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사 박경양(朴景陽)
[본관] 함양(咸陽)
[생졸년] 1708년(숙종 34)~1740년(영조 6) / 향년 32세
[진사] 영조(英祖) 14년(17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26위(56/100)
[거주지] 한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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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진사 박군 묘갈명(進士朴君墓碣銘)
박사행(朴士行) 군은 내게는 벗의 아들인데 그는 나를 스승으로 대하였다. 몸가짐이 단정치 못한 어떤 자가 일찍이 문에 이르러 수업을 청했는데 내가 차마 드러내어 물리치지 못했다. 사행이 이를 듣고는 몹시 의혹되어 속히 나를 찾아와 그 사람과 절교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호향(互鄕)의 고사를 고해주고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행은 돌아가는 길에 병이 들어 집에 도착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경신년(庚申年,1740, 영조 16) 5월 24일, 향년 겨우 33세였다.
나는 슬피 곡하였다. 이후 그 사람이 감히 다시 찾아오지 못했으니, 사행이 북을 울려 성토한 의(義)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내 그는 제대로 죽지 못했으니, 사행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겠으며 또한 나를 몹시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군의 이름은 경양(景陽)이고, 사행은 그의 자(字)이다.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신라와 고려 때부터 가문이 번성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병조 판서 휘 습(習)이 크게 현달하였다. 3대를 내려와 소요당(逍遙堂) 세무(世茂)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저술하였는데, 세상에 통행되고 있다.
소요당의 손자는 잠야(潛冶)로 휘가 지계(知誡)인데, 우암(尤菴) 선생이 ‘사문(斯文)의 선배’라고 칭하였다. 이분이 군에게 5대조가 된다. 조부 휘 여흥(汝興)은 참봉을 지냈고, 부친 휘 서규(叙揆)는 학업에 부지런히 힘썼으나 급제하지는 못하고 효자로 일컬어졌다. 모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부사 처주(處宙)의 딸로, 정승 서봉(瑞鳳)의 증손녀이다.
3형제 중에 군이 둘째인데, 4세에 아버지를 잃고서 형을 부친처럼 섬겼다. 학문에 힘을 쏟고 문장을 전공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힘썼으니 매번 과장(科場)에 들어가면 지필(紙筆)을 잡자마자 즉석에서 완성하여 사람들이 그 풍부하고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무오년(戊午年,1738, 영조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망(聲望)이 날로 성대하였으나, 성균관이 예전 같지 않고 선비의 취향이 크게 무너졌다고 생각하여 그 사이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 교유에 신중하였으니 함께 벗한 자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이 자신을 가르쳤던 것처럼 형의 아들을 가르쳤으며, 아우를 사랑함이 특히 돈독하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선조를 위하는 일에 정성을 쌓고 해이하지 않아, 우리나라의 문집(文集)과 패설(稗說) 등속을 취하여 선조의 덕이 언급된 것이 있으면 모두 모으고 엮어《지인편(知仁編)》이라 명명하여 선조의 공렬을 무궁하게 드러내려 하였으니 효자라고 이를 만하다.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어버이가 살아계시는지라 차마 과거공부를 그만둘 수 없으니, 정자(程子)의 말씀처럼 한 달의 절반만 과거공부를 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반드시 가학(家學)을 잇고자 한 것이다. 또 장차 끊임없이 진보하였을 것인데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아! 애석하다.
군은 양주(楊州) 신혈(神穴) 임좌(壬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 최씨(崔氏)는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 재화(載和)를 양자로 삼았다.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침에 즐거이 이야기하고 / 朝之言嘻嘻
저녁에 기쁘게 말하였는데 / 夕之言怡怡
하루 못 본 사이에 죽었으니 / 一日不見而死
아, 슬프도다 / 吁其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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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진사 박군 묘갈 :
이 글은 박경양(朴景陽, 1708~1740)의 묘갈이다. 박경양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사행(士行)이다.
[주02] 호향(互鄕)의 고사 :
호향은 풍습이 비루해서 모두 상대하기를 꺼려했다는 마을 이름이다.《논어》〈술이(述而)〉에 “호향 사람과는 이야기하기가 어려
웠는데, 그 마을 동자가 찾아와 공자를 만나자 제자들이 의혹을 품으니, 공자가 이르기를, ‘그가 나를 찾아온 뜻을 인정해 준 것이지,
그가 물러가 불선한 짓을 할 것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니,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여 찾아오면 그가 깨끗이 한 것을 인정해 주면 되지 지나간 일을 마음속에 담아둘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
다.”라는 내용이 있다.
[주03] 북을 울려 성토한 :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가 권력자인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이 되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그의 재산을 늘려주자, 공자가 크게 노
하여 제자들에게 “그는 더는 우리 무리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울려 성토해야 할 것이다.[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라고
한 데서온 말이다.《論語 先進》
[주04] 정자(程子)의 말씀 :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혹자는 과거공부와 사업이 사람의 공부를 빼앗는다고 말하니, 이는 옳지 않다. 우선 한 달 가운데 열흘은
과거공부를 하고 나머지 날짜만 가지고도 충분히 학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 뜻을 두지 않으면 반드시 저기에 뜻을 둔다. 이 때문에 과거공부가 서로 방해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뜻을 빼앗김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二程全書 外書》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