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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son Luhrs 원문
지난 이야기: 영사관의 의도
혁명파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기라푸르 영사관은 도시 발명가들에게서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발명품을 강제적으로 몰수하고, 에너지 자원을 철저하게 제한함과 동시에, 야간 외출금지령을 공표했다.
에테르붙이이자 사교가이며 박애주의자인 야헤니는 현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자를 간절히 바라며 불빛 하나 없는 무인의 길거리로 나왔다. 모든 에테르붙이가 피하고는 지날 수 없는 단 하나의 행위……마지막 고별 파티를 찾아서.
《영사관 단속》 아트 : Jonas De Ro
죽을 때 만큼은, 적어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원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어깨에 손을 얹고,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를 속삭여주는 누군가가. “괜찮아, 야헤니. 아무 걱정 말고 그만 가도 돼.” 라면서.
설령 그걸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아무라도 좋으니 곁에 있어줬으면.
어둑한 신속땜질지구 처마 밑을 홀로 걸어갔다. 길거리엔 사람 하나 없었고, 노점도 폐쇄되어 방치 된지 오래였다. 보이는 빛이라곤 내 몸에서 발산되는 것이 전부였다. 발명가도(긴급법령#89-A), 에테르도(긴급법령#89-B)없는 이곳에서, 마치 술에 취한 부랑아처럼 누군가를 계속해서 찾아 헤맸다――죽음을 축복해줄 누군가를.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긴급법령#89-C가 공표되자, 만나러 와주던 이들조차 발길을 끊었다.
거리에서 한 존재가 느껴졌다. 그렘린 한 마리가 내 왼쪽에 주차되어 있는 차 밑에 누워 있었는데, 굶주렸는지 배가 푹 꺼져 보였다. 요 20분간 쭉 내 뒤를 쫓아온 것이다. 내가 녀석에게 눈을 떼고 생각했다. 나도 녀석도, 죽음의 냄새를 풍기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많은 에테르붙이가 마지막 파티를 열지만, 요 근래 몇 일은 파티라곤 구경조차 못 했다.
왼쪽 손등이 에테르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감각, 이 긴장을 완화시키는 평온함이 남겨진 부위에도 마찬가지이기를 바랬다. 그렇게만 되면 편하게 갈 수 있겠지.
찌그러진 배달용 에테르 장치 파편에 다리가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다리를 보니 방금 걸린 일부가 거기 남았는데, 어느새 달려온 그렘린이 파편에 붙은 내 일부였던 것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거기서 에테르붙이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이 생각났다. 그렘린은 사냥은 하지 않지만, 기꺼이 참고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던가.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앞으로 15분.
생명을 얻기 전의 나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송수관 안을 떠다니며 무한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아니면 에테르로써 도시를 움직였을까? 그렘린의 살을 찌워주었다거나? 죽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죽음이 조용한 충격과 함께 도착하는 열차처럼 바로 저기까지 와 있었다.
이대로 난 고독하게 홀로 죽게 되는 걸까.
그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에 주춤대면서도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감각을 열자(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의 예리함이 동반되었다. 떨어진 다리 덕분인가보다!), 사람들이 집 안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으로 가득한 씁쓸함, 본래 최고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외출 금지령으로 불빛 하나 없었고, 길거리에 나는 소리라곤 비틀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내 발소리가 전부였다. 그 어떠한 법도 나만의 권한을 빼앗을 순 없어. 내 마지막 축제, 설령 그게 죽음으로 이어질 지라도.
등을 돌려 그렘린을 쳐다보자, 그것이 굶주린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까의 그 감각이 또다시 덮쳐오기 시작했다.
홀로 고독하게 죽는다는 것이 생생한 현실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홀로 죽게 된단 말인가.
나 홀로.
아직 형태가 남아 있는 손으로 건물 벽을 더듬으면서 걸음 속도를 높였다. 피부가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는 것이 느껴진다……연기의 입자와, 형태를 잃어가는 재가 지금의 내 전부나 다름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감각에 집중했다. 멀리서 절망한 젖은 양털 냄새와 쓴 맛을 내는 광물의 결의, 그리고 탄력 있는 타마린드의 냄새――
잠깐! 이 타마린드 냄새는!
기억에 있는 인상적인 냄새가 수 블록 앞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겨진 수명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분명 내장이나 유기조직을 가진 자들이 공복과 거북함, 배출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 생후 몇 주쯤 되었을 때, 자신의 수명이 4년 정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살 때에는 3년 1개월, 얼마 전에는 22일, 현재 남겨진 시간은 12분이라는 사실을 오한이 서릴 정도로 한치의 오차 없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타마린드 냄새가 강하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전방에 발명 박물관이 보였는데, 요 몇 주간에 걸쳐 수십 개의 영사관 깃발로 덮여 있던 벽 중앙의 깃발이 찢겨져 나가 있었다. 거기에……무언가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별빛으로 가까스로 빛나는 그림 하나가 보였다.
