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3, 1999. Written by C. J. Lee
나는 주임상사님한테 간단한 인수인계를 하고는 방우 30명을 인수받았다. 벌써 몇 놈은 웃고 있다. 그 놈들 생각에는 오늘은 하늘이 내린 날일 거다. 어쨌든 부대 밖으로 나간대지, 심지어 밤을 딴대지, 인솔하러 나온 현역병을 보니 이건… ‘오늘은 국경일’하고 쾌재를 부르는 놈들이 몇 눈에 뜨인다. 하긴 무리가 아니다. 참모부에서 매일 실실 웃고 다니는 놈, 죽어도 모자 안 쓰고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는 놈, 졸병들이 경례해도 손 꺼내기 싫어서 발로 받는 놈, 군기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그렇다고 민간인도 아닌 놈, 그 방우들이 평소에 본 나의 모습이다. 실실 쪼개는 몇 놈의 방우를 우선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우의 속성상 오늘 일이 개판될 가능성이 있다.
‘야, 거긴 키 큰 방우, 기준!’ ‘기..주..운’ (아쭈구리? 요것들이 개겨?)
‘4열종대, 앞으로 나란히..’
순간 당황한 기색이 완연하다. 갑자기 국민학교 이후로 들어보지도 못한 ‘앞으로 나란히’가 나오니까 전열이 흩어진다. 이 때 매우 쳐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는 화난 얼굴 보다는 귀찮다는 표정, 소리를 지르는 것 보다는 속삭이듯 하는 게 더 음산하다.
‘앞으로 취침.’
일부 앞에서 내 말을 들은 애들은 앞으로 쓰러지고 뒤에선 여전히 어리둥절이다. 이때 숨 쉴 사이 없는 공격이 이어져야 한다.
‘원 위치.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연속적으로 쏟아 내면 정리가 된다. 신기하게도 엎어졌을 때 서로 안 부딪힐 정도로 간격도 맞는다.
‘굴러서 수송부까지..’
이 대목에서 이미 방우들은 그날의 일진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조이 1 km는 되는 수송부까지 굴러 가라니…
그들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만만한 현역은 없다더니.. 게다가 이 전방에 밀집한 모든 부대 가운데 가장 지저분하고 포악하고 괴퍅하다는 ‘야리공삼’에 어찌 인간적인 현역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재수없는 하루다...’
이 때쯤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방우들의 잡초 같은 속성상 이 대목에서 불쌍히 여겨 원위치하면 다시 기어오른다. 방우..그들은 자신들을 로마시대의 반항아 ‘스파르타쿠스’에 비교하곤 하기 때문에 그들의 저항의지를 ‘분질러’ 놓기 위해서는 한 단계의 쐐기가 더 필요하다.
‘행진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단발머리’, 하나. 둘. 셋. 넷..’
‘그으언젠가나를위해꽃다발을….’ 그 때는 이 조용필의 불후의 명곡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미 반이상의 졸병 방우들은 저항의지를 접은 기색이다.
(군인이 굴러 갈 때 보면 똑바로 가지 못한다. 원추가 굴러 가듯이 약간 돌면서 굴러 가게 되는데, 그 때 방향을 수정하느라 몸을 비틀다 서로 부딪히게 되고.. 그 것이 더 괴롭다.)
나는 예의 나의 모습 그대로, 모자는 주머니에, 두 손도 주머니에 찌르고는 흥얼 흥얼 걸어가고.. 그런 나를 굴러서 따라 오며 그 빠른 ‘단발머리’를 부르느라 혼이 반쯤 나가버린 방우들… 100m 쯤 되는 참모부 마당을 벗어날 때쯤 나의 자비심이 도진다. 참모부 마당을 벗어나면 내리막 경사가 시작된다. 그러면 저 방우들은 똑바로 못 굴러 가는데다 내리막이니까 도랑에 빠지는 방우, PX로 굴러 들어가는 방우.. 가히 가관이리라. 나는 그러한 가관을 보고 싶은 유혹을 나의 특기인 자제력으로 제어하고 조용히 말한다.
