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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헌신
영적 깨달음
어떤 제자들은 말하자면
영적 성향을 갖고 태어나며
일찍부터 아름다움은 물론
종교와 영성에 대한 매혹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나
결벽성조차 드러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죄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종교 교리에 대한 순종이 따른다.
종교적으로 경도된 이들은 또한
성직자가 되거나 금욕주의, 봉사,
자발적 가난을 강조하기도 하는 수도원이나
수행단체에 가입하는데 끌릴 수도 있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내향적이고 진지하며 철학적, 도덕적,
윤리적인 쟁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경우가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중에
구도의 길로 들어선 이들은
성숙해지면서
인간 조건의 본질적 모순과
딜레마 및 그 철학적 함의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점차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존재의 의문, 즉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가는가?
신의 실재는 얼마나 사실인가?
혹은 신이 하나의 신념체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등에 대한 관상이 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쟁점을
생의 초기부터 파고드는 경향이 있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종교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본질적 문제들을
나중으로 미루거나 혹은
개인적인 삶의 비극이나
파국의 귀결로서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바닥을 치는 것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경험의 전환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는 12단계 모임과 믿음을 기본으로 하는
다른 단체들에서는 유명한 현상이다.
심장마비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처럼
갑작스러우며
예기치 못한 재난은
깊은 영적 탐구와 자기성찰을 촉발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파국 가운데
임사체험은 가장 인상적이며,
본질적인 변형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현존의 짦은 경험조차도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은 또한
죽음의 공포의
완전한 상실을 특징으로 한다.
죽음의 불가피성에 맞딱뜨렸을 때,
평균적인 이성적 인간의 반응은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가치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게 되는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한계와 나약함을 보상하기 위한
구원과 세속에의 믿음과 신념을 전통적 종교에서 찾는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신성한 스승, 화신은
예수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 무하마드와 같은
그 어떤 이름에 의해서든 혹은
신성의 표현들로서의 힌두교 제신의 이름에 의해서라도
구세주로서의 최후의 옹호자나 중재자로서 받아들여지고
숭배된다.
위 모든 것은
신성한 자비심, 은총, 연민
그리고 인간존재의 내재적 한계에서의
궁극적 해방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자기 정직성과 영적 온전성이 있을 때,
종교의 내적 유효성은
이성적 인간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종교적 진실의 수용은
육체적 죽음의 수용소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종교적으로 온전한 생활방식은
만족스러우며,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은 물론
건강한 자존심을 가져다 준다.
전통적 종교는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실용적 도덕성과 더불어
행동, 가치관, 인격 형성을 위한
윤리와 지침을 제공한다.
완고한 회의론자는 물론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과 종교가 진실이나 실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요? "
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자체의 보상덕분에
선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종교적인 개인과 가족들은
건강, 행복, 수명, 교실행동, 학교성적,
사회적 성공 및 면역체계와 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큰 이로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의식수준에 대한
발전된 앎의 실용적 지침으로서
유용한 규칙은
단순히 죄(200이하로 측정되는 모든 것)를
피하라는 것이다.
영적 종교적 실상의 유효성은 "진실대 거짓"에 폭넓게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서 의식수준 분포의 도표를 잠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명료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진실이 확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적인 전통적 종교는 인류 대다수의 영적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미국에서는 약 90%의 사람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인정한다.
비록 공식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인정하며 공식적 종교
그 자체의 필요성없이
일상생활에서
영적 가치의 실천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위집단으로서
이들은 최근 문화적 창조자로
지칭되었다.
문화적 창조자의 교의를 신봉하는
많은 이들은
종교에 대한 우호적이면서도
공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가 지나치게 분파적이며,
구속하거나 분열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 지향이 강한 이들은
다양한 종교의 교의와 친해지게 되고,
각 종교의 본질을 이루는
내재적 진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탐구는
자명하고 고유한 가치를 가지며,
교회의 권위나 교리에만 의존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영적원리를 향한 것이다.
"모든 생명에게 친절하라.
모든 생명을 지지하라.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가지라"
는 것이 공통적이고 전반적으로 우세한 태도다.
몰두하는 영적 제자들은
그래서 다양한 근원에서 배출되는데,
여기에는 재난, 성숙,
혹은 우연한 상황의 결과로서
내적 변형을 겪은
이전의 무신론자와 세속주의자들조차 포함된다.
신에 이르는 길은
만가지라고 하며,
그 중에서
몰두하는 영적 헌신자의 길은
전통이 깊고 잘 다져져 있다.
