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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의 샘터 스크랩 땅에 쓰신 글씨/마이클 카드 지음
김박사 추천 0 조회 29 08.05.08 13: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땅에 쓰신 글씨/마이클 카드 지음

땅에 쓰신 글씨

마이클 카드 지음/황병구 옮김

IVP/2003년 10월/184쪽/8,000원

저 자 마이클 카드

'엘 샤다이', '임마누엘' 같은 곡들을 쓴 작곡가이자 가수. 1981년 'First Light'로 데뷔한 이후 'Scribbling in the Sand'를 비롯, 스무 장 이상의 앨범을 제작했다. 1983년 '엘 샤다이'로 Dove Award '올해의 작곡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그는 또한 오래 전부터 여러 권의 책을 쓰고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A Fragile Stone』『The Parable of Joy』등이 있다. 그 중 어린이를 위한 책인 『Sleep Sound in Jesus』도 있다. 국내에는 『다시, 십자가』가 출간되어 있다. 문학 분야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 중이며, 젊은 예술인들의 스승으로서 대학에서 '창조적 과정'에 대한 강의를 하는 한편, 기독교 음반 제작사들이 더 깊은 제자도를 함양할 수 있도록 도전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부인과 네 자녀와 함께 현재 미국 테네시 주에 살고 있다.

▣ 역 자 황병구

작곡가 겸 연출가로, 서울대학교 제어계측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죠이선교회와 서울대 기독인 연합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겼고, 기독노래운동 ‘뜨인돌’ 창단 후 대표로 활동하였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현재는 미국 페퍼다인(Pepperdine)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 중에 있다. 역서로는 『산상수훈』『단기선교핸드북』 등이 있으며, 찬양집 『많은 물소리』(죠이선교회)의 편집인이다.

Short Summary

그리스도가 우리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 천상의 존재인 창조주가 땅의 존재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창작이라는 우리의 인간적 노력과 결합될 때 그 행위는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의사 소통의 형태를 빚어낸다. 수세기에 걸쳐 예술가들은 창작을 통해 초월적인 경지로 들어가려 했다. 논의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예술 언어는 믿음에서 탄생한 언어이다 다시 말해, 모든 예술 형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화가 조엘 쉬즐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정의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 신약 성경의 정의와 무척 유사하다고 본다.” 특히 우리가 구원받은 시각을 가지고 임할 때 예술은 글과 그림과 기타 재료들을 사용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예술의 내용과 형식으로 바꾸는 신앙 행위가 된다.

마이클 카드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음악과 글은 복음의 소중한 비밀을 우리의 영혼에 속삭인다. 음악가로서의 기량, 그리고 그 사고의 깊이로 인해 그의 표현은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황홀한 경지에 이르며, 놀라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혜의 음성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의 글은 한 올 한 올 정성껏 엮여 창조성이라는 직물을 짜내고 있다. 또한 자신의 주위에도 창조적인 공동체가 생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몸부림이 드러나 있다. 그의 지혜는 전통적인 신앙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과 우리가 교회에서 직면하는 도전들에 대처할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차 례

서문

감사의 글

흙 위에 끄적이신 말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창조로의 부르심

새 노래로 노래하기

창조적 상상력의 회복

그리스도를 향한 새 노래

창조성의 특징

귀기울이는 삶의 양식

부르심은 공동체를 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창조성의 가장 위대한 표현

부록 : 창조성 키우기

참고 문헌

땅에 쓰신 글씨

마이클 카드 지음/황병구 옮김

IVP/2003년 10월/184쪽/8,000원

흙 위에 끄적이신 말씀

지금껏 우리는 예수님이 흙 위에 무슨 말씀을 두 번씩이나 끄적이셨는지에 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대체로 주석서들도 오랜 세월동안 빗나간 질문만 해 왔다. 무슨 말씀을 쓰셨을지 그 내용만을 계속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왜 그러셨는지를 질문해야 했음에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무얼 쓰셨을까만을 질문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끄적이신 내용이 아니라 끄적이신 이유였다. 뜻밖의 행동이었다. 모두를 초조하게 했다. 그분만의 창조적 방식이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화가 난 만큼 예수님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여인을 성전 뜰로 끌고 와서는 영광스런 가르침을 전하기에 한창이셨던 예수님을 가로막았다. 그 장면은 당신도 알 것이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짐짓 예수님을 존경하는 양 바리새인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다무셨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대신 몸을 굽혀 성전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써내려’(kata - 아래로, graphein - 쓰다) 가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의미심장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질문을 던지며 재촉하고 나섰다. 마침내 예수님이 숙연한 침묵을 깨셨다. 그분은 끄적이신 말씀을 놓아두신 채 똑바로 일어서서 그분의 생애를 온전히 구체화하는 지혜와 긍휼이 농축된 단순한 여덟 단어의 말씀을 던지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고 나서 다시 흙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셨다.

