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선입견이란 무엇인가요?
어떤 대상을 경험하거나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 경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정보나 지식으로 미리 판단하는 것을 말해요. 혹은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견해,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지요. 선입견에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도 있고, 직접 경험하거나 알지 못하지만 사회현실, 문화, 역사적 산물로 인해 형성되는 경우가 더 많아요. 내가 과거네 경험해 봤더니 그렇더라, 혹은 누구누구의 말에 의하면 그렇더라는 식이죠. 어릴 적 부모의 말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며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알게 모르게 선입견이 주입되기도 해요. 여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떠한 근거나 이유 없이 그냥 받아들여진 것들도 있어요. 또한 선입견은 개인이 살고 있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유리나 이데올로기와도 관령이 있지요. 흔히 선입견이 잘못된 판단이거나 안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입견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 만큼 선입견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속단하기는 힘들어요.
2 선입견에도 여러 유형이 있나요?
선입견에도 매우 다양한 우형이 존재해요. 우선‘○○지역 사람들은 인간성이 어떠하다.’,‘흑인은 어떠어떠하다.’와 같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이상한 통념들이 있어요. 학력이나 외모, 성별, 출신지역 등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평가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선입견을 흔히 ‘편견’이나 ‘속단’이라 불러요. 편견은 사회관계 속에서 피해자를 만들기도 하며 특정 사안을 하는 잘못된 판단이기 때문에 매우 안 좋은 선입견이라 볼 수 있죠. 이와 달리 좋다 혹은 나쁘다는 식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선입견도 있어요. 흔히 설 명절이면 고향에 가는 것을 당연시하거나 어른에게 효를 행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선입견이라 볼 수 있어요. 또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미덕도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혹은“남의 집에서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실례다.”,“밥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와 같은 예의도 ‘교양’이라는 이름의 선입견이라 볼 수 있어요. 과학이나 수학적 진리라 여겨지는 것들도 선입견의 일종이라 설명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삼각형이 주어졌는데 “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라고 재어보지도 않은 상황에서 단정하는 경우들 이지요. 이처럼 실제 측정해보거나 재어보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기대어 설명하려는 경우도 일종의 선입견이라 할 수 있어요. 편견을 제외한 이러한 선입견들은 무엇이 좋다 나쁘다고 쉽게 판단내리기 힘든 사안이지요.
3 선입견이 왜 문제가 되나요?
선입견이 모두 객관적인 진리라면 문제일 수 없죠. 정확하지 않은 판단을 미리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에요. 선입견은 속성상 사람으로 하여금 수동적인 태도나 수동적인 사고방식으로 길들이는 경향이 커요. 매번 무엇이 옳은 일인가. 지리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새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판단에 맞추어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더 나은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주어진 판단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하죠. 또한 그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는 점도 큰 특징이에요. 그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해서 우리의 생각과 감성을 지배하기 때문에 선입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또한 선입견이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적·사회적·종교적인 것 등 갖가지 외 부 요소에 의하여 형성되어 왔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모든 것들을 흡수하게 돼요.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신분제도에 대한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거예요. 이슬람 문화권에서 태어났다면 서구 기독교인들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갖게 될 가증성이 크죠. 결국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습이 옳다고 인식되는 경향이 커요. 때문에 인류가 진리를 알아나가는데 또는 역사가 진보하는데 선입견이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많죠. 그래서 이론적인 추론 과정 없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 선입견은 고대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어요.
4 선입견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많은 철학자들은 선입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선입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해 왔어요. 소크라테스도 끊임없는 의심으로 선입견에서 벗어나려 했고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로 선입견에 얽매여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판했죠.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들 역시 중세적 종교관과 권위세서 벗어나 이성에 따른 자유로운 지식을 추구할 것을 강조하는 등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반면 선입견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철학자도 없지 않아요. 대표적인 철학자 가다머는 전통이나 교양 등 좋은 선입견도 있으며 선입견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고 올바른 비판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는 선입견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사고의 틀이라고 규정해요. 오히려 선입견을 반면교사삼아 더욱 더 이상적인 판단을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지요.
❈선입견을 배제한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은 가능하다!
YES (선입견은 나쁘다.)