진지한 영적 몰두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은
'의식의 진화 및 그에 수반되는 카르마적 경향성'이다.
진지한 영적수행에 대해
준비되어 있는 것을
고적적으로 "무르익음"이라고 일컫는데,
이 시점에서는
한단어, 한구절
혹은 이름 하나를 듣는 것만으로도
갑작스러운 결정과 몰두를 유발할 수 있다.
영적 봉헌의 출현은
그래서 미묘하고 느리고 점진적이다가
아주 갑작스럽게
큰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씨앗이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여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예기치 않은 통찰의 빛이
전환을 유발할 수 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삶이 변화한다.
영적 수행자/제자/행자/헌신자/구도자
영적으로 고양된 이는
영적인 서적을 뒤지고
강연에 참석하고
다양한 영성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신념체계들은 물론
다양한 행로와
영적인 길들을 연구하고
탐험하는 시기다.
다양한 영적 수행, 길, 단체 혹은
문헌들의 측정수준은
11장 의식측정도표에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 최상의 가르침은 종종 신비주의자로 불리우는 진화한 스승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교회의 전통에 고유한 이원적 한계를 초월했다.
진실의 핵심은
물들지 않은 비선형적 본질인데,
이는 비이원적이며 의식수준 600에서 일어난다.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그 수준은
매우 앞선 의식수준에 조차 내재되어 있는
이원성을 초월하기 위해 진화를 계속할 수도 있다.
성실한 헌신자는
진실의 앞선 수준들,
특히 그것이 의식측정으로 확인되면
그 본유적 권위를 임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순수한 영성에는
요구조건, 의무, 의존성, 집착, 궁핍 혹은
특별함의 다른 증거가 없고,
또한 강습이나 훈련을 위한
회원모집과 같은 통제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몰두는
진실자체의 핵심을 향한 것이며,
개종이나 비밀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다.
필요한 것은
오직 진실에 대한 호기심과
이끌림인데,
진실은
완전무결하고 전체적이며
자급자족한다.
매력적이거나 의미있게 느껴지는
스승들, 가르침 혹은 단체는
주어진 시기에
구도자의 의식수준의
진화단계에 따라 다르다.
전형적인
개인의 측정된 의식수준이
평균적으로 한생에
5점에서 10점 가량 높아지는
반면,
구도자에게
그 속도는 훨씬 빨라져서
아주 갑작스럽게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잠재성과
가능한 결말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야만 한다.
진화의 여정
진지한 제자에게 있어
영적 몰두는
삶의 맥락을 변화시키는데,
그 다음에 삶은
다른 전망에서 조망된다.
한때 매력적이고
자극적 이었던 것이
이제는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며
부적절하고 혹은
귀찮기조차 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전에는
지루하게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큰 기회로서
매력적이며 가치를 갖는다.
선호와 가치가 변화하고,
사람은 또한
영적 에너지의 강도에 놀랄 수가 있는데,
영적 에너지가 활성화되면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흐름속에 들어선 것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과정을 통제하고
이성적으로 조절하려는 노력은
점차 환상임이 드러난다.
다른 한편
표면상으로 단순해보이는
일부 경향이
저항하고 있는 끈질긴 것임이 판명될 수도 있다.
첫눈에
거의 불가능해 보인 것들이
놀랍게도 비교적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모든 경험과 현상들이
영적진화와 발견에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이
발견될 것이다.
결국
개인적 의지를 점차로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는 과정 그 자체에
단순히 복종시키는 것이 필요해진다.
진지한 영적 헌신자들의
삶의 펼쳐짐은
점점 더 에고/자기보다는
참나에 의해 조정된다.
이전의 추정들은 무의미해지고
신성한 지성과 앎은
한때 이해를 넘어선 것으로 여겨졌던
의미들을 재해석한다.
그래서
세계는
매 순간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게 되고,
참나의 광휘에 의한 것처럼
환상의 구름은 물러가고
본질이 현상을 대체한다.
기능적 가치 및 원리
영적 길을 따라
의심과 두려움은 물론
장애와 유혹이 나타난다.
고전적으로 이러한 것은 지배권의 포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에고에서 일어나는 시험'으로 불렸다.
이러한 시험은
봉헌, 끈기, 지속성, 용기, 확신,
의도와 같은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들의 강화는 물론,
목표의 재확인과
몰두에 의해 극복된다.
도전이 크면 클수록
내적인 힘, 결심, 결의 또한
더욱 크게 발달한다.