그날 아침 예수님은 시간 가운데 여백을 창조해내신 것이다. 끄적이신 글의 형태나 심지어 내용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한 순간에 소란이 멈추고 새로운 곳에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이 단지 현존하는 세상만이 아님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케 되었다. 이 또한 분명 예술이다. 우리가 창조하고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시간 속 여백이 활짝 열릴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림은 이 혼탁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될 수 있다. 음악은 이 지친 인류의 귀가 오래도록 듣기를 갈망했던 그분의 음성을 표현하는 장엄한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고 들음을 통해 산출되는 예술인 것이다.

이 책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종합해 놓은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쓸 때 내 바람이 그것이었다. 나는 창조성과 상상력에 대한 문헌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난 그들이 기울인 창조적인 노력 하나 하나에 내내 감사의 마음이 넘쳤다. 난 그들의 주요한 논지들을 종합해 내 자신만의 웅장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일종의 ‘방법론’이나 ‘창조성을 고무해주는’ 류의 책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일반 서적 중에 많으나, 테크닉적인 면만 가득할 뿐 일부 유용한 논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자들의 시간만 빼앗고 있다. 하지만 특별히 나라고 해서 이 신비한 과정을 단번에 몇 가지 단계로 응축해 낼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창조성의 진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존재하지만, 그 깊이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다.

내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비전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통로로서 창조적인 과정, 바로 그 창조 과정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비전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창조성과 더불어 창조적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 초대교회의 찬송시(빌 2:6~11)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성이 육신을 입고 구현된 형상이 어떤 것인지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발견된 개념들을 여러분의 삶과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경건 생활과 신앙 공동체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창 위에 낀 성에 각양 무늬들로 창틀을 채우네. 움직임으로 간직되고 타오름으로 얼어붙네. 그 무늬들 안에 그분의 이름이 있는가? 우리는 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가?”

- 짐 크로거트(Jim Croegaert)의 노랫말 중에서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반응

어젯밤 하늘에서 우주쇼가 펼쳐졌다. 큰아들 윌과 나는 몇 시간 안에 개기월식이 진행된다는 것을 천문력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진짜로 몇 시간 뒤 지구의 그림자가 마마 자국을 한 달을 뒤덮기 시작했고, 그 질투 가득한 얼굴은 이내 검붉게 변했다. 게다가 달 바로 아래에서는 화성이 특유의 붉은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는 대미를 장식하듯 유성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반짝이는 꼬리를 남기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윌은 이런 우주쇼를 볼 때마다 “와, 하나님 감사해요!”라고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곤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뭔가를 애써 갈망하는데, 이 위엄있는 아름다움 앞에서도 그 갈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그 이상의 것이다. 이는 동시에 사랑과 용납을 향한 갈망이자,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임을 깨닫게 된다. ‘그분은 아름다우신 분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이유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런 각별한 방식으로 깨달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하는 일이 드물고, 더군다나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데는 더 인색하다. 신학이 이를 개략적으로나마 다루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엄연히 성경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시종일관 자신이 아름다우신 존재이며 그로 인해 찬양받으셔야 함을 알리셨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 그분의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다. 그 반응이 진정한 예배이며, 예술인 것이다. 이는 빌 레인이 내게 여러 해 전에 말해 주었던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연애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아내 수잔을 처음 보았을 때,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반응하길 원했다. 감성적인 면, 영적인 면, 관계적인 면, 특별히 육체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나는 반응했다. 바로 이것이 예배다. 예배가 본질상 하나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창조성은 예배이다. 그러기에 노래하고 글을 쓴다. 그러고는 음악을 사용해서, 침묵으로, 사랑하면서, 감사 가운데 섬김의 도구인 대야와 수건을 들고 반응한다. 이것이 내가 진정 사모하는 분을 향한 낭만적인 반응이다.

