외국에 살면서 한국 잡지에 기고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거기까지 단속할 수는 없으니까요.”
입국관리 담당자는 내가 계속 따지고 드는 것이 귀찮아졌는지 “곧 한국에도 외국인 전용 수용소가 생깁니다. 일본에도 오무라 수용소라는 게 있지요. 한국 법을 지키지 않으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고 위협하듯 말했다. 남편은 화가 나 있는 나를 달래며 그 담당자를 점심에 초대해 함께 불고기를 먹었다. 식사를 하며 그동안 내가 한국 관광객 유치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역시 남편이 한국 사람이니까 말이 통하네요.” 하고 웃는 담당자를 곁눈질로 보며 나는 화가 나서 맥주만 계속 마셨다. 결국 나는 불법 취업으로 가장 낮은 10만 원의 벌금형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을 열심히 홍보해서 관광객을 불러오는 일을 해 왔는데 오히려 문화체육부 장관에게 상금이라도 받아야 할 판에 왜 벌금을 내야 하냐고.”
일본에서는 일본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이 일본에서 일을 해도 괜찮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에게 한국 돈을 주지 않겠다는 식이다. 게다가 동거비자는 주부로서 가사에 전념하기 위해 발급된 비자라는 설명도 이상했다. 한국에서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편이 회사원이었으면 배우자가 외국인이라도 쉽게 가입할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프리랜서 사진작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국민건강보험에 배우자로 들어갈 수 없었다.
보험에 가입하려면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데 나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한국에 사는 외국인 가운데 국민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사람은 화교뿐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 후 구청에서 보험 관련 법이 바뀌었다는 연락이 왔고, 문의한 지 몇 달 뒤 나도 겨우 한국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같은 서울 안에서도 구마다 대응이 다른 것 같아서, 나와 같은 처지의 일본인 가운데 아직 한국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정말로 국제결혼의 절차라는 것은 복잡하다. 상대가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까지 이것저것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귀찮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아,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흥미롭게 여기며 하나씩 처리해 나갈 수밖에 없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06 개고기를 먹어 보겠습니까 – 한국의 개고기 이야기
한국에서는 개를 먹는다는 이야기가 일본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서울 올림픽 무렵에는 이 일이 서양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개요리집 간판이 큰길에서 사라졌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개 식문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개요리집 간판은 다시 큰길에 당당히 줄지어 서 있다.
개를 먹는다고 해도 결코 애완용 개를 먹는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뭐 애완동물 가게에서 파는 실내견이 맛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게다가 한국인 모두가 개를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개를 먹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대개 중년 이상의 남성이며, 감히 아름다운 여대생에게 “개 드십니까?” 따위의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나는 대단한 개 애호가다. 물론 먹는 쪽이 아니라. 개를 보면 아무리 먼지투성이여도 그만 만져보고 싶어진다. 그런 내가 결국 개를 먹었다. 잡지 취재 때문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한 번 먹고 나니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어(?) 그 뒤로도 몇 번 더 먹게 되었다. 개 요리는 중국의 조선족 사이에서는 더욱 일반적인데, 손님을 대접할 때나 경사가 있을 때 쓰는 고급 요리다. 메뉴는 불고기, 삶아 매콤하게 무친 것, 그리고 탕의 세 종류다.
조선요리 간판이 걸린 가게에는 반드시 개요리 메뉴가 있고, 가게 마루 바닥에는 가죽이 벗겨진 개의 다리가 툭 튀어나온 대야가 놓여 있기도 한다. “활구현살(活狗現殺)”이라는 간판도 섬뜩하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개 시장도 있어 가죽을 벗긴 채로 굳어버린 개의 사체(내 눈에는 아무래도 그렇게 보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그저 식육일 뿐이다)를 그대로 자전거 짐받이에 묶어 달고 가는 사람도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개는 고급 요리라고 들었다. 언제였던가 남북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을 때 북측 대표단이 “남쪽 개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 먹는 개 요리는 대개 매콤하게 끓인 탕이다. 같은 요리라도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보신탕, 영양탕, 계절탕, 사절탕, 멍멍이탕 등으로 불린다. 식용에 가장 적합한 개는 ‘똥개’라 불리는 잡종으로, 시골에서 풀어 기르며 길에 떨어진 사람의 배설물이나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자란 개라고 한다.
예전 한국의 시골에서는 아기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아 아기가 대변을 보면 개가 와서 엉덩이를 핥아 깨끗이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끔은 똥뿐 아니라 성기까지 물어버리는 개도 있었다고 한다. 으악. 지금도 시골에 가면 팔기 위해 개를 기르는 집이 꽤 많다. 그런 집에서는 강아지 때는 애완용, 조금 크면 집 지키는 개, 그리고 몇 번 새끼를 낳으면 결국 보신탕집으로 팔려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다.
가장 맛있는 개는 중형에 갈색 털(일본에서 말하는 ‘적견’)을 가진 개라고 한다. 그러나 상업적으로 거래할 때는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가격의 기준은 몸무게이기 때문에 몸집이 큰 개, 예를 들면 도사견이나 셰퍼드 잡종 등이 선호된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설마 먹지 않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얼마 전 시골에 사는 남편 친척에게서 “언제 놀러 오세요. 개 잡을 테니까요”라는 말을 웃으며 들었다.
