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⑫]
유배지 스승 찾아 제주바다를 건너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
추사 “세상이 소치를 알아보지 못 한다” 인정
근·현대 호남 화단의 계보를 형성…5대째 계승
▲ 허련, <산수>, 한지에 채색, 29x29cm, 187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치(小癡), 추사에게 호(號)를 받다
허련(許鍊·1808~1893)은 조선말기 문인화가로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신이다. 순조8년(1808) 2월 7일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세 사람들은 허련을 일러 근·현대 호남 화단의 종조(宗祖)라 했다.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癡) 혹은 노치(老癡), 진도의 옛 이름인 옥주(沃州)를 빌어 옥주산인(沃州山人)이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허유(許維)라 부르다 후에 허련(許鍊)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維)는 남종문인화의 창시자인 당대(唐代) 왕유(王維)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소치(小癡)라는 호는 추사(秋史)가 지어주었는데,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중 한 사람이었던 황공망(黃公望)의 호인 대치(大癡)에 견주어 그렇게 지은 것이다.
1835년 27세 때 허련은 해남에 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택을 방문하여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공재화첩(恭齋畵帖)」을 보며 그림을 익혔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대흥사(大興寺) 일지암를 찾아가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서예와 그림·시문을 배웠다. 1839년 초의선사는 그의 그림을 가지고 한양 추사에게 가 장래성을 자문한 후 허련에게 상경할 것을 권유했다. 그 해 8월 허련은 한양에 있는 추사의 집 월성궁(月城宮)에 머물면서 추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이때 19세기 화단의 중요한 서화가인 조희룡(趙熙龍)·김수철(金水喆)·이한철(李漢喆)·전기(田琦) 등과 교류했다. 또 김정희의 영향 아래 중국의 화풍을 익힐 수 있었다.
허련이 33세 되던 해인 1840년 추사 김정희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됐다. 허련은 추사 유배 기간 동안 세 번이나 제주 바다를 건넜다. 허련은 인맥이 좋은 추사 덕에 전라우수사 신관호(申觀浩·1810~1884), 영의정을 지냈던 권돈인(權敦仁·1783~1859) 등 여러 명사들을 알게 되었다. 또한 1846년 헌종을 배알하면서 그림 때문에 궁중 출입을 자주할 수가 있었다. 1848년 41세 때에 무과에 합격하여 후에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856년 추사가 서거하자 이듬해 허련은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의신면에,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의 호 ‘운림(雲林)’을 따서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지었다. 허련의 교유는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도 더욱 넓어져 갔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丁學淵)과 흥선대원군(이하응), 민영익 등과 친교했다.
그는 산수화를 잘 그렸고, 인물·사군자·모란·괴석·노송 등 다양한 소재들을 잘 다루었다. 특히 모란을 잘 그렸기 때문에 ‘허모란(許牧丹)이라고 하였다.
▲ 허련 그림, <수선화>, 추사가 수선화부를 썼다.
스승을 만나러 바다를 건너다
허련이 유배 온 추사를 만나기 위해 제주 바다를 세 번 건넌 일화는 유명하다.「소치실록(小癡實錄)」에 의하면 첫 번째 제주바다를 건넌 것은 1841년 추사가 유배 온 이듬해 2월이었다. “나는 대둔사를 경유하여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제주 서쪽 100리 거리에 있는 대정에 위리안치 된 채 유배 생활을 하시는 선생님께 절을 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추사 선생의 적소(謫所)에 함께 있으면서 그림 그리기· 시 읊기·글씨 연습 등의 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허련이 제주를 떠난 것은 6월 8일, 작은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서였다. 그가 처음 제주에 와 머문 기간은 약 4개월이었다.