《즉흥적인 예술가》 아트 : Viktor Titov
혁명파의 상징――거꾸로 된 영사관 상징 밑에서 용솓음 치는 에테르가 새는 첨탑. 에테르가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희망의 상징.
그 그림을 벽에 그리고 있는 사람이 길 앞에서 보였다.
내 마음이 환희에 요동쳤다――저 사람은! 니브드, 내 최고의 연회 담당!
아아, 니브드. 어찌하여 이런 곳에! 발명 박람회 파티 이후론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훌륭한 연회와 성심 성의를 다 한 음식들……니브드가 요리하지 못하는 음식은 없지. 내 마지막 파티에 그를 부르려고 했는데……
비탄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그 말대로, 나는 파티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마지막 잔치를.
“니브드!” 내가 있는 힘껏 그를 부르자, 그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얼굴에다 손목에는 즉석 나이프라니, 내게 다시 기쁨이 넘쳐 흘렀다. 저 꼴이 뭐란 말인가, 마치 길거리의 무뢰배가 따로 없질 않은가!
니브드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7분. 양 다리가 저리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나게 될 사람이 될 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에겐 사과도 하고 싶었다.
“야헤니 님? 설마?” 니브드가 빠르게 그림을 마무리 짓고는, 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야헤니였던 누군가 라네.”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자기 의무를 다 하는 자네를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군.”
“그 몸으론――”
“멀지 않았네. 니브드……자네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어.”
“사과라니요……”
괴로움의 파도가 다시 나를 덮쳤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도 희미하다. 앞으로 몇 마디나 더 할 수 있을까. 내가 니브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네……파티를……앞으로 하루도 없겠지만……취소하겠네……”
“……진심이십니까?”
육체가 피로와 분개로 떨렸다. “난 이제 곧 죽는단 말이네!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농담도――”
“취소를 하게 된 것에 대한 사과라네.”
그 순간, 우리가 있는 곳에 악취를 내는 감정이 갑작스레 난입해 들어왔다.
“동작 그만!” 위압적인 목소리가 모퉁이 건너편에서 울려 펴졌다.
영사관의 억척스러운 집행관이 (‘명예의 요새’ 에서 온 자다, 젠장!) 무력 자동 기계를 동반해 박물관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집행관의 눈이 니브드를 향했다. 아아, 왜 진작에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기물 파손, 파괴 용의로 체포한다!”
《평화 배열》 아트 : Joseph Meehan
니브드가 도망치려 했지만, 집행관이 어깨에 있는 장치를 던졌다. 그러자 근처 울타리에서 4개의 구체가 나타나 눈부신 파란 에너지 불꽃을 발사했다. 니브드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니브드!”
친구의 탄 옷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자, 감정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 몸에서――아니면 니브드의 몸에서?――몸을 찌르듯 덮치는 공포의 냄새. 공감하는 능력이 나를 죽여버릴지도 몰라, 니브드의(아니면 나 자신의?)공포를 피부 저편에서 느끼면서 생각했다.
내 부르짖음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집행관이 니브드를 향해 걸어왔다. 그에게서 마치 깊은 심연에 서 있는 것 같은 결핍의 냄새가 났다. 내 친구를(기라푸르 최고의 연회 담당에게 어찌 이런 무례한 짓을)위압하듯 자리에 선 그의 존재는 잔인과 황동의 향기로 가득 찬 빈 우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자리에서 일어설 힘조차 없다니, 친구가 겪는 공포의 감각을 가만히 느끼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시꺼먼 것으로 데워진 황동 냄새가 역겨워 토할 수 있다면 있는 대로 토해버리고 싶었다. 이 자의 마음에서 나는 추악한 악취를 지면에 내뱉고, 이 마음을 정화시킬 수만 있다면.
니브드의 몸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집행관이 다시 에너지 장치를 작동시켰다.
공포와 병적인 희열.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에는 우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니브드가 다시 몸을 움직이려 했다.
집행관이 또다시 장치를 가동시켰다. 위험천만한 에테르가 선명한 빛과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돌진하자, 친구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두고 그만 꺼져라.” 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집행관의 얼굴에 흐늘쩍거리는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의식이 없는 니브드의 몸을 걷어찼다.
“그만둬! 죽일 셈이냐!”
남은 힘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 놈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머지 않아 바닥에 고꾸라졌다. 죽음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앞으로 3분이다). 몸이 연기를 내며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집행관이 뒤를 돌아 이쪽을 내려다 보고는, 무릎을 꿇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에테르의 반짝임이 집행관의 냉혹한 표정을 비추며 그 추악한 윤곽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혹시 야헤니……인가? 보고서에서 본 얼굴이군.” 오한이 서렸다. “혁명파에 가담한 여섯 명을 찾고 있다. 한 명은 피아 날라르의 딸이지.”
현기증이 느껴졌다. 분명 만난 적이……이름이 아마 찬드라 라고 했던가? 불과 몇 주 전의 일인데도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영사관의 주의를 끌 줄이야. 그녀와 니사 양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집행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웃듯 말했다. “알고 있는 걸 말해라. 안 그러면 이 자식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그와 동시에,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니브드를 발로 걷어 찼다.