끈기와 규율에 의해서
유혹은 공격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단순히 거부하면 될
선택지들로 비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작은 것을 큰 것에 종속시킨 결과이며,
그래서 개인적 의지를
신에게 내맡김을 통해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의지의 행위에 의해서 우세해진다.
이상의 모든 것은
헌신이라는 성질 아래 포섭되는데,
헌신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사랑이며
단순히 이성이나 정신적 이해만이 아니다.
헌신은
가슴에 속한 것인데,
때로는 오직 가슴과
신성한 사랑의 힘으로
장애가 초월될 수 있다.
유용한 수행은
영적인 길을 내다보고,
세계와 세계의 가치에 대한 집착과 같이 결국
내맡겨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다.
이러한 앎은
자진해서
집착을 내맡기는 일이
훨씬 더 쉽고 자발적이고
용이해지도록 해준다.
물질주의와 세속적 이득을 놓는 일은
일체가 신에게 속해 있고,
인간은
오직 일시적으로 보관이나 관리를 할 뿐이라는
사실을 각성함으로 촉진된다.
이렇듯
실상에
나의 것이란 없다.
사실은
어느 누구든
자신의 육체조차 소유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육체는 세계에 속해있고
자신이 나온 세계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에고/자기는
스스로가 소유물과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고 믿고 있지만
살펴보면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것,
즉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과 재산에 의해 소유당하며
그 역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영적 헌신과 몰두에서 비롯되는 능력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경우가 많아서,
표면상의 불가능이 가능으로 판명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머리에 장전된 총을 들이 대었을 때
집착을 놓을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소된다.
사람은 또한 역사적으로 다른 여러 문화에서
헌신을 위해 인간이 다다른 극한을 목격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큰 박탈, 고초, 자발적 희생이
포함된다.
비록
이러한 선택지들은
영적 수행을 하는 동안 나타나지 않을수 있어도
심리적으로 그와 맞먹는 것이
희생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가치와 매력은
보는 이의 눈에 있지
세상 그자체의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저 밖에 있다고 상상되는 것은
이안에서 비롯된다.
동일한 것이
소중한 위치성과 유혹적인 추정들에
적용된다.
저밖에는
어떠한 유혹도 없으며
그러한 것의 매력은
단순한 거절과 절연에 의해 감소한다.
종교대 종교주의
헌신은
성장기의
종교에 대한 봉헌과 더불어
시작되는 일이 많고
따라서
완전하며 만족스러운 것으로
경험된다.
믿음외에 예배, 기도, 종교의식은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
대다수의 요구에 봉사한다.
이들의 믿음은
사심없는 봉사나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지원으로
강해지는 일이 많다.
전통적 종교의 길은
자기충족적이며
의식의 앞선 상태 및
사심없는 성인과 같은 상태로 이끄는데,
이것은
생활방식의 변화와 연결되는 일이 많은
깨달음이라는 목표자체에 대한
봉헌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종교의 그늘은
종교주의라는 명칭이 가장 그럴듯한데,
이것은 극단주의로 표현되거나
혹은 신대신 종교를 숭배하는 길을 택하는
과도한 열중을 나타낸다.
종교주의의 특징은
'씌어있는 말씀과 교리에 대한거의 강박적인 몰두'다.
이러한 일탈의 전형이 "우리의 언어와 세계"에 나오는 구절 "지도와 영토의 혼동"이며, 이는 또한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도 표현된다.
이것은
지성이 내용에 한정되고,
맥락, 의미, 의의에 무지한 것을 나타내는데,
맥락과 의미와 의의는
언어/상징이
주관적 각성과 관상으로
전환되었음을 반영한다.
종교주의 오류는
종교주의자들이
인용된 경전의 진실한 추상적인,
비선형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 교리의 구체적 인용문을
이용하는 결과를 빚어낸다.
그래서
극단적 종교주의는
광신 및 병적이고, 파괴적인 일탈이 되는데,
이러한 것은 종종 세속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권력과 정치적 극단주의를 추구한다.
맥락에서 뽑아낼 때
어떠한 위치라도 정당화하는 인용문을 찾아내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 진실의 칼을 무쇠칼과 혼동하는 것).
이렇듯
'봉헌과 광신'사이에는
대단히 넓은 간격이 있고,
그 열매에 의해 차이가 뚜렷해진다.