사람들은 흔히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선입견이 우리에게 미치는 연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선입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발휘하녀 사고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견해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나의 관점이 생긴다면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만의 이성으로 사고할 것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모든 선입견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그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했다. 선입견 없이 스스로 사고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은 선입견을 배제한 판단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만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이간이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그동안 쌓아온 인류의 발전과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이성을 중시하며 중세교회의 교리 같은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만듦으로써 인류는 오늘날까지 굉장한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 냈다. 또한 옳고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 의지로도 선입견을 얼마든지 멀리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거나 충격적인 일이 생길 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크레파스 ‘살색’의 경우를 보자. 무의식적으로 썼던 그 말 속에 뜻밖의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살색이라 부르지 않고 살구색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이것은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기존의 선입견을 배제한 것이다.
또한 과학은 우리가 선입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학문이다. 과학 이론의 모든 과정은 명확한 근거에 의해 증면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험이나 관찰 등으로 객관성을 입증 받은 것이 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과학은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새로운 발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NO (선입견이 나쁘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선입견을 비판하고 선입견에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만일 머릿속이 백지상태인 어떤 사람이 판단을 내린다면 가능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생각과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마도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감각적인 경험만 느낄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은 이후 그 사람에게 선입견으로 작용할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 과거의 경험, 과거의 지식을 종합하고 검토하는 과정인지라 선입견을 배제한 판단이란 불가능하다. 선입견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인과 이 세상없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부정해도 선입견은 우리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선입견은 특정한 사람, 올바로 사고하지 않은 사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상황, 조건, 과거의 경험 등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사고의 틀이다. 따라서 현재 나의 판단은 끊임없이 과거와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이 선입견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다면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나의 관점이라는 것 역시 이후에 내려야 할 판단에서 작용될 선입견에 불과하다. 물론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선입견에 매몰되어 기계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내가 선입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부단히 열린 시각으로 선입견을 바라보아 진리를 향한 사고의 과정에서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과학이론이 선입견을 벗어난 영역이가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관찰을 위해 ‘전제’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하는데 이 역시 선입견의 영향을 받는다. 가설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선입견 없이 순수한 실험은 있을 수 없다. 뉴턴의 운동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등도 과학자들이 속한 시대정신과 일치했다.
❈선입견은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다!
YES
선입견은 우리가 태어난 이후 지속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또 어떤 경우에는 개인의 경험적 지식과 합쳐져서 마치 진리인양 착각해 쉽게 바뀌지 않고 고착화되어 버린다. 특히나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과 익숙한 것에 끌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한번 자리 잡은 선입견은 경직된 사고가 되어버린다. 아주 사소한 상황에서도 익숙해진 습관에 따르게 마련이다. 이것은 새롭고 독창적인 사고를 방해할뿐더러 사회 전체에 그 영향을 끼치기l도 한다. 중세의 노예제도나 성차별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선입견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 이후에도 몇 백 년이나 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모습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또 중세 천동설의 경우에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천동설의 거짓됨과 지동설의 타당성을 아무리 잘 설명하였다 하더라도 당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신 중심의 선입견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입견의 힘은 너무나 커서 사회 전체를 하나의 색깔로 물들이기도 하고, 태로는 세계를 뒤흔들만한 하나의 이론으로 탄생한다.
NO
중세의 노예제도난 성차별이 당연히 받아들여졌던 것은 그 시대의 한계이다. 하지만 중세의 사고는 근대에 이르러 비판되고 성찰되는 과정을 거쳐서 잘못된 선입견을 극복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있는 인종편견이나 성차별의 문제는 잘못된 편견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려는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또 천동설이라는 선입견에 머무르지 않고 ‘왜? 정말일까?’라는 의문이 지동설을 낳은 것이다. 과거의 생각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생각들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처음부처 확실한 방법이나 답이 없기 때문이다. 선입견이 없다면 진리를 향해 가는 과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선입견을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생각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다. 선입견이라 할 수 있는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여 그 의미를 알아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진리들과 만난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한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다면 이는 한국과 세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한국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선입견만으로 현재의 한국인을 판단한다면 편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해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서로 만난다면 한국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좋은 섭입견이란 없다!
