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차차! 빠지고 싶은 계곡의 위험한 유혹
산의 땅이다. 75번 도로를 따라 들어갈수록 산의 기운이 선명해진다. 산보다 벽에 가까운 힘센 덩치들이 양편으로 늘어섰다. 숨통을 죄어오듯 협곡은 더 가팔라지고 빛도 산에 막혀 들지 못한다. 사람을 압도하는 산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가평군 북면은 경기도답지 않은 오지스러움과 거친 자연의 향이 풍기는 곳이다.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화악산(1,468m)과 명지산(1,257m), 국망봉(1,168m)이 모두 북면에 있으니 경기도의 고산지대라 할 만하다. 북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단 하나 75번 국도인데 이 길을 따라 들어가도 화악산이나 명지산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 곁의 산등성이가 벽처럼 가파르고 높아 먼발치에서 산의 원경을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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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를 날려버리는 명지폭포의 차가움을 즐기는 멋진 콧수염의 박재석씨와 미모의 등산인 신앵숙ㆍ조선미씨.
근교산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여기 북면에 데려와 산을 타게 해보라. 산을 우습게 보는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게다. 2003년 국망봉에서 일가족 4명이 조난사한 예처럼 한겨울 이곳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여느 벽보다 더 거칠고 춥고 위험한 ‘북벽’ 같은 곳이 이곳 ‘북면’이다. 달리 얘기하면 보존이 잘돼 있어 원초적인 초록의 향으로 가득 찬 곳이다.
명지산 주차장에 선 이는 본지 애독자 조선미(41)씨와 프리랜서 디자이너 박재석(47)씨, 회사에서 인사·회계 일을 하는 안성헌(36)씨, 초콜릿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쇼콜라티에 신앵숙(41)씨다.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라며 아침부터 뙤약볕이 으름장을 놓는다.
산으로 드는 관문 승천사엔 최근 세운 걸로 보이는 미륵불상과 꼬리 치며 반기는 순한 개가 있다. 10m 정도 돼 보이는 커다란 불상은 머리가 큰 가분수다. 입술만 붉게 칠해 루즈를 바른 듯하다. 절은 작고 예스런 분위기인 반면 미륵불만 새하얀 돌로 거대하게 솟아 조화로운 분위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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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고 넉넉한 터의 명지계곡.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답게 골은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계곡 옆으로 난 비포장길, 숲이 그늘을 내어줘 시작이 순조롭다. 길은 계곡 곁으로 점점 다가선다. 아리따운 풍경이 나올 때마다 참지 못하고 등산로를 살짝 벗어나 계곡으로 들어가 본다. 때 묻지 않은 명지계곡의 순수한 매력에 사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맴돈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히 흐르는 물살은 숲과 어울려 조화롭고 너그럽다. 언젠가 등산복이 아닌 촉감 좋은 순면티를 입고 와서, 돗자리 펴고 앉아 느리게 여름을 흘려보내고 싶은 충동의 터가 널렸다.
협곡 속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하지만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바위를 조심스레 디뎌 협곡 안으로 들어서니 바위에 둘러싸인 명지폭포다. 안내판에는 7~8m라 적혀 있었으나 4~5m쯤으로 평범하다. 눈길이 가는 곳은 폭포가 아니라 그 아래의 시커먼 물웅덩이, 분위기가 묘하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계단을 2~3분 정도 내려와 맞는 협곡, 그 안쪽의 은밀하게 숨겨진 한기가 감도는 폭포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도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웅덩이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간다. 시원한 바람과 물보라 탓인지 검은 물의 낯빛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공포와 확 뛰어들고픈 충동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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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명지계곡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길. 1,267m로 높은 산이지만 완만한 구간이 길어 초보산객들도 많이 찾는다. / 우)명지산 정상은 숲 속 분지 속에 솟은 바위다. <보물찾기 사고 155페이지 참조. 위치 ID: GK007A#보물찾기>
이후에도 계곡은 부드러운 물살과 너른 바위를 내어주며 산꾼의 발걸음을 계속 유혹한다. 나뭇잎을 투영한 초록빛 햇살이 물 위를 찰랑거릴 때의 빛깔이 아름답다. 은은한 아름다움과 기품을 잃지 않는 값비싼 산수화에 취해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화채바위 갈림길을 지나 계곡을 고수해 직진한다. 물소리가 뜸해진다 싶더니 가팔라온다. 정상을 1km 정도 남겨둔 곳에 본격적으로 숨 넘어가게 할 계단이 어려운 숙제마냥 나타난다. 자기 걸음에 맞춰 오던 일행이 한자리에 모인다. 베테랑 산꾼들이 아니기에 벌써 통증을 느끼는 이도 있다. 날이 더워 힘들 테니 먼저 내려가서 쉬는 게 어떠냐고 권해도 다들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는 없다. 그 대가로 쉼터 없는 좁은 오르막이 삼킬 듯 밀려온다. 걸음의 리듬과 호흡에 신경 쓰며 끈질기게 오르막을 삼키고 또 삼킨다.