‘선두 제 자리.’
역시 이 소리도 크게 하면 천하게 보인다. 천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기어 오른다. 못 알아들은 뒤의 애들이 앞으로 추돌하고.. 한바탕 아수라장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최대한 싸늘하게, 아주 귀찮다는 투로..
‘잘 할 수 있니?’
‘ 아으!’
만약에 ‘예’라는 대답이 나오면 아직 풀이 덜 먹은 거다. 특공방우답게 ‘아으’하는 걸 보니 얘들이 주제 파악이 된 듯했다. 이쯤에서 분대장 방우 (대단한 방우다. 말뚝 박겠다고 해서 우리 또복이 행정과장을 감격시켰던..)에게 인솔을 맡겨서 수송부로 간다. 여러 개 준비되어 있는 박스에 하나를 추가하여 트럭에 실고, 방우들도 실고, 나는 건방지게도 트럭의 앞자리에 선탑하고 출발한다. (<선탑>: ‘선임탑승’이라는 것으로 차의 앞자리에 타서 차를 지휘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적으로 사병은 선탑을 못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내가 그냥 병인가? 장교의 인격과 장군의 이성을 겸비한 병 아닌가? 난 선탑한다. 역시 모자는 벗은 채로..)
박스를 여러 개 가지고 가는 것은 사령관 이하 본부중대장까지 밤을 보내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다 박스 하나를 추가했다. 제일 큰 걸로..
한참을 달려서 산밑에 도착한 후에 정렬을 시켜보니 아직은 풀기가 남아 있다. 한번 더 굴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귀찮다. 분대장 방우에게 박스들을 넘기고 박스를 다 채운 후에는 재주껏 자기꺼 꼬불쳐도 좋다는 햇볕정책을 발표하자 우리의 ‘스파르타쿠스’들은 신이 났다. 나는 P대 일어과 출신이라는 병약해 보이는 ‘청순가련형 방우’에게 산 아래 가게에서 소주하고 안주 좀 사오라고 이르고 시원한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이 대목에서 돈 달라는 방우는 없다. ‘야리공삼’의 현역들이 어떤 놈들인데 돈 주면서 술 사오라 하겠나.. 이미 자기들 끼리 오리엔테이션이 잘 되어있다.
분대장 방우에게 유달리 큰 박스엔 특별히 알 좋은 걸로 눌러 담으라고 지시하고, 나무그늘에서 소주 마시며 운전병의 앞뒤 안 맞는 썰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예쁜 후배와 에덴동산을 나뭇잎 하나만을 걸친 채 신나게 돌아다니다 깨어보니 박스를 다 채워 놓았다. 실컷 따도록 시간을 더 준 뒤 부대로 돌아왔고, 박스마다 표시를 해서 보내야 할 곳에 보내고 나니 커다란 박스 하나에 알밤이 가득하다.
다음날 부대 1호차까지 동원해서 그 밤 박스를 예쁜 후배네 집으로 소포로 보냈다. 이 작전은 정말로 주효했다. 그 가을 나는 상당히 쓸모 있는 ‘맏딸의 남자’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다. 후배네 집은 그 가을을 밤과 뒹굴며 보냈다고 한다. 밤에 관련된 모든 요리를 다 경험해 보았단다. 밤을 깔아놓고 그 위에 누어 뒹굴며 ‘생율 맛사지’도 했단다. 식구마다 밤을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 심지어 그 집의 강아지도 밤을 물고 다녔단다. 강 아래의 어느 부촌은 개도 포니를 몰고 다닌다고 ‘개포동’이라고 한다는데… 그러면 그때 우리 후배의 동네는 뭐라 해야 하나? 개밤동, 개율동, 견율동..
후배네 집의 자랑인 대추나무가 그 가을에는 별로 주목을 못 받았단다.
나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 굴러가면서도 ‘단발머리’를 부르던 그 방우들과 이 영예를 나누고 싶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