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길이
글 /두만강
명길이가 죽었다. 명길이는 반세기동안 해마다 날마다 간다고 벼르던 연변의 수부도시 연길시 복판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살아서 천당으로 못갈바엔 죽어서라도 간다고 하더니 끝내 연길의 번화한 십자로에서 요란하게 죽었다. 죽을바엔 두메산골 고향집에서 편안하게 죽을게지 끝내 객사를 해서 <화재인물>이 되고야 말았다. 명길이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나의 왼팔이 돠여서 줄기차게 싸운던 한전호속의 전우였다. 명길이는 글 잘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특별한 재간을 갖고 있었다. 대자보를 쓰거나 환등필림을 그리는데 명길이가 없으면 안된다. (환등 유리에 그림 영상을 말함) 그 세월에 산골에서는 영화구경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석유등잔 초롱불앞에 두손으로 개와 토끼 땅나귀 까마귀 모양을 만들고 개소리 땅나귀소리 까마귀소릴 내면서 밤을 새였지 벽에발린 그림을 보다가 명길이는 기발하게 환등을 발명하였다.
명길이는 꿈이 화가였단다. 당시 와룡산골에서 돌리는 환등그림은 거이다 명길이 솜씨였다. 어쩌다 류동영화방영대가 오면 시골마을에 경사가 났다. 사원들은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옥수수며 감자 호박을 삶아가지고 탈곡장에 모여든다. 탈곡장 복판에 영사막을 걸어놓고 영화를 돌리기전에 명길의 환등을 돌리는데 마을사람들을 산모델로 그린 만화는 어찌나 심통했는지 배꼽이 빠진단다. 명길이는 환등필림만 잘 그리는가 했는데 초상화도 멋지게 그려주었다. 집집마다 갖춰놓은 찬장의 유리그림은 명길이 멋진 창작품이였다. 수박, 오이, 사과를 먹음직하게 탐스럽게 그려놓은 찬장은 아낙 네들의 보배단지요 명길의 위대한 자화상이였다. 한평생 살아봤댓자 사진 한장 남길 수 없던 두메산골에서 처녀총각이 시집장가 갈때면 명길이가 그린 초상을 그려주었다. 지금도 명길이가 그린 초상을 간작하고 있는 집들이 많았다.
명길이 이름은 명길이 아버지가 점쟁이를 찾아서 특별히 져준 이름이다. 명길이 아버지는 명이 짧은 사람이였다. 해방이 되던해에 목재판에 갔다가 겨울곰이 들어있는 통나무를 켜다가 곰에게 봉변을 당했다. 천만다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살렸지만 얼굴과 목덜미에 곰이 할아놓은 흉터가 생겨나서 모두들 <곰뜯개령감> 이라고 불렀다. 명길이는 기구한 애비 운명을 닮지말라고 지었다. 명길이 운명은 아버지의 움명을 피치못했다. 몇번이나 죽을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1988년도에 와룡산골은 해방후에 보기드문 큰물이 졌다. 제정때 왜놈들의 등쌀에 못이겨서 고동화와 봉밀하가 합친 합수목에 집단부락을 앉힌게 화근이였다. 거기다 문화대혁명 때 반란파들이 물귀신을 때려 잡는다고 버들방천의 고목을 몽땅 란벌해서 끝내 자연의 천벌을 받았던 것이다. 마을이 하루아침에 두 동강났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봇따리를 둘러메고 어랑촌으로 도망가는데 명길이는 둥굴소를 끌고서 피난하다가 사태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서 둥둥 떠내려갔다. 사람 살리라고 소리쳐 보았댔자 모기소리요 흙마처럼 날뛰는 파도속에서 소도 사람도 억망진창이 되였다. 망창 십리도 넘게 휩쓸려 가다가 요행 명길이 아버지가 묻혀있던 곰바위골 어구지에서 파리목숨을 건졌다. 사람들은 명길이가 아버지 덕분에 살아났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한번은 몇년전에 잣 뜯어러 가다가 백두산으로 가는 뻐스를 탓는데 그만 차비가 모자란다고 인가 없는 밀림에다 부리워 놓았다. 눈보라 몰아치는 밀림속에서 배고푸면 눈을 녹여먹으며 련속 이틀이나 뻐쳐 냈단다. 사람들은 명길이 운명이 소가죽보다 더 질기다고 소가죽띠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곰에게 뜯기워서 겨우 살아났고 아들은 홍수에 밀려서 죽다가 요행 살아났는데 생각밖에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백곰>에게 물리워서 죽어버렸다. 현대문명은 휘발유를 입에물고 날뛰는 <백곰>들을 만들어서 생사람을 잡아 간단다. 명길이는 죽어가는데 운전수는 도망가고 없었단다. 누가 신고했는지 교통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명길이가 인사불썽이 된지 오래였다. 명길이는 연길시에 알만한 사람이 나를 내놓고 없었을 것이다. 그날도 한국 로무송출 시헙에 합격되였다고 너무 좋아서 한잔 한게 봉변을 당했단다. 뺑소니 택시운전사를 찾았지만 대리운전수라 돈이 없었다. 결국 교통국에서는 량쪽에 다 문제가 있다고 결론내려서 보상금을 달랑 3만원 받고 말았단다.
요즘은 웬만한 애환견도 몇만원씩 한다는데 명길이 목숨은 개목숨보다 못하단 말인가? 명길이 막내아들이 작년에 일본으로 류학가면서 한족집에서 꾼돈이 본전만 해도 3만원(한화로 5백만원)이 넘는단다. 빚달련에 못배기고 한국으로 가려고 했는데...결국 목숨으로 빚을 청산한 셈이다. 농촌에는 웬일인지 사람이 죽어도 보상금이 한푼도 없다는게 리해 안된다. 명길이는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간다고 그렇게 기뻐했는데 결국 죽기전에 한번만 타보고 싶다던 비행기도 못타보고 죽었다. 사람들은 명길이가 불쌍하게 죽었지만 그래도 사지판에서 3만원을 벌어놓고 죽은게 다행이라고 혀를 끌끌찾다. 집에서 죽었으면 누가 3만원을 주는가?... 모두들 명길이네 팔자는 곰에게 뜯기우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을 상팔자라고 결론했다. 차라리 교통사고를 당한게 행운이란다. 정말 그럴가?
2010년 8월17일 수개
첫댓글 참으로 안타까운 삶이었네요.
안녕하세요 처움 봡갰습니다. 까페에서 만난 첫 사람입니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은 사람이 있다는게 ...고마워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인가 ....날마다 좋은일만 차레지기를 기도할게요
저는 [문학사랑 글짱들] 카페의 카페지기 리헌석입니다.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맘 아픈 일생을 보내셨네요. 그래도 자신을 기억하고 글로 남겨주는 지인이 있어 입가에 미소 짓고 있을거예요. 더이상 고통없는 하늘 나라에서 말입니다.
전관장님, 새해 안녕하세요. 상해에서 인사올립니다. 우연하게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였습니다. 반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