소름이 끼쳤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퍽 퍽 소리. “끽소리 하나 못하는 요놈 하고는 무슨 관계냐, 이 죽다 만 놈아.”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있는 대로 끌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쪽 다리가 쉬지 않고 떨렸고, 오른손이 분노에 요동쳤다. 그리고 영사관 집행관과 눈을 맞추고 죽음의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내 연회 담당이다.”
《야헤니의 전문 지식》 아트 : Daarken
아무런 주저도, 마음에 스치는 죄악감도 신경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집행관의 목에서 그것을 ‘끄집어냈다’. 생명력의 눈부신 빛이 피부에서 새어 나와 손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나는 한 없는 고양감과 고통의 파도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덮쳐오는 감각에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느껴졌고, 죽어가는 감각이 마치 자신이 죽어가는 듯한 고통과 같아, 내가 죽이는 입장인지, 죽어가는 입장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비명소리 안에서 그가 방금 전까지 발산하던 집요하면서 잔혹한 감정이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행위.
7초라는 영원처럼 계속되는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손을 떼자 집행관이 지면에 쓰러졌다. 시체 한 구가 니브드의 의식 없는 몸 옆에 잠들었다.
광란의 고통이 끝나자, 갑작스레 불안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어째서 이 사악한 집행관이 죽어가는 모든 감각을 나도 똑같이 느낀 것일까. 최초로 생명을 흡수했을 때는 생명의 기쁨만이 넘쳤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다른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이 마치 납처럼 내 마음 속에 눌러 앉았다. 처음으로 생명을 흡수한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살인을 한 것이다.
……살인자.
육체에 일어난 일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워, 어딘가 다른 사람 일처럼 느껴졌다.
신비하게도 몸이……무언가로 가득 찬 느낌이다. 등을 곧게 뻗고 자리에 서서 보니, 손과 발이 멀쩡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어져 나갔던 피부가 지금은 거의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가빴던 숨소리도 지금은 고르다. 내가……죽음을 피한 건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할 뿐?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지?
12일.
오오.
한 인간의 생명으로 몇 분의 시간이 12일로 연장되다니. 나는 살아 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였다. 틀린가?
소음이 나를 현실로 되돌렸다. 감각을 넓히자,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지부 부대가 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니브드의 몸을 들쳐 메고, 근처의 무인 노점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벽에 숨자, 마음이 갖가지 생각들로 요동쳤다.
내가 죽을 필요는 없잖아? 이게 마음 속에서부터 바라던 해결책이 아닐까? 그래, 마음 편하게 아무 신경 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살아 남기 위해 죽이는 거야, 가능하면 사악한 자들을.
……하지만 살기 위해 그렇게 한다면, 나 자신이 죽어 마땅한 악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연약한 마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야, 약해져선 안돼. 방금 죽음의 필연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찾질 않았던가. 나는 더 이상 죽음이라는 열차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엔 질렸단 말이다.
12일! 12일만 있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12일이라는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선 곁에서 함께 싸워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선결이야. 그들과 함께 악한 자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친구들도 내 죄를 부정해주지 않을까?
그 기만이 내 마음에 안식을 주었다. 좋아, 혁명파를 찾아보자. 범죄자의 딸과 끝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가진 엘프를.
그녀들이 숨을 만한 장소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법한 사람이 하나 있지.
곤티.
《사치스러운 군주 곤티》 아트 : Daarken
의식을 잃은 니브드를 자택에 숨기고, 집행관들을 피해 거리를 숨어 겨우 겨우 악명 높은 범죄왕 곤티의 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에테르붙이들은 필요에 따라 허세를 중요시 여기지만 곤티의 허영심은 끝을 모른다.
내가 가진 약간의 명성 덕분에(유명해지고 싶다면 부자가 되어 대부분의 재산을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고, 그 사실을 세간에 알리면 된다)다소의 마찰 없이 그의 은신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곤티의 집은 겉으로는 창고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궁전이나 다름 없었다. 곤티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입을 허락해 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압도적이면서 집착적인 호화로움에 입을 딱 벌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까지 낭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로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도적질한 휘황찬란한 물건들이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현혹될 것 같은 금줄 세공과, 아낌없이 금을 사용한 장식들. 그곳을 지나 넓은 현관으로 들어가자, 구석에 두꺼운 책상 하나가 보였는데, 바닥에는 긴 털로 만들어진 융단이 펼쳐져 있었고, 여러 개의 화려한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자들은 혁명파에서 범죄조직의 고참들까지 다양했는데, 그들이 차를 입에 대면서 서로의 비밀을 주고 받으며 넓은 방을 지나가는 나를 눈으로 쫓았다. 그 사이에 한 자동기계가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야간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사이, 숨기엔 이곳만큼 좋은 장소가 또 없겠지.