개는 탕 외에도 이용된다. ‘개 소주’라는 것이 있다. 물론 개를 소주에 담근 것은 아니다. 개 한 마리 분량의 고기를 여러 약초와 함께 큰 솥에 넣어 찌고, 소주를 증류할 때처럼 그 엑기스를 뽑아낸 것이 바로 개 소주다. 주로 남성의 자양강장제로 쓰인다. 한 마리로 한 달 분량의 엑기스가 나오며, 그것을 하루 세 번 복용하면 신기하게도 허약 체질이었던 사람이 눈에 띄게 건강해지고 식욕이 늘며 혈액순환도 좋아진다고 한다. 개고기는 인간과 성분이 가장 비슷하고 소화 흡수가 잘되며 지방이 적다고도 한다.
참고로 여성에게는 개보다 흑염소가 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나도 출산 후 한 달 정도 흑염소 엑기스를 마신 적이 있다. 개에게 가장 고난의 계절은 여름이다. 일본에서는 복날에 장어를 먹지만 한국에서는 7~8월 사이에 초복·중복·말복이라는 날이 있어 개탕을 먹고 기력을 보충하는 풍습이 있다. 반대로 중국의 조선족은 개를 먹으면 몸이 따뜻해진다며 겨울에 많이 먹는다. 한국에서는 여름이 가까워지면 “개 삽니다―”라고 외치며 자전거 짐받이에 바구니를 매단 아저씨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에는 아끼던 개를 학교 간 사이 아버지가 팔아버려 그 뒤로 아버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가진 아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개의 ‘권리(?)’가 너무 낮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팔아버릴 것이니 이름을 붙이면 정이 들어 곤란하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혹 이름이 있어도 매우 단순하다. 일본에도 시로(白)나 쿠로(黑) 같은 이름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식이 특히 많다. 검은 개는 검둥이, 흑백 얼룩은 바둑이, 갈색은 누렁이다. 또 한국에서는 개는 풀어 기르고 고양이는 묶어 기르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개 장수에게 납치되는 개도 꽤 있다. 개의 낮은 지위는 일상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싸움이 나면 꼭 튀어나오는 욕 ‘개새끼’는 직역하면 ‘개의 자식’이지만 상대를 모욕하는 말로 일본의 ‘바카야로’와 비슷하다. 일본어 ‘결석(欠席-겟쎄키)’이 이 욕으로 오해되는 일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또 “개 같은 남자(여자)”라고 하면 문란한 사람을 뜻하고, “개망신”은 큰 수치를 의미한다.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개죽음”이라는 말도 있다. 그 밖에도 개가 붙은 표현은 대부분 형편없다, 시시하다, 품위 없다 등의 뜻이어서 개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완견 붐도 일고 있다. 애완동물 가게는 호황이며 다른 업종은 불황이라는데도 개 장사와 동물병원만은 경기가 좋다. 수입 개 사료나 목걸이, 장식품 등이 꽤 비싼데도 잘 팔린다. 통계에 따르면 1988년에 비해 최근 몇 년 사이 개 사료 수요가 거의 20배나 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애완견에게는 시로나 쿠로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는다. 바흐, 쇼팽, 베토벤, 피카소, 모딜리아니 같은 거창한 이름을 가진 강아지도 있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도 지인에게 개를 한 마리 받아 기르기 시작했다. 아파트라 원래는 개를 기르면 안 되지만 단지 안에는 이미 개를 기르는 집이 많고 관리인 아저씨도 오히려 귀여워한다. 그 개는 순수한 똥개 잡종으로, 데려올 때 이미 임신 상태였다. 치와와 잡종이라 작은 것은 좋았지만 털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이미 성견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개가 새끼를 낳으면 그 강아지를 기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쉽게 개를 데려오는 일을 진행했고 강아지는 조카들이 기꺼이 맡아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온 개는 한 달 뒤 두 마리의 강아지를 낳았다. 사실 나는 개를 기르는 데 대해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있었다. 어릴 때 기르던 개를 이사 때문에 보건소에 맡겨야 했던 어두운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를 기르면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것이 주인의 의무라고 배웠기에 좋아해도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한국이다. 개에 대한 생각이 일본과 다르다는 것을 나는 개를 길러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리 집에 온 개는 사실 우리가 세 번째 주인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성견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왔다고 해서 그 개가 천수를 다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시어머니는 개가 말썽을 부리면 “그렇게 하면 너 약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라고 소리친다. 약용 개소주의 재료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몸집이 작아 개 장수에게 납치되어 보신탕집에 팔릴 위험은 낮지만 한국에는 “개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가 데려가도 따질 데가 없다. 얼마 전 남편의 절친이 놀러 와서 포메라니안을 받을 예정이라 지금 키우는 코커스패니얼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 개는 혈통서가 있는 개로 20만 원에 샀지만 그냥 주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꽤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좁은 아파트에서 개 두 마리를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기르는 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된다고 남편은 쉽게 말했지만 이렇게 못생긴 개를 누가 잘 길러줄지 걱정이었다. 못 찾으면 식용이나 약용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 강력한 반대로 코커스패니얼은 받지 않기로 했고 우리 집 똥개는 목숨을 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집에서는 한일 개 논쟁이 벌어졌다. 남편은 일본처럼 인간의 편의로 개를 거세시키는 것은 잔인하다고 주장했고 나는 몇 달 키우다 팔고 또 새 개를 들이는 것은 비인도적이라고 맞섰다.
한국에서는 개를 풀어 기르는 일이 많아 개들은 자유롭게 산다. 그래서 암컷이 아버지 모르는 새끼를 임신하는 것도 자연의 섭리(?)다. 잡종 강아지도 상품 가치가 있다. 어느 시장에서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를 5천 원에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보통은 생후 두 달 정도 강아지가 2~3만 원에 거래된다.