창조로의 부르심

하나님이 자기 앞에 늘어 세운 수천 종류의 동물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줄 줄 알았건만, 정작 아담은 뼈에 사무치는 자기 아픔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후에 그는 이 아픔을 외로움이라 불렀으리라. 그러나 외로움의 이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외롭다는 느낌을 이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녀만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외로움이라는 공간을 미리 아담 안에 창조하셔야 했을 것이다. 비로소 하와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으로 아담은 인류 최초의 노래를 불렀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아담의 이 첫 노래는 하와를 향한 찬사이자 위로였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이며 또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이후의 모든 예술이 추구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최초의 부부이자 최초의 창조 공동체로서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 앞에 서서, 창조하라는 명령을 부여받는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은 낭만적인 응답자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맥없는 모방의 목소리로 답하지 않고(진정한 창조는 결코 모방일 수 없다), 찬양으로 고동치는 심장으로 화답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명령의 본질은 바로 예배로의 부르심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창조적 행위의 기록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한 방향이든 아니든 이후로도 계속 창조의 충동에 사로잡힌 인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노아만큼 팔과 허리에 큰 통증을 느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와 그 아들들이 비웃음거리였던 방주를 지으면서 수십 년 동안 받았던 만큼이나 많은 조롱을 받아 본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노아는 그때까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을 대비해 엄청나고도 기이한 형태의 구조물을 지어 나갔다. 창세기 2:5~6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홍수는커녕 가랑비 한 번 내린 적이 없었다. 창조적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노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순종이라는 개념이 창조적 명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6:22을 통해 노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준행했음을 알 수 있다. 노아의 능력이나 상상력, 그가 가진 상식과 자원을 뛰어넘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 구원의 방주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노아의 순종과 만났을 때, 그 결과는 구원으로 드러났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값비싼 순종을 필요로 한다.

홍수가 지나간 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향해 새로운 창조 명령을 내리신다. 그들은 창조적인 반응으로 포도밭을 경작했으나 끝내는 파국을 가져오게 된다. 창조성을 남용한 것이다! 새 포도밭의 풍성한 수확 덕택에 노아는 만취 상태가 되었다. 어쩌면 방주를 짓는 것으로 그의 순종은 ‘완료되었다’고 잘못 추측했을 수도 있다. 아마 지나친 자축이 하나님을 잊게 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1장에서 우리는 창조의 충동에 대한 또 다른 예, 바벨탑 사건에서도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창조에 대한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창조적인 공동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이다. 다만 이 공동체에 속한 일단의 사람들은 순종이 동기가 되어 움직인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이기적인 야망에 의해 행동하였다. 바벨탑은 그들 스스로 생각해 낸 것 같다. 그 동기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반응하거나 그분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파국이었다. 인류는 나누이고 흩어졌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처음 만나는 하나님은 가까이 가기 두려운 우주의 입법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예술가이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마치 화가나 조각가처럼 매일 저녁 ‘창조’라는 캔버스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 그분의 작업을 감상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 한마디로 “좋군!”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형상을 우리 삶의 구조 속에 엮어 놓으셨다. 우리 한계를 넘어서며 때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창조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정이 이로써 설명된다. 하나님은 시간 가운데 여백을 창조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우러르며 그분을 경배하도록 하는 여백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분의 아름다움에 창조적인 예배로 응답할 수 있는 부르심을 허락하시되, 이 부르심은 순종과 불순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응답은 바벨탑을 쌓은 이들처럼 우리 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보여주고 있다.

창조적 상상력의 회복

분명 우리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창조적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첫 기억은 아기 침대에 누워서 모빌 연의 꼬리를 잡아당겨 얼굴에 부벼 대던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방법을 연구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다양한 비행용 기구와 낙하 기구들은 물론 그의 놀라운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 연구는 매우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전에, 또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우리는 먼저 쓰거나 읽는 상상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아무도 자신이 상상해 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냉수 한 잔 들이키는 것을 상상하고 바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무언가 할 일을 상상하고 나면 0.1초 후가 되든 10년 후가 되든 간에 그 일을 한다. 상상력은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생활의 전 영역에 담겨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상상력의 덩어리이다.