YES
좋은 선입견과 나쁜 선입견을 구분하는 기준이 과연 존재하는가? 전통이나 교양이 좋은 선입견이라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판단할 기준이란 모호하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나 교양을 지키는 것이 꼭 좋은 것이라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라고 불리는 제사도 미풍양속으로 내려오지만 제사 준비 과정에서 여자만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당한 이유라기보다는 그 시대의 관습이 습관이 되고 오늘날에 와서는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또 교양의 내용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지금의 가치로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통이나 교양에 얽매여 사고와 행동을 제약한다면 그 취지가 좋다고 하더라도 결코 좋은 것이라 말하기 힘들다. 선입견은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역사적, 사회적 틀 안 에서만 인정되어 온 것이다. 정당한 선입견이라는 전통이나 교양 등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 또한 우리가 정한 또 다른 편견일 수도 있다. 선입견이란 대개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의미의 선입견이라도 ‘좋다’라는 단정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이유다.
NO
어떤 의견을 절대화하는 편견처럼 사회적 해악을 낳는 선입견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선입견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 만일 선입견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상황에서 일일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그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또한 개인이 혹은 사회가 선입견을 가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개인적인 경험의 역사, 사회적인 합의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할 때 그 선입견의 올바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선입견이란 시대 속에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 온 선입견은 많다. 일부 부정적인 전통이 있다고 해서 전통과 교양을 전체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든 것들이 비판되고 재해석 되어 인정받았을 때 전통이 되지만 그 정당성이 의심되거나 부정되는 관습은 인습이라 여겨져 왔다. 제사를 통해 자손들이 서로 만나고 우애를 다지면서 조상들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은 전통으로, 그 속에서의 남녀차별은 인습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읽기 자료>
1아빠는 돈 벌고 엄마는 살림...... 교과서 ‘性차별’퇴출!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가정을 이끌고, 어머니는 가족들이 마음 놓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가정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초등6학년 F사 사회 교과서)
“정○○씨는 초등학교 아들ㅇ르 둔 어머니이자 직장인이다. 그녀는 바쁘지만 아이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러나 그 외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집안사림이 엉망이 되곤 한다.”(중2학년 C사 사회 교과서)
현재 교과서에는 남녀의 역할을 구분해 은연중에 성차별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이처럼 ‘일하는 아빠’‘가정주부 엄마’로 고정된 남녀의 역할에 대한 표현이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진다.
교육인적자원부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17일 학생들이 학교교육을 통해 양성평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를 수 잇도록 내년부터 사회, 실과(기술, 가정), 도덕 교과서 등을 수정·보완해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정과 직장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현실의 모습을 교과서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우리사회가 장면한 심각한 문제인 저출산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손질이 가해진다. 낮은 인구증가율을 선진국의 요건으로 기술하거나 우리나라 가족정책이 과거 산아제한에서 출산장려로 바뀐 점을 소개하지 않은 부분을 수정키로 했다.
교육부는 또 저출산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는데 교과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할 계획이다. 가정을 표현하는 삽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1자녀 가정의 모습을 ‘동생이 생겼어요’등의 제목을 달아 다자녀 가정의 행복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꿀 계획이다.
교령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상황에서 부양대상으로만 인식돼 온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개선한다. 노인정 앞에 않아있거나 집안에 누워있는 노인의 삽화를 없애고, 조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실을 계획이다. 단일민족을 지나치게 강조, 혼혈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배타적 감성을 주입할 위험이 있는 표현도 삭제키로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양성평등과 저출산, 고령사회는 어느 하나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며 “학생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시민단체들은 그러나 “교육부가 이제야 현실을 반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사회 변화에 발맞춰 교과서 내용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도록 교과서 관리체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06-09-17한국일보>
2‘하얀 거짓말’과 블랙 유머
“당신은 선입견에 가득 차 있어!”
아침부터 이런 말들 듣는다면 우리의 하루는 우울하다. 그런데 이런 말들 자기 사상의 기초로 삼은 철학자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우리의 삶에서 선입견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선입견이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이전 우리가 미리 지니고 있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머릿속을 텅 비워보자. 그리고 하루를 시작해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직장에서의 업무 판단은 물론이거니와 문밖에 나가서 거리를 걷는 일조차 힘들어진다. 문은 당기지 않고 밀어야 열린다, 파랑 신호등일 때 길을 건너야 한다, 자동차와 부딪혀서는 안 된다는 등의 지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먼저 들어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성입견이 세상 보는 눈 지배
물론, 필수 불가결하다고 해서 선입견이 무차별적으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선입견도 있고, 나쁜 선입견도 있다. 그렇지만 선입견 없이 세상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좋은 선입견을 통해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가다머 주장의 핵심이다.