일본의 개는 생리 현상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식용이 될 걱정은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는 개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다만 평균 수명을 비교해 보면 한일 간 차이가 꽤 클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 집에서 태어난 두 강아지는 남편 누나와 형 집으로 각각 가게 되었다. 누나 집으로 간 바둑이는 내가 직접 탯줄도 잘라 주었기 때문에 손주 같은 애착이 있었다. 두 번째로 태어난 토토도 통통하고 정말 귀여웠다.
아이들은 개를 몹시 기다리며 전화로 자주 강아지 이야기를 물었기 때문에 잘 키워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행은 먼저 토토에게 찾아왔다. 아이들과 놀다 다리를 다친 것 같았고 계속 아파하며 울자 형수는 불평을 했다. 그러다 얼마 뒤 아이들이 “토토는 줘버렸어”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바둑이는 그래도 누나 집에서 1년 넘게 길러졌지만 피부병이 생겨 결국 어디론가 “보내졌다”. 아마 두 마리 모두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 집에 있던 어미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양가 부모로부터 곧바로 “버려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어쩔 수 없이 그 개를 다시 처음 데려왔던 집에 돌려보내야 했다. 이처럼 생명을 너무 쉽게 사고, 주고, 또 받는 일은 역시 나는 싫다. 애완동물 가게에서 들으니 이태원이나 압구정동처럼 호스티스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혼자 사는 호스티스들이 외롭다며 실내견을 사 갔다가 며칠 지나 “병이 났으니 바꿔 달라”, “죽어 버렸으니 다른 걸 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실내견으로 인기 있는 것은 요크셔테리어나 포메라니안 같은 소형견이다. 강아지 가격은 20만에서 50만 원(1992년 당시 환율로 약 3만에서 7만 엔) 정도이며 물론 암컷이 더 비싸다. 참고로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은 70만 원 정도다. 또 한국에는 토종 개가 두 종류 있는데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진돗개는 일본 개의 조상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귀가 똑바로 서 있고 꼬리가 둥글게 말려 있어 일본의 옛이야기, 예컨대 모모타로나 하나사카 할아버지에 등장하는 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냥 능력이 뛰어나고 주인에게 매우 충성스럽다. 군용견으로 38선 근처에 끌려갔던 개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옛 주인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나 산에서 조난당한 주인을 구했다는 미담도 많다.
지난해 가을에도 개 시장에 팔려 갔던 다섯 살짜리 진돗개가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으로 3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진도의 주인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외모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일부 업자들이 아키타견 등과 교배를 시키는 바람에 지금은 80%가 잡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애호가들은 순종을 지키기 위해 콘테스트를 열거나 사육장을 만들기도 한다.
나도 전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진돗개 사육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다른 개 애호가들과는 달리 진돗개 애호가들에게서는 어딘가 열광적이고 격렬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 진돗개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일본 개와 같은 종이라는 이유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려 했던 내력이 있는 개다. 그런데 애호가들은 오히려 진돗개가 일본 개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애완동물 붐이 일기 훨씬 전부터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어쩌면 우익?)에게 사랑받아 온 개라고 한다.
또 하나의 토종 개 삽살개는 순종이 거의 멸종 직전에 있다는 여론을 반영하여 1992년 3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벤지를 크게 만든 듯한 모습으로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털을 가지고 있다. 성격은 온순하고 주인에게 충실해 신라 시대부터 서민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민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밭에서 불에 휩싸인 주인을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뒤 불붙은 풀 위를 굴러다니며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충견 삽살이 이야기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신문에서 삽살개 보존회 회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삽살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는데 일본 순사가 와서 곤봉으로 개를 때리고 바구니에 넣어 데려가 버렸습니다. 당시 일제는 서울에 조선원피주식회사를 세우고 연간 50만 마리의 삽살개를 잡아 만주 주둔 일본군의 군복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삽살개 보존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진돗개도 삽살개도 일제 식민지 시대 때문에 순종이 줄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다. 이 나라에서는 개마저도 일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무엇에든 애국심을 가질 수 있는 한국인이라는 존재는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거리의 애완동물 가게에서는 법으로 판매가 금지된 천연기념물 혈통견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파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과연 그것이 정말 순종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戸田郁子)
●07. 돈이 생기면 집을 사자 ― 주거 사정의 차이
“너희도 빨리 돈을 모아서 집을 사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시아버지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집을 산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한 번도 입력된 적이 없는 문장이었기 때문에, 처음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이나 땅을 산다는 것은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어느 정도 저축이 생기면 훌쩍 여행을 떠나 모두 써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저축이 바닥나면 다시 부지런히 일한다. 그런 일을 반복해 왔다. 일본에 있는 내 친구들 역시 집이나 토지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가끔 듣는 “도쿄 교외에 대출로 맨션을 샀다”는 친구의 이야기는 왠지 구름 위의 동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시아버지의 말을 웃으며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아버지가 말했다. “뭘 웃고 있는 거냐.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너희 아파트의 전세금을 밑천으로 삼아서, 빨리 아파트라도 살 수 있게 열심히 돈을 모아라.” 한국에서 말하는 아파트는 모두 분양 아파트다. 일본의 맨션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꽤 넓다. 우리가 전세로 살던 곳도 15평에 3DK, 베란다가 두 개나 있었다.
서울 교외로 나가면 그 전세금에 조금만 보태면 같은 정도 크기의 아파트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저축이란 어디까지나 다음 여행을 위한 자금이지, 집을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여행을 갈 정도의 돈은 어떻게든 모을 수 있지만, 집을 살 만큼 큰돈과는 애초부터 평생 인연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울도 집값과 땅값이 급등하고 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도 낡았지만 사려면 1억 원 이상은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엔고라는 아주 강력한 아군이 있었다.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 원으로 바꾸면 금액이 7배가 된다(1992년 당시. 이후 원화는 더 떨어져 1998년 현재는 약 10배).
