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상아에 꽃을 피우는구나. / 법전 스님
낙도불방일樂道不放逸하고, 상능자호심常能自護心하라.
시위발신고是爲拔身苦러니, 여상출우함如象出于陷이라.
도를 즐겨 방일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라.
몸의 괴로움을 제거함은 코끼리가 늪을 벗어남과 같도다.
분양선소(汾陽善昭)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파초는 무심하다가 천둥소리를 듣고서 피어나는데,
코끼리 상아에는 언제 꽃이 핍니까?”
이에 선사는 대답했습니다.
“하늘에는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고,
온몸 어디에도 마음을 어둡게 하는 기미는 없다.”
‘코끼리 상아에 꽃이 핀다’는 것은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이면서 상아에 비칠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무늬를 말합니다.
이 말 속에서 천둥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고
번개 불빛에 새겨지는 상아무늬는 불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상아는 중생의 마음을 말합니다.
허공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서
모든 상아에는 꽃무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번갯불이 없다면 상아의 꽃무늬 역시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많은 번뇌에 덮여있으면서도
그것도 모르는 채 그대로 둔다면 절대로 불성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은 중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부처입니다.
그래서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아무리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수행하고 법문을 듣게 된다면
그 불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중생모습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즉 수행을 한다면 불성을 드러낼 수 있지만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불성은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결제란 중생의 불성을 드러내는 일인 것입니다.
결제라는 번갯불은 중생의 상아에 꽃을 피우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상아가 당당한 만큼 그 당당함을 받쳐주기 위해
코끼리 위의와 발걸음 역시 당당해야만 합니다.
부처님 80종호 가운데 ‘걸음걸이는 코끼리 왕처럼 걷는다.’고 했습니다.
당당한 걸음 속에는 위의(威儀)와 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짓이 경망스럽지 않으며 뒤돌아볼 때도 고개만 휙 돌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몸을 함께 천천히 돌려서 지긋한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중후한 위의를 갖춘 수행자를 코끼리 왕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수행이 몸에 베면 자연스럽게 위의가 갖추어지기 마련입니다.
코끼리는 걸을 때 발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지만
다시 땅에 닿기 때문에 발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설사 코끼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코끼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역대 선사의 옛길을 뒤따라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발자국을 따르다보면 코끼리를 만나듯이
수행 길을 뒤따라 가다보면 언젠가는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선지식이 될 것입니다.
코끼리 발자국이 큰 것을 보면 그 코끼리 역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끼리는 강을 건널 때도 강바닥까지 철저 하게 발바닥을 닿게 하면서 걷습니다.
공부할 때는 바닥까지 확실하게 밟아야 합니다.
토끼처럼 물에 떠서 건너가거나 말처럼 몸을 반쯤 담그고
건너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의 눈에 건너가는 모습은 똑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번뇌를 끊고 수행하는 내용의 깊이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 짐승이 강을 건널 때 깊고 얕은 것을 애써 가리지 않아도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토끼는 보물이 있는 곳에 이르더라도 진기한 보물을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어줄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만 즐기는 정도에 그칩니다.
말은 비록 보물이 있는 곳에 이르더라도 중생에게 널리 베풀 수는 없고
다만 중생의 청정한 복전(福田)정도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끼리는 보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끝없이 많은
모든 중생 에게 두루 베풀어 널리 그들에게 큰 이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을 나의 법열(法悅)을 위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며,
중생의 복전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도 안 될 것입니다.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할 때까지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조주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여러 명의 장님이 코끼리 몸을 만지고
각자 서로 일단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코끼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선사는 말했습니다.
“무가(無假)라. 자시부지(自是不知)니라.
모두가 잘못된 것은 없다. 스스로 전체를 알지 못할 뿐이다."
코끼리를 볼 때는 제대로 봐야 합니다.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같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의미에 집착한다면 영원히 코끼리를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코끼리 전체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적인 사실을 떠나서 달리 코끼리도 없음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듯이 부분과 전체도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양선소 선사의‘상아화발(象牙花發)’에 대하여
삼산등래(三山燈來) 선사는
“천둥소리를 한번 들을 때마다 상아에도 점차로
그것과 함께 무늬가 생기는구나.
소리가 귀를 통하여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찌 꽃무늬가 입 주변에서 일어났겠는가?”라고 하여
입주변의 상아에 꽃무늬가 일어나기 위해선
천둥소리가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번개불빛이 눈을 통해서 들어와야만 한다고 말씀 했습니다.
결제란 납자가 스스로 천둥소리를 만들고
번개 불 빛을 번쩍 거려 코끼리 상아에 꽃을 피우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인이라면 코끼리 상아에 꽃을 피우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스스로 코끼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과 코끼리는 제대로 된 공부인을 말합니다.
우리가 임진년 하안거를 맞아 용상방을 붙여놓고
정진에 몰입함은 바로 우리 결제대중이
용과 코끼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백장 선사 이래 용상대덕들이 한 마음으로
천년이 흐른 오늘까지 결제회상을 이룬 까닭은
결국 눈 밝은 이가 속출하여 부처님의 영산회상을 만들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영산회상은 결제를 하고 또 모여서 산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초발심자경문》은
“망용상덕(望龍象德)하야 능인장고(能忍長苦)하고
기사자좌(期獅子座)하야 영배욕락(永背欲樂)이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용상의 덕은 수행이라는 긴 고통을 참아내야 하고
사자좌는 욕락을 버려야 기약할 수 있다는
옛 선지식의 고구정녕한 말씀을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허함명(裏許含明)은 반야월통서각(半夜月通犀角)하고
기한전동(其閒轉動)하니 홀지뢰화상아(忽地雷華象牙)로다
속까지 온통 밝은 빛을 머금은 한밤의 달이 무소뿔을 환희 드러내고
한순간에 움직여 별안간 치는 번개 빛이 상아에 꽃을 피게 하는구나.
불기 2556년 임진년 하안거 결제일
해인사 방장 법전스님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