뇌성마비의 시련을 딛고 최근 미국 대륙의 횡단에 성공한 최창현 씨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 장애인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인‘disabled man'으로 표현합니다. 제가 성공했으니까 앞으로는 장애인을 ‘할 수 있는 사람(abled man)'으로 불러줄 것을 건의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영어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자 언어에도 수많은 나쁜 선입견이 개입돼 있다. 영어의 경우,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흑색과 백색이란 단어를 둘러싼 선입견이다. 거짓말은 부정직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되지만, 하야 거짓말(white lie)은 선의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 유머는 좋고 즐겁지만, 블랙 유머(black humor)는 추하고 불쾌하다.
천수를 검게 그린다면...
이런 흑백 차별적 선입견은 시각 언어인 이미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천사는 항상 희게 그려지고 악마는 항상 검게 그려진다. 그리고 백조가 곧잘 왕자나 공주로 변신한다면, 검은 오리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장애인은 아무 능력도 지니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그 동안 잠재해 있던‘다른 능력을 개발해 나갈 수 있는 사람(differently abled person)’이다. 검은 색 또한 추하고 악한 색이 아니라, 흰색과는 다른 표현력을 지녔을 뿐이다. 중요한 점은 잠재적 힘을 개발하게 하는 일이지 그 힘을 무력화시키거나 악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그 타인의 잠재적 능력까지도 박탈시켜 버리지는 않나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선입견의 사전적의미
선입견(先入見) 또는 선입관념(先入觀念)이라고도 한다. 사물 ·사항 ·인물 등에 대해 미리 접한 정보나 자신이 처음 접했을 때 가진 지식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그들 대상에 대해 형성되는 고정적이며 변화하기 어려운 평가 및 견해를 말한다.
선입관은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인 것 등 갖가지 요소에 의하여 형성되며 호의적인 경우와 악의적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선입관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일단 가지게 되면 그것이 고정되기 쉽다는 특징이 있다. 또 선입관과 관련되는 일이 일어나면 무비판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로 나온다. 선입관이 합리화되고 고정되면 편견(偏見)이 되고, 객관적 사실이 왜곡 인지되어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인종적 편견 ·사회적 편견 등은 대부분 선입관에 기인한다.
<방하 한생각> 선입견의 무의식화, 고정관념이란 병
1.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는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일상적 인간관계 하나만 놓고 이야기해도 그렇다. 예컨대 사람을 만난다고 하자. 어제 만난 그 사람을 오늘도 또 만난다. 분명 어제는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어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몸도 마음 상태도 객관적인 조건들도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만났던 그 사람에 대한 인상과 기분을 갖고 그 사람을 만난다. 오늘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그 사람을 만나고 있다. 어제 보았던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先入見)으로 만난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의 오늘이란 것은 어제로써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이란 게 없다. 또 내일도 없다.
선입견이 누적이 되어서 달리 그에 대한 의문이나 반성의 여지조차 없어지면 무의식으로 되는데 이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이는 참으로 깊은 병이다. 어제로써 오늘을 사는 깊은 병이다.
우리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흔히 열림을 말하지만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열림의 의미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그 연장선상에서 타인을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은 열림이 아니다. 착각일 뿐이다. 열려있다는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지금 있는 상태로 마주하는 것, 지금이 어제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으로 얼룩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귀가 닫히고 눈이 어두워지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오늘 보는 사람을 어제 보았던 사람으로 자꾸 보고 있으니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눈이 제구실을 못하고 귀가 제 구실을 못한다. 그래서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닫힌다.
2.정신질환자들을 보게되면 대체로 집착이 강하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환자들의 경우,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나 슬펐던 기억, 상처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 사람한테는 그 다음이 없다.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오로지 한때의 그 기억에 집착해서 머물고자 한다. 선입견에서 고정관념으로 그리고 고정관념이 정신질환으로 간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 그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마다 그 나름의 상처를 갖고 있고 상처 없는 사람이 없다. 또 상처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 초조, 당황, 공포, 불신이 계속 싸여간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과 만나서 사기를 당하고 배신당한 상처를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B라는 사람을 만나면서도B는 분명히 다른 사람임에도 ‘너도 그렇겠지’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그런 선입견을 갖게 되면 결국 B와의 관계도 A와의 관계처럼 되어 버리고 서로를 갉아 먹는다. 그래서 한 번의 상처가 자꾸 이어지고 평생을 가게 된다. 선입견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고 이것이 평생의 병이 된다. 지독한 병이.
