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성체성사의 역사적 과정과 신학적 의미
제3장 7세기~16세기 (중세기)
5. 14세기
중세 말기 신학자들은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신학적으로 보다는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경향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중세 말기에 등장한 유명론에(唯名論 Nominalismus)312이다.
오컴 W. Ockham을 지도자로 하는 유명론자들은 교회의 교권을 인정하고 그 교권에 기초하여 그 가르침은 믿고 있었으나, 성체의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신학적인 입장에서의 '실체변화'와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가르침은 극히 간단히 다루고, 대신 논리학, 자연신학, 존재론, 인식론 등 철학적인 입장에서 '실체변화'의 본질, '그리스도의 현존'의 특별한 양식 등의 연구에만 저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번잡한 연구들은 신심을 위해서나 또 하느님께서 계시한 성체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들 신학자들은 자기의 교설을 변명하고 상대의 교설을 비난할 뿐, 신앙의 원천인 성서를 근거로 하여 그 성서의 가르침의 풍부함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신심이 두터운 많은 열심한 이들마저 학문적인 신학을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신앙생활과 학문적인 신학 사이에 틈이 생겨 결국 당시 교회는 신앙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인도하지 않는 그런 신학은 그 본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또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신심은 미신이나 편협된 신심에 쉽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그 당시 신자들은 신학을 바탕으로 한 충분한 지도를 받지 못했으므로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렸고, 성체에 관해서도 신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잘못된 신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일정한 횟수의 미사 성찬례를 계속 바치면서 청원하면 그 청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식의 빗나간 신심, 특정한 기원을 위한 지나친 미사예물 봉헌 등 성찬례 본연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혼란스러운 신앙생활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사제들 중에는 예물을 받기 위하여 매일 3-4회 이상 성찬례를 봉헌하기만 할 뿐 다른 성무는 하지 않는 태만한 사제들도 적지 않았으며, 동시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일반적으로 믿음이 일그러지고 열심하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성당에서는 성스러움이 결핍된, 경건함이 없는 성찬례가 거행되고 있었고, 신자들은 성당이 더러워도 모른 척하였으며, 또 성찬례 중에 부르는 성가도 신심을 더하기보다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되었다. 더욱이 신자들이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신앙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성체에 관한 경건하지 못한 그릇된 생각과 불경한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체에 관한 이단설이 영국 교회를 개혁한 위클리프 J. Wycliffe라는 신학자로부터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전승이나 교계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서만을 자기 신학의 기준으로 삼으려 하였다. 성체성사에 관하여 그는 유명론唯名論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철학적인 입장에서만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사물의 실체적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성체에 있어서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실체변화'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성체에 있어서 빵의 실체는 그대로 남고 '그리스도의 몸'은 그것에 가加해져서 현존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313 이렇게 14세기 교회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정확하게 신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살았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교회를 위해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성의 중심이었던 성녀 카타리나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그 사랑의 표시로 교회에 남기신 성체성사에 온 정성을 쏟음으로써 어려움에 처해 있는 성교회를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