현관 안으로 들어가 불량배와 망나니들을 피한 뒤,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통과했다. 방 안에는 목가적 낙원으로 보이는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벽에는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들과 굽고 굽은 작은 시냇물이, 천장에는 찬란한 수로가 나를 내려다 보았다. 벽면에는 번뜩이는 우리가 나열되듯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안으로 작은 생명체 애완동물들이 보였고, 융단 위에는 기계로 된 여우와 금 사슴이 신났다는 듯 뛰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음……이렇게까지 요란한 장식들은 분명 내 취향은 아니야.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무리인 건 무리지. 다음으로 지나갈 문 앞에선 곡예사들이 천장에 매달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곡예를 선보이고 있었고, 그곳을 지나자 최고급 향유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열되어 있었다. 연락 통로를 지나는 사이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선반들 안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장치들이 광채를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있는 모든 장물들이 영사관의 마수로부터 비밀스럽고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미로 끝에는 흐릿한 유리로 된 문 하나가 있었다. 그 옆에 선 경비원이 나를 안내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증기가 나를 반겼다. 넓고 깊은 온천탕에서 흘러 나오는 쟈스민 에테르 향유의 냄새, 그리고 구리로 만들어진 벽이 내 모습을 무한하게 반사시켰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따뜻한 물 안에 몸을 담근 한 에테르붙이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 가면을 쓰고 가슴에 신비한 금속 덩어리를 박아 넣은 이 남자가 곤티.
《곤티의 에테르 심장》 아트 : Vincent Proce
기분이 묘했다. 설마 저런 것을 보게 될 줄이야.
곤티의 동요를 느끼며 내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종족에게 저런 습관은 없을 텐데……하지만 저건 틀림없이 목욕이라는 것이다. 은은하게 빛나는 에테르로 목욕을 하는 행위, 긴 하루를 끝내고 욕조 안에 몸을 넣은 뒤, 스스로를 구성하는 물질 안에서 그날의 피로를 해소한다는 게 어떤 기분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황홀 그 자체가 아닐까. 더욱이 10개도 넘는 에테르 향유가 가져오는 일시적인 수명 연장이라니……그것도 전신에 말이다. 곤티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습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범죄조직으로 많은 자금을 얻어야 하겠지.
내가 깊은 생각에 잠긴 사이, 곤티가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색 로브를 몸에 걸쳤다.
건강한 에테르붙이끼리의 대화는, 육체를 가진 자들의 시점에서 보면 아주 빠르게 느껴질 것이다. 서로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천적인 감정의 이해가 결론을 유도한다. 소비되는 시간은 찰나 그 자체로, 사용되는 언어 또한 산문적인 것들이 전부다. 시라는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곤티가 로브를 고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죄를 지은 역겨운 냄새가 나는군.”
이럴 수가, 나름 잘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하게 전부 토로하라 이건가. “영사관이 저를 궁지로 몰았습니다. 이게 그 결과이지요.”
곤티가 나를 부른 곳은 내가 방금 지나쳐온 융단이 깔린 방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내 감정적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이 일을 더 물을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순식간에 경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네가 보호를 바라고 있다면 무리라고만 해두지. 쓸모 없는 도구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우리 양측에 있어서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열정을 담아 말했다.
곤티의 흥미가 유발된 것이 느껴졌다. 그가 방을 가로질러, 아름다운 조각상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 뒤 선반에 있는 예술품이 하늘을 떼어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곤티가 표면상으로 풍기고 있는 냄새는 짜증과 약간의 분개였지만, 그 아래쪽 기반에는 자포자기가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쌉쌀한 불안의 냄새가 희미한 공포로 끝맺음 되었다.
그 또한 열차를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고, 가슴에서 빛나는 심장이 대체 어떤 기능을 할까?
내가 일부러 뜸을 들이자 곤티가 입을 열었다.
“반역자를 찾고 있는 건가?”
“찬드라 날라르와 피아 날라르를.”
우리 에테르붙이들 중에는 거짓말에 재능 있는 자가 간혹 존재한다. 그가 표면적인 감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싹 난 이율배반적 오라를 발산했다. 나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이어 내가 친애와 제비꽃의 은은한 바람으로 대답했다. “그녀들을 도울 수 있다면, 서로에게 있어 유용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몸을 내밀어, 밖에 있는 경비원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녀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신다면, 인공심장에 대한 것은 제 마음 속에만 담아두도록 하지요. 영사관에게 알려지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싹 난 이율배반이 불안을 담은 시큼한 후추와 경비원에 대한 원망스러운 실망으로 증발했다.
내가 질투의 하층류와 함께 압도적 신뢰를 몸에 둘렀다. 그러자 곤티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콩 냄새를 풍기는 자기만족으로 대답했다.
이쪽에서 발산한 질투의 신호를 그가 눈치채고, 내 피부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영사관의 보고서에서 본 내 모습과 비교를 하면서 피부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하자, 갑자기 놀라움을 폭발시켰다.