상상력은 마음과 생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둘을 통합하며 우리로 하여금 감성적인 마음을 사용해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지적인 생각을 사용해서 느끼며 감정을 나타내게 한다. 이것은 진리로 이끌어주는 매체이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상징과 비유와 이야기와 역설을 사용해서 우리를 상호 작용 가운데로 이끌어 준다. 상상력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는 데 그토록 열심을 보이시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시각으로 상상력을 이해해야 한다.

상상력의 위력을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를 몹시도 괴롭히는 죄들이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탐욕은 내가 이웃의 물건을 훔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내 것이라고 상상할 때부터 생긴다. 세상 죄악의 창조자인 사단은 이 상상력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역시 음악과 은유와 영상을 자신의 음흉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시려 두루 찾으시는 것만큼 사단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사로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창조적이 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상상력에 대해 실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상상력은 가장 강력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론 동시에 두 가지 모두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 더 나아가 이 상상력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은 아직까지 충분히 논의되거나 기도 제목이 된다거나 실행에 옮겨진 적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구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려면 먼저 상상력을 회개시켜야만 한다. 또한 예언서들을 통해 우리는 장차 그분의 아들을 통해 완성될 사역을 행하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행하기를 지금도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분이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제단 불꽃 위에 올려놓으신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걸림돌은 그들의 ‘예언자적 열정’이다. 우리는 소심한 아브라함과 남을 속이기 바빴던 야곱, 심지어 상사병에 시달렸던 솔로몬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사야의 열정이나 예레미야의 상한 심령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아마 가장 난해한 것은 예언자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일 것이다. 복잡한 상징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환상과 이상야릇한 이미지들, 그리고 그들의 노래가 비유하는 바가 다 그렇다. 하나님이 예언서들을 통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예언서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예언자들이 회개치 않는 자들 위에 내릴 하늘의 불을 이야기할 때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나 지켜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그들의 삶을 즉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품기 쉬운, 균형 잃고 건강치 못한 미래 예측에 대한 집착(그래서 예언 중심에 있는 회개와 각성의 부르심을 배제하는 것)은 예언의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우리는 예언의 목적이 ‘앞을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앞서 이야기하는’ 데 있음을 완전히 다시 배워야 한다. 예언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요소는 한 가지 수단일 뿐 그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이렇듯 간단명료한데도 왜 그들은 굳이 돌려서 이야기하며, 그 많은 상징과 신비한 환상은 왜 있는 것인가? 간단히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보이셔서 무릎 꿇게 하거나 불을 내리시는 것이, 그 모든 예언자들의 기괴한 행동과 분노에 찬 소리보다 훨씬 효과적인 듯한데 말이다. 그러나 모세오경에서 보듯이 이 직접적인 계시들조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언서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 모습과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 전부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나서고 계심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단지 마음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생각의 마음’, 즉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의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진정 당신을 이해하기를 간곡히 부탁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핵심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창조성의 특징

겸손 : 감추어짐의 은사

초대교회 성도들은 '카르멘 크리스티‘(Carmen Christi, 라틴어로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를 통해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고 노래했다. 예수님의 겸손만큼 그분의 생애 가운데 확연히 구별되는 성품이 또 있을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실 수 있음에도 예수님은 겸손한 종이 되기를 택하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꾸밈없으며 기적답지 않게 이루어졌는지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이적을 베푸실 때마다 그분에게로 집중되는 관심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돌려 놓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이끌어내셨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그럼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진정한 성경적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직 그분과의 관계만이 진정한 겸손을 가져다줄 수 있다. 중세의 미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은사였고, 그들 자신보다는 그 재능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 자신은 주의 영광을 위해 신성한 과업을 맡게 된, 위대하신 왕의 자녀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이 겸손한 감추어짐이다. 이는 실로 우리의 소유로 보이는 타고난 소질들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또한 그 재능을 부여하신 목적이 우리 스스로 주목받거나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요, 애초에 그 은사를 주신 한 분에게 우리의 할 수 있는 바 최대의 창조적인 노력으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함임을 믿는 것이다.