▲ 미산 그림, <귤수소조>, 68x36cm. 비단채색 1863
허련 제발. 제주특별자치자연사박물관 소장
두 번째 제주 바다를 건넌 것은 1843년 7월. 온양 병사(兵使)였던 이용현(李容鉉)이 제주목사로 부임돼 오는 길에 함께 따라왔다. 그는 제주목에 머물면서 추사선생이 있는 대정을 끊임없이 왕래하다가 이듬해(1844) 봄에 제주를 떠나면서 추사 선생께 귀향 인사를 드렸다. 이때 추사는 “세상에 자네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네”라고 한탄하며, 추사와 친교가 깊은 전라우수사 신관호(申觀浩)를 만나보라고 권유하면서 한 편의 시를 써주었다. 이를 계기로 허련은 전라감영에 머물면서 제주로 가는 배가 있을 때마다 추사선생께 편지를 올렸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풀리기 한 해전인 1847년 봄, 권돈인의 집에 머물던 허련은 다시 제주바다를 건너 추사를 만나러 왔다. 추사는 허련을 매우 아꼈고, 허련은 추사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1850년 7월 16일 추사가 허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허련은 여러 가지 물품을 추사에게 보냈고, 추사는 답례로 철 지난 부채라도 받아 주길 바란다는 내용과 함께 초의암의 차와 새로 수확한 구기자 2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후의 편지에서 추사는 허련이 인편으로 보내준 구기자를 잘 받았다고 답신했다.
제주사람의 초상화를 그린 ‘미산’
허련이 제주바다를 세 번 건너는 동안 한 제주사람을 알고 지냈다. 제주 성안에서 1000여 그루가 넘는 귤나무를 소유했던 귤수(橘叟) 문백민(文百敏·1810~1872)이다. 허련이 제발(題跋)을 쓰고 큰아들 미산(米山)이 그린 문백민의 초상화 ‘귤수소조(橘叟小照)’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제발에 의하면 “귤수는 탐라 사람으로 내가(허련) 십 수 년 전(1847·39세)에 제주바다를 건너 세 번 들어왔는데, 이 사람(문백민)은 남달리 알고 지내온 사람이다. 오늘 홀연히 내 처소에 찾아오시고, 또한 그 뜻도 남다름이 있어 내 아들 미산을 시켜 이 어른과 똑같이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으니,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말자하여 나는 그림의 바탕에 다음과 같이 쓴다…. 계해(1863, 55세) 이른 봄 완성(完成)의 선교교사(仙橋僑舍)에서 소치.”
위 내용을 보면 1863년 이른 봄에 허련은 미산과 함께 제주를 방문했으며, 그 때 허련 부자가 묵고 있는 객사에 문백민이 찾아와 초상화를 부탁했다. 아들 미산이 그림을 그리고, 제발은 허련이 지었으니 부자 공동 창작으로 최초의 제주사람의 초상을 남긴 것이다. 제발에는 귤수의 과수원을 노래한 한편의 시가 들어있다.
여기에서 초상화를 그린 미산(米山)은 허련의 큰아들 허은(許溵·1831~1865)을 말한다. 귤수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그가 죽기 2년 전. 허은이 허련의 기대를 저버리고 일찍 사망하자 넷째 아들 허형(許瀅·1862~1938)에게 허은의 호 미산(米山)을 물려주었다. 허형은 진도에 유배 온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예술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고, 아버지 허련의 화법을 계승하여 산수·묵모란·사군자 등 남종 문인화의 맥을 이어나갔으나 아버지 허련의 화격(畵格)에는 못 미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직업 화가로 토속적인 미학을 키워낸 허형의 산수 작품이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그로부터 5년 뒤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아버지의 화업을 이어 간 점,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배운 남종문인화의 화법을 다시 자신의 넷째 아들인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과 방계인 의제 허백련에게 전승시킨 점은 호남 회화사의 큰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허련의 집안은 5대 째 계승되고 있다.
허련에 대한 후대 호남화단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소치의 출현이 근대 서화의 유일한 접목으로 남도 화단의 계보를 이루게 된다…. 추사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은 거목이었으나…그의 작품 세계는 추사의 취향에 맞추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의 독자성은 일격(逸格)에 의한 사의성(寫意性)을 추구하는 동시에 특유의 갈필법(渴筆法)을 쓰는 호방(豪放)하면서도 수준 높은 수묵화에 있다”
전은자: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2009년 9월 21일 <제민일보>
첫댓글 허련과 추사의 교유가 남달랐다는 얘기를 아주 명료하게 알려주었네요.
옛 사람들의 의리와 정분은
지금보다 더 깊고 그윽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