“생명 흡수 능력자는 좀처럼 없는 부류다. 내 부하 중에도 있긴 있었지만 지금까지 두 명이 전부였는데, 어떻게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나?”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심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행운아는 아니니까요.”
거짓말로 들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건 내가 태어난 지 4주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드워프 친구가 파티에 하이에나를 데리고 왔는데……내가 그걸 쓰다듬다 사건이 일어났다(두말 할 것도 없이 우발적 사고였다. 데팔라 양도 그걸 이해하고 괜찮다고 용서해주었다).
“뜸들이지 마라, 야헤니. 대체 어떤 기분이었나?”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집행관 일이 있은 후, 이것이 데팔라의 애완동물과는 다른 종류라는 것을 이해했다. 한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그의 죽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생을 바꿀만한 사람에게 누군가를 소개한다거나, 별 하늘 밑에서 친구들과 몇 시간이고 춤을 출 때라던가, 마음 깊이 바라던 선물을 받은 젊은 연구가가 장미의 들뜸과 감사에 넘치는 시나몬의 빛을 발할 때라던가, 아니면 미래에 연인이 될 두 남녀가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서 눈이 마주쳐 번개를 맞은 것 같은 때처럼……
그 느낌은 마치, 이 비유들과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고통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태어난 순간의 충격,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내게 의도치 않게 살해당한 데팔라 양의 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 생애를 통틀어 얻는 것보다도 많은 돈을 하루밤 만에 잃은 내 회사, 벽 너머로 공감하며 경험하는 이웃들의 우울한 감정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음에 대한 비탄, 왜 파랄이, 베디가, 드리티가, 나짐이, 내 에테르붙이 가족들이 어째서 모두 죽어가는지를――
2초간 이어진 생각들이 비웃는 웃음으로 인해 멈추어졌다. “죄의 냄새가 날 만도 하군.” 곤티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쪽 사정이 당신 일과는 상관 없을 텐데요.”
미혹적인 기쁨이 느껴졌다. 벌꿀과 캐슈넛――나를 이처럼 풍미 깊게 생각해주는 것인가.
“네가 또 살인을 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외출 금지령과 에테르 제한으로 우리 종업원들의 업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네. 물론 내가 어떻게든 해줄 생각이지만, 영사관의 강제 야간 외출 금지령과 개인 자산 압수가 우리 도시의 멍에가 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덕분에 기라푸르의 힘을 결집해 움직여줄 혁명파의 필요성이 절실해졌어. 날라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그 자들과 혁명파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은신처에 영사관을 보낼 거라고."
내가 자리에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어째서요?!”
위압적이면서 공격적인 침향의 냄새.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 필요가 있단 말이다. 영사관과 싸우도록 만들어라. 녀석들이 선제 공격을 해준다면 내 부하들도 적게 죽을 테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나?”
내가 조용한 승낙으로 대답했다. 과연, 범죄왕까지 올라왔을 만도 한 거래 수완이다.
“날라르의 딸과 그 무리들은 조각 정원 안 숨기 적당한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야. 그들에게 그곳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전하고, 놀라게 만들어 움직이도록 유도해라. 넌 이제 괴물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협박 정도는 제 2의 천성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지. 놈들을 흡수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야헤니.”
이 모든 대화가 2분 내로 끝났다.
《영감을 주는 조각상》 아트 : Kirsten Zirngibl
다음날, 굳은 결의를 가지고 그들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 조각 정원을 찾았다. 한 낮에 움직이는 편이 밤중에 몰래 다니는 것 보다 나았지만, 영사관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숨통을 막히게 하는지, 아무도 길거리에 오래 서 있으려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갈 길을 찾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혹시 찬드라 양과 니사 양(그리고 친구들)이 영사관을 열 받게 만들기에 충분한 행동을 했다면, 그녀들을 돕는 것으로 남은 나날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조각 정원은 아라다라역 근처의 광대한 수목원 안에 있다. 20개가 넘는 우아하게 조각된 거대한 금속 조각상이 도보 옆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 전부가 기라푸르에서 가장 유명한 발명가들을 본 떠 만들어진 것이었다. 불후의 명성으로 이름을 날린 발명가들의 전통은, 다름아닌 아라다라 일가에서 시작되었다――바로 어머니와 아들이 힘을 합쳐 완성시킨 에테르 추진식 열차이다. 이곳에 조각상이 세워진다는 것은 한 사람의 발명가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뜻하지. 에테르 붐 직전에 열차를 발명한 아라다라 가문, 그리고 그들의 조각상에 이어 에테르 정제과정을 발견한 자들의 모습을 한 조각상. 마침 구름 저편에서 나온 햇빛이 우리 종족이 창조될 수 있었던 원인을 가져온 자들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걸 본 내 마음에 묘한 감동이 물결쳤다.
신기하게도, 마지막 날이 다가온 이후로, 감각이 평소의 10배는 예리해졌다. 감정의 간만이 마치 미술관 안을 걸을 때의 그 느낌이다. 간소하게 진열된 예술품들을 멀리서도 손쉽게 볼 수 있는 감각, 이것을 이용해 그녀들이 숨은 곳을 찾았는데, 한 커다란 베달켄 발명가 조각상 위쪽에서 불안과 미덥지 못한 감정의 기복이 느껴졌다. 틀림없어.