순종 : 부르심

오래 전 한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응했을 때, 인류는 영적 대전쟁에서 패했다. “당신의 뜻 말고 제 뜻을 이루렵니다.” 한편, 어둠이 깃든 또 다른 동산 겟세마네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 사이에서 씨름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은 그 혈과 육의 전쟁에 들어가시며 핵심적인 말씀을 하신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거둔 승리는 바로 아들의 전적인 순종이었다. 이 ‘전적인 순종’이란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대신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순종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부르심과 비전을 함께 이야기한다. 순종이란 늘 무엇 또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창조적인 과정에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창조 명령은 모든 사람을 향한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은 개인적 차원의 순종을 요구한다. 이는 관계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관계성이야말로 언제나 진정한 창조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이것은 사랑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살핀다면, 이 부르심은 일상적인 사랑의 반응, 즉 개인적 순종을 요구한다. 이는 철저한 부르심이며, 어떻게 해서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순종은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를 향한 노래가 지닌 교차 구조의 중심축에 자리한다. 이 순종이 극적 반전을 가능케 하는 힘을 중간에서 전달한다. 종의 자리를 위대함으로, 겸손을 칭송으로 바꾸어주는 동력도 이 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와 증언 그리고 창조적인 삶에 능력을 공급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동일한 역할을 할 것을 약속한다.

섬김 : 대야와 수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여행길 내내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놓고 논쟁했다.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내기를 무척 바라셨다. 마지막 만찬,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건만, 제자들은 너무나 어이없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기다리실 만큼 기다리신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많이 지치셨고 제자들의 태도로 인해 너무도 슬프셨지만 평정을 잃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이제 말로 가르치기를 내려놓으실 지점에 다다르셨다. 극도의 피로 속에서도 다만 예수님은 할 수 있는 한 제자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긴 겉옷을 벗으시고 베드로가 식탁을 훔치던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동이시고는 말없이 문 쪽으로 가셔서 손을 씻기 위해 준비된 물 한 대야를 가져오셨다. 주님은 다대오부터 시작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오셨다. 그때 베드로는 분노섞인 슬픔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는 논쟁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장 컸었다. “싫습니다.” 베드로가 불평했다. “제 발은 안 돼요. 절대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눈을 똑바로 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우린 아무 상관이 없어지며, 너는 장차 나를 위한 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너는 지금 나의 섬김을 원치 않는구나.” 베드로는 그 순간 무너져 내렸고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깨지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려 오셨던 것이다.

“내가 방금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 중 누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겠느냐?”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과연 언제가 되어야 이해하겠느냐? 너희들은 감히 나를 너희의 주라고 말한다. 그럼 지금 이건 무엇이냐? 너희가 주님이라 부르는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고 너희의 종이 되었다. 그럼 너희는 무엇을 행하여야 하겠느냐?” 그들은 결코 다시는 누가 가장 큰 자인가 논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섬김은 그분의 삶의 방식이자 마음의 소원이셨다. 그러고는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모든 것이 뒤집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참된 위대함은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종으로서 무릎 꿇는 것이다. 예수님을 섬김의 구주로 바라보는 시각이 성경적 가치 체계의 기초를 제공한다.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가치로운가?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베드로처럼 하지 말라. 당신과 내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바 부드럽게 발을 씻기기 원하시는 그분을 거부하지 말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단지 교만이며, 누가 최고인가라는 논쟁으로 당신을 끌어들이는 그런 종류의 교만이다. 먼저 종 되신 주님께 겸손히 순복하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대야와 수건을 집어들 수 없을 것이다.

부르심은 공동체를 향한 것이다

공동체(community : cum - 함께, moenia - 성 쌓기)를 정의하면 방어벽이 있는 장소라는 뜻이다. 우리는 인종 간의 벽이나 남녀 사이의 벽 등 ‘벽을 허무는 것’에 대해 늘상 이야기하며, 분명 이런 장벽들은 무너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보호할 벽, 세속의 어떤 측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벽을 쌓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이자, 스가랴서에 의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창조적 삶의 모범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이 가장 심사숙고하셨던 일 중 하나가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일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 그분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첫째, 신중하게 선택하신 열두 제자가 있었다. 이 그룹은 전위 부대였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권위를 부여받은 이들이었다. 열두 제자들은 바로 이 작은 공동체에서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들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 예수님과의 상호 작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 사이의 부딪힘과 깨짐, 즉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비를 그들 안에서 드러내고, 서로 다가가서 상대방의 신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 공동체라는 환경 속에서 그들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도전을 발견했다.