우리 생활세계에서 보면 그렇다. 작은 허물이나 서로가 좀 맞지 않는 오착 때문에 다음을 크게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어제의 모습, 어제 저질렀던 인과를 갖고 오늘을 도배하면서 오늘이 어제에 의해서 염습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장벽에 스스로 갇혀 버리기 때문에 어제와 달라진 오늘, 어제 보다 나아진 오늘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살아있는 생명체로의 탄력성을 잃어버리고 삶의 신선도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삶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관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평생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나를 가두고 또 상대방을 가두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굴레로부터 탈출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그로부터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악순환을 거듭한다. 악순환, 그것이 윤회의 의미다. 그 굴레를 벗어날 때, 비로소 나도 해탈(=자유)을 얻고 너도 또한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나와 너, 우리는 새로운 관계의 지평으로 들어선다.
/배영순(영남대교수)
[Cover Story] 인간은 미리 형성된 선입견에 의해 관성적으로 사고한다
한국경제 | 기사입력 2007-05-25 16:21
⇦에서(M.C.Escher, 네덜란드)의 '뫼비우스의 띠'
버지니아 총기사건 범인이 만일 흑인이었다면 한국인들 대부분 "흑인들은 원래 그래"라고 했을 것이다
"생명을 가진 태아에 대한 살인 행위인 낙태에 찬성합니까?" 낙태 찬성 비율이 40%였다.
다시 물었다.
"여성의 자유선택권을 보장하는 낙태에 찬성합니까?" 낙태 찬성 비율은 60%로 높아졌다.
-제3회 생글 논술경시대회 인문계 고3 유형 제시문 [나]의 C 왜 그럴까?
인간의 사고는 우리 생각보다 쉽게 이리저리 휩쓸린다.
다중의 생각, 즉 여론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덕스럽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포획된 개인과 사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은 미리 경험한(선행적) 인식에 의해 관성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이 보이고 듣고 싶은 것이 들리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다.
정치, 사회 현상 속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데 훼방을 놓는 선입견, 고정관념의 문제를 살펴보자.
◆ 의도되지 않은 설문 조사는 없다
여론 조사 전문가들은 세상의 어떤 설문 조사든 기획한 사람의 의도가 담겨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첫머리에 소개된 제시문에서 보이듯 단지 낙태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느냐에 따라 찬성 비율은 20%포인트나 차이가 났다.
낙태 반대론자는 설문 문항을 만들 때 '태아에 대한 살인 행위'란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고, 찬성론자가 기획한 설문에선 '여성의 자유선택권'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문 조사 자체가 갖는 '정파성'이다.
국민들의 이념 성향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가 한겨레 5월21일자와 중앙일보 5월22일자에 나란히 보도됐다.
한겨레 신문의 해설기사 타이틀은 '대선 앞두고 변화와 개혁 욕구 다시 기지개'인 반면 중앙일보는 '국민은 5년 새 우향우'였다.
똑같이 '국민'을 조사했는데 내용은 논조에 따라 판이했다.
결과를 의도하지 않은 설문은 사실상 없다는 이야기다.
◆ 정치적 '낙인' 찍기
정치인들이야말로 국민들의 선입견, 고정관념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공산국가 지도자들은 낙인 찍기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데 탁월했다.
옛 소련의 스탈린은 정적인 트로츠키를 '분열주의자, 극좌모험주의자'로, 중국의 마오쩌둥은 임표를 '배신자, 반사회주의자'로,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월북한 남로당 총책인 박헌영을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 숙청했다.
'분열, 배신, 스파이' 등 부정적 단어들로 일단 덮어씌웠을 때 그런 단어들이 주는 고정관념까지 더해져 여론몰이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사에서도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른 비수와 같은 낙인 찍기가 적지 않았다.
해방 이후 지속돼 온 진보·보수 논쟁에서 진보는 보수를 '수구, 반동, 친일'로, 보수는 진보를 '빨갱이, 좌파, 친북'으로 서로 공격해 왔다.
또 정파적 이익을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것도 국민들의 선입견을 이용한 정략이다.
이렇게 되면 본질은 사라지고, 국민들에겐 뿌리 깊은 부정적 각인만 남는다.
정치의 후진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 지푸라기 인형 전략
지난해 10월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하자 국내에선 햇볕 정책과 대북 지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그럼 전쟁하자는 거냐"였다.
