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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Después que Juan fue entregado, marchó Jesús a Galilea; y proclamaba la Buena Nueva de Dios: «El tiempo se ha cumplido y el Reino de Dios está cerca; convertíos y creed en la Buena Nueva». Bordeando el mar de Galilea, vio a Simón y Andrés, el hermano de Simón, largando las redes en el mar, pues eran pescadores. Jesús les dijo: «Venid conmigo, y os haré llegar a ser pescadores de hombres». Al instante, dejando las redes, le siguieron. Caminando un poco más adelante, vio a Santiago, el de Zebedeo, y a su hermano Juan; estaban también en la barca arreglando las redes; y al instante los llamó. Y ellos, dejando a su padre Zebedeo en la barca con los jornaleros, se fueron tras Él.
«Convertíos y creed en la Buena Nueva»
Rev. D. Joan COSTA i Bou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invita a la conversión. «Convertíos y creed en la Buena Nueva» (Mc 1,15). Convertirse, ¿a qué?; mejor sería decir, ¿a quién? ¡A Cristo! Así lo expresó: «El que ama a su padre o a su madre más que a mí, no es digno de mí» (Mt 10,37).
Convertirse significa acoger agradecidos el don de la fe y hacerlo operativo por la caridad. Convertirse quiere decir reconocer a Cristo como único señor y rey de nuestros corazones, de los que puede disponer. Convertirse implica descubrir a Cristo en todos los acontecimientos de la historia humana, también de la nuestra personal, a sabiendas de que Él es el origen, el centro y el fin de toda la historia, y que por Él todo ha sido redimido y en Él alcanza su plenitud. Convertirse supone vivir de esperanza, porque Él ha vencido el pecado, al maligno y la muerte, y la Eucaristía es la garantía.
Convertirse comporta amar a Nuestro Señor por encima de todo aquí en la tierra, con todo nuestro corazón, con toda nuestra alma y con todas nuestras fuerzas. Convertirse presupone entregarle nuestro entendimiento y nuestra voluntad, de tal manera que nuestro comportamiento haga realidad el lema episcopal del Santo Padre, Juan Pablo II, Totus tuus, es decir, Todo tuyo, Dios mío; y todo es: tiempo, cualidades, bienes, ilusiones, proyectos, salud, familia, trabajo, descanso, todo. Convertirse requiere, entonces, amar la voluntad de Dios en Cristo por encima de todo y gozar, agradecidos, de todo lo que acontece de parte de Dios, incluso contradicciones, humillaciones, enfermedades, y descubrirlas como tesoros que nos permiten manifestar más plenamente nuestro amor a Dios: ¡si Tú lo quieres así, yo también lo quiero!
Convertirse pide, así, como los apóstoles Simón, Andrés, Santiago y Juan, dejar «inmediatamente las redes» e irse con Él (cf. Mc 1,18), una vez oída su voz. Convertirse es que Cristo lo sea todo en nosotros.
일상으로 돌아옴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이런저런 뮤직 페스티벌에 종종 참여합니다. 지난 가을에는 아예 휴가를 내고 뮤직 페스티벌에 다녀왔습니다. 페스티벌도 휴가도 너무나 좋았는데 마지막 날이 되니 많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아, 내일이면
다시 일상이구나. 축제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마음 반.
‘아니야! 일상을 잘 살아야 축제가 더 의미 있는 법이지! 다음을 기약하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굳은 결심 반. 결국 후자를 선택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축제나 휴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작습니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결국 삶을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성탄 시기를 보냈고 오늘부터 연중 시기를 맞이합니다. 짧지만 길었던 성탄 축제를 뒤로하고 이제는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연중 시기의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축제를 위해 우리가 성실히 살아내야 할 일상의 목표입니다. 축제 기간 동안 흐트러졌던 나 자신을 바로 하고 크고 작은 잘못을 뉘우치고 더더욱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며, 매일매일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박민우 신부(서울대교구 서교동성당)
♣ 버리고 떠나 따르는 제자의 길 ♣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시간 속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심으로써 시간을 완성하시고 성화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결정적으로 드러날 때가 다가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구원의 때’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매순간이 행복으로의 초대인 셈입니다.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오시어 다스리시는 결정적인 기쁨을 맛보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1,15).
‘회개’와 ‘믿음’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그 근본적인 새로움 앞에서 취해야 할 영적 태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소유와 집착, 굳어진 생활방식과 사고의 틀을 버리고 몸소 찾아오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생각을 바꿉니다. 그는 모든 사람과 세상사, 피조물을 하느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쓴 것이 단맛으로 변하여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님을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며, 실패와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그분께 모두를 내맡길 줄 압니다. 회개와 믿음은 밀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1,17) 하고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1,18),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을 버려두고(1,20) 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버리고, 몸에 익은 환경에서 떠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의 학교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몸에 익은 과거의 삶과 사고의 틀, 곧 거짓자아를 미련 없이 버리는 '영적 다이어트'를 해야겠습니다. 나아가 하느님과 무관하거나 그분보다 더 중요시하는 온갖 관계까지도 포기하고 예수님을 철저히 추종함으로써(1,20), 모든 관계를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버리고 떠나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정에 기꺼이 내맡기는 가난한 제자가 될 때, 주님께서는 나의 빈 자리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얻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닮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걸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과 함께 지냄으로써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을 배워 익혀 파견됩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은 가난한 순례요 긴 수행과정이기에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순간도 버리고 떠나 당신께 의탁하는 이들에게 은총을 주시고 행복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은총의 때인 '지금' 이 순간을 주님과 함께 지내고, 삶으로 기쁜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회개, 믿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 라는 말은,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종말의 날을 정하는 것은, 또는 하느님 나라를 언제 완성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종말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결정하시고 실행하실 때 종말이 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 근처 어디쯤에 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가까워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중간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나서 이천 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가?")
지난 이천 여 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일 뿐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일입니다.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메시아로서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은 진리이지만,
'믿기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다고 해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21).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
여기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고,
"들었을 때 내가 기뻐하게 되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려면
먼저 그 소식을 희망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희망하지 않았다면, 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면,
소식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에 있는 나라를 원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되기는커녕 슬픈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긴 해도 회개하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귀찮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7-18)."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이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어부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첫 신자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회개하지도 않고 복음을 믿지도 않은 어부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삼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회개했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 주시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은,
그들이 회개와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회개'란, 우리를 붙잡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일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마르 4,19).
'믿음'이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제자들만(사도들만) 실천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 참례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그 시간 동안에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놀러가자는 유혹도 뿌리치고, 뭔가 중요한 일들도 포기하고...
미사 중에 휴대 전화를 꺼놓는 것도 모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만일에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전화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떠나 있다면 몸이 성당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일도,
즉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하느님 나라로 가자고 권하고 인도하는 일도,
사도들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마태 28,19)"
이것은 신앙인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모든 신앙인은 제자로서 복음 선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