내가 태연한 척, 그 조각상으로 다가가 뒤에 있는 사다리를 탔다. 참 크기도 해라, 내가 한창 일하던 시절에 이렇게까지 큰 무언가를 만든 적이 있던가, 홀연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갑자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경비용 자동기계 한 대가 정원에서 역 쪽으로 이동하면서 감시활동을 하는 것이 보였다. 저런 아둔하고 감정 없는 고철덩이가 에테르붙이인 나를 두렵게 만들 줄이야. 이어 자동기계가 이쪽에 눈치채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위로 올라가는 작업을 계속했다.
올라가는 사이,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앞으로 11일. 타인의 생명을 훔침으로 시간을 얼마나 더 벌 수 있을까? 영사관 병사들로 한정 지으면 괜찮을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선한 일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남겨져 있을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격통이 전신에서 느껴져, 자칫하면 손을 놓칠 뻔 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돌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뇌 없는 뭔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데.”
저런 무례한.
목소리의 인물에게서, 돌 위로 떨어지는 비와 같이, 해답이 없는 수 많은 의문들이 느껴졌다. “이런 건 읽어본 적이 없는데……너희 둘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남성으로 보이는 그 자가 덮개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이 내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알았으니까 입구를 열어!” 여성의 목소리. 이……마리 골드의 냄새는……?
빗물에 젖은 돌에 이어, 호기심에 젖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범죄왕이 보낸 자가 아닐까?”
“이야기를 들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이 냄새! 이 오렌지꽃 기름 냄새는 틀림없이 니사 양이다!!
“니사 양! 저에요, 야헤니에요!” 내가 남성이 뿜어내는 위압의 고통을 참으며 소리쳤다.
머리 위에서 아웅다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위압의 고통이 사라지면서 빗물 냄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찬드라, 들어오게 해줘.”
“야헤니 씨!” 덮개가 열림과 동시에, 찬드라 양이 큰 소리로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조각상 내부는 생각 외로 넓었다. 구석에는 칸막이 5개가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쿠션으로 만든 즉석 침대가, 또 다른 모퉁이에는 수많은 장치들 옆에 목제로 된 지팡이가 걸쳐져 있었다.
특이한 망토를 몸에 두르고, 호기심으로 마음이 들뜬 낯선 인간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옷은 잘 차려 입었지만, 속속들이 캐묻지 않고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라고 그 자리에서 판단했다.
그리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니사 양, 찬드라 양.”
엘프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찬드라 양이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야헤니 씨. 일전엔 고마웠어.”
“이쪽이야말로 신세를 졌습니다. 어머니와 재회했다고 들었는데요.”
“응, 덕분에.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좀 만나러 갔어.”
내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테제렛과 싸우실 줄이야. 그는 무시무시한 자입니다.”
“그 녀석은 그저 도구에 불과해.” 찬드라 양이 챔을 뱉듯 말했다.
“제 앞에서 말을 골라서 쓰실 필요는 없답니다. 어머님께 이르지 않을게요.” 그녀가 겨우 얼굴에 미소를 되찾았다.
찬드라 양 뒤쪽에 있는 두 명의 인간――유유자적하면서도 어딘가 불쾌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검은 드레스의 여성(어쩜, 저리 야만스러울 수가. 모피로 된 소매 장식이라니, 대체 누가 저런 디자인을?)과 근육질에 우람하면서 귀밑털이 진한 남성이 벽 사이에서 밖을 감시하는 것이 보였다.
“이 사람은 야헤니라고 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안심해도 돼.” 찬드라 양이 나를 소개시켜주자, 내가 기쁨에 찬 자랑스러움과 함께 얼굴을 들었다. “야헤니 씨, 이쪽이 제이스, 이쪽이 릴리아나. 그리고 구석에 있는 남자가 기디온이야.”
“신비한 친구분들이 많으시군요.” 내가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우리가 신기해 보이면 커다란 고양이를 보면 뭐라고 할까?”
“……고양이?”
“지금은 파시리 부인과 함께 식료품 보급을 하러 나갔어요.” 니사 양이 진솔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렇군요.”
아차, 그러고 보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시간이 없어요,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사관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방 안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경계심으로 가득 차더니, 전원이 재빨리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보였다. 경계를 하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선 두려움 대신 각오가 느껴졌다.
“이곳으로 오고 있다면 전투 준비를 해야 해.” 니사 양이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갈지를 정하는 게 선결이야.” 제이스 씨가 그 뒤를 이어 입을 열었다.
“테제렛도 함께일지도 몰라.” 검은 드레스 여성의 불쾌하다는 말투.
내가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이길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뿜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으로 갈렸다. 커민향의 결단, 짜증스러움과 불만, 불안하면서도 자신이 넘치는 시체 썩는 냄새(잠깐, 이게 뭐지?).