병리적 상태가
종교주의 속에 숨기도하는 것이
보다 심각한 사실,
즉 차이를 무시하려는 변증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가 본질적으로
병적이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상되는 바와같이
'종교적 광신'은
극단적으로 낮게 측정되지만
대조적으로
'진정한 종교적 헌신'은
매우 높게 측정된다.
종교적 극단주의는 또한
공산주의가 지나간 자리(티베트, 중국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세속주의 및 군사적인 반종교주의의 발흥에도
기여한다.
진정한 종교적 헌신은
강압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해치거나 생존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균형은
극단주의와 대립하며,
종교의식의 관습적 의례로의 대치를 상쇄하는
영적지혜와 성숙의 한 요소다.
경전의 가치는
주관적 변형을 촉진하는
그 의미와 능력에 있는데,
주관적 변형의 촉진은
지구의 해석보다는
의미해설의 귀결인 일이 많다.
과정으로서 절연
일차적 절연은
경험자로 불리는,
에너지 집중으로서의 주의를 욕망하는
저 에고의,
내면의 극장처리의 가치와 매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경험자는
탐욕스럽게 끊임없이
초점, 관심, 흥분의 대상을 구하는
주의처리의 성질이다.
의식의 이러한 면은
강박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는 탐색기와 같으며
여기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
호기심이다.
경험자는
감정성의 보상자체는 물론
선형적 데이터, 감각, 형상을 갈망한다.
경험자는
변화와 사건을 먹고 살며
흥분의 매혹에 이끌린다.
경험자의 특징은 또한
해양생물이나 해저생물을 찍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도 볼 수 있다.
경험자는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 결과 인간은
에너지의 재생및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수면을 필요로 한다.
명상과 관상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은 이 경험자의 집중이다.
경험자는
신기한 일과 흥미로운 데이터를 갈망하고,
에고는 감정의 서커스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에 대해
열심히 반응한다.
경험자의 우회에 있어
삶이라는 변화무쌍한
멜로드라마에의 관여와 참여는
유혹적이다.
에고의 민감하고
열성적인 경험자 측면은
무대중앙에 서려하고,
자신의 내면의 명사로 연기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자는
나, 나자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그래서 큰 가치와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진행중인 이야기의
남/여주인공이다.
경험자는
자기의 자기애적 관여의 초점이며
그로 인해
심리적 에너지와
우선순위를 크게 부여받는다.
경험자는
행위의 행위자,
생각의 생각하는 자
그리고 행동과 결정의 은밀한 작인으로서
신뢰받는 주연배우다.
경험자는
승리자이며 피해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자는
삶의 핵심, 근원, 정수, 원인이며
따라서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중심적이고 결정적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자의 소멸은
죽음으로서 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강력하게 방어된다.
진정한 참나인 실상의 대역이
바로 이 경험자/개성이다.
함정과 주의분산 : 마음과 세계
카르마적으로
상속받은 에고/마음의 한계는
결국 본유적 오류 경향성으로 귀착되며
무구함과 순진함 모두의 귀결이다.
도움이 없이는
에고/마음은
그 본유적 한계를 초월할 수도 없고,
자신의 손상정도를 각성할 수조차 없다.
그 어떤 소프트웨어가 입력되든
하드웨어가 자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컴퓨터처럼,
인간의 마음은
가장 기괴하고 극단적인 정도의
허위까지 상상할수 있는
거의 모든 프로그래밍에 대해
무방비 상태이고 취약한데,
그 중에서
고전적인 루시퍼적 전도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인상적인 사례다.
무방비 상태의 마음은
인상받기 쉬우며,
가장 기본적인 이성의 보호조차
감정성이나 사회적 프로그래밍에
압도당할수 있다.
세계의 전인구는
일반적으로 여러세기 동안
완전히 그릇된 신념을 품어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므로
대중적인 신념체계에 의존하는 것은
그릇되기 쉽다.
그와같은 모든 추정은
마음자체의 내재적 한계라는 관점에서
기껏해야 임시적인 것으로
조망되어야 한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축소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외에
다른 모든 것은
지혜를 대신함을 의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 또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나 그리고
혹은 앞선 스승외에
마음은
최근까지도 진실을 평가하는
확인가능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의식의 진화로 인해
지금 한가지 수단이
이용가능한데,
그것은
진실과 거짓의 식별뿐 아니라
절대와 비교된 것으로서의
진실의 정도의 측정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용적인 의식지도는
지극히 유용한 도구다.
왜냐하면
그것은 숨어있거나
애매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어둠속에 빛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에고/마음의
고유한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열쇠는
겸손함이며,
이것이 없다면
마음은
그 환상적인 거울의 집안에
희망없이 갇히게 된다.