결혼할 때 시아버지가 마련해 준 전세금은 우리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라고 준 돈이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남편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나에게는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정말 그렇게 기대어도 된다면 집을 사는 것도 꿈만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이니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젊은 사람이 집을 산다는 꿈을 꿀 수 있는 셈이다.
그만큼 집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목돈이 생기면 무엇보다 먼저 “집을 사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무리를 해서 겨우 샀다고 해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더 넓은 곳, 더 편리한 곳으로 점점 단계를 올려 간다. 이 의식의 차이는 일본과 한국의 주택 대출 상환 방식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조금씩 갚아 나가기 때문에 새 집으로 이사해도 아직 100% 자신의 것이라는 의식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대출을 다 갚을 무렵에는 이미 그 집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다. 몇 년, 몇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집이 자기 것이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신의 돈에 더해 가족, 친척, 친구 등 빌릴 수 있는 곳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그래도 부족하면 은행 대출을 받는다. 일본의 대출과 달리 먼저 빌린 돈을 모두 합쳐 일시불로 집을 사고, 빚은 매달 이자를 붙여 조금씩 갚는다. 이렇게 집을 샀다가 도중에 상환이 어려워지면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전세로 내주고 자신들은 다시 전세집으로 옮겨 자금을 돌린다. 여유가 생기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남편의 친구나 지인을 보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꾸려서 30대에 처음 집을 산다. 전세에서 자가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집을 사는 방법은 은행 대출 외에도 또 하나가 있다. 한국주택은행에 몇백만 원을 먼저 예금하고 아파트 분양을 기다리는 방법이다. 계약금을 넣고 약 3년 정도 기다리면 분양받을 권리가 생긴다.
분양 접수는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진다. 완공까지는 약 3년. 처음에 분양가의 3분의 1 정도를 내고 나머지는 1년마다 나누어 3년에 걸쳐 낸다. 그리고 아파트가 완성되어 입주할 때 마지막 잔금을 납부한다. 즉 아파트 건설 자금을 조금씩 건설회사에 지불하면서 완공을 기다리는 방식이다. 이 방법이면 프리미엄이 붙지 않은 비교적 싼 가격에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아버지가 서울 교외에 산 아파트는 38평에 7천8백만 원(약 1천1백만 엔)이었다.
그런데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부동산에서 1억5천만 원의 가격을 붙였다. 부자들이 이런 제도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분양 아파트는 무주택자만 신청 가능하고 입주 후 3년 동안은 반드시 본인이 거주해야 한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여러 가지 있는 듯하다. 본인이 살지 않고 바로 전세로 내놓거나 팔아버리는 사람도 가끔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목돈이 없는 우리도 이 방법으로 집을 사려고 했다.
사실 서울 시내는 이미 인구가 포화 상태라 새 아파트 단지를 지을 만한 부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주택은행에 계약금을 넣으면 예전에는 3년 이내에 분양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게다가 추첨에도 당첨되어야 한다. 장소에 따라서는 경쟁률이 몇 배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래도 도쿄에서 공단 주택에 당첨되는 것보다는 훨씬 확률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느긋하게 언젠가 올 차례를 기다려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갑자기 급전개했다. 우리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갑자기 시아버지가 새로 산 38평 아파트를 우리에게 주겠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사 둔 거야.” 남편도 또 당연하다는 얼굴로 엄청난 말을 꺼냈다. “원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집은 형에게 주었고, 지금 사는 아파트(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시누이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는 누나 부부에게 사 준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 산 건 우리 거지.”
“에에? 그럼 아버님과 어머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세요?” “세 자식 집을 차례차례 돌아다니면서 묵으면 되지.” 부모에게 그런 불편한 생활을 강요해 놓고 자기들은 끝까지 부모에게 의지하려는 것일까. 그런 일이 한국에서는 괜찮은 것일까. 그런데 남편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 형제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형 부부는 결혼 후에도 몇 년 동안 시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고, 지금도 시아버지가 사 준 집에 살고 있다.
누나 부부의 아파트도 시아버지가 상당히 도와주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이거나 결혼 전이라면 몰라도, 결혼한 뒤에도 부모에게 그렇게 의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한국의 부모는 여기까지 자식에게 해줘야 하는 것일까. 농담이 아니다. 나는 그런 일은 못 한다. 결혼한 지금 부모의 도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을 생각도 없고, 내가 부모가 되더라도 내 자식에게 그렇게까지 해 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 자식 간의 정이 얕다거나 냉정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다. 인간은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한국의 모든 가정이 이런 것은 아니다. 우연히 내가 시집온 집이 이랬을 뿐이다. 남편은 형도 누나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부모가 준다고 하면 그냥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파트 값은 우리가 시아버지에게 지불하겠다고 고집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집한 이유는 공짜로 받으면 언제까지나 “사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간섭하고 싶어 하는 시누이가 틀림없이 “너희 아파트는 아버지 거니까 효도 잘해라”라고 훈계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집을 받았으니 효도한다, 돈을 내면 부모와 상관없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어려울 때 언제든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로 있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시누이의 말도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다. 자기들도 충분히 부모 도움을 받으면서 그건 제쳐 두고 우리에게 훈계한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어쨌든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자고 생각했다. 분양가 7천8백만 원 중에서, 이사를 하며 돌려받은 전세금 3천4백만 원을 먼저 시아버지에게 돌려 드리고, 나머지는 일본에 있던 저축을 전부 가져왔다. 엔고 덕분에 한국에 가져오니 약 2천만 원 정도가 되었다.