둘째, 예수님과 ‘대들보’ 같은 세 제자들, 즉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간에는 더욱 친밀한 수준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예수님이 그분의 진정한 성품의 심오한 면들을 드러내 보이신 것도 이 제자들에게였다. 이 세 제자가 예수님의 관심을 더 받은 이유는 더 신실하다거나 명석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시종일관 틀린 것을 말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그들의 연약함 속에 깊은 교훈이 있다. 바로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나 혹은 그 재능의 부족함이 주님과 우리와의 친밀함이나 우리가 그분께 과연 쓸모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 공동체의 강함은 우리 공동의 연약함으로부터 나오고, 이 연약함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강건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진다.

셋째, 이 공동체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칠십 인’인데, 누가만이 이 그룹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눅 10:1~4). 다소 큰 이 ‘제자들’의 무리는 예수님이 정해진 지역에 다다르시기 전에 길을 닦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 분이 도착하실 때마다 어떻게 그리 자주 수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분의 사역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처럼 많은 수의 남자들과 역시 그 정도로 많았을 여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활용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공동체는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분이 건설하시겠노라 말씀하셨던 우주적 교회의 기초를 제공했다.

역사 속의 공동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성의 시대들은 늘 공동체의 결과였다. 창조성과 신앙과 상상력을 놀랍게 꽃피웠던 르네상스는, 대개 공동체들 또는 예술가들의 길드가 연합해서 이룬 결과였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사실상 다른 모든 이름 있는 예술가들이 다 창조적 공동체나 ‘길드’의 결과물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는 베로키오가 직접 그린 ‘예수님의 세례’이다(다빈치는 베로키오가 세운 길드에 속해 있었다). 그림을 보면 요한은 세례를 주는 직무에 여념이 없고, 예수님은 신중하고도 공손한 태도로 아래를 응시하고 계신다. 그림의 좌측 아래 부분에는 두 천사가 무릎을 꿇고 있다. 하나는 금빛 후광을 띤 어린 소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정말 천사처럼 보인다! 눈이 부시다. 이것이 스물 세 살의 다빈치가 그의 스승의 작품에 기여한 인물화이다. 만일 공동 작업을 하는 이러한 공동체의 격려가 없었다면, 과연 이 세상이 다빈치라는 독보적인 천재를 알게 되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초기 길드에서 창조적 투자는 공동체라는 환경, 즉 존경과 신뢰라는 환경 가운데 주어졌다. 그 공동체는 고도의 탁월성과 미적 책임감을 북돋웠다. 맘껏 실험할 수 있는 자유, 심지어 실패할 수 있는 자유는 젊은 도제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성경 속의 창조적 공동체

성경은 창조적 공동체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제공한다. 구약 시대 예배에 등장한 숙련된 기능과 음악은 모두 예술 사제들의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 예언 현상이 늘어나면서, 선지 학교나 선지자 가문들이 동시에 생겨났는데, 모든 구약의 예언들이 음악에 맞추어 이루어졌음이 거의 확실하기에 이 선지 학교들이 예언의 말씀뿐 아니라 예언적 음악과도 관련되었음을 기억하라. 신약 시대에는, 음악이 전문 사제 음악가로부터 아마추어 평신도 음악가에게 옮겨가면서, 초대교회가 새 찬송과 공동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미술과 음악은 예배를 담는 새로운 매체들로 공동체의 필요에 맞춰 창작되었다. 왜 창조성이 공동체 안에서 꽃피는지에 대해서는 영적인 이유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오늘날 음악과 미술에 대한 '산업적' 접근은 대체로 이러한 상식적 접근에 반하여 이루어진다. 이 명백한 차이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은, 창조성을 지향하는 공동체가 지닌 은사들과 그 은사들이 산업적 접근에 의해 훼손당한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창조적 공동체의 모델

창조적 공동체를 위한 모델을 한 가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를 일단 '언약 예술인 연합'(Covenant Artist Allicance)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언약 예술인 연합’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① 진정한 공동체를 위한 체계를 제공한다.

② 예술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전문가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언약,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목적과 비전에서 하나로 묶는 언약을 제공한다.

③ 공동체를 위한 일련의 강의와 공개 토론회를 널리 지원한다.

④ 언약 회원들을 위한 수련 센터를 제공한다.

