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적었다. 그 정통성의 바탕이던 '단기 연호'와 '개천절', '어천절'은 지금 뒷전에 밀려 있다. 민족의 뿌리인 단군의 역사만 낮춰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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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뒤 제도 안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것이 '단기 연호'다. 단기는 단군의 건국을 기점으로 해를 세는 '단군건국기원'의 줄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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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는 본래 천자를 자처하는 지배자가 천명을 이었음을 과시하고 내부를 묶기 위해 제정했다. 다른 나라가 그 연호를 쓴다는 것은 기록의 편의를 넘어 그 통치권을 받아들인다는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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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제국이 문화력과 군사력으로 동아시아 위에 군림하던 시대에는 어느 연호를 쓰느냐가 자주의식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다. 독자 연호를 내걸면 중국과 대등한 존재임을 천명하는 행위였고, 중국 연호를 쓰면 제후국의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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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는 한 무제 때부터 썼다고 알려진다. 한국사에서는 사대 관념 아래 중국 연호가 널리 쓰였으나 독자 연호의 사례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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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영락'을 썼다. 신라는 법흥왕 때(536) '건원'을 시작으로 '개국', '건복', '인평', '태화'를 쓰다가 진덕여왕 때(650) 당의 연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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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 때(822)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은 '장안'이라는 국호에 '경운'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후삼국의 궁예는 '마진', '태봉'이라는 국호와 함께 '무태', '성책' 같은 연호를 썼고, 고려 태조와 광종도 '천수', '광덕'을 썼다.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라는 국호에 '천개'라는 연호를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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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사대를 대외관계의 원칙으로 삼았기에 '명'과 '청'의 연호를 썼다. 한말에 이르러 자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자각되면서 '개국기원'(1894), '건양'(1896), '광무'(1897), '융희'(1907) 같은 독자 연호가 등장했다. 이들은 왕조의 독자성을 밝힌 것이지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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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차원의 정체성을 담아 등장한 연호가 '단기'다.
'단군개국 O년' 식의 기년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1905년 무렵이다. '황성신문'은 1905년 4월부터 '단군개국' 기년을 '기자원년', '대한개국', '광무', 서기, 음력, 일본과 중국의 연호와 나란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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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와 '만세보', '경남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등 국내외 신문이 뒤를 따랐다. 단기만으로 연대를 적는 방식은 그 뒤 차츰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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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사용의 당위를 주창한 대표 인물이 대종교인 단재 신채호다. 그는 한말의 논설에서 조선의 역사가 단군에서 시작되었음을 짚고, 건국 시조 단군을 기원으로 삼으면 '동조동족'의 관념이 생겨 애국심을 일깨우는 데 유익하다고 썼다. 그의 애국계몽운동과 역사 연구는 민족의식을 깨워 국권을 되찾는 데 목적이 있었고, 단기 주장은 그 문제의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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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는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 뒤 왕실의 '융희' 연호를 대신하며 빠르게 퍼졌다. 삼일운동 무렵 발표된 독립선언서들은 대개 발표일을 단기로 적었다. 선언서들이 궐기의 주체를 '반만년 역사'의 '단군배달겨레'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기를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으로 여기고, 거사의 의미도 반만년 민족사 안에서 찾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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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의 확산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계급주의적 세계관의 확대로 한때 제약을 받았다. 일제가 패망하자 단기는 곧바로 전면에 되살아났다. 해방 후 복간된 신문과 잡지가 대거 단기로 발간일을 표기했고, 미군정 아래에서는 호적을 단기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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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는 헌법 전문 말미에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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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는 개원 때부터 단기를 썼으나 이승만 정부는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한 '대한민국 30년'을 썼고, 당시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서기를 썼다. 연호를 통일할 필요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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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논쟁은 '단기'와 '대한민국' 둘 사이에서 벌어졌다. 1948년 9월 8일 본회의 표결에서 '대한민국' 연호는 재석 121인 중 찬성 33인, 반대 87인으로 부결됐고, '단기'는 찬성 89인, 반대 26인으로 가결됐다.
이어 열린 본회의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는 '연호에 관한 법률'이 재석 133인 중 찬성 106인, 반대 5인으로 통과되어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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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산정은 서기 연도에 2333년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단군의 건국 시기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요임금과 같은 때 즉위했다는 '여고동시'가 있고, 요임금 25년 무진년이라는 '당요25년무진'이 있다. 요임금 때 무진년이라고만 적은 '당요무진세'와 요임금 50년 경인년이라는 기록도 전한다.
단군 전승이 다양했고, 기준으로 삼은 요임금 즉위년에 대한 이론이 서로 달랐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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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연호는 공용연호가 된 지 13년 만에 폐지됐다. 5·16을 주도한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12월 2일 서기를 공용연호로 하는 새 법률을 제정했고,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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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이유서는 세 가지를 들었다. (1) 대내문서는 단기, 대외문서는 서기를 써 통일이 안 되고, (2) 환산에 낭비와 혼란이 따르며, (3) 대외적으로 국수주의적이고 국제협력에 등한한 인상을 주기 쉽다는 것이다.
군사정부가 연호 변경을 서두른 배경은 분명히 밝혀진 바 없다. 쿠데타 세력이 '조국근대화'를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최우선 구호로 내걸고, 반공·친미·친서방 노선에서 대외적 지지기반을 얻으려 한 사정과 관련지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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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의지를 과시하고 미국과 서방에 정권의 성향을 확인시키려는 정책적 고려가 연호 변경으로 이어졌다고 볼 만하다.
이 결정은 여론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 군부가 삼권을 장악한 억압 상황이었기에 반대나 저항은 별로 없었다. 일부 신문이 연호 문제를 경박하게 처리했다고 비판했지만 물리력을 쥔 군사정부의 조치를 되돌리기에는 힘이 없었다.
단기 부활을 촉구하는 시민운동 차원의 요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나 서기를 다시 단기로 바꾸는 계기는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