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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정기여행 계획표(경북 영주)
1.여행 일시: 2011년 1월 16일(셋째 일요일) 07:20 출발
2.출발지: 부산진역 8번 출구 신우고속관광
*06:30 다대포낙조분수대-06:35 다대포 현대아파트-06:45 괴정 뉴코아 아울렛을 경유하여 부산진역 도착,
돌아올 때도 역순으로 운행됩니다.
3.회비: 43,000원(포함사항: 차량비, 입장료, 진행비, 맛기행 경비)
4.답사코스: 죽령 옛길걷기-풍기인삼시장-부석사 -무섬마을
5.인원: 40명 선착순(입금 예약자 우선 좌석 배정)
*클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선입금제를 실시하며, 입금 순으로 좌석 배정합니다. 전화로 예약할 경우 좌석 유무를 반드시
확인하여 주십시오.(연락처: 017-850-1265)(입금계좌: 국민은행130202-04-150453 예금주:유유자적, 예약확인: 010-8646-1265)
6. 여행지 안내
*죽령 옛길: 조선시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가장 중심이 되었던 옛길, 영남대로 중에서도
가장 넘기 힘든 구간이었던 이 길은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했을 선비들과 장사치 등 많은
사람들이 넘었던 유서 깊은 고갯길이었다. 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 볼 수 있는 죽령
옛길 산책로는 약 2.5km로 죽령주막에서 희방사역까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풍기인삼시장: 소백산록의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생산되는 풍기인삼은 타지방 어느 곳 인삼보다
수분 함량이 적으며 내용 조직이 충실할 뿐만 아니라 인삼향이 강하며 유효 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아 예로부터
고급 인삼으로 인정받아 왔다.(풍기인삼 협동조합 054-636-2714 풍기인삼시장 054-636-7948)
734년 당 현제에게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이미 소백산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풍기인삼만 애용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향토음식 맛기행 ①: 영주는 사과뿐 아니라 한우로도 유명하다. '조춘풍 풍기인삼갈비'는 풍기인삼과
한우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고 영주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집이다. 한우인삼왕갈비는 갈비 켜켜이 저민 인삼이
충분히 들어간 탓에 인삼향이 진하다. 인삼갈비탕은 국물이 걸쭉하게 우러나 시원하다. 고기와 인삼향이 적절히 어우러져 독특한 맛이 난다.
갈비 양념에 인삼이 들어 있어 인삼향이 진하다
*향토음식 맛기행 ②: 풍기읍에는 어릴 적 맛을 못 잊어 멀리 이사를 가서도 먹으러 온다는 '생강도너츠'집이 있다.
'정아분식'은 조그만 분식점이지만 30년 전 생강도너츠를 개발해 2대째 운영하고 있는 동네 명물이다.
생강 특유의 알싸한 맛이 독특하게 맛있다. 단팥도 적절히 들었다. 10개 7,000원. 택배도 가능하다.(054-636-0067)
*부석사: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국보 18호 무량수전,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알려진 국보 17호 석등,
의상대사 영정을 모신 국보 19호 조사당 등 국보와 보물을 9개나 갖고 있는 명찰이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800m
남짓한 은행나무 숲길은 완경사인데다 아주 운치가 있어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로 꼽힌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자락의 파도는 환상적인 풍경이다.
안양문(좌)과 무량수전(우)
보물 제249호인 부석사 삼층석탑
*무섬마을(수도리전통마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선암마을 ․ 청령포와 같이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천이 합수되어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아 마치 섬처럼 육지속의
섬마을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강변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마을의 중앙에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만운고택(민속자료 제118호)이 있다. 이 집을 지은 만운 김휘걸의 호를 따서 지은 집으로,
시인 조지훈의 처갓집이다. 조지훈은 시 '별리'를 통해 이곳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1979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350여 년간 무섬마을과 강 건너를 연결시켜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던 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50m에 이르고, 폭은 30cm에 불과한 다리이다.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 채 건너야 한다. 무섬마을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볼거리이다.
영 주 여 행
지금의 영주시를 이룬 땅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의 세 고을이 엇비슷한 규모로 솥발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 왔던 곳입니다. 삼국시대에 지금의 영주 지역은 고구려 땅으로서 내기군으로 불렸습니다.