정상은 조금 맥 빠지게 둥그스름한 숲 속이다. 정확히 어느 지점이 정상일까 살피는데 바위가 눈에 띈다. 몇 발짝 올라서자 갑자기 뻥 트이며 근방의 산들이 모두 우릴 쳐다본다. 표지석 위에서 아껴먹듯 조금씩 꼭대기의 풍경을 누린다. 온통 산이다. 거대한 녹색 왕국의 한가운데다. 산등성이가 흘러가는 결은 무척 부드럽다. 결 속을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같은 듯 다른 빛깔임을 알 수 있다. 신록인 탓에 형광색을 띤 초록이 곳곳에서 똑똑하게 반짝인다. 동쪽으로 화악산의 거대한 덩치가 눈에 든다. 남으로는 가야 할 2봉과 3봉 줄기가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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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압도적인 장관으로 정점의 감동을 주는 명지3봉 꼭대기. <보물찾기 사고 155페이지 참조. 위치 ID: GK007B#보물찾기>
아기 잡아먹은 어미의 고개 숲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서둘러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길이 양 갈래로 나 있어 명지2봉을 지나칠 뻔했다. 바위가 있으나 터가 좁고 나무가 높아 조망은 별로인 2봉이다. 표지석이 덩그러니 초라한 공간을 지키며 봉우리임을 알려준다. 별 기대 없이 오른 3봉의, 지나칠까 하다 오른 바위는 지금껏 만난 꼭대기와 스케일이 다르다. 반반한 마당바위는 아니지만 너른 백색의 바위라 경치가 시원하게 드러난다.
명지3봉은 제일 막내 봉우리지만 풍경은 가장 압도적이다. 백둔계곡이 푹 파인 게 드러나고 연인산 줄기가 사방으로 풀어헤친 마루금이 속속들이 보인다. 체증을 후련히 가시게 하는 파노라마가 산행의 클라이맥스를 완성하며 정점의 감동을 준다.
3봉 이후로는 산행 스토리가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린다. 가파르지만 부드러운 육산의 내리막. 산불방화선 탓에 능선 가운데엔 나무가 없어 능선이 휘어지는 끝까지 시선이 가 닿는다. 푹신푹신한 흙길을 비탈에 떠밀려 걷듯 뛰듯 내려선다. 시간은 저녁을 향해 가지만 힘센 여름햇살은 여전히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옆으로 누워 비춘다. 나무 틈새로 흩어진 햇살의 조각이 흩날린다. 숲을 지나온 미세한 바람이 매끄러운 살결로 몸을 휘감는다. 감미롭고 시원한 촉감에 순간 황홀해진다. 한바탕 폭풍 같은 산행이 지나면 힘을 뺀 감각은 원초적인 것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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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위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명지계곡. 촬영을 위해 계곡 곁으로 내려왔다. 등산로는 계곡을 옆에 두고 가는 안전한 길이다.
고도를 올리는 건 힘들어도 내리는 건 금방이다. 40분 만에 1,200m대에서 820m 아재비고개다. 고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임신한 여인이 이곳을 넘어가다 출산하게 되었다. 산모는 배고픔의 환각에 앞에 펄펄 뛰는 생선이 있어 잡아먹었다. 정신을 차린 후 자기가 낳은 아기를 먹은 것을 알고 벼랑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골을 따라 내려서는 길, 작은 물줄기가 따라오더니 점점 커지다가 곳곳에 1~2m짜리 폭포를 만들어 놓는다. 명지계곡에 비하면 사람의 발길이 뜸해 길들여지지 않은 계곡이다. 널찍한 암반이나 터는 드물지만 자연 그대로의 시원함이 배어 있다.
임도가 가까워 오자 계곡 곳곳이 철망이다. 사유지라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두었다. 이 좋은 계곡이 자기 것이라니 부러우나 마음 씀씀이는 부럽지 않다. 백둔계곡의 뿌리계곡인 대골은 맑고 깊게 흘러간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아도 씩씩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저녁 산을 물과 함께 빠져나온다.
[ 명지산 계곡산행 왜 명품 등산로인가? ]
“명지계곡은 놀기 좋고 예쁜 계곡”
“명지산이 여름에 좋은 건 계곡물이 워낙 깨끗하고 좋아서예요.”
적설량이 많아 겨울 눈꽃 산행지로 잘 알려진 명지산이지만, 가평 토박이이자 군청 산림공원과에서 등산로를 담당하고 있는 성근영(55)씨는 여름 산행지로도 좋다고 추천한다. 특히 보존이 잘된 자연 그대로의 계곡은 한여름 산행에 제격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여름 산행에 제일 좋은 코스는… 명지계곡으로 해서 정상을 올라 아재비고개까지 능선 타고 가서 백둔리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아닌가 싶어요.”