“범죄왕이 왜 당신을 여기로 보냈죠?” 제이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내게 질문했다.
그걸 어떻게? “곤티는 이 도시에서 저보다도 숨기 좋은 곳을 잘 아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계시는 곳을 찾기 위해 그를 찾아갔지요. 저도 혁명파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을 찾을 수 있었구요.”
그들의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침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제 저택이라면 안전합니다. 경비도 만전을 기하고 있으니 여러분이 눈치 채일 일은 절대 없지요. 오늘 밤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거기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곤티도, 영사관도, 여러분이 저와 함께 갔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야헤니 씨는 믿을 수 있어.” 니사 양이 강인한 확신과 함께 말해주었다.
다른 자들이 빠르게 시선을 마주쳤다. 곧 기디온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검은 드레스의 여성이 소파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 나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 집에 침실 다섯 개는 있어?” 그녀에게서 축축한 흙과 경이로운 자의식의 냄새가 났다.
“일곱 개도 더 넘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요, 야헤니 씨.”
“영광입니다.” 내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곳 조각 정원 주변을 향해 감각을 뻗었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세요.”
내가 덮개를 열어 사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하자, 다른 자들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목에 두른 케이프를 때렸다. 어제 몸이 좋지 않았을 때(흡수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할 옷으로 고른 것이었다. 어제 막 흡수한 생명이 몸을 흐르는 것을 자각하고 감상적인 기분이 됨과 동시에, 씁쓸한 기쁨이 나를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일이 어디로 굴러가든, 난 이 케이프를 다시 두르게 되겠지.
지상까지의 거리는 꽤 길었다. 지붕을 트는 새 한 마리는커녕,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고, 조각 정원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발명가들의 그림자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사이, 멀리서 위대한 에테르붙이 발명가 라쥴의 조각상 윤곽이 보였다. 비 유기체를 위한 의료기술의 선구자 라쥴은, 세상에 영감을 남겼고, 가장 위대한 자가 항상 곁에 있다는 사실로 우리 종족에게 위안을 주었다. 나는 우리 종족이 우리가 태어난 이 도시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취급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른다. 위대한 라쥴의 커다란 조각상 자체가 우리 종족의 확고한 신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땅의 발명가들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그것도 2살 때에.
지면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머리 위에서 모두가 의견을 주고받으며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다리를 꽉 잡은 채, 소음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찾았다.
전신의 감각이 공포로 물들었다.
엔진 소리가 굉음을 올리며 급속도로 접근해오는 소리, 영사관 자동차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 정원을 지나치며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도보를 넘어, 풀밭 위를 그대로 쏜살같이 달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외출금지 시간은 아직일 텐데, 위험은 없었을 텐데!
곤티가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사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속도와 방향으로 미루어 보아 곤티가 약간의 말미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땅으로 내려와도 저 자동차를 피해서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그렇다고 돌아가면 조각상 안에 갇혀버리는 꼴이 되겠지.
도덕적 선택을 가늠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동차가 우리가 있는 사다리를 향해 거칠 것 없이 달려왔다(그대로 밀어버릴 생각인가?).
내가 몸의 방향을 바꾸어 발 돋음을 하고, 왼손으로 나무를 잡았다(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건 바보 같은 짓이야(최악의 선택지다――운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데).
오른손을 뻗자, 최근에야 친숙해진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힘이 느껴졌다(그들의 죽음을 느끼게 되겠지, 그들의 죽음을.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그리고 그대로 뛰어 내려 본넷 위로 착지했다.
《불사의 유격병 야헤니》 아트 : Lius Lasahido
몇 초 동안의 고통.
몇 초 동안의 황홀.
그들의 고통이 즉 나의 고통, 하지만 고양되는 기분은 나만의 것. 마치 물에 빠졌을 때의 그 느낌이다.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했지만, 이때만큼은 큰 소리를 지르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운전자가 사망하자, 자동차가 조각상에서 비껴갔다.
이어서 내가 몸을 감싸며, 차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자동차가 다른 기념비에 충돌하는 소리.
살아있어? 아아, 살아있다, 살아있어. 하지만 하루 만에 두 명을 죽였잖아, 나를 다들 뭐라고――
아아.
앞으로 22일.
경악과 함께 매스꺼움이 일었다. 이젠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야헤니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마리 골드의 목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무사히 내려온 걸까. 뒤를 돌아보자, 인간 세 명과 엘프 한 명이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 뒤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굽이 높은 구두로(잘도) 우아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는 다른 동상에 충돌해 찌부러져 있었다. 내가 방금 살해한 집행관이 애처롭게 몸이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 속 어딘가에서 실감했다. 그들은 이런 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더 좋지 않은 것들을 보아 왔다는 사실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괜찮아요.”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갈라질 대로 갈라져 나왔다.
일행이 긴장을 풀고 갈 길을 준비했고, 찬드라 양이 끄덕이더니,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니사 양이 내 몸을 일으켜 주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찬드라 양이 걸어가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찬드라는 어디로 가면 되는지 모르면서 가고 있는 걸 거에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곧게 펴고, 케이프를 털었다.