신라 파사왕 때 신라 땅이 된 영주 지역은 내령군, 강주, 순안으로 차례로 불리다가 고려 고종 때에 비로소 영주가 되었습니다.
부석사
지금의 풍기읍 일대는 본디 신라의 땅으로 기목진이라 불렀습니다. 고려 초에 기주가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기천으로 불리다가 그 뒤에 은풍현과 합쳐져서 풍기군이 되었습니다.
본디 고구려 땅에 들었던 순흥 지방은 신라에 병합되어 경순왕 때에 협산군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홍주,
순정으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에 순흥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소백산의 산그리메
영주, 풍기, 순흥의 세 고을은 1914년에 합쳐져 영주군이 되었고, 영주군은 다시1980년 옛 풍기와 순흥 땅을
묶은 영풍군과 그때의 영주읍을 중심으로 하여 이산면, 문수면, 안정면 일부를 포함한 영주시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도 · 농 복합형 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4774호(1994. 8. 3)에 의거 영주시와 영풍군이 분리된 지
15년 만에 1읍 9면 13동을 행정구역으로 하여 영주시와 영풍군이 다시 영주시로 통합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단산면의 갈참나무
죽령 옛길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소백산맥과 그 등줄기에 위치한 죽령은 지리적, 문화적 환경을 가르는 경계이자
과거부터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많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낙엽으로 뒤덮힌 죽령 옛길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뒤엉켜 싸우며 치고받고 했던 불꽃 튀는 격전장이었으며,
근세에 접어든 1910년대까지만 해도 경상도 동북지방의 서울 왕래길로서,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길의 선비나
공무를 띈 관원들 혹은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붐벼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주막, 마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던,
그야말로 사시사철 번잡했던 고갯길이었습니다.
주막 또는 마방터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의 대동맥이었던 이 죽령 고갯길은 근래 교통수단의 발달로 행객이 끊기면서 수십 년
숲 덩굴에 묻혀 있었으나,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자는 뜻에서 1999년 5월 이 길(2.5km)을 다시 뚫었고
죽령 옛길 안내판과 전설 안내판들을 설치하여 이곳을 찾는 여행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족 단위의
새로운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단양군 관내의 죽령휴게소(해발 689m)에서 영주 쪽으로 넘어가면 도로 오른쪽의 안내표지판을 따라 옛 고갯길
입구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풍기읍과 영주시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길 건너편 죽령주막의 약수는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길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좋습니다.
죽령주막
고갯길로 접어들고 나면 이름 모를 각종 산새들과 다람쥐가 노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뜁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가다 보면 전나무 숲길을 통과하기도 하고 관목과 넝쿨이 칭칭 얽혀있는 숲 터널을 지나기도 합니다.
죽령고개의 죽절문 석주
죽령 옛길의 하산지점인 희방사역 쪽은 과거 객점과 마방이 즐비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사과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어
가을이 되면 붉게 익어가는 사과열매와 함께 가을의 정취에 흠뻑 취해 볼 수 있습니다.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왕명(王命)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찰(首刹)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었으며, 나라 안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절로 꼽힙니다.
사찰이 산지의 경사면에 지어진 탓에 제일 꼭대기인 무량수전에 오르기 위해선 아홉 단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천왕문이 있는 맨 아래층은 지옥, 무량수전이 있는 꼭대기는 극락이라고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수양하는 마음이 듭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1km 남짓한 길을 올라가는 사이 소백산맥의 온화한 능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고(故)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를 두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安養樓)에 서면 발아래 소백산과 태백산의 줄기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로는 온통 구름의 바다입니다.
흰구름이 뭉칫뭉칫 떠있는 아스라한 먼산을 바라보며 무심에 젖기에 좋은 곳, 이곳 안양루는 하늘에서 산과 구름을
내려다보는 극락세계와 같은 곳입니다.
안양루에 김삿갓의 시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이곳에 올랐구나 ....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구경할까. 세월이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버렸네"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인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에 닿는 셈입니다. 무량수전을 향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약간 비껴 선 자리에서, 현재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조각물로 평가받는 석등이 그 자태를 수줍게 뽐내고 있습니다.