⑤ 공동체에 예술인들과 전문가들을 배치해서 매일 매일의 창조 ‘사업’ 속에 언약의 정신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이 연합의 구조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중심에는 언약 예술인 그룹들, 아마도 4~5명의 회원들로 규모가 제한된 그룹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 그룹들은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로 제자 훈련에 그들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동료들과 나란히 걷고, 연장자와 멘토링 관계를 맺는 것이다(디모데와 바울과 바나바가 그 모델이다). 이 그룹 곁에는 협력 회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술인들을 위해 일하는 주요 전문인들이다. 이 그룹을 연합에 포함시키는 것이 두 가지 이유에서 좋다. 첫째, 사실 이들이 지닌 실무적인 은사들이 예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종종 이들은 예술인들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마치 ‘이등 시민’인 양 스스로 느끼게 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경험을 통해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참 많다. 그래서 그들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그 조직이 연합이라고 불릴 수 있다. 둘째, 연합된 전문인들의 존재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창작, 연주, 제작, 홍보, 유통 등 자신의 서로 다른 은사들을 모두 함께 결합시키는 모습은 철저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라 그 공동체를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다.

창조성의 가장 위대한 표현

잠시 후면 그분은 체포되실 것이다. 몇 시간 후면 그분은 돌아가실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축되거나 숨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그분은 골고다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베다니로 향하시어 나환자 시몬이라고만 알려진 사람의 집으로 가신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여인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옆문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식사가 한창일 때, 그녀는 예수님 뒤편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고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음 순간, 겉옷 자락에서 하얀 옥합을 꺼내었다. 그녀는 예수님 옆으로 다가가서, 말 한마디 없이 그분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천천히 붓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뜻밖의 행동이었다. 모두를 노하게 했다. 제자들은 흙바닥에 쏟아버린 1년치 품삯 어치의 향유가 엄청난 낭비로 보여 화가 났다. 그들이라면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을 주는 등 무언가 더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말이다. 잊지 못할 그 날 저녁, 이름없는 한 여인이 행한 일은 시간 속에 여백을 만든 것이었다.

그 여백 안에서 그녀가 행한 바 그 사랑의 고요함에 귀기울인 이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셨다. 그분은 평소에 좀처럼 사용하시지 않던 단어로, 우리가 창조성과 예술과 상상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그 절대 중심에 있는 단어로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행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을 행했는가? 그녀는 그분에게 무언가를, 향유보다 한없이 귀중한 무언가를 드렸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드리기 위해 창조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해받지 못한 채 철저히 홀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그분이 곧 돌아가실 것에 관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사랑을 최대한 나타내 보였다.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물 그 이상의 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창조성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물은 놀라운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과정은 그것이 친구를 위한 시 한편이든 세계를 일주하는 거대한 전람회이든 간에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짜릿한 경험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상을 주기 위해 부름받았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대로 예수님이 진정 우리의 모범이자 본보기시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그리고 그분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줄 새롭고도 창조적인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이 참된 창조성이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가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시비를 거는 우둔하고도 침울한 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동참’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우리의 세계가 단지 보이는 세계만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 모든 일이 그리고 무한히 더 많은 일들이 머지않아 단번에 일어난다. 들음, 귀기울임, 느낌, 이해함에서 모두 동시에 말이다. 그리고 그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내내, 우리는 흙 위에 끄적거린다.

창조성 키우기

여러 동료들이 이 책의 원고를 읽던 중, 몇몇 실제적인 조언을 이 책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을 위해 이 곳에 중요한 생각들을 몇 가지 적어 본다.

① 성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 메시지가 충격적이건 위험하건 상관하지 말고 성경 말씀에 귀기울이는 자세를 개발하라.

② 언제나 당신 자신에게서 떠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라.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바”(골 3:3) 되게 하라.

③ 결코 전달 수단이 메시지를 압도하지 않게 하라. 전달 수단은 메시지에 적절해야 한다. 메시지와의 상호 의존성이 반영되어야만 한다.

④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공동체를 육성하고 공동체에 자신을 쏟아 붓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공동체가 당신 자신의 교제권의 일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⑤ 당신이 창작한 것들을 공동체와 나누라. 그 모든 명백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⑥ 겸손과 섬김과 전적인 순종에 대해 당신의 재능과 관련지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추구하라.

⑦ 창조성은 계절처럼 주기적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창조적 활력이 넘쳐나는 봄철이 있을 수 있고 암담한 추위가 엄습하는 겨울철도 있을 수 있다.

⑧ 당신이 지닌 가장 위대한 자유 중의 하나가 실패할 자유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언제나 성공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신실하도록 부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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