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싸울 때는 적병의 사기를 꺾고, 적장의 심지를 뒤흔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심리전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례로 초한전 때 항우가 결정적으로 패하게 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일화를 들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항우가
일개 건달 출신의 유방에게 패하게 된 이유는 매우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그의 얇은 귀를 들 수 있다.
진평(陳平)의 반간계에 넘어가
최고의 책사인 범증(范曾)을 내쳤던 것이 그렇다.
범증을 내친 뒤
그는 줄곧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원전 203년 8월,
궁지에 몰린 항우는
유방과 함께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가질 생각으로 이내 맹약을 맺었다.
회하 상류에서 황하로 연결된 운하인 홍구(鴻溝)를 기준으로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에 귀속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초하한계(楚河漢界)로 부른다.
춘추전국시대 이래의 역사전개 과정을 보면
남방문화의 상징은 초나라 문화다.
특이하게도
초한전 당시 서로 맞붙었던 유방과 항우 모두 초나라 출신이다.
그러나 유방의 군사는 북방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면초가 고사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홍구의 강화가 성립될 당시
항우는 억류하고 있던
유방의 부친 태공과 부인 여후를 돌려보낸 후
동쪽 팽성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유방도 서쪽 관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장량과 진평이 만류했다.
“한나라가 천하의 반을 차지하자 제후 모두 귀부했습니다.
지금 저들을 풀어준 채 공격하지 않으면
이는 호랑이를 길러 근심거리를 남기는 것입니다.”
유방이 두사람의 의견에 따라
제나라 왕 한신(韓信)과 위나라 상국 팽월(彭越)에게 사자를 보내
초나라를 함께 칠 것을 다짐했다.
이해 10월,
유방의 군사는 홀로 항우의 군사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낙담한 유방이
장량에게 한신과 팽월이 명을 따르지 않은 이유를 묻자
장량이 대답했다.
“한신이 제나라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결코 대왕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팽월 또한 위나라 땅을 평정한 공으로 상국이 되었으나
위왕이 죽고 없는 마당에 아직까지 위왕이 되지 못했으니
그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합니다.
속히 땅을 떼어주어 그들을 다독이십시오.
그 후 두 사람에게 초나라와 싸우게 하면
초나라는 쉽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유방이 장량의 계책을 좇았다.
이해 12월,
항우는 한나라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 동남쪽의 12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인
해하(垓下)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항우는
군사는 적고 식량도 다한 까닭에
이내 영루 안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유방을 중심으로 제후들의 군사가 속속 도착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하루는 밤중에
문득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인 초가(楚歌)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사기》 〈항우본기〉는
항우가 사면초가를 듣고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이같이 탄식했다고 기록해놓았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 땅을 이미 모두 점거했단 말인가?
어찌해 한나라 군사 속에 초나라 지역 사람들이 저토록 많단 말인가!”
〈항우본기〉는
항우의 부인 우미인(虞美人)을 끌어들여
당시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놓았다.
미인은 후궁의 서열에서 부인(夫人) 다음으로 높다.
후대의 비빈(妃嬪)에 해당한다.
사면초가에 잠이 깬 항우는
울적한 마음에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며 슬프게 읊조렸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나 [力拔山兮氣蓋世]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馬 또한 내닫지 않네. [時不利兮騅不逝]
오추馬가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騅不逝兮可柰何]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虞兮虞兮柰若何]
후대에 널리 애송된 이른바 〈해하가(垓下歌)〉다.
〈항우본기〉에 따르면
항우는 비통함을 참지 못해
이내 우미인의 목을 친 뒤
애마에 올라타 휘하 기병 800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당제국 때의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의 3대 주석서 가운데 하나인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펴내면서
지금은 사라진 《초한춘추(楚漢春秋)》를 인용해
우미인이 죽기 직전에 화답했다는 이른바 〈화해하가(和垓下歌)〉를 실어놓았다.
한나라 군사가 이미 초 땅을 차지했으니 [漢兵已略地]
사방이 항복한 초나라 병사 노래뿐이네 [四方楚歌聲]
대왕의 뜻과 기개가 이미 소진되었으니 [大王意氣盡]
소첩은 장차 어찌 홀로 살아갈 수 있으리 [賤妾何聊生]
《초한춘추》는
유방의 책사인 육가(陸賈)가 지은 사서로
유방을 미화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화해하가〉는 말할 것도 없고 〈해하가〉도
후세의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
《자치통감》은 〈해하가〉와 관련한 일화를 모두 빼버렸다.
당시 항우가
한밤중에 은밀히 도주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나라 군사들은 날이 밝은 뒤 이 사실을 눈치챘다.
유방이 곧 휘하장수에게 명해 5,000기를 이끌고 급히 그 뒤를 쫓게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너려 할 때
뒤따르는 자는 겨우 100여 기에 불과했다.
안휘성 정원현 서북쪽인 음릉(陰陵) 땅에 이르러
길을 잃게 된 항후 일행이
농부에게 길을 묻자 농부가 길을 속여 반대로 말했다.
“왼쪽이오.”
그들은 이내 큰 늪 지역에 빠지고 말았다.
간신히 늪에서 빠져나온 항우는
추격 거리가 좁혀지자
안휘성 화현 동북쪽 오강포인 오강(烏江) 쪽으로 갔다.
이때 배를 놓고 기다리던 오강의 정장(亭長)이 항우에게 말했다.
“강동은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으로 1,000리나 되고 수십만 명의 무리가 있으니
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은 속히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은 여기에 臣만이 배를 갖고 있어
한나라 군사들이 이를지라도 결코 도강할 수 없습니다.”
항우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는데 내가 강을 건너 무엇을 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강동의 자제 8,000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가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들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령 그들이 말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어찌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말하면서 타고 있던 애마인 추를 정장에게 내준 뒤
추격해온 한나라 기병들과 싸웠다.
이때 한나라의 기병사마(騎兵司馬) 여마동(呂馬童)이
눈에 띄자 항우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옛 친구가 아닌가?”
여마동이 손가락으로 항우를 가리키며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이 사람이 항우다!”
항우가 큰소리로 말했다.
“듣건대 한나라에서 나의 수급을 1,000금과 성읍 1만 호에 산다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해 덕을 베풀겠다!”
그러고는 스스로 들고 있던 칼로 목을 찔렀다.
한나라 기병들이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
〈항우본기〉는
여마동과 왕예 등 5명이 그의 시신을 한쪽씩 나누어 가진 덕분에 열후에 봉해지고
항우의 식읍을 5개로 나누어 가졌다고 기록해놓았다.
병법의 관점에서 보면
항우는 〈군쟁〉에서 역설한 심리전의 전형적인 희생양에 해당한다.
그가 사면초가에 휘둘렸던 것은
그의 명예욕이 과도할 정도로 컸음을 뜻한다.
명예욕이 큰 사람은 작은 모욕에도 견디지 못하고 이성을 잃기 십상이다.
이성을 잃으면 판단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면 적의 암수에 걸려들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 死地(사지)로 들어가게 된다.
항우가 해하에서 패한 뒤
마침내 오강에서 자진하는 과정이 그렇다.
삼국시대의 원소도 항우의 전철을 밟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지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공략당해 투지를 잃게 되면
이내 사면초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