이성, 논리, 과학으로서
지성의 진화는
결국
인류에게 큰 이익이 됨과 함께
현대문명의 긍정적인 면이 되었다.
어떤 사고체계의 측정수준이 높을수록
인류를 더욱 크게 이롭게 하며
무지에 뿌리박은 고통의 완화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이
확인가능한 관찰결과다.
의식/마음의 진화의 전체적인 긍정적인 효과는
선형적 차원내에서
분명하지만,
의식이 측정수준 499의
선형적 영역을 넘어 발전하여
비선형적 영적 에너지가
지배적으로 될때
그것은 한층 더 그러하다.
오늘날의 교육받은 영적 제자는
운좋게도 과거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이점을 누리고 있다.
에고/마음의 본성 및
그것의 진화의 기초에 대한
정교한 이해는 뚜렷한 이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내면의 숨은 성향에 대한
앎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던
죄책감과 수치심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조차했던
자기 정직성과 앎을 제고시키기 때문이다.
영적제자들이 종종 간과하는 한계의 영역은
신념체계들의 사회적 프로그래밍 영역인데,
이는 요란한 선전과 사실들의 함축된 의미에 대한
정치적 왜곡은 물론, 밈의 귀결이다.
이러한 것은
교묘히 은폐된 지적 허영에의 유혹을 통해
세상에 퍼져나간다.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마음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스승이 밝혀주지 않는다면,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많은 제자들이
영적인 것이 함축하는 바에 대한
고정관념에 집착한다.
이렇듯
순진한 프로그램들로서
조사될 필요가 있는
고정관념화된 정치적/사회적/지적 신념들이 많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영적운동으로 추정되는 일에 관여하는
매력을 피하는 매우 엄격한 훈련인데,
이른바 영적운동은
실제적, 본질적으로 그
본성이 정치적이며 당파적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의 매력은
내면의 영적 청소년의
순진한 이상주의에 호소하는데
이는 성숙과 더불어 초월된다.
인간 삶의 본성은
인간의식 자체의
전체적 수준의 자동적 귀결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아닌
자기자신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은
그 행위가 아닌
본질로 말미암아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행위의 목적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낮은 힘은
결국 반발력을 초래한다.
힘은
의식의 비선형적인
수준자체에서 나온다.
길이 곧고 좁은 것은
내적규율이 없이는
내적 에너지가
각양각색의 유혹속에서
흩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심원한 침묵은
영적 에고 및 에고의 진부한 합리화에서 나오는
넘치는 말과 행동의 홍수보다
더욱 영향력이 크고 이롭다.
영적수사는
여전히 수사일 뿐이며,
영적궤변을 나타낸다.
깨달음에 대한 몰두는
사회적 역할을 바꾸고 재맥락화한다.
매력적이지만 상도를 벗어난 영적단체, 기법, 수행, 가르침들이 많은데
이러한 것은 미화되고, 유행을 타고, 강요되고,
말 그대로 거래되기조차 한다.
또한 개종, 대중문화의 선전용입장, 분출하는 감정성에 의한 유혹이 있다. 이 모든 매력적인 것들은 그것의 선전에 의한 이득추구를 나타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온전한 것은
스스로를 충족시키며
따라서 선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열성적이고 순진한 제자들은
매력넘치는 다양한 영적 단체와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이들의
의견과 열정에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웹사이트, 명사 혹은 감정적인 주장들에 감명받는다.
인류의 위대한 구세주라고 하는
수십명의 이른바 "화신"들이 있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낮게 측정될 뿐아니라
진실의 임계수준인
200이하의 경우도 많다.
그 매력에 종종 덧붙여지는 것이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아주 유명하고 크게 찬양받는 기적의 일꾼이 175정도로 낮게 측정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기괴하거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원인-결과류의 맥락화에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진정으로
기적적인 것은
카르마를 포함하는
전체적 맥락의 장의 귀결로서
잠재성의 현실로의 출현인데,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지 않으며
이떤 개별적 성격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주장될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의 노력이
다 그런 것처럼
정교화, 교육, 경험,
그리고 기술과 지식획득의
점진적 수준들을 향한
성숙과 숙달의 연쇄적 수준들이 있다.
진실을 추구하는 초기에는
신비하고 마술적인 유혹을 불러내는
매력적인 극장이 되는 경향이 있는,
세상에 보급되어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성격들의 유혹에 대한
취약성이 있다.