가평에서도 손꼽히는 계곡인 명지계곡과 백둔계곡 모두를 하루에 즐길 수 있으니 명품코스로 꼽는 것이다. 다만 산행 거리가 13km에 이르므로 능숙한 산꾼의 하루 풀코스다.
“명지계곡은 고찰인 승천사가 있고 명지폭포가 있어 볼거리가 많고요, 능선에는 천연림이 장관을 이룹니다. 백둔계곡은 보존이 잘돼 있어 원시림 느낌이 나고 캠프장이 있어 야영도 가능합니다.”
두 군데 계곡 중 더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익근리 명지계곡”을 꼽는다. “더 놀기 좋고 계곡이 예쁘다”고 한다.
[ 산행 길잡이 ]
고도 800m 이후 오르막부터 숨넘어가는 진짜 산행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거대한 육산
들머리인 명지산 주차장의 해발고도는 170m, 정상은 1,257m다. 즉 1,087m의 고도를 높여야 정상에 닿는다. 지리산 천왕봉 들머리인 백무동이나 중산리의 고도가 500~600m인 걸 감안하면 명지산 산행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럼에도 초보자들도 명지산을 많이 찾는 건 계곡을 타고 오를 경우 완만해 해발고도 800m 정도까지는 수월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6km 정도는 수월하게 가지만 계단이 늘어선 고도 870m 지점부터는 가파른 오름이다. 여기서 1km만 오르면 정상이니 1km 사이에 고도 380m 정도를 올려야 한다.
정상부는 펑퍼짐한 숲 속이라 대번에 알아보기 어렵다. 다만 숲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곳이 정상 역할을 한다. 바위에는 표지석이 있고 조망이 트인다.
백둔계곡은 정상에서 다시 봉우리 두 개를 더 넘어 6km를 가야 하므로 시간이 3시간 이상 걸린다. 일행의 컨디션을 감안해 화채바위로 해서 다시 명지계곡으로 하산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이후 능선길은 오르내림이 적고 명지3봉 이후로는 내리막길만 계속 이어지므로 거리에 비해 힘들진 않은 편이다. 백둔리와 익근리를 오가는 버스는 없으므로 차량 두 대로 한 대는 날머리에 미리 세워두는 게 좋다.
백둔리 버스 종점에 차를 세울 공간이 있다. 백둔리에서 시작할 경우 고도 420m 지점에서 시작하고 주능선까지 거리가 짧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아재비고개에서 명지3봉까지 가파른 오르막이므로 어딜 들머리로 잡든 난이도는 비슷하다.
계곡에는 바위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육산이라 길은 편안하다. 이정표가 잘돼 있어 길찾기는 수월하며 정상에서 명지2봉으로 갈 경우 올라왔던 계단으로 다시 내려가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가야 한다. 명지3봉 아래의 갈림길에서도 귀목고개 쪽이 아닌 남쪽 아재비고개로 가야 한다. 오레곤 300GPS로 확인한 실주행거리는 13.2km, 8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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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지폭포<보물찾기 사고 155페이지 참조. 위치 ID: GK0079#보물찾기>
교통 명지산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가평을 거쳐 갈아타고 가야 한다. 동서울터미널→가평행 버스 06:20~22:05, 30분 간격 운행. 요금 6,100원. 1시간10분 소요.
가평터미널→백둔리행 버스 1일 5회(06:20, 09:35, 13:40, 17:20, 19:30) 운행하며 익근리를 경유하는 용수동행 버스 역시 1일 5회(09:00, 11:00, 15:00, 16:40, 19:20) 운행.
숙식 (지역번호 031) 백둔계곡에 연인산다목적캠핑장(582-5701)이 있다. 오토캠핑장은 데크당 10,000원, 휴양림 캐빈은 15만~20만원이다. 오토캠핑장은 땡볕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단점이지만 최신 시설이다. 백둔리에는 이 밖에도 초원의집민박식당(582-8492), 솔낭구펜션(582-6317), 약수터민박(582-0661) 등이 있다. 익근리에는 명지산아래촌민박식당(582-0506), 금자네식당민박(582-5574), 안성집식당민박(582-9612) 등이 있으며, 익근리에서 76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2km 더 가면 휴림오토캠핑장(581-0190)이 있다. 나무 그늘이고 시설도 좋은 편이지만 1박에 30,000원이다.
볼거리 명지폭포 명지산 익근리 명지계곡의 폭포로 주차장에서 3.4km 지점에 있다. 등산로에서 100m 정도 내려선 계곡 협곡에 있으며 폭포 높이는 5m 정도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깊은 소를 가지고 있으며 한여름에도 폭포 앞에 서면 서늘한 폭포의 물보라와 바람을 맛볼 수 있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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