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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소백산의 으뜸가는 절경이며, 영남 제1폭포로 손꼽히는 희방폭포는 높이 28m로, 해발 700m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백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는 장관이 넋을 잃게하여 조선의 석학 서거정 선생이 "天惠夢遊處(하늘이 내려주신, 꿈속에서 노니는 곳)"이라 읊으며 감탄했다고 한다.
계속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라 물소리는 끊임없이 나를 따라왔건만 눈앞의 폭포는 그야말로 귀를 멍하게 하는 박력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오르며 여러 각도로 폭포의 시원스러움을 사진에 담고자 애썼건만, 역시 실물의 위대함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큼지막한 돌이 깔려 있는 길이 나오는데, 어제 내린 비로 젖은 바위에 예쁜 꽃이 떨어져 있다. 노란 꽃술이 선명한 하얀 꽃송이가 회색빛 돌들 위에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어느 광고에서 "레드가 섹시한 줄 알았다. 아니다, 화이트다!"란 카피가 있었는데, 지금 그 말이 너무도 이해가 된다.
절 입구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림이 빽빽이 우거져 있다. 나무다리를 건너며 위쪽을 살피자, 얼핏 나뭇가지 사이로 희방사 당우가 보인다. "다, 왔구나" 싶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양쪽에 돌로 쌓은 벽을 따라 오르막길이 나온다.
통나무를 그대로 가로질러 만들어 놓은 계단을 다 오르자 하늘이 뚫리고, 눈앞 노란 벽에 붉은 기둥을 한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 앞을 지나 옆쪽 계단으로 올라가니 정면에 단청이 고운 대웅보전이 보였다.
작은 석등을 양쪽 앞에 둔 새로 지은 대웅보전에는 좌상의 석가모니불과 함께 양쪽에 협시보살이 모셔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협시보살은 모두 입상이었다. 불단 양쪽으로는 아기 부처님들이 벽을 층층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고, 법당 왼쪽 구석에는 동종이 놓여 있었다.
▲희방사 전경 1742년(영조18)에 주조된 이 동종은 충북 단양 대흥사 종으로 승장(僧匠)인 해철과 초부 등이 제작한 중종(中鐘)이었으나,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경내를 둘러본다.
대웅보전의 뒤쪽으로 난 돌계단을 올라 삼성각에 오르니 숨 헐떡이며 올라온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우선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그 밑으로는 끝없는 초록의 물결이다. 이렇게 계곡 물소리와 푸른 잎들이 가득한 숲에 자리한 희방사에는 유별난 창건전설이 있다.
태백산 심원암에 거처하던 두운조사는 수행을 위해 지금의 희방사가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지금도 희방사는 울창한 숲속에 있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인가와 떨어진 숲속이어서 산짐승들만이 오가는 곳이었다.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수도에 열중하고 있는데, 암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괴로운 시늉을 하였다. 호랑이는 출산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아 조사는 부엌에 검불을 깔고 출산을 도와주었다. 얼마 안 있어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낳았고, 조사는 겨울이 다 가도록 돌봐주었다.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자 호랑이는 새끼를 데리고 떠나갔다.
얼마 있다가 다시 그 호랑이가 왔는데,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은비녀가 목에 걸려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다가 비녀가 목에 걸린 것이었다. 조사는 비녀를 꺼내주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크게 꾸짖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조사가 밖에 나가보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한 마리 물어다 놓았다. 은혜를 갚기 위해 잡아온 것이 분명했으나, 수행하는 중이어서 그런 것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면서 돌아갔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호랑이가 예쁜 처녀를 물고 왔다. 기절해 있던 처녀를 깨워 신분을 물어보니, 자기는 계림(경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의 딸인데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는 순간 잡혀 왔다는 것이었다.
조사는 부모가 크게 걱정을 할 것이라 여겨 처녀를 계림으로 데려갔다. 유석은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 딸을 데리고 살아 달라고 하였다. 조사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렇다면 몇 달간만이라도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마 그 부탁까지 거절하지 못한 조사는 유석의 집에 머물다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수도하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초막은 단청이 잘 된 법당으로 변해 있었다. 유석이 은혜를 갚고자 조사가 자기 집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법당을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희방사'라 칭했다고 한다. ▲ 감로수
▲ 지장전 대웅보전의 오른쪽에는 '소백산 희방사'의 오래된 현판을 걸고 있는 요사채가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역시 새로 지은 건물인 '희방쉼터'가 있다. 왼쪽으로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지장전과 종각이 보인다. 삼성각을 내려와 지장전으로 향한다.
계곡 건너에 있는 지장전으로 가기 위한 다리 앞에는 다리 건너 오른쪽이 연화봉과 천문대, 비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임을 가르쳐주는 표지판과 식수를 여기서 준비하라는 안내의 마지막 음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운조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지장전은 다리의 바로 정면에서 석탑과 한 쌍의 석등을 대동하고 있으며, 희방사란 이름이 선연한 범종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를 소장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부왕인 세종대왕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원래는 1568년(선조1)에 새긴 <월인석보> 1, 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월인석보> 책판만을 보존하고 있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국보급 문화재들을 안타까워 하다가, 경내에서 희방사의 설송 주지스님을 만났다.
내가 영주출신이라고 하자 스님은 차를 한잔하면서 경내에 보관 중인 그림 몇 점을 보여주었다. 부처님을 그린 서양화로 그림이 너무 좋아 누가 그렸냐고 물었더니, 1910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해방 이후 월남하여 영주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던 고 계삼정 화백의 작품이라고 했다.
계삼정 화백은 영주시 풍기읍에서 금계중학교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영주에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그린 작가로 주로 풍경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던 분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 서울과 미국에서 개인전을 5번 연 경력이 있고, 지난 6월 중순 영주에서 아트파크 개관을 기념하여 그의 유작전이 60여점의 작품이 출시된 가운데 열린 적이 있다.
나는 익히 그분의 존함은 들었지만, 눈앞에서 부처님 그림을 세 점씩이나 보게 되어 무척 기뻤다. 특히 전날 방문했던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붉은 색이 강조된 부처님은 그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되어 너무 감격했다. 조만간 다시 희방사를 방문하여 선생의 예전 전시도록을 전부 보게 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을 하고는 하산을 했다.
희방사는 역시 기쁨을 주는 절이다. 나에게는 고향의 대단한 계곡과 사찰을 다시 한 번 보게 했고, 친구들에게는 색다른 여름 피서지를 알려주었고, 계삼정 화백의 유족들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선생의 작품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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