심지어
예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며
막대한 부를 끌어모으는
입심좋은 마스터들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장려하여
심지어 지도자와의 거룩한 섹스만남조차 갖는다.
이러한 이들은 모두가
200이하로 측정되지만
그중 몇몇은 활동초기에 일시적으로
500대 초반이었다.
또한
유혹적인 것은
비밀들의 은근한 매력이며,
칭호 및 특권이 주어지는
선택받은 내부 소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에 공통된 것은
다양한 개인적 제약은 물론
지도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 또한
있다는 것이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 모든 선형적인 것들은
본질의 이성주의적 주의분산이라기 보다는
특별함을 표시한다.
공통적으로
이색적인 다른차원들이나
독특한 명칭을 가진 영역들에 대한 주장이 있다.
상도를 벗어난 길,
스승 혹은 단체들 중에서 수용할 수 있을만한
진실의 수준으로 측정되는 것은 없고,
확인된 영적 스승이나 가르침의 반열에 드는 것도 없다.
구매자 위험부담의 원칙은
명백히 적용되며
현명한 이들은
이것을 잊지 않는다.
새로운 것의 탐구는
무해하고 교육적이며
재미난 신기한 경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정도의 노출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그것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은
비언어적 에너지 패턴은 물론
선형적 내용에 의해
순식간에 프로그램될 수 있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다.
그래서 전형적인 뉴에이지 박람회의 아스트럴 서크스의 유행하는 사이비 영성을 탐구하는 이는 부지불식간에 알지 못하는 다양한 에너지를 끌어모은다.
최상의 보호책은
에고/마음의 한계와 나약함에 대한
겸허한 존중에서
이를 피하는 것이다.
표면상으로
무해해 보이는 것과
노니는 것은
부정적인 식역하 에너지 패턴들에게는
매력적이다.
몸에 붙은 영적 결함들은
나중에 제자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본인은 알지 못해도
남들은 그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겸손함과 한계에 대한 존중에서
해롭거나 영적진화를 늦출 수 있는 것은
피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 경전에서는 초상현상을 피하라고 조언하며 "그냥 거기 가지말라"라고 한다.
다른 매력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주의를 분산시키는 일에의 관여, 시시분별,
그리고 그릇된 결정이나 결론의 순진한 오류로 인도하는 것은
에고의 경험자 측면이다.
오락과 매력적인 것들을 피하는 것은
시비분별이 아닌 확인된 진실의 가치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다.
온전한 스승과 가르침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니
신기한 샛길을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전통있는 위대한 길들은
수천년동안 충분했고,
그 본질적 진실은
경험으로 확인되었다.
그러한 것은
지금 한층 더 충분히 이해되고 있고
확인가능하다.
진지한 영적제자들이
매력넘치는 편향된 길, 종파,
가르침에 붙들려서
영적 환상의 무익한 추구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렇게 하면서
수년, 수십년 혹은
심지어 여러생을 통째로 흘려보낼 수 있는데,
때로 이는 후회나 쓰디쓴 실망으로 끝난다.
현재
진실수준의 측정기법을
이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오류는 우회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교의 주입과 세뇌에서의 회복을 돕는 전문적인 재교육자들조차 있는데, 사교의 주입과 세뇌는 집단자살이나 이른바 신을 위해 무고한 이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정도까지 현실 검증력과 이성을 심각하게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나의 길과의 정렬
11장에서는 스승, 전통, 종교, 영적 유파와 단체들의 순수성, 진위, 유효성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안내를 제공한다.
열정보다는 봉헌이
온전성의 보다 중요한 지표다.
하나의 길에 대해 믿음을 갖고
의심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그 의심이 현실적인 것인지
혹은 저항의 형태일 뿐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구도자에게는
학습, 개인적 조사,
연구의 귀결인
내적 확신과 굳건한 믿음의 안전성과
지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길은 발견과 내적 경험에 의해
본질적으로
재확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진실한 길은 펼쳐지고
스스로를 드러내며
경험적으로 재확인된다.
영적 앎이 발전할수록
영적 에너지의 흐름은 증가하여
표면상으로 넘어설 수 없을것 같던
이전의 장애들을 초월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과 감정들의 매력이 줄어들면서
물질이나 표면적 이득보다는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평화와 같은 성질들에
점점 강하게 이끌린다.
용서는
습관적인 태도가 되며
모든 창조의 본유적 무구함이 환히 빛난다.
위대한 성인과
스승들의 가르침이
내면에서 나온
자기자신의 것이 된다.