제기된 문제는 대북 지원금이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가는지, 핵 개발 자금으로 유용되진 않는지 따져보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의도적인 논리 비약을 통해 전쟁과 결부 지어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다.
전쟁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논점은 '전쟁 찬성이냐, 반대냐'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이런 논법을 '지푸라기 인형 전략(strawman strategy)'이라고 부른다.
수세에 몰릴 때 버려도 되는 쟁점(지푸라기 인형)을 내세우고 그것을 공격함으로써, 본래 논점을 피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해 허점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 선입견·편견이란 색안경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야말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비판한다.
한국인들이 흑백 인종에 대해 가진 선입견을 생각하면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이 흑인이었다면 한국인의 반응은 어땠을까? "흑인들은 원래 그래"가 아니었을까?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 "전과자는 잠재적 범죄자야" "동성 연애자는 에이즈에 걸려" "그 학교 학생들은 문제가 많아"….부분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더라도 그것이 전체를 포괄하는 명제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사고 방식 속에 선입견이란 색안경으로 인해 '조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양윤덕 선생님(경기 덕계고) 의견
"고1 공통사회 교과서에선 고정관념을 편견 아집 흑백논리 등과 함께 합리적 사고를 저해하는 사고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을 편협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을 그 틀 안에 가두고 속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지혜와 안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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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새까만 대나무는 보았느냐"
지난 19,20일 치러진 제3회 생글 논술경시대회의 인문계 고3 유형 제시문들의 키워드는 바로 '고정관념' 또는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제시문을 통해 사람의 사고가 이미 경험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고 틀에 의해 관성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파악했다면 출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우선 제시문 [가]의 (A)는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가 붉은 먹물로 대나무를 그린 데 대한 예화이다.
다른 이들은 "세상에 붉은 대나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소동파는 "그럼 새까만 대나무는 보았느냐"고 응수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붉은 대나무가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먹물로 그린 검은 대나무만이 진실일 수도 없다.
(B)예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물체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지만, 뉴턴은 공중에 떠 있는 게 당연했기에 물체가 땅에 떨어진 현상을 설명하는 데 고민했다.
(C)는 컵의 물이 반 정도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아직 반이나 남았다'와 '이제 반밖에 없다'를 대비한다.
'반 컵의 물'은 변함이 없지만 선행적 경험 혹은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제시문 [나]에서 소개된 도표 (A)는 장기 기증 의사를 표시해야 기증자로 간주할지, 기증 않겠다는 의사 표시가 없으면 기증자로 간주할지에 따라 통계상 엄청난 차이가 났다.
(B)는 고교생 두 집단에 1부터 8까지 곱하기 문제를 주고 5초 안에 근사치를 답하도록 한 실험 결과다.
큰 수부터 곱한 문제(8×7…×1)의 답은 평균 2453이었지만, 작은 수부터 곱한 문제(1×2…×8)의 답은 평균 534에 불과했다.
사람의 생각이 환경에 따라 무려 5배가량 차이가 날 수 있는 셈이다.
사람은 이토록 고정관념의 지배를 받는 존재인가.
[Cover Story] 인간은 고정관념의 포로인가 [한경] 2007.05.25 17:00
우리는 얼마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까.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때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수용한다. 그런데 확고한 주관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늘 남과 다른 판단과 행동만을 할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관성적 사고를 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관성적 사고는 합리적 사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어떤 현상을 인식할 때 진정한 그 실체를 파악하려 들기보다는 그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대로, 타성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백화점 세일 때만 되면 실제 물건 값이 싼지 여부와 자신이 필요한 물건도 세일중인지 여부 등을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떼지어 몰려가는 것도 이런 반응 중 하나다.그동안 믿어왔던 것을 의심 없이 수용하고 바꾸려 하지 않는 고정관념 역시 타성적 사고의 결과다.'흑인은 게으를 것이다' '정치인은 모두 부정을 저지를 것이다'와 같은 생각이대표적인 고정관념이다.이 같은 인간 사고의 경향성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부지불식간 작용하고 있다.그리고 이런 관성적 사고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례도 잘 살펴보면 아주 많다.선거운동을 하는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 각종 여론조사에서 의도된 답변을 유도하기 위한 방식으로 질문지를 만드는 것, 정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입맛에 맞는 통계수치만을 선별 인용하는 것 등이다.지난 19, 20일 치러졌던 생글 논술경시대회(인문계 고3 유형)도 고정관념에 좌우되는 인간의 사고경향에 대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