“기디온, 찬드라를 불러주겠어?” 니사 양이 부드러운 어조로 기디온 씨에게 말했다.
그가 입에 손을 대고 고함쳤다. “그쪽이 아니야, 찬드라!”
멀리서 보이는 빨란 머리가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그대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 사이, 니사 양이 잠시 눈을 감더니, 찬드라 양이 걸어나간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야헤니 씨 집은 이쪽이라고 찬드라한테 전해줘. 제이스는 아자니와 피아 씨, 파시리 씨에게 새 은신처를 알려주고.” 기디온 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자리를 떴다.
나와 니사 양, 두 사람만이 자리에 남았다.
그녀가 솜털처럼 나를 자리에 세우고,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어디 다치셨나요?”
“아니에요, 몸은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마음은……이라고 하고 싶었던 걸까?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졌다. 그런 나를 니사 양이 부드러운 공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그 걱정 밑에는 놀라움의 잔불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의식 속에서 발로 지져 없애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의 수면 밑에서 내가 누군가를 죽여서 동요할 법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걸까……?
친근한 구리 냄새와 함께, 그녀의 눈가가 근심으로 주름지어지는 것이 보였다.
“제가 힘이 되어드릴 수 없을까요?”
어깨를 움츠리고 싶었지만 그 대신, 입을 다물고 고통 속에서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섰다. 하지만 곧, 내가 느낀 잔불이 니사 양 자신의 공감적인 홍수에 의해 쓸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민의 마음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야헤니 씨, 많이 힘드셨지요.”
그녀의 눈이 감겼다.
멀리서 소리 없는 노래 소리가 들려오더니, 발 밑 어디선가, 에너지의 흐름이 상냥하게 올라왔다――그녀가 한 걸까? 그리고 어깨 근처의 어딘가로 이어졌다. 나를 만든 도시의 활기가 나 자신을 흘러가는 듯한 느낌, 기분 좋은 환희의 흐름이 상처를 치료해주진 않았지만, 편안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내가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니사 양, 전 오늘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들이 저를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전――” 목소리가 갈라졌다. “더는 생명을 흡수하고 싶지 않아요. 느낄 수 있어요……그 전부를.”
그녀를 통해 내 어깨 안을 흐르는 따스한 에너지가 사랑스러워, 흐느껴 우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제가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지,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녀보다도, 자기 자신을 향해 말했다. “살인자의 집을 은신처로 쓰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우린 친구잖아요?” 우아한 대답. 그녀가 두른 조용한 분위기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씨앗을 고르는 것 같았다. 고르고, 물고는, 다시 하늘로 뛰어 오르는 그런.
자애로운 오렌지꽃 기름이 우리 사이를 가득 메웠다. 내가 잠시 입을 닫고, 니사 양이 하려는 말을 추측해 보았다.
……그녀 또한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네 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좋은 사람들, 하지만 그들 모두 후회되는 일이 있었던 거겠지.
온유한 에너지가 어깨를 계속 덥혀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상냥함이 내 마음에 꽃을 피우자, 그제서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나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나는 분명 앞으로도 또 누군가를 죽이게 되겠지. 그들이 의무감으로 의도치 않게 타인을 상처 입히듯이. 하지만 그들은……마지막에는 상처 입힌 이상으로 누군가를 구하게 될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이 낯선 자들처럼 나 또한 더 좋은 선을 이룰 멋진 힘을 가지고 있질 않은가? 좋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근사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멋진 일이 아닐까?
미래의 죽음을 떠올렸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2일.
22일이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근사한 인생이란 말인가.
니사 양의 존재는 등나무 꽃이 피는 우듬지다.
“고마워요, 니사 양.”
“천만에요, 야헤니 씨.”
내가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에너지로 이루어진 달콤한 작은 강이 발 밑의 대지로 회귀하는 것을 느꼈다.
“제 집은 이쪽이랍니다.”
(Tr. Mayuko Wakatsuki / TSV Yohei Mori)
<새로운 등장인물>
사치스러운 군주 곤티/Gonti, Lord of Luxury [에테르붙이, 도적]
에테르붙이 곤티는 기라푸르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의 군주입니다. 곤티의 무리는 무법자들이 불법 물품과 훔친 에테르를 구입하는, 도시의
유일한 상설 야간시장을 관장합니다. 곤티는 최첨단 비행선, 동물
자동장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광대한 특별 발명품들의 수집목록으로 방문객과 귀빈을 즐겁게 만듭니다.
첫댓글 에테르본들은 간지나는 정말 존재였군여 "too young to die too fast to live!"
살기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엔 너무 젊다! 멋진 말이네요.
@iamgood 원래도 좋아했던 문구인데 이번칼라데쉬에 두 카드로 나와서 더 멋졌지요
@iamgood .
@iamgood .
잘 읽고 갑니다 ㅋ
다크히어로 야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