토론
1. 물질주의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공식적으로
물질주의라는 용어는
물질적/물리적 세계가 유일한 현실이고,
모든 현상은 물질성의 귀결이며
또한 물질성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에 대한
신념을 표시합니다.
그것은
전통과학의 뉴턴적 패러다임에서
그리고 인과율의 상향식 대 하향식 이론들의 논의와 관련된 지적 담화에서
물질적 환원주의로 표현되지요.
물질주의라는 주제는
특히 과학과 의식 혹은 과학과 종교 혹은
신학과 관련된 회의에서 반복됩니다.
물질주의라는 주체가
추상적이고 또 일차적으로
철학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실제에서 그것은
심원한 실용적 귀결을 갖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시즘으로 출현했는데, 그것은 세계적으로 혁명과 수백만명의 죽음을 초래했지요. 유물론은 창조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신성의 실상을 부정하며, 그 결과(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130으로 측정됩니다.
기계적 유물론은
회의론(160)을 낳는데,
이것은 선형적 영역에 한정됩니다.
회의론은
500수준이나 그 이상으로 측정되는
비선형적 실상을 부정하지요.
역설적인 것은
회의론은
믿음을 조롱하면서도
그 자체에 매우 제한된 패러다임과
철학적 추정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고,
또한 순진하게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연구에 적용할 때,
상향식 인과율의 이론가들은
의식이 오직 뉴련활동의 산물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런 모든 프로젝트는
매우 낮게 측정되고,
유물론적 전제를 증명하는데 실패하지요.
크릭(DNA로 유명한)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 연구 프로젝트는
그렇게 설계되었습니다.
이처럼 비슷한 모든 프로젝트의 설계는
매우 낮게 측정되고,
그릇된 기초와 시각의 결함 뿐 아니라
철학적 반영적, 혹은 무신론적 편견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연구는
무엇보다 진실로 과학적이지 않을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편향되어 있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은 연구라는 원칙에 위배됩니다.
영적 노력의 분야에서
물질주의는
선형적 한계에 대한
에고의 집착을 나타내며,
또한
장기적인 영적가치를 희생시키고
일시적인 것에 투사시킨
가치의 불균형을 나타냅니다.
물질주의는
추상적 의미와 추론에 대한
앎을 배제하고
좌뇌만으로 정보를 처리한 결과지요.
그래서
그것은
잠재성의 손상을 반영하는데,
이는 뇌 생리자체의 귀결입니다.
물질주의의 또 다른 오류는
청지기역과 책임을 요구하는
자산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돈이나
소유물과 같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부정적인 의미로 물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존재는
육체의 물질성과 육체의 요구를 포함하기 때문에
물질적 세계는 적당히 중요하며
선형적 형상속에서의
창조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균형잡힌 관점은
전반적인 영적관점에서
물질성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정하되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요. 세상을 헐렁한 의상처럼 걸치는 것은 적절하게 균형잡힌 태도를 표현합니다.
금욕주의는
감각적 집착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가치가 있을수도 있지만,
그 극단은 또한
두려움이나 혐오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매혹은
세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선형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팽창된 가치를 부여하는
에고에 의한 욕망의 투사입니다.
2. 그래서 세상은 세속으로 지칭될수 있습니까?
그것은 맥락화를 반영하는 제한적 위치성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세속주의는 선형 내부에 비선형이 현존하는 실상을 부정하는 신념입니다. 세속주의(165로 측정)는 존재와 창조의 근원으로서의 신성의 실상을 무시하거나 부정합니다.
3. 어떤 식으로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취사선택은
사람이 되어있는 것의 귀결이며,
사람들이 의식의 진화에서
어디에 있느냐의 귀결입니다.
개인적 선택은
출신가정, 문화, 교육, 나이, 카르마적 패턴, 개인적 관계,
그리고 삶의 경험과 같은
무수한 요소들의 결과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다양한 가르침과 단체들의
진실의 수준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며
오늘날의 영적 제자들은
더욱 유리합니다.
높은 측정수준이
~~보다 낫다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저 실상과 영적진실의 표현수준을
묘사해줄 뿐이지요.
가장 중요한 원리들은
선의, 용서, 존중, 온전함, 사랑,
연민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지요.
이러한 것에 대한 장애는
상대적으로 식별하기 쉽고
재맥락화로 해결하기 쉬운데,
재맥락화는 위치성들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합니다.
