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과 5월 2
https://youtu.be/rpUbC_E0ynU
후에 결성한 포크 록 그룹의 이름도 ‘들개들’로 정한 것은 외국 것만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항이었다. “사실 가수가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나는 부를만한 우리 노래가 없고 팝송만을 선호하는 학생들과 가수들에게 순수 우리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고 싶었다.”어느 날 이수만이 “명동 YWCA 청개구리에 엄청나게 노래를 잘하는 여자가 있다”고 했다. 양희은이었다. 찾아간 김에 ‘스카보로우 페어’를 연주하자 사회자 이백천이 “기타로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이후 청개구리에서 김민기 서유석 김세환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과 교류를 했다. 청개구리에서 만난 임문일의 주선으로 CBS의 ‘밤과 음악사이’에 출연했다. 첫 방송 출연 후 1971년 청평페스티발, KBS TV ‘젊은 세대’ 등으로 인지도를 넓혀 나갔다.
하지만 이수만이 늑막염에 걸려 도중 하차를 해, 기타 레슨생이었던 외국어대 불어과 3학년 김태풍을 영입했다. 2기의 첫 무대는 일주일 후 시민회관 공연이었다. 긴장이 되어 진정제를 먹고 무대에 올랐던 김태풍은 이천호텔을 경영했던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DJ 이종환이 주선한 데뷔 음반의 녹음은 백순진이 이수만과 했지만, 음반 재킷은 백순진이 김태풍과 촬영한 사진으로 발매된 것. “사실 데뷔 음반은 정식 녹음이 아닌 방송 출연 음원이라 음질이 엉망이다. 멤버 교체가 되었지만 제작비 때문에 재녹음을 못했다.” 이 음반이 1972년 4월에 발표된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1집’이다. 창작한 12곡이 수록된 데뷔 음반에는 ‘4월과 5월’이 7곡을, 쉐그린 홍민 이수미 최병걸과 안혜경 등이 5곡을 불렀다.
백순진이 작사 작곡에 편곡까지 직접 맡은 선구적인 앨범이었다. 이후 DJ 이종환과 가깝게 지내며 MBC라디오 ‘청춘 파라다이스’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또한 1972년 5월, 몇 곡을 재녹음해 ‘포크페스티발 2집’을 발표했다. 그래서 백순진이 이수만, 김태풍과 부른 2가지 버전의 같은 노래가 생겼던 것. 당시 표절곡이란 이유로 잠시 방송 금지되었던 히트곡 ‘화’는 이종환과 방송윤리위 사이에 벌어진 파워 게임의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6월,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살롱에서 시작된 ‘맷돌’ 공연에 참여했다. 이 공연은 우리 노래 찾기 일환으로, 포크의 저변을 넓혔던 노래 운동이었다. 참가했던 백순진,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포크 가수들은 군사 정권에 의해 억압된 자유와 저항 의식을 포크 송에 담아내려고 했다.
숨겨진 사실 하나.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맷돌 공연 때 ‘딩동댕 지난 여름’의 가사로 송창식과 백순진이 각각 다른 곡을 만들어 발표했다. 송창식은 대중이 기억하는 히트곡 버전으로 노래했고, 백순진은 가야금 2대와 통기타 2대가 어우러지는 실험적인 협연 양식으로의 국악 포크를 시도했다. 공식 무대에서 시도된 첫 국악 포크였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한 국악인이 ‘다시는 그런 장난 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웃고 넘겼지만 음악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험적인 그의 곡은 방송을 거의 타지 못하고 송창식의 노래만 히트되었지만 지금도 그는 당시의 시도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창균은 당시 보사부장관의 아들. 맷돌 공연이 제약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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