남은 돈은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시아버지에게 그렇게 큰돈을 한 번에 준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은 남편 가족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자식에게 돈을 받을 생각은 없다”고 고집하던 시아버지도 전혀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38평 아파트는 우리 것이 되었다. (아직 전부 다 갚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던 15평 집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넓다. 4LDK에 화장실도 두 개나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에서는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같은 세대 평균 주거 공간과 비교해도 꽤 넓은 편일 것이다. 도쿄의 주거 사정을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이곳은 서울의 위성도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한 구석이다. 서울 중심부까지 지하철로 40분. 눈앞에 도서관과 스포츠센터, 축구장이 있고 학교와 쇼핑센터도 갖춰져 있는 좋은 환경이다. 우리에게는 과분한 집이다. 이곳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이상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기쁘다. 이제 평생 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 기쁘다.
보통이라면 자기 집을 가지기까지 여러 번 이사를 반복하며 단계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혹은 반대로 사업이 실패해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기는 사람도 있다. 집을 빌릴 때 일본처럼 예치금이나 사례금 같은 복잡한 제도도 없고, 사람들은 이사를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지 비교적 자주 주소를 바꾸는 사람이 많다. 주소뿐 아니라 직장도 금방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2~3년 전 주소록은 거의 쓸모가 없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는 전화번호가 바뀌어 찾을 수 없는 일도 자주 있다.
우리가 처음 전세로 빌렸던 아파트의 이전 세입자는 네 식구 가족이었는데, 월세(月世->月貰)로 그 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전세의 경우에는 이사할 때 처음에 냈던 돈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지만, 월세의 경우에는 매달 내는 집세는 돌려받을 수 없다. 그래서 월세라는 것은 목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 가족은 예전에는 큰 아파트에 살았는데 사업에 실패해 재산을 잃고 이 아파트로 이사 왔다고 했다. “전에 꽤 잘 살았던 것 같더라구요.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같은 것도 전부 외제였어요.” 외제라고 불리는 외국 제품에는 높은 관세가 붙는다. 특히 외국산 가전제품은 한국 제품보다 품질은 좋지만 가격도 비싸다. 일본제 대형 텔레비전이나 스테레오, 미국제 냉장고나 가스레인지 같은 것은 부유층의 신분 상징이기도 하다.
그 가족이 나간 뒤 바로 이사를 하려던 우리는 집의 너무나 지저분한 상태에 망연자실했다. 안방이라고 불리는 침실은 왜인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온돌 바닥인데도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바닥을 뜯어 보니 온수 파이프가 터져 온통 곰팡이가 생겨 있었다. 추운 겨울에도 수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모양이다. 실내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형님이 수리를 맡아 주었다. 벽지도 전부 새로 바꾸고 바닥 비닐 장판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자 집은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그런데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구서가 계속 날아오기 시작했다.보니 관리비, 전기요금, 가스요금, 수도요금 등이 무려 반 년이나 미납된 상태였다. 우리는 급히 부동산으로 달려갔다. 집을 빌릴 때는 부동산이 중개하기 때문에 집주인과 직접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다. 우리는 부동산에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미납금을 빨리 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청구서를 한동안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에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오늘 오후 6시까지 전기요금을 내지 않으면 오늘 밤부터 전기를 끊겠습니다.” 이것에는 정말 당황했다. 우리는 허둥지둥 전력공사까지 달려가서 돈을 냈다. 이번에는 가스 요금이었다. 독촉장의 어조도 점점 거칠어졌다.
“언제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쌓여 있던 요금을 모두 내고 영수증을 들고 다시 부동산으로 가서 항의했다. 그러고 나서야 집주인이 돈을 송금해 왔다. 또한 이전 세입자 앞으로 온 우편물도 많이 도착했다. 편지와 정기구독 잡지, 그리고 여러 가지 청구서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지만 계속 쌓여 갔다.
어느 날에는 주민등록증과 은행 현금카드가 들어 있는 봉투까지 도착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아마 어디선가 지갑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주운 사람이 주민등록증의 주소로 우편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는 우리도, 집주인도, 부동산도 아무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그것만은 근처 파출소에 맡겼다.
내가 이렇게 우편물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는 것을 보고 한국 친구들은 모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요”라고 하면
“찾으러 올 리 없으니까 그냥 버려요”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 앞으로 온 우편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려진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일본처럼 새 주소로 우편을 전송해 주면 좋을 텐데…결국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이사할 때가 되어서야 포기하고 전부 버리고 말았다.
전화번호도 사연이 있는 번호였다. 이·창내(イ・チャンネ)라는 사람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 왔다. 전화국에 물어보니 이전 사용자의 번호는 두 달 동안 보류했다가 새 사용자에게 넘기며 그동안 번호 변경 안내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창내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모양이었다.
너무 자주 전화가 걸려 와서 상대방의 질문을 듣다 보니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창내 씨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양복 맞춤점을 운영했고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번호가 바뀐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친구나 친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화를 하는 것을 보면, 혹시 가게 경영이 어려워져서 야반도주라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교통사고라도 내서 빚을 떠안게 된 것일까. 의료보험료까지 밀린 것으로 보아 상당히 어려운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고 나는 혼자 상상했다.