적절한 길은 옳다나 그르다와 같은 분류로 갈등을 가중시키기보다는 그것을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길입니다. 물론 증오, 탐욕 등은 그르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그러한 것을 해결하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효율적인 길이라면
종합적인 이해만으로
장애가 녹아내릴 수 있도록
다른 시각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장애가 되는 위치성을 확인하고
갈등의 기초인 이원성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예를들어 주실까요?
각 위치성들은
벽돌을 쌓아올린 것과 같은
구조물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내적조사에 의해
해결되지요.
표면상의 문제는
정직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증오를
예로 들어봅시다.
일정한 상황에서
증오의 기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기, 질투, 두려움, 자부심?
그것은 대개
복합된 여러 요소들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위를 향한 다툼입니까? 아니면 경쟁? 상처받은 느낌? 에고의 자부심에 대한 모욕? 정당성? 승리? 위협? 선전/대중매체에 의한 프로그래밍?
하나의 쟁점이라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그 모든 문제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맨 밑바닥에는
대개 자기애적인 에고의 겸손함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맡겨야할 핵심이
바로 이것이지요.
각 수준에 있어서의 중심적 갈등에 대해서는 의식수준의 초월에서 자세히 고찰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비슷비슷합니다. 각각의 위치성은 매력적인 것들과 그에 상응하는 혐오스러운 것들이라는 이원적 짝에 의해 고정되어 있습니다.
겸손함을 가질 때
누구나 의식진화의 여정 어딘가에 있다는 것과
영적발달이
이 세상에서
인간 삶의 핵심적 목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5. 세상속에서 삶이 때로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다수의 진화하는 종이 지구상에 공존하고 있는데, 지구자체는 끊임없는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사람과는 최근에 출현했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의식수준의 편차가 큰 혼합물이지요. 개인뿐 아니라 전 문화와 국가가 다 그렇습니다. 문맹의 석기문화 혹은 유목민 부족문화가 기술과 경제가 크게 발달한 세련되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컴퓨터화된 국가들과 여전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종종 갈등을 빚기도 하는 종교들이 있고, 종교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물론 반종교적 신념체계들이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갈등하는
이 모든 다양성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 설계자체로 인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원초적이고 고유한 기본적 장애입니다.
모든 기록된 인간역사에서
평화가 지배했던 시기는
고작 7%에 불과했고,
93%의 시기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선형적 차원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역사상 최고의 스승들은
그러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으로서
구원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첫댓글 매력적이거나 의미있게 느껴지는 스승들, 가르침 혹은 단체는 주어진 시기에 구도자의 의식수준의 진화단계에 따라 다르다. 전형적인 개인의 측정된 의식수준이 평균적으로 한생에 5점에서 10점 가량 높아지는 반면, 구도자에게 그 속도는 훨씬 빨라져서 아주 갑작스럽게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잠재성과 가능한 결말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야만 한다
진지한 영적수행에 대해 준비되어 있는 것을 고적적으로 "무르익음"이라고 일컫는데, 이 시점에서는 한단어, 한구절 혹은 이름하나를 듣는 것만으로도 갑작스러운 결정과 몰두를 유발할 수 있다. 영적 봉헌의 출현은 그래서 미묘하고 느리고 점진적이다가 자주 갑작스럽게 큰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씨앗이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여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예기치 않은 통찰의 빛이 전환을 유발할 수 있고 바로 그 순간부터 삶이 변화한다
'모든 생명에게 친절하라. 모든 생명을 지지하라.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가지라"
사랑에 헌신하기를 빕니다_()_
넹 ㅎㅎㅎ
열성적이고 순진한 제자들은 매력넘치는 다양한 영적 단체와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이들의 의견과 열정에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웹사이트, 명사 혹은 감정적인 주장들에 감명받는다. 인류의 위대한 구세주라고 하는 수십명의 이른바 "화신"들이 있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낮게 측정될 뿐아니라 진실의 임계수준인 200이하의 경우도 많다. 그 매력에 종종 덧붙여지는 것이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아주 유명하고 크게 찬양받는 기적의 일꾼이 175정도로 낮게 측정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기적 아닌 것이 없지요
기적이란 초자연적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자연적 현상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호흡은 멎지 않으며
피는 혈관을 타고 흐르고
세포는 활동하며
꿈을 꾸기도 하지요.
길가에 나 있는 풀 한포기,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이 모든 것이 기적같습니다_()_
경험자는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 결과 인간은 에너지 재생 및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수면을 필요로 한다. 명상과 관상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은 이 경험자의 집중이다