천 년 전 무량수전을 은은하게 밝혔을 등불의 불빛을 그려보면 그 상상만으로 설렘을 줍니다.(국보 제17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 된(1016년) 목조 건물 중 하나입니다.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쉬는 상쾌한 균형과 절제가
있다는 예찬을 듣고 있습니다.(국보 제18호)
사뿐히 고개 쳐든 지붕의 추녀 곡선, 그 추녀와 기둥의 조화, 간결하고 절제된 주심포로 절묘한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소백산이 부석사의 울타리인 양
마당 안으로 들어와 앉는 풍광을 바라보면 가슴에 사무치는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순우 선생의 마지막 책 제목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부석사에 닿자마자 높이 있는
무량수전에 오른 다음 푸근한 배흘림기둥(가운데 부위가 둥그렇게 살짝 나온 기둥)을 쓰다듬습니다.
배흘림기둥
무량수전에서 신도들이 이용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앞의 배흘림기둥에 전설이 있습니다.
그 기둥을 3번 돌면 죽기 전 딱 3일만 아프다가 평화롭게 삶을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금당인데도 주존불인 아미타여래가 중앙에 좌정하지 않고 서방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현존하는 법당에서는 다시 보기 어려운 예입니다. 이는 서방 정토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를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라는 설과 호국의 부처이므로 문무왕 수중릉을 향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국보 제45호)
무량수전 동쪽의 부석사 삼층석탑(신라통일 기념탑)은 국보의 가치가 있는 탑이지만 꼭대기의 쇠붙이로 만들어진
높은 기둥 모양의 장식이 깨어져나갔습니다. 이 탑에 돌을 던져 지붕돌 위에 얹히면 재수가 있다는 미신 때문에 탑 위쪽
곳곳에 돌에 맞아 깨어진 흔적이 있고, 6.25 때 맞은 총알의 흔적도 얼룩져 있습니다.(보물 제249호)
삼층석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끄는 삼층석탑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조사당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석탑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30m쯤 올라가면 옛날 의상대사가 살았고,
지금은 대사의 얼굴 화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祖師堂)이 있습니다.(국보 제19호)
조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아담한 이 건물은 청아한 색채와
소박함이 순례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1916년 중수 때 묵서명이 발견되어 고려 우왕 3년(1377)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부석사(浮石寺)란 이름의 유래가 된 큰 바위는 무량수전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합니다. 얼핏 보면 가운데가 둘로 갈라진 편편한 돌덩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
'갈라진 틈으로 실을 통과시키면 걸리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부석(뜬돌)
살아서 함께 할 수 없다하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며 죽어서라도 님(의상)을 돕겠다고 한 당나라 여인,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이적(異蹟)을 행했으며,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이 바위를 하늘로 들어 올려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무리를 물리치고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게 도왔습니다.
무량수전의 동쪽 뒤태를 살며시 바라보는 지점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의상대사를 연모했던 선묘낭자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 선묘각입니다. 부석사와 멀리 펼쳐진 산을 바라보며 깊은 그리움이 가득한 선묘낭자의
마음을 기억해 보고 싶게 하는 장소입니다.
무섬마을
무섬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택이며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된 전통마을입니다. 한자 지명 수도(水島)라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감싸 안고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마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따라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고색창연한 50여 고가가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물 위에 뜬 연꽃 모양을 한 무섬마을은 성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영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반촌(班村)입니다.
옛 선비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해우당(도 민속자료 제92호)과 만죽재(도 민속자료 제 93호)는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습니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느긋하고 한가로운 고향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내성천 위로 견실한 외나무다리가 놓여져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습니다. 외나무다리는 마을 앞의 백사장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S라인입니다. 중간에는 비킬 수 있는 공간도 있어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더라도 큰 걱정은 없습니다.
원래 외나무다리는 3개가 만들어 졌었다고 합니다.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장보러 가는 다리, 학동들이 학교 가는 다리.
지금은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하나만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해마다 새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는데, 장마철이면 불어난 강물에 다리가 떠내려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도교의 건설로 사라졌던 외나무다리는 최근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를
만들어가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치켜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건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 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출전 / 최순우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학고재 / 1994 / p.78∼80
출처: 유유자적 여행자 클럽 / 글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