그런데 우리가 나중에 그 38평 아파트로 이사한 뒤, 우리가 떠난 그 집에 들어온 사람도 역시 사업에 실패했다는 50대 부부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인생의 드라마 같은 것을 보게 되면 나는 큰돈 따위는 필요 없으니 사업 같은 것에는 손대지 않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소박하지만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토다 이쿠코)
●08. 회사 도산도 전직도 당연한 일 — 혹독한 출판 사정
사실 나는 결혼하기 전, 한국의 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업 비자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무렵 그 회사는 도산해 버렸다. 기대하고 있던 월급은 받지 못했고, 일본에서 가져온 돈도 거의 없었으며,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마침 슬럼프 시기였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매일 밤 술만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은 바로 그런,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이었던 시기였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다시 일에 대한 의욕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무척 큰 용기를 얻었다. 내게 그는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때 회사가 도산한 것도 어쩌면 내 인생에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까지 여러 해 한국에 살았지만, 유학생으로 있을 때와 일을 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보이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또 다른 한국이 보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가졌던 것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와 그 회사의 인연은 매우 짧았기 때문에 회사 도산에 대해 나는 거의 아무런 미련이나 집착도 없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도산하는 경험은 그전까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좋은 경험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있던 곳은 세 종류의 잡지와 단행본을 발행하는 출판사였는데, 직원은 수십 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의 출판사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다. 무엇보다 동료들의 이름도 다 외우기 전에 회사는 사라져 버렸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미 직원들의 급여가 세 달치나 밀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동안 그만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잡지를 만들기 위한 취재비도 지급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모두 세 잡지의 다음 호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 이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만두지 않는 거죠?” “노동조합은 없나요?” “파업은 하지 않나요?” “도대체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요?” “다음 달이 되면 월급은 받을 수 있나요?” “회사라도 망하면 밀린 월급은 어떻게 되나요?” 일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지만, 그 자리에서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사진부의 젊은 카메라맨과 함께 취재를 나갔다. 그의 집은 회사에서 비교적 가까워 교통비도 거의 들지 않고, 부모님이 밥을 먹여 주기 때문에 식비도 들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가끔은 부모에게서 용돈까지 받는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점심도 집에 돌아가 먹으면 된다며 태평하게 말하고 있었다.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왜 일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잡지를 만들어 팔지 않으면 회사 수입이 완전히 끊겨 버립니다. 만약 이 회사가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면 광고 수입도 끊겨 버려요. 그러니 어쨌든 계속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그만둔다고 해도 일자리가 없으면 어쩔 수 없잖아요. 실업 상태로 다음 직장을 찾는 건 더 불리하기도 하고요. 아마 다들 다른 잡지사로 옮기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불경기라 다른 잡지사로 옮기기도 어렵고…”
그 해 막 입사했다는 신입 여성 카메라맨은 아직 한 번도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자대학 사진학과를 나왔는데, 동기 중에서 취직한 건 저 혼자뿐이에요. 친구들은 지금도 모두 실업 상태인데, 만나면 제가 일하고 있다고 부러워하면서 밥을 사라고 해요. 설마 월급도 못 받고 있다는 말은 창피해서 못 하죠.” 그래도 미혼인 사람들은 아직 사정이 낫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넘기고 있는 것일까.
결혼한 지 반년이 되었다는 한 남성 편집자는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저축을 깎아 먹으며 버텨 왔지만, 이번 달에도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면 본가에서라도 돈을 빌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편집 일을 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같은 직종으로 이직하고 싶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신입사원과 같은 대우로 옮길 수도 없다. 그렇다고 어느 정도 지위를 원하면 이직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본의 대형 출판사를 보면 같은 회사 안에서 편집부에서 홍보, 경리, 다시 다른 편집부로 빙빙 돌며 이동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편집부 사람은 편집, 영업부 사람은 영업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유지한 채 회사를 옮겨 다닌다. 신문사처럼 잡지와 단행본 등 여러 매체를 가진 곳에서는 사내 부서 이동도 있지만, 그 외에는 큰 규모의 출판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부서 이동보다 이직이 더 일반적이다.
영세 출판사의 도산은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어서 내가 있던 회사에도 예전에 다니던 회사가 망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나는 도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큰일처럼 느껴졌지만, 그들에게는 “또냐” 하는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월급이 밀려 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일을 하고 있어도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한잔하러 나가고 싶어도 돈이 없다. 밖에서 친구를 만나도 마음껏 돈을 쓸 수 없고, 더구나 자기 회사가 도산 위기에 있다는 어두운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다. 불안과 짜증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장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것뿐이다.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는 않는다. 마치 출구 없는 터널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한 분위기였다.
다른 업종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한국 출판업계에서 이직이 매우 많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다른 잡지에 원고를 부탁받아 편집부에 가 보면 반드시 어디선가 본 얼굴이 있다. 혹은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예전에 ○○○○ 잡지 편집부에서 뵌 적 있죠?” 하고 인사를 받는 경우도 많다.
한 회사에 오래 있는 것은 오히려 개인 경력으로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보통은 2~3년 주기로 월급과 지위의 스텝업을 노리며 이직을 반복한다. 또는 편집장이 움직일 때 그 아래 스태프들도 함께 옮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편집장이 바뀌면 잡지 내용도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긴 편집장은 자신이 가진 노하우로 다른 회사에서 이전과 비슷한 잡지를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유행하면 누구나 비슷한 것을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젊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잘 팔린다는 것이 알려지면 여러 출판사에서 비슷한 잡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 노하우는 성공한 잡지에서 훔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잘 팔리는 잡지의 편집장은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를 받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A사의 표지가 예전 스타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돈이 움직였는지, 사람 마음이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일도 한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만약 경영자의 입장이라면 한 번 나를 배신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나를 떠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스태프를 찾아 더 수준 높고 잘 팔리는 잡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이를 갈 것 같다.
하지만 말로 하는 것과 실제는 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체면을 무척 중시한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체면을 상하는 말을 듣고 사표를 던져 회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나도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그 다음이 나와는 다르다.
장소를 바꿔 술자리에서 “그건 내가 좀 지나치게 말했어”라는 한마디가 나오면 금세 용서해 버린다. 그렇게 그만두었던 사람이 다시 회사에 나타나기도 한다. 일상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금방 화를 내며 싸우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용서해 버린다. 내 배우자도 그렇다. 밖에서 누군가와 말다툼을 했다고 불쾌해하다가도 며칠 지나면 그 사람과 다시 함께 식사를 했다고 말한다.
“왜? 다시 안 만나겠다며?” “악의로 한 말도 아니고,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니까 도와줘야지.” 그렇게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부럽다. 나는 마음이 좁은 탓인지 그렇게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겉으로 말하지 않아도 꽤 오래 마음에 담아 두는 타입이다. 배우자를 보며 여러 번 스스로를 반성해 보지만 좀처럼 마음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가 허용된다고 한다. 자금 여유가 있는 외국 자본의 잡지사가 한국 잡지계의 안일한 현실에 자극을 주기를 바란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도다 이쿠코)
●09. 잘도 남자로 태어났구나 ― 아이가 생기다
결혼한 지 반년쯤 지났을 어느 날, 나는 입덧 같은 증상을 느끼고 근처 산부인과에 갔다. 임신 2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당황했다. 사실 나는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아이가 생기면 상당히 지장이 생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함께 병원에 따라왔던 남편도 나중에 말하길, 병원에서는 나를 슬프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매우 기뻐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속으로는 곤란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우리 부부는 둘 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나는 기사를 쓰고 그는 사진을 찍어 주로 일본 잡지에 원고를 팔아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생활 패턴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렵게 얻은 아이이니 낳아야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우선 남편의 부모님께 보고하러 갔다. 가족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다. 시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잘됐다, 잘됐어. 너희들 좀처럼 아이가 안 생기길래 이번에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에엣,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는 우리 두 사람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젠가 형님이 나에게
“너희 혹시 피임하고 있는 거 아냐?” 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사적인 질문을 하는 걸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두 우리가 아이를 갖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말했다. “옛날부터 개를 키우면 아이가 안 생긴다고 하잖아. 그래서 너희도 그 때문인가 생각했지.” 아마 개가 주인의 관심을 아이에게 빼앗기는 것을 질투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미신이 생긴 것 같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개에게 기생충이 있을지도 모르니 당장 다른 데 보내버리라는 가족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결국 할 수 없이 우리가 데려왔던 집으로 다시 데려다주게 되었다.
그런데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에는 나는 저항감을 느낀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당사자가 정할 일이다. 아이가 없는 인생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어떤 사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라 해도 비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봤자 남편의 가족에게 통할 리가 없다. 나는 속으로 계속 “큰일이다, 큰일이다”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입덧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던 김치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요리를 하면 그 냄새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 누가 만들어준 음식이나 외식은 괜찮았기 때문에, 이때를 계기로 부엌일은 거의 남편의 담당이 되었다. 남자가 부엌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시어머니지만, 이것만은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우리 집에 들이닥쳤을 때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있어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나는 한국 남자들이 자립하지 못하는 것은 여자들 탓이라고 늘 생각한다. 집에 여자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빨래도 못 한다는 한심한 남자들이 너무 많다. 어머니들이 남편이나 아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훈련을 단호하게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봐도 시아버지는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무리 바쁠 때라도 시어머니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절대로 집안일을 부탁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집에 돌아오면 옷과 양말을 여기저기 벗어 던져 놓고 모른 척한다.
만약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편은 어떻게 할까, 나는 걱정이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며느리나 딸이 대신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남자는 평생 동안 세 번 식성 이 바뀐다고 한다. 첫 번째는 군대, 두 번째는 결혼, 그리고 세 번째는 며느리의 음식 맛에 익숙해질 때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오히려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처음 우리 집에 식사를 하러 왔을 때, 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대접한 적이 있다. 억지로 한국 요리를 만들어도 어차피 맛없다고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내가 익숙한 것을 만드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아버지는 맛있다고 하며 큰 그릇으로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돌아갔다.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형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아버지께 카레 먹였다면서? 무슨 짓이야! 아버지 카레 정말 싫어하신단 말이야!” “그래도 맛있다고 많이 드셨는데요.” “바보네. 며느리가 처음 대접해 준다고 억지로 먹은 거야. 지금 위장약 드시고 계셔!”
그러고 보니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형님 집 식탁에는 항상 한국 요리만 올라온다. 카레나 햄버그, 돈가스, 스파게티 같은 것이 놓여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형님의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은 피자를 무척 좋아해서 음식 취향도 나와 비슷하지만, 그런 음식은 특별한 날 외식할 때 먹는 즐거움일 뿐 집에서 평소에 먹는 것은 아니다.
즉 형님 집에서는 일 년 365일 한국 요리인 것이다. 나는 한국 요리를 먹는 데는 익숙하지만 만드는 순서를 모른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재료는 무엇을 얼마나 사야 하는지,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처음에는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설날, 추석 같은 때 여러 종류의 요리를 만들어야 할 때면 나는 허둥지둥 부엌을 돌아다닐 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심부름, 상 차리기, 설거지를 맡았다. 평소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집에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은 나에게 괴로운 날이었다. “나는 일제 36년의 죄를 갚기 위해 한국에 노예로 팔려온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동안 어떻게든 버텨왔다.
그런데 말이다. 임신 사실이 알려진 순간, 나는 노예에서 공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 그전에는 식탁 끝에 비좁게 앉아 서빙을 하며 허둥지둥 먹었는데 갑자기 상석에 앉는 것이 허락되었다. 디저트 과일도 가장 모양 좋은 것이 내 몫이다. 물론 설거지나 뒷정리도 하지 않아도 된다. 느긋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야호! 이럴 거라면 몇 년이고 임신 상태가 좋겠는데.” 나는 아이를 한국에서 낳기로 정했다. 한국에서의 출산이 어떤 것인지 꼭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산 예정일이 되었지만 진통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담당 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은 예정일 일주일 뒤에 대전에서 산부인과 의사 학회가 있어서 사흘 동안 출장을 가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첫 출산이니까 조금 더 늦어질 겁니다. 아마 제가 돌아올 때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의사야 어차피 남의 일이니 태평한 것이다. 몇 시간씩 기다리면서 정기 검진을 계속 다닌 것은 막상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때가 되자 의사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의사가 없는 사이에 진통이 올 것이라고 나는 직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처 개인 병원에 다닐 걸 하고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갑자기 개인 병원에 뛰어들어 출산하려 해도 받아주지 않아서, 진통에 시달리면서 병원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출산 날짜를 조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될 대로 되라.” 나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도 예정일이 가까운 듯했다. “저는 학원 강사를 하고 있어서 일요일에 낳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출산 날짜를 그렇게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요?” “요즘은 다 그렇게 해요. 진통을 기다리지 않고 날짜를 정해서 제왕절개를 하는 거죠. 남편이 직장 쉬기 편한 날이나, 아이 생일을 기억하기 쉬운 날로 맞추기도 하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병원 복도에 붙어 있는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많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제왕절개 예약일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길일에 낳으라고 하세요. 사주가 좋게 나오도록 날짜와 시간을 맞추는 거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더욱 놀랐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짜와 시간까지 사람이 정하려 한다니.
하지만 한국에서는 꽤 흔한 일이라고 한다. 출산 날짜를 길일에 맞추거나, 남편의 휴일에 맞추거나, 혹은 아이의 사주가 좋게 나오도록 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 분만도 많지만, 제왕절개 비율이 일본보다 훨씬 높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병원에서 아기의 성별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꼭 아들이어야 하는데, 이 병원은 초음파를 해도 절대로 성별을 알려주지 않네요.”
병원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여자아이로 밝혀지면 낙태해 버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최근 태어나는 아이는 압도적으로 남자아이가 많아서, 앞으로 한국은 여성 부족으로 결혼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디 병원에서는 몇 백만 원을 내면 성별을 알려 준다는 소문도 있고,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점쟁이가 성업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디에 가서 기도를 하면 아들을 얻는다든가, 어느 돌을 갈아서 먹으면 아들이 생긴다든가 하는 미신 같은 이야기들도 진지하게 떠돌고 있다. 남녀를 골라 낳는 방법을 설명한 책도 꽤 잘 팔린다. 남편의 친구 중에도 잡지에 나온 남녀 구별 출산법을 참고해서, 생리 후 며칠째에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자세로 관계를 가지면 된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해 정말 아들을 낳았다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기가 막힌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다음에도 또 딸이 태어나면 소주에 담가 버리겠다.” 농담 섞인 술자리라 해도 너무 심한 말이다. “당신 아내도 여자 아니냐? 여자가 뭐가 나쁘다는 거야?” 나는 술김에 그렇게 따져 묻기도 했다.
동네 소문에서도 “저 집은 딸만 둘이래.” 라는 말이 아주 차별적인 뉘앙스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여자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나는 남편에게 물어 보았다.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이 좋아?”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당신 닮은 딸이 커서 부모 말 안 듣고 집을 뛰쳐나가 버리면 슬플 것 같으니까 아들이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들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남편의 가족에게 말하면 아무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태몽은 뭐였어?” 그렇게 물어보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꿈도 없었다. 태몽이란 아이가 생길 징조로 꾸는 꿈을 말하는데, 본인이 아니라 친척이 대신 꾸는 경우도 있다고 꽤 진지하게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용이나 호랑이 꿈을 꾸면 장차 큰 인물이 된다고 한다. 꽃이나 뱀 같은 것도 꿈 내용에 따라 아들인지 딸인지, 심지어 아이의 장래까지 점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순산 부적 이야기처럼, 외국인에게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내가 임신 사실을 알린 뒤 한동안 시어머니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태몽을 꾼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남편 가족은 그런 미신을 그다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며칠 지나자 그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내가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도 꿈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다가 딸이 태어나면 실망하니까 처음부터 딸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아니요, 정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그래도 분명 아들일 것 같아요.”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나는 정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말해도, 내 말은 가볍게 무시당해 버린다. 그 허무함이라니. 그래도 딸이면 실망이라는 말을 시어머니와 형님의 입에서 듣는 것은 정말 마음이 상한다. 당신들도 여자 아닌가. 여자가 여자의 편이 될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로 태어나 손해 보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 집에서도 여자들은 늘 남자들이 먹고 남긴 것을 치우고 밥을 해야 한다. 이런 삶은 싫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여자들이 여자이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딸에게 집안일을 절대 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키우는 집도 많이 보았다. “어차피 결혼하면 평생 하기 싫어도 해야 하니까, 적어도 시집가기 전까지는 편하게 지내게 해 주고 싶다.” 이런 생각 때문이다.
남편의 형수도 그런 식으로 자랐다고 한다. “밥 짓는 법도 김치 담그는 법도 아무것도 몰라서, 시어머니에게 혼날 때마다 매일 부엌에서 울었어요.” 그렇다면 혼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속으로 결심했다. 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철저히 시켜서 노예처럼 부려 먹어야겠다고. 아들이라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무서운 사람이란 걸 알게 해 주겠어.”
서울은 오늘도 쾌청(1998 도다 이쿠코)
●10. 고추는 남자아이의 표식―한국의 출산 사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